당신의 먼발치에도 눈이 내린다면

작품/소설 2016. 4. 7. 15:52

당신의 먼발치에도 눈이 내린다면

 

 

 

 

 

가늘게 잡히는 샤프펜슬의 느낌이 좋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어두컴컴한 학교에서 끓인 라면 국물 안에서 이런 말이 보였다. 자기자신을 그토록 미워해본 적이 있나. 친구의 말이다. 난 뜨거운 응어리를 뜨겁게 빨간 성수로서 씻어내렸다. 첫 하강, 두 번째 하강.

 

선풍기 바람 앞에서 적당히 크게 볼륨을 높인 헤드셋을 끼고서 음악을 들었다.

Be, 그리고 오버. 여럿을 들었다. 눈을 감았다. 지휘했다. 키보드를 두들기고 드럼을 쳤다.

내 손끝이 지휘자 못지 않은 가녀림과 섬세함으로 4박자휘를 한다 라고 생각했고 그는 곧 그렇게 행해졌다. 섬세한 백조가 물돋움을 하는 듯이, 불우한 소녀의 판잣집에 천둥번개가 치듯이 나는 손을 움직였다. 손은 휘저어졌고, 나는 전해오는 파동에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고 내 자신이 손에 종속되었다. 바뀌었다. 그리고 난 1분이 1분이 아닐 수 있음과 1초가 1초가 아닐 수 있음을 정확히, 아니, 이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실제로 난 시간에 휘저어졌다).

 

 

 

그녀 생각이 났다. 내 생각이 났다. 여실히 보이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스튜가 끓어오름에 나는 그 앞에 서서 국자로 요리지어 냉정이라는 잣대를 든 온정이라는 심사관 앞에 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확신한 그 심사관이 안경을 고쳐잡았다.

 

앞에 보이던 천장이 천장을 넘어 아직 보지도, 듣지도, 그리고 심지어는 알지도 못하는, 그렇지만 실로 확실히 그렇다고 믿는(믿어지는) 그녀의 집에 다다랐을 때, 나는 문가에 서서 나와 같은 노래를 듣고 나와 같은 뇌수 속을 떠다니고 같은 별과 구름과 차다 만, 하지만 곧 차오를 달을 보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먼발치에 서서 나에게 속삭였다.

 

내용은 뭔지 모른다. 백조는 날아갔다. 모비는 왜 그가 나를 두고 갔는지를 노래했다.

시간은 흘렀다. 이젠 아니었다. 그럴수도 있었다. 모기가 날 물었다. 그리핀이 힘차게 날아올라 공기를 그리고 바람을 솎았다. 청량림 한가운데 서서 가슴을 화알짝 펴고 겨울안개를 잔뜩 들이마시는 나를 보았다. 힘이 풀린다. 나른해진다. 그대로 녹아내리며 이 밤이 진다. 내 자신을 보았다. 검은 구름은 비킬 생각을 않지만 여전히 별들은 마디마디 총총히 구름보다 높이 박혀있다.

 

 

그녀 창가가 보였다. 벽돌부터 문귀퉁이 잡초까지. 이상하게도 내 얼굴 옆 그녀 얼굴은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다. 멀어졌다. 멀어진 소설에도 시간은 펜을 댄다. 아침햇살 깊은 골목에도 이렇다할듯 자라는 풀은 드물지만, 마침맞게 보여져버린 이슬에 사랑은 웃다 지쳐 눈물 잣는다.

 

깊은 음악은 끝까지 달을 두르고 잠을 잔다. 나는 그녀를 안고서 멀어져갔다. 입맞추며 사라졌다. 끝에 가사는 ……없다.

 

그렇기에 난 이 하찮은 음악과 초가을의 선풍기 바람과, 그리고 구멍뚫린 천장에 기대어 그녀를 찾는다.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어쩌다가 그녀 생각이 나면 이렇다할 생각 없이 이렇게 빌었었다.

 

 

 

당신의 먼발치에도 눈이 내린다면.

 

 

2011 08 26 02 33 AM

[N]


백업  20110902 2338 작성  20110826 0233 Hwp파일 작성 20110924 2232


스승한테 넌 느낌이 있어 라고 평가받은 작품이지만 지금 보니 고딩때 절 향해 이불킥 하고 싶네요

갯가재

작품/소설 2016. 4. 7. 15:51

등대 그늘녘엔 파도가 부딪쳐 스며든 짠내와 따개비가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그 중 한 곳을 골라 앉아 내다보이는 앞 쪽으로 파고 들어오는 곶을 바라 보았다. 평범한 능선의 산이 곶을 따라 저 편에 보였고 썰물이었는지 바닷가 아낙네들은 곶 근처 갯벌에 나와 물질을 하고 있었다. 습기와 소금기가 섞여 짬을 두고 불어오는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가만히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을 얹고 턱을 괴었다. 습한 바람이 말라가면서 스웨터에 서서히 말라붙은 소금 결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방파제 사이사이의 검은 구멍에서 갯가재들이 나왔다 들어갔다하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갯가재 한 마리가 이리저리 망설이기를 반복하다가 내 발곁에 다가와 가만히 멈췄다. 바닷가에 사는 다족류가 이렇게 가만히 머물러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저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곁시선으로는 아낙네들이 갈귀로 바지락을 긁으며 호미로 땅을 파 낙지를 잡아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파도가 코 앞까지 치밀어오르다 아직은 아니라는 듯 물러섰고 잠시 후 파도가 맘을 굳힌 듯 다가오자 아낙네들이 뻘에서 나와 바닷가에 세워져 있던 트럭을 타고 돌아갔다. 태양은 파도를 따라 불꽃 아크릴을 그려내며 서서히 바닷속으로 잠겨갔다. 어쩜 그렇게 연기도 나지 않고 스리슬쩍 도둑놈처럼 바닷속으로 슬며시 가라 앉을까.


그 사람과 왔던 바닷가였다. 물질하는 그 사람을 보며 앉아있던 등대 그늘이었고 그 사람이 방파제 이리 저리를 껑충껑충 넘어다니는 것을 바라보던 그 때 그 순간 그대로였고 그 이 가고 나서 눈이 내리는 겨울 바다가 보고 싶어 차를 달려 왔을 때도 항상 이 풍경 이 이미지 그대로였다.


스물. 그 사람을 기억이 나지 않는 계기로 만나게 되어 좋다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루프트탑에 스키 기어가 달린 녹색 마티즈였다. 여름엔 에어컨을 틀어도 살며시 땀이 나고 겨울엔 히터를 틀고 창문을 꽉 틀어막아도 냉기가 살며시 스며오고 입김이 불어져 나오는 그 마티즈를 타고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늙은 작가였던 그의 마지막 남은 원고료로 운 좋게도 풍경 좋은 방들만 빌려가며 이곳 저곳 기약없이 여유롭게 유랑했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가 재개봉한다는 말을 들으면 가던 길을 돌아서라도 갔고 나는 잘 모르지만 언제 어디서든 쏜살같이 연락이 오는 그의 정보통으로부터 어떤 바다에 눈이 내리고 있다고 하면 금새 그 곳으로 차를 돌렸다.


그는 이따금 뱉어대는 피 섞인 가래와 잦은 기침을 빼고선 건강했던 사람이었다. 폐암이라고 했다. 멋스럽게 뒤로 쓸어 넘겨 자연스럽게 잡힌 회색빛 머리와 작가라는 인상 덕분에 그 잦은 기침도 뭔가 어울리는 듯 싶었다.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담배는 어찌 그렇게 피워댔을까.


이 곳에 왔던 적이 세 번인가 됐을 것이다. 자주 들렀던 다른 곳보다는 적은 횟수지만 어쩜 이렇게 기억에 남을까. 비록 가을자락이라 눈은 내리지 않고 입김도 나오지 않지만 왠지 내 눈에는 선하게 함박눈이 하늘에서 내리며 갯벌에 쌓이는 광경과 그 사람이 갯벌 이리저리를 뛰어다니며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며 어린 아이마냥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져 내리기 직전 차 안에서부터 그렇게 기침을 해댔던 그 이였는데 내려서 눈이 송송 내리는 그 갯벌 위를 팔 벌리며 뛰어다닐 때는 어쩜 그렇게 기침도 멎었던지.


그는 그 때 여행을 마치고 바닷가에서 돌아오던 길에 들른 휴게소에서 내가 두 손에 커피와 그가 좋아하던 찐 감자를 사오던 때에 차 안에 편안히 의자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 잠에 들었는지 알 수 없어 조용히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아 조금 기다렸을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목에 맥을 짚어 보았고 손 끝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나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전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었다. 정말로 내가 그 때 왜 그렇게 침착했을까.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 보았었다. 그는 마치 낮잠을 자는 것처럼 너무도 편안하게, 누가 봐도 방금 세상을 떠난게 아니라 단잠에 빠진 것 같이 누워 있었다. 웃고 있었다.


살며시 눈이 오기 시작한다. 갯가재는 눈송이를 맞더니 정신을 차린 듯 바르르 다리를 바삐 움직여 방파제 아래로 내려갔다. 등대지기가 내 쪽으로 걸어오며 열쇠로 등대 문을 따곤 안부를 묻고 춥지 않느냐고 했다. 난 곧 일어설거니 괜찮다고 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등대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멀어지며 맴돌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쇠로 트렁크 문을 열고 체인을 채웠다. 마티즈는 여전히 자기 몸보다 긴 스키 기어를 위에 달고 있었다. 운전석 문 앞에 서서 마티즈를 둘러다보았다. 그리곤 운전석 안으로 들어가 핸들을 잡았다. 왠지 모르게 그의 자리에 앉아 그가 손 잡던 핸들을 잡고 앉아 있는게 큰 일 마냥 와닿았다. 시동을 키고, 히터를 틀었다.


히터를 방금 틀었던지라 차 안은 아직 차디 찼다. 들이쉬는 차가운 공기는 왠지 그 어린 날의 아이스링크장을 마주보는 통유리 창문에서 들이마셨던 공기와 같아 더더욱 폐부로 스미어왔고, 나는 잠시 핸들에 이마를 댄 채 소리 죽여 울었다. 그가 사그라들어 재가 되어 바다에 흩뿌려지던 날이 생각난다. 나는 그저 손을 앞으로 맞잡고 그가 날아가 바다에 스미는 것을 보고 있었고 스무 살이던 나와 나이 든 그와의 유랑을 두고 뒤에서 수군대던 이들의 말뜻이 들려와 말없이 슬퍼 했었다.


시동을 걸고, 브레이크를 풀고, 엑셀을 밟았다. 등대가 점점 멀어져갔다. 앞유리에 쌓이는 눈송이는 점점 거센 바람에 흩날려 머물지를 못했다.


END

노래 : 붕대클럽 - 불온한 바람

ハンバ?トハンバ? 「?

 

 

 

 

 

후기

요즘 들어 나이 든 작가나 기타 예술인과 함께 유랑하거나 여행을 다니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나마 욕구를 해소 해봅니다. 은교?

저 혼자 감상에 취해 쓴 글이라 제 글 고유의 단점, 즉 전 다 알고 느끼고 쓰지만 읽는 이는 서술된 내용에서 제가 느꼈던 만큼의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단점이 보이네요. 여전히.

, 글이 엄청나게 빠르게 나오는 건 아직 좋지만 이제 슬슬 느긋하게 쓸 때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20141114 1256 20150504 1812 수정

태양의 끝에는 누군가 서있었다

작품/소설 2016. 4. 7. 15:49

태양의 끝에는 누군가가 서있었다

 

 

 

길고 끝없는 태양의 늘어짐이 거울에 비치듯 비치는 모래 위를 걸었다.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고 모래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은 이곳에는 죽음의 공기도 살 썩는 냄새도 없다. 그저 비어있었다. 구두를 파고드는 모래가 꺼끌거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모래 속에 처박았다. 그렇게 발만이라도 사막 그 자체로 변해보니 한결 편했다. 지나가는 시선으로 어느 말라붙은 식물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슬펐다.

 

모든 것은 햇볕 아래서 평등했고 공정했다. 태양이 내리쬐며 내 머리카락을 달구었고, 내 몸의 모든 곳의 체온은 평등해졌고 공정해졌다. 모든 것이 공정한 이곳에서 나는 그 누군가에게 공정하지 못했던 범죄자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이곳에 들어섰고, 피고인은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려 한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미안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사실이었다. 지나고 보니 정말로 미안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지나기 전에 미안했으면 될 일이 아닌가……. 주황색 점퍼를 벗어 처박았고 검은 긴팔 티셔츠를 벗어 찢었다. 내 몸을 감싼 것은 옷 안에 입는 흰색 티셔츠와 카키색 면바지뿐이었다. 햇빛 때문에 덥다던가 모래가 뜨겁다던가 해서 벗은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이 주체하지 못 할 정도로 미안함의 미열에 휩싸여 벗은 것이다. 죄책감에도 열이 있다.

 

고개를 숙인 채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를 세어가는 것처럼 걸어가다가 문득 뭔가가 눈에 띄었다. 일일이 연한 색이던 바닥에 진한 색이 하나 스쳐갔다. 그 앞에 멈춰 서서 모래를 손으로 긁어내어갔다. 생각보다 잘 파이지 않았다. 파내는 작업과 그 주변의 모래가 흘러내려 메워지는 작업이 반복되었다. 팔까지 긁혀가며 파내자, 진한 색깔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입었던 카디건이었다. 색은 바래어 그저 자주-보랏빛 계통의 어느 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채 모래 속에서 파헤쳐낸 그 헤진 카디건을 보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었다. 나 그리고 저 높이 솟아있는, 찬란한 코로나의 태양은…….

 

나는, 그녀를 조심스레 양 손으로 안아들고, 여태 왔던 발걸음보다 더 짧은 발걸음으로 천천히 사막을 걸어갔다. 그녀를 안아든 채 바라보면서, 이 사막을 나가기 위해서. 그렇게라도 하면 속죄할 수 있을 성 싶어서.

 

 

 

 

 

20120110 1634

N


먼젓일의 개념. 아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태양이 뒤.

아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태양

작품/소설 2016. 4. 7. 15:49

아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태양

 

 

 

 

 

 

발밑의 모래는 밟을 때마다 부드러운 감촉에 기분이 좋았다. 이따금씩 발가락 사이로 차오르는, 비단같이 곱고 애매한 따스함의 색을 지닌 모래알갱이들을 볼 때마다 희미하게 웃었다. 끝없이 눈앞에 펼쳐진, 구불구불함이 밋밋하게 드러나는 모래 쌓인 지평선과 그 위에 곧바로 맞닿아있는, 투명하고 높은 하늘이 보인다. 하늘은 마치 가을처럼 진하고 높고, 그리고 숨 쉬어 흐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데도 햇빛은 목 뒤를 따갑게 대신 따뜻하게 부드럽게 그러쥐어주었다. 하얗게 휘날리는 내 머리카락이 바람의 손에 맡겨져 자연스러웠다. 가끔씩 뒷바람이 불어 뒤집히는 것조차도.

 

모든 것이 부드러웠다. 발밑과 앞으로 밟게 될 눈앞의 모래도, 짙게 흐드러진 햇빛과 바람결도, 입고 있는 옷자락이 산들산들 휘날리고 있는 흰색 가디건도. 씁쓸하게, 부수어진 심장에서 새어나오는 검은색 액체는 모래 위로 떨어지자마자 눈 녹듯 파묻혔다. 마치 스타킹 위를 걷는 느낌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태양은 드높은 쨍쨍함에서 서서히 기울은 파스텔 톤의, 가을날 수풀 사이로 드러누운 이마 위처럼, 바뀌어갔다. 지평선은 가만있다가도 계속 꾸불거렸고, 가끔씩 지나치는 말라붙은 풀뙈기는 한층 사실 같았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나는 천천히, 빠르지 않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구월 초의 너른거리는 하늘 아래 서서는 누군가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이 떠오를 수 없었다. 발가락 틈새로 삐져나오는 모든 영롱함을 세다보면 상실의 슬픔 따위는 쉽게 잊혀졌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 시간, 이 장소 안에서. 사막 위를 걸으면서도 전혀 위급감이라던가 그런 것 없이, 그저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걷는 것 자체가 좋았다. 평소같이 무릎이 아프지도 않았고, 연갈빛이 도는 하얀 머리카락이 주목받을 일도 없었다. 그와의 말다툼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여기서 혼자라는거. 아무도 없었다. 그게 좋다.

 

 

그에게는 또 다른 피앙세가 있었다. 손에 품고서 따스히 뺨을 비빌 새가 한 마리 더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서 떠나가 그 이에게 옮겨갔다. 모성(母星)의 굴레를 벗어난 작은 왜성은 서서히 길을 잃었다. 모래가 살며시 나를 안아 올렸다. 하지만 너무도 작고 연약해 발에서 그친다. 그런 발밑을 향해 미소 짓는다.

 

, 이제는 상관없다. 이곳에서라면야. 이곳에 서서 걷고 있는 동안에는 엊그제의 일도 없었던 일이고 몇 년 전의 일도 없었던 일이다. 이곳에서라면야 그 무엇인가라도 나를 상처 입히지 못해. 나는 아름답고 가녀린 한 여자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니까. 이곳에서라면야. 햇살은 산맥에 걸린 듯이 진홍빛 잔영을 살며시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햇빛의 태반은 노오란 하얀색이다. 연하양빛의 햇살이 따뜻해서 기분 좋았다. 나른한 달콤함이 햇빛을 쬐는 곳마다 피어올랐다.

 

지평선의 접점에선 하늘빛 하얀색, 그 위로는 점점 파래져 시원하게 끌어올려지는 드높은 하늘. 그리고 그 아래에는 그도, 그의 애인도 없다. 여기엔 오직 나 하나뿐이야. 죽도록 싫었던 고독조차 달콤한 풍경.

 

피아노 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아니, 피아노 소리다. . 잘못 들은 거겠지.

계속 걷는다. 수북히, 마치 염전에서 긁어 올려 쌓은 소금산처럼 저 너머에는 모랫둑이 보였다. 그나마도 작은 크기. 넓고 평평히, 끝이 없는 이 모래벌판에서 기쁜 듯이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태양은 아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나는 바람 부는 가디건을 한 차례 모아잡고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반백발을 휘날리며 잩게 스며드는 모래의 바다를 걸었다. 애써서 쓸쓸치 않으려는 듯 보이겠지, 나와 모래벌판을 비스듬히 품고 찍는 사진은.

 

하늘 위로는 차마 숨지 못한 별 두어 개가 나지막히 총총이었다.

 


 

 

 

20110923 17:24PM~17:57PM / 23:06PM

텍스트 백업 : 20110924 23:39PM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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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 있던 한 움큼의 공기

작품/소설 2016. 4. 7. 15:47

내 방에 있던 한 움큼의 공기

 

 

 

이별했었다. 정중앙에 서서 남쪽으로 북쪽으로 동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각각 멀어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어느 곳으로도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옆에는 멀어져가며 턱 밑으로 무언가 한순간 반짝이는 그녀의 고개 숙인 옆모습이 똑같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목도리를 입가까지 올리던 그녀의 턱은 오랜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봐서인지 너무도 갸름했다. 손을 대면 부서져 내릴 것 같이 부드럽게 날카로워보였다. 너무 깎아지르지도, 너무 완만하지도 않았다. 난 그 순간까지도 그녀의 턱만을 보고 있었다.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차가운 바람이 눈가를 스쳐 눈을 꾹 감고 나서 다시 뜨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의 앞모습은 없었다. 그녀의 앞모습은 이제 종이쪽에서나 핸드폰 사진 보관함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방문이 열리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휘이잉 하고 분 바람에 그녀의 눈물과는 상관없이 현관문은 거세게 닫혔다. 평상시의 그녀라면 다시 열어서 고개를 쑥 내밀고 미안, 세게 닫은 거 아냐. 바람 불어서 그랬어. 잘 자. 라고 얼굴이 빨개진 채 말하고는 천천히, 닫힐 때까지. 차가운 손잡이가 손의 온기로 따스해질 때까지 잡고, 문 틈새로 바람소리가 후웅 하고 들릴 때는 더더욱 손에 힘을 줘서 잡고 있다가 꼬옥 닫히고 나서 발걸음을 돌렸을 텐데. 얼마 못가서 고개를 돌려 내 방의 창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곤 문득 찡그리는 별 하나를 발견하곤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집까지 걸어갈 텐데.

 

너무도 잘 알았다. 커튼이 쳐진 창문 사이로 빼꼼히 쳐다보면서, 가끔씩은 넘어지는 그녀 뒷모습에 피식 웃으면서도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만날 그녀를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배웅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나치게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서로의 장점을 너무도 지나치게 좋아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너무 빨리 먹어 체했었나보다.

 

다음 날, 팬티를 거꾸로 입고 집을 나서 하루 종일 이상한 느낌에 신경이 쓰였고, 서빙을 하다가 국을 엎질렀고 그 날 알바비는 마이너스가 됐다. 집에 와서 요리를 하다가 손을 세 번이나 베였고, 쓰던 원고지에 커피를 엎질러 짜증이 났다. 비는 하루 종일 내리고 있었고, 바람이 불어 차가운 이불의 느낌에 몸을 기분 좋게 비비며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커튼 사이로 창밖의, 집 앞의 골목을 내다보았다. 파란색 우산이 보일 때마다 오른손으로 커튼을 아주 조금 더 걷어보았다.

 

책상의 한 가운데, 벽에 뒷면이 붙어있는 TV겸 모니터를 틀어 리모컨으로 영화목록을 뒤졌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제, 물고기, 그리고 호랑이들. 아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최신영화 두 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아래, 아래, 확인. 랜덤 재생.

 

 

 

잉그리드 버그만을 난 좋아한다.

 

 

 

그녀는 누워있는 내 옆, 내 가슴께에 걸터앉아 다리를 번갈아가며 휘젓다가 이따금 침대 밑에 발뒤꿈치를 부딪쳐 울상을 지었다. 커튼으로 가려진 채 열려있는 창문 덕에 연주홍빛 까칠한 커튼이 펄럭여 내 뺨과 그녀 목덜미를 스쳤다. 바람은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을 찰랑였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왼손을 살며시 고고한 듯 들어 올려 어깨 맡에서 머리끝을 만졌다. 오른팔을 베고 있던 나는 왼팔을 쭉 뻗어 리모컨으로 모니터를 조작했다. 우리 둘은 아무 말이 없었고, 긴 정적의 순간 동안 침대 옆 자그만 탁자 겸 속옷장 위에 놓인, 이미 식어버린 커피와 허브티와 푸석푸석한 맛의 다과에는 커튼의 무늬가 선명히 도장 찍힌 햇빛이 천천히 모양 입혀지고 있었다. 나는 리모컨으로 영화를 틀었고, 어쩌다보니 영화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되어버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내 방안에서도 보풀보풀한 하얀색 손뜨개 목도리와 깔끔한 겉옷을 벗지 않았는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왜 현관에서부터 잠깐 거실에 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는지를. 로제는 담배를 폈고, 폴은 시몽을 만났다. 어디선가 많이 다른 상황이었지만, 우리 둘은 충분히 그리고 말없이 그 영화를 보고 있었다.

 

뭔가 다툴 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우리 두 사람은. 나는 CD플레이어를 틀었고, 그녀는 거의 동시에 영화를 보면서 무슨 음악이냐고 말했다.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슬펐다. 미친 듯이 서로가 서로의 헤집어진 심장을 보듬고 싶어 했고 자신들의 심장을 꺼내 자, . 내 마음이 얼마나 갈기갈기 할퀴어졌는지를. 안아줘. 이해해줘. 사랑해줘. 따뜻한 말을 해줘. 라고 요구하고 그렇게 해주고 싶어 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바람은 거세게 불다가 그쳐 그녀의 뺨과 떨리는 목소리를 차갑게 변장해주었고 나의 오른쪽 눈가에 맺힌 눈물을 말려주었다. 나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어울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고 그녀는 오른손으로 이불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인 채

 

어울릴 리가 없잖아…….” 라고 말했다.

 

시몽! 시몽! 계단을 돌아 내려가는 시몽을 잉그리드 버그만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버그만의 눈동자는 슬프도록 투명했고, 그 눈동자를 우리 두 사람은 좋아했었다. 같은 배우를 좋아했고, 같은 시대를 좋아했다. 남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녀는 그 말을 끝내고 잠시, 이불을 움켜쥔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은 너무도 더뎠다. 시몽이 난간을 움켜쥔 손이 회전하는 것도, 바람이 불어 커튼이 출렁이는 것도, 내 눈물이 감았다 뜬 눈의 속눈썹 사이로 맺혀 나왔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떨며 일그러졌다가 하늘로 사라지는 것도 느렸다. 너무나도 느렸고 너무나도 더뎠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그 하얗고 부드러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그녀의, 여리고 가여워 부러질지 몰라 항상 목도리로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줬던 그녀의 목을 보고 있었다.

 

시몽은 사라졌고, 그녀는 킁 하고 한번 막힌 코로 숨을 쉬더니, 움켜쥔 오른손을 풀고 눈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잘 있어.” 라고 말하곤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마침표가 딱 잘라 말하는 듯 해 가슴이 아려왔다. 차가운 문고리를 잡곤, 따뜻한 그녀 손이 문고리에 하얗게 서리는 낙인을 새기는 동안 그곳에 서서, 눈에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곤 문을 열고 나갔다. 열렸던 문이 되돌아오는 동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닫히기 직전 현관문은 거세게 반문했다. 방문이 닫혔고, 버그만은 로제를 꼭 껴안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왼손을 베고 그녀가 누웠던 자리와 그녀가 움켜쥔 침대의 자국에 살며시 손과 시선을 얹었고, 잠시 후 고개를 들어 그녀가 잡았던 문고리를 보았다. 그녀의 새하얀 서리가 녹아내려 지문이 보일 때까지.

 

커튼은 그녀가 가는 것을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활짝 펄럭여있었다. 어서 내다보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듯이 그 주홍빛을 오후에 걸맞는 색깔에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떠나가는 뒷모습 같은 거, 평상시와 다른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볼걸 그랬다. 그래도 안 본다면 그녀의 슬픔이 아스팔트 위를 긁고 지나간 자국이라도……볼걸 그랬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녀가 봉지를 까놓은 다과를 아직도 속옷장 위에 놓아두고 있고 그녀의 입술이 닿은 허브티의 자그만 컵을 씻지 않았고 그녀가 떠나갈 때 작은 빛으로 화면에서 스며 나왔던 버그만의 얼굴을 돌려놓지 않았으며 그녀가 발을 부딪던 침대 아래의 나무 모서리에 묻은 핏자국을 닦지 않았다. 발을 절룩였을려나.

 

리모컨을 떨어트렸다. 건전지가 빠져나왔고 다시 끼워 넣고 작동되나 확인하려고 아무 버튼이나 누른다는 게 그만 재생을 눌러버렸다. 버그만이 나왔다. 시몽은 계단 난간을 잡고 내려갔고, 폴의 눈에는 시몽의 팔과 손 그리고 가끔씩 비치는 머리만이 보였다. 검은색 나무 계단의 난간은 위에서 보면 볼수록 슬펐다. 시몽! 시몽! 폴이 시몽을 불렀다. 폴은 시몽을 애타게 불렀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불렀고 고맙다는 인사를 담아 불렀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담아 불렀고 안녕이라는 미소 지을 수 없지만 애써 짓는 미소와 의도와는 상관없이 터져 나온 눈물 한 방울을 담아 불렀다.

 

나도 그녀를 그렇게 불렀어야 했나보다. 다과 봉지와 투명한 립글로즈가 묻은 찻잔과 어쩌면 나 혼자 누워도 좁아 보이기 때문에 그녀가 떠나갔을까라고 터무니없이 생각해본 그녀와 나의 붉은 침대와 연주홍빛 커튼.

 

그리고 잉그리드 버그만의 지나간 젊음을 담은 사랑 영화가 나오던 그 순간 내 방 안에 있던 한 움큼의 공기에서. 차가운 이불을 움켜잡고 차가운 문고리를 움켜잡던 그 공기에서. 나는 그녀를 불렀어야 했나보다.

 

 

 

 

 

 

 

 

 

[N]

   

20120122 0135 

쓰면서 자꾸 딸기100% 츠바사가 생각났는데, 왠지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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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놓인 정원수 사이에서 20120124 0300

작품/소설 2016. 4. 7. 15:47

가로놓인 정원수 사이에서

 

 

 

 

 

너는 나를 부른다.

나는 너를

 

 

 

 

 

꿈을 꿨다. 포플러나무. 호랑가시나무. 그 두 가지 외에는 이름을 전혀 모르는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늘어서 있는 그런 정원에 나는 서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흠뻑 젖어있어 이른 새벽이거나 저녁의 안개 같았고, 알맞게 깎인 잔디를 밟고 선 내 앞에는 무언가 커다란 겨울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 반대편을 가로놓고 있었다. 나무의 밑동 사이로 보이는 조금의 공간이 반대편에 공간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구름이 많았고, 마치 검은색을 섞은 남색처럼. 저녁의 해가 지고 나서 세상에 잠시 동안 달도 북극성도 없을 무렵의 색깔이 보였다. 시간상으로는 맞지 않지만 무척이나 어울렸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찌릿찌릿 아려왔다.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사람이 있는 걸까. 그 목소리는 어디선가 왜곡되고 일그러져 불분명하게 들려왔다. 무언가가 목소리의 진로 사이에 놓여 여러 번 부딪치고 찌그러져 간신히 만신창이의 몸을 이끌고 건너온 듯 한 그런 소리였다. 목소리는 잠시 간격을 두고 한 번 더 들렸다. 건너편이었다. 저 이름 모를, 키가 무지하게 큰 침엽수의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목소리는 간신히 뭔가를 실어왔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목소리의 꼬리를 잡고 귓가로 끌어당겨 간신히 콘센트를 꽂았다.

 

나는 잠시, 물끄러미 서서 저녁의 안개 혹은 새벽의 갓 난 공기를 조용히, 깊게 들이쉬고 있었다. 목소리를 타고 넘어온 그 무엇인가를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아주 애타게, 그러면서도 겨우 들릴 듯 한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마치 단단히 겁에 질렸거나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해 기쁨 혹은 슬픔에 차있는 것 같은, 내보내려 해도 나오지 않는 그런 목소리로. 그런 목소리로 그녀는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꿈은 거기서 끝났다. 난 문득 눈을 떠 이마에 대고 있던 손등으로 살짝 맺힌 땀을 닦고,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천장의 색깔을 확인하고, 반쯤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은 채 꿈의 내용을 생각했다. 아무런 노력도,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목소리를 듣고, 알아차리고, 숨을 쉬고, 꿈은 끝이 난다.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밑동 사이의 틈새로 그녀를 보려 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부르는 게 나와 관계없는 머나먼 것일지라도 크게 소리를 질러 그녀를 부르지도 않았다. 며칠의 낮과 밤을 그런 꿈으로 지내다가 깨달은 사실은, 꿈속에서 나는. 나는 그저 그녀를 지켜보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꾸는 꿈이라는 것이다.

 

 

 

2.

 

나는 여태껏 많은 장례식을 봐왔다. 내 주변에서는 내가 알건 알지 못하건 많은 사람들이 죽고 태어나고 헤어지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영원하지 못했다. 영원하지 못한 것을 기리고 평생 간직하기 위하여 또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순간 이후의 결과가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부정하기 위하여 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저 무덤덤하게, 두 손을 깍지 낀 채 늘어트려 바라보거나 이따금씩 박수를 쳐주며, 혹은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으며 지나왔다. 하지만 언젠가, 엊그제 같으면서도 마치 수백 년이나 지난 듯 느껴지는 그 순간은 예외였다. 나는 울고, 깔려있던 까칠까칠한 돗자리를 주먹에 피가 맺힐 때까지 내려치고, 술잔을 들었다 내렸다 반복하다가 기어이 깨트려버리고, 향냄새가 가득 차 누군가가 기침을 할 때까지 한가득, 멎어버린 눈동자로 향을 계속 꽂았다. 향이 많이 피어오르면 피어오를수록 그녀가 좋은 곳에라도 가는 듯이.

 

난 살아오면서 미친 짓을 많이 했었다. 여자 뺨도 때려봤고, 바람도 펴봤고, 한밤중에 술집에서 패싸움도 해봤다. 그 미친 짓들이 끝나고 쓸쓸히 혹은 몸도 마음도 아픈 채 어딘가 내가 있어야 할 장소 혹은 의지할 수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길 때, 고개를 들어 찌들어있는 나와 달리 언제고 맑은 별을 보면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의 살아생전에도 그녀가 죽고 나서도. 그녀는 내게 전화를 많이 했었다. 문자도 많이 보냈었다. 소녀틱한 내용의 문자가 많아 나는 얼굴에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으므로, 나란 사람은 당연히 더 너머를 원하고 더 너머를 바라봤다. 바로 내 등 뒤에 나를 껴안은 채 사랑해라고 속삭이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머로 걷는 걸음에 무게만 더 실어주는 짐일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짐이 된 것이다.

 

그녀가 보낸 문자에 보내는 답장의 길이는 점점 짧아졌지만 그녀는 전혀 문자의 내용을 줄일 생각을 안했다. 오히려 그녀의 문자는 거의 매 건마다 편지 수준의 길이를 자랑했다. 전파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어딘가 울림을 가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울림을 귀찮게 생각했다. 뭔가, 부여잡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울림이었지만…….

 

 

.

어이.” 눈앞에서 불똥이 튀어 정신을 차려보니, 점장이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고 있었다.

, . 죄송합니다.” 모자의 끈을 다시 동여매고, 튀김기계 앞에 가서 감자반죽을 넣었다. 뜰채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동안, 끓어오르는 튀김기름의 거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겨울이라 장사도 안 되는데다가 따뜻한 바람 솔솔 나온다고 졸면 안 되지.” 점장이 계산대에서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 좀 졸려서요. 얼마 안 안 남았으니까 정신 차려야죠.”

그래. 그래야지. 그나저나 크리스마스에 쉬나?”

, , 약속이 있어서요.”

그런가……. , 어서 오세요, 손님.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튀기고, 튀기고, 튀겼다. 아직 프렌치프라이에 머물러 있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가게 문을 닫고 외투자락을 여미며 밤의 공기를 마셨다. 몸은 무겁고, 등이며 온몸이며 춥고 배고팠다. 오늘은 꿈 없이 잠을 잘 수 있을까. 아니면, 꿈이 더 나아갈 수 있을까.

 

 

 

 

3.

 

꿈이다. 이번엔 다른 꿈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관 앞에 서있는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녀의 전화다. 전용 컬러링이 울리고 있는 그 전화기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영원히 울릴 기세였고, 나는 받았다. 받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꿈의 길이 이쪽으로 그려져 있나 궁금해서 보고 있었을 뿐이다.

 

어어.” 나는 여느 때처럼 무덤덤했고,

.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점심 먹었어?” 그녀는 여느 때처럼 다정했고 포근했다. 나는 뭔가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먹었어. 뭐하고 있었어?”

, 그냥 뜨개질 좀 하고 있었어. 목도리 짜느라고.” 1. 유난히도 추웠던 그 달의 과거였다.

여태까지 짜네. , 할 말 있어?” 꿈은 여전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내가 한 말은 아니었다. 꿈은 때로는 뭔가가 산산조각 나도록 냉정하다.

아니……. , 미안해. 갑자기 전화해서…….”

……. 니가 왜 미안하냐. 미안한건 백 번 천 번 나다.

. 알면 됐어. 끊는다. 밥 잘 챙겨먹어라.”

핸드폰이 부서지도록 세게 움켜잡았다. 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나는 이대로 핸드폰이 부서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부서지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안녕.” .

종료 버튼을 누르고, 통화는 끝났다. 유난히도 내 기억 속을 휘젓던, 안녕이라는 말의 울림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우물에서 길어 올린 깊은 차가움과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의 공기. 어딘가 단념하고 결심하고 체념한, 마지막의 울림을 가진 안녕. 그 안녕 뒤에 나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까. .

 

 

 

그로부터 세 시간 삼십팔 분 후, 그녀는 그녀의 방에서, 침대에 누워 내가 선물해준 곰 인형을 푹 끌어안은 채,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인형의 등에 적시며 세상을 떠났다. 웃는……얼굴이었다. 어찌 보면 우는 얼굴이었을지도……모르겠다. 엄마 품의 아이처럼, 인형을 꼭 껴안은 채로…….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유서는 단 두 줄뿐이었다. 우편함을 열어보니 유서는 한 달 전의 날짜로 적힌 채 들어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내 방 안에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아 봉투를 뜯었다. 봉투를 뜯고 종이를 펼치고 나서야 그게 유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유서까지도 포근한 분위기를 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거야. 즐거웠어. 그리고……정말 미안해. 바이바이.

 

 

 

그녀의 손으로 쓴 글씨가 이렇게 눈가에 들어온 적은 처음 시절 이후로 거의 처음이었다. , 난 어째서 이렇게 소홀했을까? 나는 그 자리에서 마지막 글자가 번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었다. 울음을 그치고 나서 번진 글자를 손으로 매만지며, 묻어나온 잉크를 보곤 고개를 들어 천장의 색깔을 확인했다. 검은색이 섞인 남색이었다.

 

 

 

4.

 

꿈이다.

 

 

 

 

 

 

정원 꿈이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공기. 안개. 내가 서있는 위치. 나무의 종. 침엽수의 키와 잎의 무성한 정도. 밑동과 밑동 사이의 간격. 잔디가 자란 정도. 울타리. 그리고 목소리.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한 건반 한 건반, 그러다가 마디의 소리가 들렸고 천천히 울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안개에 젖은 듯 했다. 목소리가 들렸고,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세 번째로 가로놓인 정원수를 넘어왔다. 그 옛날, 그녀가 세상을 떠난 날의 전화통화의 목소리였다. 안녕. 여태까지 내가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는 안녕이라는 두 글자였다. 안녕. 안녕. 안녕. 첫 번째와 두 번째 안녕의 사이에는 영원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는 듯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운명과 냉정함을 느끼며 눈앞에 가로놓인 침엽수의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안녕의 사이에는 거센 바람이 불었다. 영원히 불 것만 같은 그런 바람이. 모든 걸 뒤흔들고 뒤섞고 몰아세우고 그러다가 다시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 지워냈던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 같은 그런 바람이 불었다.

 

생각했다. 나는 왜 그때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까. 왜 그녀의 말 속에서 기묘한 울림을 눈치 채고선 물어보지 않았을까.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이상하네. 이렇게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된 것을. ? 아무 일도 없어. 설마 있기를 바라는 거야? 라고 하면? 당연히, 그녀는 그런 말을 할리가 없다. 만약 했다고 해도, 그저 오지랖이 넓은 걸로 한 번보인 것뿐이잖아. 말 한 번 들은 거니까 그냥 넘어가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보이는 게 싫어서 그녀가 그런 결정을 하기 전에 그녀 편이 되어주지 못한 건가. 그런 건가, 나란 사람은. 그런 생각을 했다. 영원이 모든 시간을 삼키고 끝내는 0으로 만들고, 바람이 모든 것을 지우고 다시 돌려놓으려 하는 그 순간에. 저녁은 슬슬 걷혀 밤노을이 지려고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순간 바람이 멎었고, 휘날리던 옷소매와 머리카락은 일순간 푹 꺼졌다. 침엽수는 춤을 그만뒀고, 모든 잔디는 똑같이 바로 서서 혹은 약간 뉘여서 숨죽인 채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불렀다.

 

 

 

 

 

5.

 

모든 감각을 재가동시켰다. 다시 한 번 말해줘. 뭐라고 말했는지를. 감각이 떨렸다. 곤두세운 촉각이 서로 딱딱 부딪혔고, 나는 알았다. 그녀가 나를 불렀다.

 

여깄어.” 뭔가 어색한 투로 가로놓인 정원수 위를 향해 크게 말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나는 두리번거리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왜 대답이 없는지 궁금해 하며 조금 안절부절해했다.

거기……있어?”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또 울컥했다. 겁에 질렸던 목소리가 조금은 밝아졌고, 환해졌다. 나 같은 것 따위의 목소리로 그렇게나 안심이 되는 거냐, 너라는 사람은.

. 여기 있어. 그러니까 그렇게 막 안 불러도 돼.”

……다행이다.” 그녀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약간 목이 메어 기침을 하고, 말라붙은 입술을 간신히 떼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듣고 있다간 나도 좀 슬플 것 같아 말을 했다.

, 그러니까 이거,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밥 잘 먹고 다니지?”

그녀가 이 꿈속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모르니까 일단 뒤의 것으로 물어봤다.

. 덕분에 항상. 고마워.” 점점 더 밝아진 목소리는 마치 정원수에 가로막혀 상처 입었던 처음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했다. 바로 옆에 있는 느낌이 들어 껴안고 싶어져 옆을 돌아다봤지만,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잔디와 저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울타리뿐이었다.

……미안하다.” 나는 묵묵히 말을 건넸고,

? 뭐가?” 그녀는 여전히 밝았다.

그냥, 모든 게. 평소에 좀 뭐라고 해야 하나, 못해준 느낌이 들어서.”

괜찮아. 미안해할 거 없어. 너무 잘해주는걸. 항상 고마워.”

제기랄. 이거 나 울리려고 꿈이 일부러 이렇게 되가는 거지? 이빨을 꽉 깨물고, 잠깐 숨을 고르게 쉬었다. 저 너머, 정원수를 사이에 두고서 침엽수의 밑동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신발과 종아리는 너무도 선명했다. 안개가 하얗게 끼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거 알아?”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렸다. 나는 푹 젖었고, 침엽수도 푹 젖어 서서히 고개를 늘어트렸다. 이파리들은 물방울을 하나 둘 떨구면서 수그러들었고, 침엽수들은 키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내 턱 앞까지 작아졌다.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까치발을 하면 그녀의 옆얼굴이 반쯤 보였다.

그녀의 눈은 너무도 슬퍼보였고, 혼자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뭔가 슬퍼서 견딜 수가 없어. 나는 너를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데, 나는 어째서……어째서 죽은 걸까?” 그녀의 눈이 젖어들었다. 비는 계속 내렸고, 언제 멎은 지도 몰랐던 피아노 소리가 다시 들렸다. 비는 바람을 손잡고 데려왔고, 바람은 비와 손을 잡고 이리저리 뛰놀았다. 안개를 흩뿌리면서. 그녀를 눈물짓게 하면서.

너무나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해봐도 여전히 미안해. 너에게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그저, 그저 뭔가……정해져 있는 걸 거야. 우리 둘이 헤어진다는 거……말야.” 도저히 무슨 말인지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했지만 나는 왠지 납득이 갔다. 이해할 수 있었다. 뭔가,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그녀를 말하게 했고 나를 납득시켰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나는 어느새 그녀의 부재를 납득하고 있었다. 나쁜 뜻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조용하고 고요하게 그녀는 내 곁에 있으면서도 없었다는 걸 알았다. 모든 게, 모든 사랑과 인연이 그렇다는 걸 그녀는 말했다.

 

내가 없어도 잘 지내줄 거라 믿어. 너는 강하니까. 그러면 된 거야. 언제나 너는 괜찮을 거야. 내가 없어도.” 그녀는 나의 대답 같은걸 구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그 말은 여러 낮과 밤의 꿈을 거쳐서 내게 당도했다. 그 말이 이제 끝나려 하고 있었고, 피아노 소리와 함께 나는 두 손을 맞잡고 어딘가로 말했다.

 

말이 끝나고, 비가 그치고 바람이 거세게 일순간 몰아치는 때 침엽수는 모두 사라졌고 가로놓인 정원수의 이별은 풀어졌다. 그녀가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갔고, 그녀는 달려오는 나를 웃으며 반겼다. 서로가 서로의 등에 팔을 둘렀고, 손가락을 펼쳐 조금이라도 더 서로를 넓게 안으려 했다. 밤의 들판에는 해가 걷혀 달도 북극성도 없는 순간이 잠시 동안 이어졌지만, 이윽고 달과 북극성은 누가 뭐라고 말하건 간에 떠올라 제 자리를 지켰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떠올라 자신이 비춰야 할 곳을 비추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갔고, 바람은 할 일을 다 마치고도 뭔가를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이 끊임없이 불었으며, 영원은 순간을 벗어나 계속 영원했으며, 그녀의 사라져가는 모습과 멎어가는 피아노 소리를 느끼면서 나는 조용히 웃으며 내가 있었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몸을 돌려 원래 바라보던 곳을 바라보며. 그녀가 있었던 곳을 마주보며 서자, 침엽수가 원래처럼 서있었고, 수그러들었던 이파리는 고개를 들었으며, 빗방울을 배불리 머금은 줄기와 가지들은 전과 같이 서서 이 꿈속을 반절로 가로놓은 채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밑동의 간격들도 모두 그대로였다. 땅바닥에 엎드려 그 사이의 틈새로 반대편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고 겉을 두르던 갖가지 정원수들의 울타리는 내가 가까이 가자 활짝 열린 채 나를 지나가게 해주었다. 바람은 비에게 손을 흔들어 나중에 또 놀자고 말하며 내 뒤를 따라왔고 저 손이 닿지 않을 먼 거리를 걷고 있는 북극성과 달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로놓인 정원수의 만남을 뒤로 하고 나는 꿈속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녀를 안은 손에는 아직도 감촉이 남아있었다. 그래. 나는 용서받았지만 앞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거로도 뭐 됐어. 나는 앞으로도 살아갈 거고, 살아가면서 용서받을 테니까.

 

살아간다는 것으로 용서를 받아낼 테니까.

 

 

 

 

 

 

 

 

 

 

 

[N]

 

 

 

 

 

 

 

 

 

 

 

 

 

 

 

 

영화 별의 목소리’,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초속 5cm’ 사운드 트랙.

<Through the Year and Far Away>, <너의 목소리>, <く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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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빛

작품/소설 2016. 4. 7. 15:45

上편은 되게 호흡이 길고 어색함. 下편과 달리 느낌대로 이어나가질 않고 억지로 쓰려고 해서 그런 듯. 거북함에 사과드림.



꿈결처럼 지나간 사람들이 있다. 같이 있을 때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그들과 함께 누리는 시간이 값지고 아름답고 즐거웠으나 눈꺼풀을 들어올리고서 기억을 더듬어보면 멀리 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 떠올라 손끝으로 더듬어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연이 있다. 많다. 그 옛날 같이 피아노 의자 옆에 앉아 아무런 음율 없이 이리저리 건반을 서로 두들기며 웃고 떠들던 여자가 있었고 들판이라면 어디든 가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보온병에 타온 커피를 함께 따라 마시며 불어오는 바람을 서로의 얼굴 사이에 두고 웃기만 하며 행복해하던 여자가 있었다. 웃고 떠들며 무슨 주제던 간에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던 녀석도 있었고 함께 드라이브를 떠나 벚꽃을 보며 말 없이 손을 잡고서 손에 고이는 땀을 부비던 정말 사랑스럽던 그녀가 있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 내 손에 딱 들어맞던 그 가녀린 손을 안고서 저 아래 땅 밑에서 한 평도 안되는 땅만을 부여받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다. 고요히 잠들어 있으리라. 그랬으면 좋겠다.

 

수많은 이별을 지나고 인연이 끝날 즈음 온종일 미동도 않는 휴대전화 액정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더 이상 인연을 찾기 위해 연연하지 않으리라. 오는 인연 오게 하고 가는 인연 여태껏 꿈결처럼 그래왔듯 보내리라. 그렇게 결심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그녀의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활짝 웃는 미소가 화면 안에 한가득이었다. 울적해지지도 않았고 보면서 미소가 지어지지도 않았다. 이런 시기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인연은 떠나가면서 머무르는 사람을 늙게 만든다. 나는 내 나이에 비하면 너무 늙은 것이리라. 울고 싶었지만 내 안에 그들이 남기고 떠난 그들이 원래 살아갔어야 할 시간들은 나를 울게 놔두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제각각의 시간이 초침을 똑딱이며 내 안에 죽은 채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 똑딱임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이제는 거슬렸다. 잊기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 이차선 도로를 건너 계단을 내려가 하천변의 산책로를 걸었다. 하염없이 걸었다. 다리 하나를 지나고 이전보다 조금 더 멀찍이 떨어져 놓인 다리 하나를 또 건넜다.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하천변의 모양을 조금 바꿔놓은 탓인지 이전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경했고 그 생경함에 분노했다. 다시금 꿈결처럼, 억새가 너울거리는 이 천변에서 있었던 추억들이 내 안에서 똑딱였다. 더 멀리 갔다. 중인리 쪽으로 향했다. 조팝나무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마치 자라나다 멈추어 그 왜소함에 만족한 듯 고요히 늘어서있는 조팝나무들이 늙은 퇴역군인처럼 느껴졌다. 조팝나무 산책길 왼쪽으로는 이름 모를 나무가 오름 위에서 군락을 이루어 오름을 뒤덮은 모습이 보였다. 삼림풍이 불어왔다. 삼림풍의 끝자락에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삼층집이 보였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창고에는 태양열 발전판이 지붕을 덮고 있었다.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서있는 외딴 그 집의 고고함이 왠지 모를 이끌림으로 조금씩 나를 끌어당겼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활짝 피다 못해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잠겨갔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제시 쿡의 플라멩코 기타 소리가 울렸다. 조팝나무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너풀거리고 싶음에도 크기의 작음에 슬퍼하며 조금씩 펄럭였다. 그래도 그들은 만족하는 것처럼 흥겹게 너울거렸다. 산책로는 길었고 그 긴 산책로를 걷는 동안에 그 집은 항상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 집의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한 여자가 보였다.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머그잔에 포트에 담긴 물을 따라 다시 소파로 가던 도중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렇게 한동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왠지 모르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조금 되기에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계속해서 나는 왠지 모를 이끌림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를 만났을 때와 같은 이끌림이었다. 빛깔도 강도도 비슷했다. 어찌 흘러가던 간에 인연을 지어야 한다고 운명지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이끌림이었다. 부여받은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강한 이끌림이었다. 창밖으로 나를 내다보고 있는 그녀는 머그잔을 내려놓곤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발걸음을 돌려 그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쪽으로 향하는 날 본 것인지 머그잔을 들고서 소파로 향했다.

 

초인종을 눌렀다. 으레 이 근처에 별장을 지어둔 사람들은 마당에 개를 묶어놓는데 이 집은 그렇지 않았다. 고요했다. 불어오는 바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슬리퍼를 신은 발소리가 점점 현관문으로 가까워져왔다. 그리고 그녀는 현관문 렌즈로 바깥을 내다보더니 나를 발견한 듯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 돌아가는 소리조차 조용했다. 문이 열리고 나온 여성은 키가 조금 큰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생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고 얼굴은 조금 수척하지만 기품이 느껴졌다. 생기와 기품을 맞바꾼 것처럼 보였다. 하늘색 티셔츠와 베이지색 긴 바지를 입고서 문을 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잠시 머뭇거렸고 그녀는 살짝 웃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녀가 금방이라도 바람에 실려 날아갈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바깥에서 산책하다가 봤는데 이 집 디자인이 되게 멋져서요. 사진이라도 찍을까 해서 허락 맡고 싶어서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그녀는 내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사진 찍으신다는 분들은 대부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니시던데 그 쪽은 아니시네요?”

아차 하고 카메라를 들고 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야 나중에 가져와서 찍어도 되죠. 해도 졌고 해서. 노을진 풍경을 찍고 싶어서요.”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고 그녀는 여전히 문고리를 잡은 채 웃고 있었다.

여긴 밤풍경도 멋있어요. 손님을 밖에 세워두긴 뭐하니 들어오셔요.”

그녀는 문고리를 놓고서 안으로 들어가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놓았다. 나는 문이 닫히기 전에 팔로 살짝 연 후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발냄새가 나진 않을까 조금 신경이 쓰였다. 집 안은 엊그제 벽지를 바른 듯 정갈했고 은은한 커피향이 났다. 아까 머그잔에 따른 물은 커피 끓인 것이리라. 그제서야 내 옷차림이 어떻게 보일지가 신경쓰이기 시작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금 와서 다시 옷을 갈아입는 것은 불가능하고 갈아입을 옷도 없기 때문이었다. 일층에는 책장에 온갖 책이 가득했다. 우측에 원래 거실 용도로 디자인된 공간에는 사방에 책장이 놓여 있었고 현관문 바로 맞은 편에는 나선형으로 계단이 보였다. 그녀는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살짝 바라보곤 그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일층과 이층 사이엔 천장이 뚫려 있었다. 이층에서 일층 서재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소파와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이 보였고 그 뒤 창가 쪽으로 주방이 보였다. 그녀는 어깨를 반대쪽 손으로 긁더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누추한 곳이에요. 저 혼자 살고 있고요. 커피, 드실래요?”

냄새로 보건데 원두커피였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분 혼자 사는 집에 낯선 남자를 들일 때 의심하는 것이 보통 아닌가요?”

그녀는 그 말이 상당히 즐겁게 들렸던 듯 여태껏 지었던 미소보다 더 크게 웃고선 말했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당신은 의심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 앉으셔요.”

그녀는 정중한 손짓으로 소파를 가리키곤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 거울이 어딨는지 물어보려는 마음을 꾹 참았다. 의심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눈빛은 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했지만, 이내 그녀가 권한대로 소파에 앉았다. 딱딱하지도 푹신하지도 않은 적당한 소파였다. 그녀는 그녀의 것과 똑같이 생긴 빨간 머그잔을 들고 와 내게 건넸다. 커피잔을 양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졌다. 그녀는 내 옆에 너무 멀찍이는 아닌 거리를 두고 앉아 말했다.

 

여기에 사람이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선뜻 들인걸지도 모르겠구요. 더욱이 아까 창밖에서 왠지 모르게 이쪽을 계속 쳐다보시길래.”

나는 그 말에 커피를 조금 뿜을 뻔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무척이나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미소였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라던가 뭐 옛날 중세시대에 귀족들이 작업 걸 때 하던 멘트가 나오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문을 열었거든요. 근데 그런 건 아니라서 다행이기도 하고, 오히려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여자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거,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커피를 홀짝이며 시선만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가재도구는 별로 없어보였다. 그제서야 혼자 사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그 사람만의 온기를 집안에 드리우는 편이 많은데 이 집에는 온기가 그득했기 때문이다. 가녀린 몸 안에 품은 소소한 온기가 이 집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다.

꽤나 오랫동안 혼자 지내셨던 것 같아요.”

그녀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되게 외로웠기도 하고 유유자적함을 즐기기도 하고 뭐 그렇죠. 거의 다 죽어가는 여자를 누가 만나러 오겠어요?”

그녀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 마냥 흐르듯 흘러간 그 말에 나는 머그잔을 조금 세게 잡았다.

?”

나는 반문했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암이에요. 암 중에서 그나마 조금 점잖은 암이라고 해두죠. 후후.”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우스웠던 듯 살짝 실소를 내뱉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모든 연을 끊고 하던 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고 여기에 집을 짓고 살고 있어요. , 그런거죠.”

그녀의 말에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유감입니다 라는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막 찾아온 이방인이기 때문이었고 나는 그런 나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녀는 무언가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 말을 끊었다. 나는 억지로 말을 이었다.

일이라면 어떤 일이죠?”

자기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지 그녀는 웃으며 머그잔을 내려놓고 일어서 따라오라고 말했다. 나 또한 소파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텔레비전 왼쪽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작업실로 보였다. 컴퓨터가 있었고, 책장이 양쪽에 있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마주보는 쪽에는 바깥으로 나있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고선 방향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소소하게 글을 쓰는 일이에요. 작가죠 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어떤 글인지 물어봐도…….”

알고 나서도 굳이 찾아볼 마음은 들지 않을건데요?”

나는 그 말에 잠깐 당황했고 그녀는 또 다시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성인 소설이니까요. 여성들을 위한. 웃기죠? 세상으로부터 연을 끊고 혼자 칩거해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여자가 쓰는 소설이 성인 소설이라니.”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빈 말일 뿐인 위로조차. 그녀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괜찮다는 미소를 띄우곤 말을 이었다.

, 그런거예요. 그렇게 살고 있는데, 오늘 마침 되게 흥미로운 사람. 당신이 이렇게 찾아온거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전 그런 거 좋아하니까.”

그녀는 자신이 할 말에 대해 각오하라는 듯 잠시 숨을 고르곤 말했다.

친구가 되어주시겠어요? 얼마 남지 않은 삶, 친구 하나는 가진 채 보내고 싶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일어나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생머리가 휘날리며 샴푸 냄새가 날아왔다. 죽어가는 사람으로부터 나는 냄새라기엔 향기로웠다. 마주치는 모든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지금 불어오고 있는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휘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조팝나무가 생각났다. 메타세쿼이어같은 느낌도 났지만 조팝나무였다.

 

그러죠. 기꺼이. 스물 여덟. 이시헌이라고 해요.”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서른 둘 먹은 이혜인이라고 하는 늙은 여자에요. 가슴도 작고 볼품 없고 죽어가는 성인 소설 작가.”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소리나게 웃더니 몸을 돌려 내 쪽으로 걸어와 내게 안겼다. 그 어떤 육체적 목적도 없었다. 그저 안겼다. 나는 조용히 그런 그녀에게 기댈 곳이 잠시 되어주었다. 꿈결 같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끌려서 찾아온 곳에는 매력적이지만 죽어가는 한 여자가 있었고 그런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죽기 전까지 그녀를 찾아와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주며 친구가 되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역할이라고 하니 뭔가 억지로 한 것 같이 들린다. 기꺼이 맡은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말을 놓게 되었다. 주로 그녀의 이야기였다. 스물이 되었을 즈음 불문과에서 만나 처음으로 사귄 연인은 군대에 가서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프랑수아즈 사강을 읽기 시작했고 자판을 두들기며 글을 썼다고 한다.

야한 것을 야하게 보이지 않게 하면서도 야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내 글의 궁극적인 목표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내게 그녀의 글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 이야기로 돌아와서, 대학을 그저 무난히 졸업하고 이런저런 번역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쓰러졌고 검진을 받아보니 갑상선 암 말기였다고 한다. 그 때 그녀의 나이 스물 아홉. 나는 그녀에게 왜 입원해서 치료를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든 채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족할 수가 없어서. 암을 고치고 더 오래 산다고 해도 내가 살아가면서 만족할 수 있는 삶일까 싶어서야. 그리고 내게 주어질 그 기회. 삶을 더 이어나갔을 때 내가 더 알차고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고. 그래서 그냥 그 기회는 누군가에게 주기로 했어. 하늘이 내게 기회를 준 것은 곧 누군가가 그 기회를 잃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나는 나지막히 이렇게 말한거지. ‘신이시여, 제게 그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리고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저는 합당치 않사옵니다. 그러니 그 기회를 저보다 더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으나 멈춰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저보다 더 어리고 더 사람된 사람에게 주시옵소서.’ 하고 송장을 떼지 않은 채 바로 반송을 한거지. .”

 

그녀는 말 끝에 손가락을 튕겼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밤이 늦어 돌아갔다. 방을 하나 비울테니 자고 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다음에 와서 그러기로 했다. 갈아입을 옷이며 칫솔 치약이며 안 가져왔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실례하고 싶진 않았다. 연인 사이라면 괜찮은 일들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돌아가기로.

아쉽네, 칫솔하고 치약이며 옷가지 다 빌려줄 수 있는데. 빌려준다는 표현을 쓰기엔 조금 그렇지만. 친구 사이잖아?” 그녀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내게 조팝나무 산책길에서 자기네 집으로 걸어올 때 사인을 주라고 말하고 잠시 그 사인의 내용에 대해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서 놀아라.

학교 가는 뒷동산에

해는 아직 쨍쨍한데

바둑아 바둑아

이리 나와 놀아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놀아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 나와 놀자.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약간 벙 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는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 좋잖아. 딱 맞네. 내가 바둑이고 네가 철수니까. 부끄러운 거라면 신경 쓸 필요 없어. 저 길은 거의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산책길이니까. 철수라는 몰개성한 이름이 싫으면 다른 걸로 바꿔줄까?”

나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저었다. 내가 철수인 건 둘째치고 왜 그녀가 바둑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렇게 그녀는 바둑이가 되었다.

 

2015 05 14

18 23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베란다로 나있는 창 틈 사이로 스며오는 냉기에 깜짝 놀라 이불을 두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푸거리며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다. 어제만 해도 볼만하게 나있던 수염은 이제 덥수룩해져있었다. 작년만 해도 삼 일에 한 번 꼴로 면도를 해야 한다는 점이 싫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런 것까지 싫어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끔하게 수염을 깎은 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보일러를 끄고 수도가 얼지 않게 수도꼭지를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도록 열어놓은 후 옷을 입었다. 목을 푼 와이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위에는 가벼운 윈드브레이커를 걸친 후 속옷과 양말 그리고 세면도구를 넣은 더플백을 메고 로퍼를 신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선 후 가까운 꽃집을 찾아 장미 한 송이를 샀다. 별다른 뜻은 없다. 그녀가 빨간 것을 좋아하는 것 같길래 샀을 뿐이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갔다. 20분 쯤 걸었을까, 조팝나무 길이 보였다. 나는 주변에 누가 없나 살핀 후 헛기침을 하곤 노래를 불렀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서 놀아라. 학교 가는 뒷동산에 해는 아직 쨍쨍한데 바둑아 바둑아 이리 나와 놀아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놀아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 나와 놀자.

 

노래가 딱 끝나자마자 신기하게도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멈춰섰다. 노래의 길이가 적절했기 때문이리라.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현관문 앞에 멈춘 후 초인종을 눌렀다. 꽃은 등 뒤에 감춰둔 채. 잠시 후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녀는 밤색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머리에 물기가 남아있는 걸로 보아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나보다.

안녕하세요.”

일찍 왔네? 어서와. 아침은 먹었어?”

그녀는 내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다가 잠시 움직임을 멈춘 다음 배시시 웃었다.

거기 등 뒤에 감춰둔 것의 정체를 소녀가 여쭤봐도 되렵니까?”

나는 어떻게 맞춰줄지 잠시 난감해하다 말했다.

그냥 좀, 어떠려나 해서 사봤어요. 이런 거 받아본 건 오랜만일까 해서.”

그리고 꽃을 내밀었다. 다행히 아직 시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시들면 현대 플라워리스트들의 체면이 울겠지만. 그녀는 가녀린 두 손으로 장미를 받아들곤 잠시 멈춰서서 꽃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곤 윗층 주방으로 후다닥 가버렸다. 물 소리가 났고 이윽고 장미 한 송이가 꽂힌 샴페인글라스를 들고 왔다.

이렇게 해도 오래 가진 못하겠지만 일 주일은 가겠지. 고마워. 조금 놀랐네. 다른 사람한테서 꽃이란 걸 받아본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 보답으로 아침 해줄게. 들어와서 앉아. 추워.”

나는 문을 닫아 잠그고 신발을 벗은 다음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거실에 있는 탁자에 샴페인글라스를 놓고선 주방으로 가 가스불을 켰다. 나는 윈드브레이커를 벗어 대충 접은 다음 옆에 놓고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틀었다.

 

노래 틀건데 티비 계속 볼거야?”

주방 쪽에서 그녀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뭔가를 굽고 있는 건지 크게 말하지 않았으면 소리가 묻힐 뻔 했다.

아뇨, 그다지 볼 것도 없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리모컨 버튼을 꾹 눌러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주방 쪽에서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접시 두 개를 들고서 내게 다가왔다.

 

에릭 클랩튼인가요?”

그녀는 탁자에 접시를 놓고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접시에는 계란과 베이컨, 햄 그리고 식빵이 있었다.

. 녀석,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네.”

, 왜요?”

당황해하는 날 보며 그녀는 크게 웃고는 주방으로 가 포크와 나이프 두 짝을 가져온 후 내 옆에 앉았다.

그냥, 취향이 잘 맞아서? 크로스로드 페스티벌 2013년 라이브야. 괜찮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옆에 딱 붙어선 칼질을 잠시 요리저리 하더니 탁자에 포크와 칼을 내려놓고 접시를 집어들었다. 소파 위에 발을 모아 앉더니 햄과 계란을 잘 끌어모은 빵을 한 손으로 집은 채 먹기 시작했다.

. 트랙 순서로 봐선 조만간 <티어즈 인 헤븐>이 나올 차례 같은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그녀를 따라 빵을 대각선으로 자른 다음 위에 계란과 햄을 끌어모은 후 집어들었다. 그러자 노른자가 터져 다리 사이 소파로 조금 떨어졌다.

.”

기술이 부족하네, 기술이. 칼로 옮기다가 노른자를 터트려서 그래.”

그녀는 팔을 뻗어 탁자에 놓여있던 물티슈를 열어 뽑아 건넸다.

, 떨어진 위치가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알아서 닦아.”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에요?”

나는 물티슈를 받아들곤 닦으며 웃었다.

하는 일이 일이니만큼 버릇이 들더라고. 신경 쓰지마. 혹시 불편해?”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주의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맛있네요.”

그녀가 해준 간단한 식사는 베이컨을 좋아하기도 하는지라 입맛에 딱 맞았다. 그러자 그녀가 웃었다.

혼자 산지가 십 년은 더 되니까 말야. 조금은 변덕에 맞춰줘. 미안해.”

변덕이었나요. 버릇이라면 맞춰줄 수 있는데.”

그녀가 주먹을 쥐곤 내 어깨를 장난스럽게 쳤다. 노른자가 또 흘렀고 물티슈 한 장을 더 뽑았다. 그렇게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아침식사를 마쳤다.

 

서재에서 나는 창가에 서서 커피를 마시고 그녀는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던 차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엔 하이얀 눈송이가 천천히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기지개를 펴곤 다른 눈송이들을 불러오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발은 점점 빽빽해져갔다. LP플레이어 위엔 켄트의 <Vapen & Ammuniton>이 조용히 돌고 있었다. 트랙 중간이리라. 이윽고 <Socker>가 나오기 시작했다. 노래 소리 말고는 이따금씩 내가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와 그녀가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있었다. 이윽고 그 적막의 틈바구니에 눈발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더해지자 그녀가 물어왔다.

우산, 가져왔어?”

아니요. 눈이 온다는 건 일기예보로 들었는데 이렇게 세게 내릴 줄은 몰랐네요.”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내게 다가와 머그잔을 받아들곤 계단을 올라가며 말했다.

오늘은 꼼짝없이 갇혔네. 여기 이래뵈도 산골이거든. 한 삼십 센치는 쌓일거야.”

안 그래도 챙겨 왔거든요. 다행히.”

나는 가만히 서서 땅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도 논도 이윽고 눈에 묻히고 길에는 표면 위로 머리를 빼꼼 내민 조팝나무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야, 그래도 이건 좀 심하네. 올해 첫 눈일텐데.”

그녀가 양손에 각각 머그잔을 잡은 채 돌아와 내게 한 쪽을 내밀었다. 나는 받아들고는 홀짝였고 그녀는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커피 좋아하나보네.”

그다지요. 그냥 커피가 맛있어서 자꾸 마시게 되네요.”

타이핑 소리가 멈췄다. 그녀가 의자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많이 마시면 밤에 지도 그린다?”

나이가 몇인데요.”

그래도 나한텐 왠지 아기처럼 보여.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그나저나 의외네. 두근거리게 하는 말도 할 줄 알고.”

스물 여덟인데 모태솔로인 줄 아셨나요.”

나는 살짝 토라진 채 커피를 계속 홀짝였다.

그건 아니지. 내가 걱정했던 건 한창일 나이에 나 같은 사람하고 시간을 보내도 괜찮나 해서 말야. 어느 날 아침에 누가 문을 두들겨서 나갔는데 젊은 여자가 서있고 다짜고짜 뺨을 맞고 싶지는 않거든.”

그럴 걱정은 안 하셔도 되요. 지금은 혼자니까.”

나는 눈길을 돌려 바깥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있는 재떨이를 끌어당기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 소리에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말했다.

담배 태우면서도 삼 년을 살았으니 걱정 마. 행여나 안 태웠으면 더 살 거란 말은 말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렇게 말해도 걱정되기는 마련이라 내가 물었다.

몇 미리 짜린데요.”

“1미리. ?”

“6미리면 뺏어서 바로 끄려고 했죠.”

에이, 나도 그렇게 대책 없는 여자는 아냐.”

그녀는 허공에 연기를 내뱉곤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선 다시 조금 토라진 채로 창밖을 바라보다 그만두고 소파에 마주앉았다.

? 갑자기 왜?”

창밖을 보는 건 질려서요.”

그래. 서서히 관둘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어. 여자한테는 관심 없고 눈이나 비같은 무생물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상성애자인가 의심하려던 때였어.”

나는 그녀의 농담에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자 그녀도 만족한 듯 웃었고.

그것도 그렇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

?”

아니에요.”

나는 단념한 채 그저 그녀가 담배 태우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고파져서 주머니를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더플백에 넣어놓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담배갑을 열어 내밀었다.

귀찮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한 개피 꺼내어 물었다. 그녀가 불을 당겨주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담배 태우는 광경을 소중히 봐두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잠시동안 소파에 앉아 연기를 마셨다 뱉었다 바라보았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계속 물어봐도 돼?”

담배를 문 채 눈썹을 으쓱하며 되묻자 그녀가 말했다.

아까 그거. 이별 이야기. 그냥 좀 참고가 되려나 싶어서.”

의외네요. 일 핑계를 대다니. 그냥 재밌어보여서 라고 하셔도 되는데.”

그녀가 내숭을 부리는 것 마냥 배시시 웃었다.

좋아요. 대신 LP판 좀 바꿔줘요. 스노우 패트롤 있어요?”

있다마다. 취향이 정말 잘 맞는다니까?”

“<업 투 나우> 2번 디스크 6번 트랙 좀 틀어줘요. 듣고 싶네요.”

오키도키.”

그녀는 켄트의 것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고 커버에 꽂고선 책장으로 가 시선으로 뒤적이더니 LP를 커버에서 꺼내 플레이어에 놓고 틀었다. 그리고 소파로 와 앉은 다음 담배갑을 내밀었다.

담배도 하필이면 맨솔이라니, 정말 취향 참 잘 맞는다니까요.”

그녀는 웃었고 나는 한 개피 꺼낸 다음 그녀가 대주는 불을 받아 한 모금 빤 다음 말했다.

그냥 오래 알고 지내던 후배였어요. 대학 복학하고 알게 되었는데 교양과목까지 해서 강의 네 개를 같이 듣고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그냥저냥 오고가다 강의 사이 비는 시간에 커피 한 잔씩 마시고, 강의를 같이 들으니 찾는 자료도 같아서 도서관에 같이 가서 자료 찾아보고 이따금씩 도와주고. 그러다보니까 애가 저한테 고백하더라고요. 그래서 사귀었죠.”

담배를 빨아들이는 중간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무릎을 모아앉고서 거기에 턱을 괸 채 듣고 있었다.

근데 한 이 년 반인가 지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왜 얘하고 사귀었지? 하는 생각 말이죠. 서로 좋아하는 것도 완전히 다르고. 응석만 부리고 기대어오기만 하고. 만날 때마다 저만 왠지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서 옷도 안 갈아입은 채 침대 위에 드러누워선 퍼진 채 천장만 보고 있고. 근데 웃긴 건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제 자신이 참 미운 거 있죠. 그렇게 생각이 되면 그냥 헤어지지 왜 붙잡고 있는지가. 아무라도 좋지만 완전히 좋은 건 아니면서 왜 사람 마음을 갖고 놀고 있는지가 밉더라고요. 그래서 진작 내렸어야 할 결단을 그때서야 내렸죠. 헤어진거예요.”

그렇게 말을 하고선 담배를 바라보니 벌써 절반이나 타 있었다. 회색 재가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었다. 재털이에 털고 난 후 천장을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고등학교 때였나, 정말로 좋아했던 여자애가 있었죠. 뭐 여느 이야기가 그렇듯이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던 찰나에 어딘가로 떠나고 없었고, 연줄도 없고 만날 방법도 없고. 그렇게 스물 다섯까지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간에 만났던 여자들은 마음은 가지 않았지만 그녀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하기에 그냥 사귀었었죠. 참 개자식 같은 마인드였죠. 만약 지금 그때의 저를 만날 수 있다 하면 당장에 보자마자 한 대 쳐도 될 만큼의 마인드. 하지만 그 후배는 달랐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도 그 아이를 조금이나마 좋아했거든요. 헤어지고 나니까 문자하고 전화가 계속 오고제가 뭘 잘못했나요 하는 이야기였죠. 잘못한 건 없어요. 아니 있다면 하나겠죠.”

잠시 쉬며 담배를 빨아들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한 게 잘못이다……그 말이야?”

.”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아, .”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이니까요.”

그녀는 여전히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조금 달랐다. 눈빛이 슬퍼보였다. 아픈 짐승을 바라보는 또 다른 짐승의 눈빛이었다. 아픈 곳을 샅샅이 훑어보는 조금은 부끄럽고 조금은 아픈 눈빛. 나랑 똑같다는 눈빛.

담배 피고 싶은 기분이네.”

그녀는 자세를 풀고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허리는 여전히 숙여 허벅지에 손을 괴어 턱을 올려놓은 채. 내 것은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천천히 타는 담배인 것 같다.

그래서 말야. 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이번 건 조금 각오해.”

뭔데요?”

그녀는 화두를 던져놓고선 조용히 담배를 세 모금이나 흩뿌렸다. 짧은 적막의 시간 동안에 트랙은 벌써 <다크 로만 와인>이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하면, 넌 어쩔거야?”

그녀의 말에 나 또한 담배를 다 탈 때까지 연거푸 피우곤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녀는 약간 긴장한 듯 그 시간 동안 입에 대지 않고 계속 재만 털고 있었다.

전 또, 뭐라고. 난 사실 외계인이야. 아니면 난 사실 뱀파이어인데 네 목 좀 씻고 오면 안될까? 하는 그런 건 줄 알았는데요.”

농담을 던졌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곤 말을 이었다.

글쎄요. 당장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제 마음 속으로부터 싫다 라는 말이 올라오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격렬하게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은은하게, 누나가 타준 커피처럼 은은하게 좋은 느낌이에요.”

그제서야 그녀는 담배를 한 모금 태우더니 내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거면 족해. 누나라는 말도 들었고. 하지만 말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나보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평소의 나처럼 계속 지내면서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 하지만 난 시간이 없어. 너도 알다시피.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걱정이 돼. 네가 나를 연민해서 좋아한다던가. 그런 느낌에 동정 받아도 좋은 마음이야. 그 정도로 시간이 없어. 그래서 되묻고 싶어.”

그녀는 마지막 모금을 태우고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뭐지? <업 투 나우>에 더 라이트닝 스트라이크가 있었나? 내 머릿속에서 언제부턴가 계속 그 노래가 울리고 있었다.

 

나를 동정하는 것도 좋아. 나를 연민하는 것도 좋아. 대놓고 말해서 불쌍히 여겨도 좋아. 그러니까, 한 번만. 좋아해줘.”

서로의 눈빛이 바뀌었다. 내 눈빛을 내가 스스로 볼 순 없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상처를 바라보는 쪽은 나일 것이다. 그녀의 눈빛에는 마치 안구 그 자체가 갈기갈기 찢긴 것 마냥 상처가 보였다. 깊은 상처였다. 흉터에는 구더기가 끓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약초를 찢어 발라야만 할 것처럼 깊고 곪아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았지만 눈치챈 걸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상처였다. 그녀는 내 눈을 깊이 바라보며 구조 요청을 보내고 있었다. 대답해야만 한다. . 불가不可.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옆으로 갔다. 그녀는 어느새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옆에 앉은 걸 알아채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눈망울 아래로 눈물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조팝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단풍이었다. 이파리를 다 떨어트리곤 서서히 말라가는 단풍나무였다. 안아보니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렇게 그녀를 안는 나를 끌어안았다. 가슴팍이 축축해져갔지만 뭐 괜찮았다. 따뜻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 품 안에서 나지막히 말했다.

, 신이란 걸 믿어보려고.”

왜요?”

아프고 나서부터 정말 싫어했던 사람이거든. 근데 말야, 네가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 건 그 사람 뜻이 아닌가 해서……그래서 믿어보려고.”

누나 곁에 나라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몇 초 만에 바람 필 궁리 하려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웃으며 검지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참내. 얼마만에 우는 건지. 커피 가져올게.”

그렇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고 나는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발은 여전히 빽빽했다. 누가 단체로 바구니에서 한 아름 집어들고서 바깥으로 냅다 뿌리는 것 마냥 흩날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그녀가 커피를 가지고 왔다.

좀 늦었네요. 또 거기 가서 운 거 아니에요?

아닌데. 아싸 좋아라 하면서 춤추고 난리치다 왔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내민 커피를 받았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 다가오며 말했다.

보통은 웃으면서라도 부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방금 농담?”

누나 성격이면 정말로 그럴 것 같아서요.”

그녀는 내 머리에 장난스럽게 딱밤을 먹이곤 잔을 내밀었다. 나는 잠깐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잔을 부딪혔다.

와인 있는데, 따올까?”

좀 이따가 점저 먹을 때요.”

점저가 뭐야?”

점심 겸 저녁.”

그녀는 웃으며 일어나 의자로 가 앉았다가 다시 돌아왔다. 일이 손에 안 잡힌다면서.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은 손에 잡히잖아요. 라고 말했고 그녀는 웃으며 손을 잡았다. 장미도 애인도 있겠다, 이따가 간만에 솜씨 발휘 좀 해야겠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기대 천장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물었다. 근데 왜 제가 철수면 누나는 영희여야지 바둑이에요?

 

그녀는 탁자에 머그잔을 내려놓고선 몸을 휙 돌려 소파에 무릎을 꿇은 채 내 쪽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봐봐.

뭘요?

꼬리 살랑거리는 거, 안 보여?

 

 

 

END

2016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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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취

작품/짧은 글 2015. 7. 26. 02:10

술에 취했던 날 밤이면 항상 밤하늘에 떠있는 별의 갯수가 평소보다 많아 보였다. 그리고 평소에 올려다 보던 그 밤하늘보다 가까웠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 몰려 날던 나방들도 집에 돌아가던 늦은 밤. 위아래로 요동치는 시야에 따라 올라오던 구역질. 가끔 목젖을 타고 넘어와 그 사람의 어깻죽지를 적셔도 멈추지도 묵언 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내게 곧 있을 도착을 알리던 등 너머의 목소리. 한 손으로 나를 지탱해주며 힘겹게 길고도 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들어설 때 그 문지방을 밟던 구두의 따각거리는 소리. 거의 반 송장이 된 채 과한 음주에 계속해서 헛구역을 해대는 나를 침대에 내동댕이 치도 않고 살며시 내려놓으며 그제서야 소맷자락으로 훔치는 이마의 땀방울. 숙면과 가위 그 사이를 외줄타듯 휘청이다 밤을 넘기고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코 끝을 간질이던 갓 뜯은 말린 북어 냄새. 목이 주려 눈에 뵈는 것 없이 물가로 달음박질 치는 영양처럼 식탁에 앉아 북엇국 한 모금 들이키고 나면 그제서야 뒤에 널브러져 있는 그가 덮어줬던 이불.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사람이 떠난 후 다시는 술에 취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맹세는 구긴 종잇장처럼 어딘가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휴지통에 정확히 스트라이크로 꽂혀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술에 취한 채 길거리를 휘청이며 걷고 있다. 집 주소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사람 곁에서 취했을 때 있었던 일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선명하게 쑤셔온다. 가슴에 박동이 뛸 때마다 혈관을 타고 기억이 날 선 유리 조각을 든 채 머릿 속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어 덮치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왔고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들은 여느 때보다 가까웠다. 그 사람과 나의 눈높이 차이 만큼 가까워졌다. 위장이 한번 더 역동했다. 토사물이 길가 배수구를 적셨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자 묻어나온 위액의 냄새와 입 안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함께 머릿속을 진동했다.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싶었다. 물 한 컵을 마시고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면 모두 다 씻겨 나갈 것 같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그와 동시에 집 주소가 기억이 났다. 힐을 벗어 양 손에 들고 스타킹 바람으로 걸었다. 나 자신은 모르겠지만 분명 비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도어락 버튼을 누르는 검지 끝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실수로 누르면 다시 눌러야 한다는 것이 그토록 신경 쓰인 적이 없었다. 면접날 스타킹에 구멍이 나고 시간도 근처에 편의점도 없는 상황과 비슷한 크기의 위기감에 신중하게 버튼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가며 간신히 문을 열었다.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자 마자 바로 구두를 현관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벽에 기대어 스타킹을 벗어 던지고 치마를 끌렀다. 블라우스 버튼을 끌러 벗고 바로 욕실로 향했다. 욕실 불을 키고서 블라우스가 구겨지진 않을까 뒤를 돌아보자 벗어 놓은 옷들이 보였다. 널브러져 마치 변태 직전에 위험을 감지하고 필사적으로 도망가며 성충이 된 매미의 허물처럼 보였다. 내일 세탁소 쉬는 날인 것 같은데. 손톱을 기르고 있던 것도 깜빡하고 논 갈아엎듯 뒤통수를 벅벅 긁적였다. 여드름을 건드렸다. 뒤통수는 아프고 머리는 깨질 것 같고 브라와 팬티는 벗겨지질 않았다. 될대로 되라. 입은 채로 샤워기 물을 틀었다. 물이 아니라 얼음장으로 몸을 씻는 것 같았다. 그 상태로 한참을 욕조 안에 쭈구려 앉은 채 물을 맞았다. 냉장고를 열어 국거리를 찾는 소리와 벗어놓은 옷가지를 치워줄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떠나가고. 곁에.

 

샴푸를 했는지. 린스를 했는지. 바디워시로 몸을 닦았는지. 클렌징으로 화장을 지웠는지. 양치는 했는지. 드라이로 머리를 말렸는지. 문은 제대로 잠겼는지. 옷은 구겨지지 않게 잘 치웠는지. 씻고 몸은 말렸는지. 안 말렸다면 감기 들지 않게 베란다 문은 닫았는지. 잠에서 깸과 동시에 수많은 의문이 기다렸다는 듯 발했다. 그 의문을 다 밀어 제끼고 내 몸은 그저 눈을 감은 채 반사적으로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았다. 북어 냄새는 나지 않았다. 가스렌지에는 엊그제 어머니가 보내주어 반 쯤 먹다 만 김치찌개가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눈을 떴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 쓰고 소리 없이 울었다. 베개를 집어 던졌다. 어디에 맞았는 지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잘못했던 모든 일들과 내가 고마웠던 모든 일들이 뒤섞여 엉망진창으로 이불자락을 적실 뿐이었다.

 

이별, 일 주일 하고도 네 시간 삼십이 분 후의 일이었다.

 

 

20150726 0205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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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

작품/소설 2015. 6. 30. 17:48

발자국은 저 멀리 폐허가 된 상가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발자국 하나와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 셋이었다.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살필 여유는 없었다. 양 옆으로 나있는 골목에서 놈들이 덮쳐올 수도 있었다. 허나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나는 발밑의 발자국 만을 보며 달려갔다. 방금 지나온 골목길에서 굶주린 듯한 쇳소리가 들렸다. 셋이었다. 권총집에서 총을 꺼내 슬라이드를 당겼다. 그 묵직함에 총탄은 제대로 쟁여 놓았음을 확인했고 안도했다. 그대로 몸을 뒤로 돌려 길바닥에 넘어지며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를 향해 세 발을 나눠 쏘았다. 시야에 들어온 놈들의 모습은 추악했다. 왼쪽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골이 드러난 녀석은 한 방에 그대로 머리가 날아가 생김새 때문에 놀림 받을 일이 없어졌다. 두 발은 각각 다 헤진 정장을 입고 있는 놈의 몸통과 책가방을 메고 있는 것의 다리에 꽂혔다. 책가방? 눈쌀이 절로 찌뿌려졌다. 아직도 어린 애들이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역겨워졌다. 그대로 뒤로 굴러 자세를 바로 잡고 정조준을 하여 왼쪽의 정장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짧은 시간에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와 있었던 녀석은 날아가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붙잡으려는 듯 뒤로 한참을 날았다. 책가방은 아직 따돌릴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발자국을 따라가며 달렸다. 총알을 아껴야 했다. 여차하면 구석에 잠시 멈춰 자신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미끄러져 오는 녀석의 머리를 붙잡고 쓰레기통에 박아버려도 된다. 급한 것은 발자국이다. 그녀다.


지켜주기로 약속했었다. 햇빛이 떠 있어도 하루 종일 흐리고 어두워보이는 이 세계의 한복판에서 놈들에게 둘러 싸여도 너만은 놓지 않고 내 품 안에서 지켜주리라고 맹세했었다. 그렇기에 손바닥에 흐르는 땀은 미끄러지지 않고 더더욱 굳세게 총을 감아왔고 주머니에서 짤그락거리는 총알의 갯수는 계속해서 소리로 내 머릿속에 울려왔다. 아홉 발 남았다. 한 발에 한 놈씩이면 스물 일곱.

발자국은 어느 빌딩 지하주차장으로 이어졌다. 층수를 가늠해보건데 아홉 개인 것 같았다. 주차장 안에는 불에 타올라 차마 재도 되지 못한 차량 몇 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을 멈췄다. 저 멀리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보이는 자동문 안 쪽으로 부숴져 명멸하고 있는 형광등이 보였다. 엘리베이터의 층 수 표시등은 꺼져 있었다. 계단으로 올라갔으리라. 나는 잠시 가까운 기둥 옆으로 숨어 뒤에 따라오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아까 전부터 따라오는 발소리에 섞여 둘이 늘었다. 땅바닥에 뭔가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았다. 불탄 차량에서 떨어져 나온 새까만 금속 덩어리가 있었다. 손에 쥐고 으스러트렸다. 으스러진 쇳덩이는 금이 간 채 내 손 안에 아까 전과 같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지하주차장 입구가 더 잘 보이는 기둥 쪽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책가방이 먼저 걸어 들어왔고 하반신에만 스커트를 입은 놈과 한 쪽 다리를 저는 놈이 따라 들어왔다. 나는 선두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책가방과 나머지 둘 사이의 땅바닥을 겨누고 쇳덩이를 던졌다. 그리고 주먹진 왼손을 뻗어 펼쳤다. 쇳덩이는 그대로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비산했다. 책가방은 뒤통수에 깊숙히 박힌 모양인지 앞으로 고꾸라졌고 스커트는 두 다리가 잘렸다. 절름발은 가장 큰 조각이 머리에 꿰뚫려 그대로 옆에 있는 기둥에 머리가 박힌 채 몸부림 쳤다. 이 정도면 되었다. 아직 힘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충분하였으면 좋으련만. 울부짖는 쇳소리를 뒤로 하고 달려나가 엘리베이터를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발자국은 옥상으로 이어졌다. 커다란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숨을 고르며 입 안에 총알 두 개를 던져 넣었다. 따라 올라오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조준간을 연발에 놓았다. 슬라이더는 아까 당겨 놓았다. 남은 총알은 탄창 안에 일곱. 입 안에 둘. 하나씩 양 어금니 사이에 물었다. 그녀를 지켜야 한다. 앞에 무엇이 있어도, 총알이 비바람치고 그들이 휘두르는 발톱이 천둥번개처럼 눈 앞을 스쳐 베어나가도 그녀는 내 품 안에. 신부가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오늘도 평안히. 오늘도 평안히. 나설 때는 뭔 개소리인가 했었지만 이만한 기도가 없었다. 사치도 아니고 검소하지도 않은, 적당히 바랄만 한 소원이었다. 내게 기도문 한 구절을 짊어준 샘이었다. 나는 그 기도문을 소중히 읊었다. 어금니에 문 총알 때문에 발음이 눌려 꼴사나웠다.

오늘도 평안히.
세 번쯤 읊조리고 마지막으로 말하며 문을 열었다. 녹이 슬었는지 바닥에 문이 슬키는 쇳소리가 크게 났다. 그리고 어금니 사이에 문 총알을 깨물고 탄창을 꺼내 안에 재웠다.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보였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을까. 저 멀리 난간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슈트를 입고서 허리를 피고 꼿꼿히 서있는 세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문 열리는 소리에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도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우는 것일까. 아니면 놀란 것일까. 절망과 포기 속에서 찾아온 나라는 존재에 고마운 것일까. 아니면 오지 말라고 눈빛으로 손사래를 치고 있는 것일까.


알지 못했다. 그저 총구를 그들을 향해 겨누었다.
왔나. 그렇게 소중한 년이었나.
그들은 셋이서 하나 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래. 니들이 털 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이 옥상에서 바로 지옥 밑바닥으로 하이패스를 뚫어줄 수도 있을 정도로 내게 소중한 사람이다.
비웃음 소리가 났다.
사람? 그깟 연약한 몸뚱아리 하나 이끌고 총 한 자루에 의지하는 나약한 존재가 뭐가 좋다는 말인지 모르겠는데. 더 나은 존재로 올라가게 이끌어 준대도 거절하는 건 성의를 무시하는 행동이 아닌가.
성의? 나는 웃으며 반문했다. 그리고 왼손으로 가슴께를 풀어 해쳤다. 옥상에는 바람 한 꺼풀 불지 않았다. 땀 한 방울이 이마 위를 구르는 것이 느껴졌다. 더웠다.

그럼 내가 친절히 니네가 뒈지는 걸 봐줄테니까 거절하지 마라. 이것도 성의니까.
손에 쥔 권총의 해머를 엄지로 내렸다. 왼쪽에 서있는 정장이 미소를 씩 지어보이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 앞에 서있는 나머지 둘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돌리지 않았다. 소리조차 없었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이마에서 구르던 땀방울이 코 끝에 맺혀 달랑거렸다.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뻥긋거렸다. 뭔가 말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뒤. 에. 요.

뒤다. 몸을 돌려 뒤를 보는 순간 정장의 발톱이 눈 앞에 와 있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숙이며 땅바닥에 총구를 향했다. 아까 부숴놓은 총알 한 발. 머리카락이 발톱에 걸려 우수수 뜯겨나갔다. 아프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총구에서 뿜어져 나와 땅바닥을 쳐 불꽃이 튀었다. 굳게 쥐었던 왼손을 놓았다. 이빨로 부숴놓아 조각조각이 나 있었던 총알은 그대로 흩어져 비산하였다.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그리고 총구를 들어 두 정장이 있는 쪽에 향한 후 곁눈질로 뒤의 녀석을 보았다. 크레모아가 정면에서 터진 것 마냥 몸에 바람구멍이 뚫린 채 푸드덕거렸다. 이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보고 머리에 하나 박힌 것을 확인하는 순간 오른쪽 정장이 뛰쳐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부수어 놓은 총알은 한 발. 맨 아래에 장전해두었다. 단발 일곱 발 남았다. 숙인 자세 그대로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녀석을 향해 정조준했다. 슬라이더가 뒤로 후퇴하며 해머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총 소리가 나기 무섭게 고개를 기형적으로 뒤로 젖혔다. 총알은 그대로 저 멀리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여섯. 재빨리 몸통을 겨누어 두 발을 쏘았다. 달려오며 도약하던 도중에 날아가는 총알이었다. 그렇기에 한 발은 맞으리라 생각하여 두 발을 당겼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그대로 공중에서 발레를 하는 것처럼 몸을 돌려 피하며 다가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녀석도 한 발은 맞을 거라고 각오한 것처럼 보였다. 그대로 권총을 거꾸로 쥐었다. 탄창 밑바닥에 박아둔 못이 튀어나왔다. 그대로 위로 올려 쳤다. 묵직한 끝맛이 났다. 녀석은 그대로 턱뼈가 날아가며 뒤로 고꾸라졌다. 가운데 정장이 움직였다. 제길. 그냥 두 발 다 위쪽에 쟁여놓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권총을 바로 잡고 한 손으로 녀석을 겨누어 두 발을 쏘았다. 다리에 한 발 맞았다. 빗나간 총탄이 그녀 옆의 난간을 때렸다. 그녀가 도탄에 맞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던 순간 아까 고꾸라졌던 오른쪽 정장의 발톱이 어깨를 스쳤다. 살이 한 움큼 뜯겨나갔다. 격통이 가슴까지 파고 들었다. 뼈까지 상한 것 같았다. 그대로 정조준을 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오른손으로 녀석의 목을 겨누고 세 발을 쏘았다. 두 번째 발톱을 치켜들 던 녀석의 눈동자가 커졌다. 녀석의 발톱이 내 왼다리에 박히는 순간 정장은 그대로 총알을 맞고 건물 바깥으로 떨어지며 울부짖었다. 쉴 틈이 없네, 제길. 코 끝에 맺힌 땀이 아까부터 자꾸 거슬렸다. 닦을 새가 없었다. 그제서야 또 한 번의 통증이 명치를 때리는 듯 다가왔다. 왼쪽 종아리의 살이 다 뜯겨나가고 뼈가 으스러져 있었다. 이 변두리에서 개방성 골절이라니, 틀렸구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대로 오른손을 한 바퀴 돌려 아까 달려오다 넘어졌던 마지막 놈이 있던 곳을 향해 겨눴다. 없었다.

그녀가 주변에 서있는 놈이 없어지자 그제서야 소리쳤다.

위에 조심해요!
그 말에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이 높이 도약하여 그대로 깔아 뭉개려는 듯 양 무릎을 굽힌 채 낙하하고 있었다. 단발 한 발. 손을 위로 올려 그대로 쏘았다. 몸통 아랫부분에서 어깨 윗부분으로 총알의 궤적이 보였다. 하지만 녀석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리가 으스러져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 눈을 가리는 거냐. 적어도 내 마지막은 제대로 봐주길 바랬는데. 욕심이었는 갑다. 마지막 총알은 아까 부숴놓은 것이었다. 공중을 향해 쏘면 위력이 약해서 제대로 될 수 있을지는 몰랐다. 코 끝에 맺힌 땀이 그제서야 떨어졌다.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면 녀석과 부딪혀 으스러진 살덩이가 되리라.

손잡이 아래의 못을 꺼내 굽히고 있던 오른다리 허벅지를 찔러 후볐다. 뼈가 드러났다. 이를 꽉 물었다. 송곳니가 부러진 것 같았다. 그대로 총구를 뼈에 들이대고 발사했다. 정신을 거의 잃을 뻔 했다. 간신히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왼손을 힘들게 폈다. 탄 조각이 그대로 비산하며 하늘을 향했다. 떨어져오는 녀석을 향해 울부짖었다. 대공포다, 개자식아! 전쟁 이후로는 본 적이 없을 거다! 당해봐라!



거기서부터 기억나는 것이 없다.
눈을 떴다.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몸뚱아리는 관짝, 아니. 묻을 새가 어딨어. 옥상에 있고 이건 꿈이 아닌가. 천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일어났어요…?
지켜낸 건가. 나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애써 일으키며 웃었다. 그녀는 내 가슴께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아까 깨물었던 총알에서 새어나온 화약의 맛이 입 안에 번졌다. 씁쓸하고도 피비린내가 났다. 이빨이 거의 다 부러진 채 웃어보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걱정되는 것이라곤 그것 뿐이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곳에는 다치고 쓰러져도 날 데려와줄 신부도 없는데.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만이 들었다.

올라가지 않는 손을 들어 권총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발소리가 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직선으로 가지 말고 골목 입구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놈들이 쫓아오다가 벽에 박으면 다시 달려라. 이 버튼, 보이냐. 누르면 손잡이에서 못이 나온다. 여의치 않으면 휘두르고 내빼라. 총알은 우리 숙소, 침낭 밑에 조금 있다.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가라고요…. 저보고. 저 혼자 놔두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서히 눈이 감겨왔다. 어떻게든지 입을 움직여야 하는데. 마지막 말로 고작 이런 말을 남기기에는 뭐하지 않냐.
그러…게…말이다. 미안하…다. 지켜줘야 하는….



병신아. 생각해서 내뱉은 말이 고작 이거냐. 하늘 참 지랄맞게 흐리네. 비 올라는 갑다. 신부. 가요. 마지막으로 느껴지는 감각이라곤 따뜻하게 젖어있는 가슴팍 뿐이었다. 더워, 이 년아. 좀…떨어져.






End
20150630 1630-1735
Evangelion 3.0 OST - Gods Gift
https://www.youtube.com/watch?v=gGuMeMsR6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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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나비 춤을 추며 上

작품/소설 2015. 5. 14. 18:30

꿈결처럼 지나간 사람들이 있다. 같이 있을 때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그들과 함께 누리는 시간이 값지고 아름답고 즐거웠으나 눈꺼풀을 들어올리고서 기억을 더듬어보면 멀리 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 떠올라 손끝으로 더듬어 찾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인연이 있다. 많다. 그 옛날 같이 피아노 의자 옆에 앉아 아무런 음율 없이 이리저리 건반을 서로 두들기며 웃고 떠들던 여자가 있었고 들판이라면 어디든 가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보온병에 타온 커피를 함께 따라 마시며 불어오는 바람을 서로의 얼굴 사이에 두고 웃기만 하며 행복해하던 여자가 있었다. 웃고 떠들며 무슨 주제던 간에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던 녀석도 있었고 함께 드라이브를 떠나 벚꽃을 보며 말 없이 손을 잡고서 손에 고이는 땀을 부비던 정말 사랑스럽던 그녀가 있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 내 손에 딱 들어맞던 그 가녀린 손을 안고서 저 아래 땅 밑에서 한 평도 안되는 땅만을 부여받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다. 고요히 잠들어 있으리라. 그랬으면 좋겠다.

 

수많은 이별을 지나고 인연이 끝날 즈음 온종일 미동도 않는 휴대전화 액정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더 이상 인연을 찾기 위해 연연하지 않으리라. 오는 인연 오게 하고 가는 인연 여태껏 꿈결처럼 그래왔듯 보내리라. 그렇게 결심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그녀의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활짝 웃는 미소가 화면 안에 한가득이었다. 울적해지지도 않았고 보면서 미소가 지어지지도 않았다. 이런 시기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인연은 떠나가면서 머무르는 사람을 늙게 만든다. 나는 내 나이에 비하면 너무 늙은 것이리라. 울고 싶었지만 내 안에 그들이 남기고 떠난 그들이 원래 살아갔어야 할 시간들은 나를 울게 놔두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제각각의 시간이 초침을 똑딱이며 내 안에 죽은 채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 똑딱임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이제는 거슬렸다. 잊기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 이차선 도로를 건너 계단을 내려가 하천변의 산책로를 걸었다. 하염없이 걸었다. 다리 하나를 지나고 이전보다 조금 더 멀찍이 떨어져 놓인 다리 하나를 또 건넜다.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하천변의 모양을 조금 바꿔놓은 탓인지 이전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경했고 그 생경함에 분노했다. 다시금 꿈결처럼, 억새가 너울거리는 이 천변에서 있었던 추억들이 내 안에서 똑딱였다. 더 멀리 갔다. 중인리 쪽으로 향했다. 조팝나무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마치 자라나다 멈추어 그 왜소함에 만족한 듯 고요히 늘어서있는 조팝나무들이 늙은 퇴역군인처럼 느껴졌다. 조팝나무 산책길 왼쪽으로는 이름 모를 나무가 오름 위에서 군락을 이루어 오름을 뒤덮은 모습이 보였다. 삼림풍이 불어왔다. 삼림풍의 끝자락에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삼층집이 보였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창고에는 태양열 발전판이 지붕을 덮고 있었다.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서있는 외딴 그 집의 고고함이 왠지 모를 이끌림으로 조금씩 나를 끌어당겼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활짝 피다 못해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잠겨갔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제시 쿡의 플라멩코 기타 소리가 울렸다. 조팝나무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너풀거리고 싶음에도 크기의 작음에 슬퍼하며 조금씩 펄럭였다. 그래도 그들은 만족하는 것처럼 흥겹게 너울거렸다. 산책로는 길었고 그 긴 산책로를 걷는 동안에 그 집은 항상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 집의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한 여자가 보였다.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머그잔에 포트에 담긴 물을 따라 다시 소파로 가던 도중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렇게 한동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왠지 모르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조금 되기에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계속해서 나는 왠지 모를 이끌림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를 만났을 때와 같은 이끌림이었다. 빛깔도 강도도 비슷했다. 어찌 흘러가던 간에 인연을 지어야 한다고 운명지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이끌림이었다. 부여받은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강한 이끌림이었다. 창밖으로 나를 내다보고 있는 그녀는 머그잔을 내려놓곤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발걸음을 돌려 그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쪽으로 향하는 날 본 것인지 머그잔을 들고서 소파로 향했다.

 

초인종을 눌렀다. 으레 이 근처에 별장을 지어둔 사람들은 마당에 개를 묶어놓는데 이 집은 그렇지 않았다. 고요했다. 불어오는 바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슬리퍼를 신은 발소리가 점점 현관문으로 가까워져왔다. 그리고 그녀는 현관문 렌즈로 바깥을 내다보더니 나를 발견한 듯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 돌아가는 소리조차 조용했다. 문이 열리고 나온 여성은 키가 조금 큰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생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고 얼굴은 조금 수척하지만 기품이 느껴졌다. 생기와 기품을 맞바꾼 것처럼 보였다. 하늘색 티셔츠와 베이지색 긴 바지를 입고서 문을 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잠시 머뭇거렸고 그녀는 살짝 웃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녀가 금방이라도 바람에 실려 날아갈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바깥에서 산책하다가 봤는데 이 집 디자인이 되게 멋져서요. 사진이라도 찍을까 해서 허락 맡고 싶어서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그녀는 내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사진 찍으신다는 분들은 대부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니시던데 그 쪽은 아니시네요?”

아차 하고 카메라를 들고 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야 나중에 가져와서 찍어도 되죠. 해도 졌고 해서. 노을진 풍경을 찍고 싶어서요.”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고 그녀는 여전히 문고리를 잡은 채 웃고 있었다.

“여긴 밤풍경도 멋있어요. 손님을 밖에 세워두긴 뭐하니 들어오셔요.”

그녀는 문고리를 놓고서 안으로 들어가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놓았다. 나는 문이 닫히기 전에 팔로 살짝 연 후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발냄새가 나진 않을까 조금 신경이 쓰였다. 집 안은 엊그제 벽지를 바른 듯 정갈했고 은은한 커피향이 났다. 아까 머그잔에 따른 물은 커피 끓인 것이리라. 그제서야 내 옷차림이 어떻게 보일지가 신경쓰이기 시작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금 와서 다시 옷을 갈아입는 것은 불가능하고 갈아입을 옷도 없기 때문이었다. 일층에는 책장에 온갖 책이 가득했다. 우측에 원래 거실 용도로 디자인된 공간에는 사방에 책장이 놓여 있었고 현관문 바로 맞은 편에는 나선형으로 계단이 보였다. 그녀는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살짝 바라보곤 그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일층과 이층 사이엔 천장이 뚫려 있었다. 이층에서 일층 서재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소파와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이 보였고 그 뒤 창가 쪽으로 주방이 보였다. 그녀는 어깨를 반대쪽 손으로 긁더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누추한 곳이에요. 저 혼자 살고 있고요. 커피, 드실래요?”

냄새로 보건데 원두커피였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분 혼자 사는 집에 낯선 남자를 들일 때 의심하는 것이 보통 아닌가요?”

그녀는 그 말이 상당히 즐겁게 들렸던 듯 여태껏 지었던 미소보다 더 크게 웃고선 말했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당신은 의심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자, 앉으셔요.”

나는 그 말을 듣고서 거울이 어딨는지 물어보려는 마음을 꾹 참았다. 내 눈빛이 어떻게 보이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던 것이 갑자기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가 권한대로 소파에 앉았다. 딱딱하지도 푹신하지도 않은 적당한 소파였다. 그녀는 그녀의 것과 똑같이 생긴 빨간 머그잔을 들고 와 내게 건넸다. 커피잔을 양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졌다. 그녀는 내 옆에 너무 멀찍이는 아닌 거리를 두고 앉아 말했다.

 

“여기에 사람이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선뜻 들인걸지도 모르겠구요. 더욱이 아까 창밖에서 왠지 모르게 이쪽을 계속 쳐다보시길래.”

나는 그 말에 커피를 조금 뿜을 뻔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무척이나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미소였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라던가 뭐 옛날 중세시대에 귀족들이 작업 걸 때 하던 멘트가 나오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문을 열었거든요. 근데 그런 건 아니라서 다행이기도 하고, 오히려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여자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거,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커피를 홀짝이며 시선만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가재도구는 별로 없어보였다. 그제서야 혼자 사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그 사람만의 온기를 집안에 드리우는 편이 많은데 이 집에는 온기가 그득했기 때문이다. 가녀린 몸 안에 품은 소소한 온기가 이 집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다.

“꽤나 오랫동안 혼자 지내셨던 것 같아요.”

그녀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되게 외로웠기도 하고 유유자적함을 즐기기도 하고 뭐 그렇죠. 거의 다 죽어가는 여자를 누가 만나러 오겠어요?”

그녀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 마냥 흐르듯 흘러간 그 말에 나는 머그잔을 조금 세게 잡았다.

“네?”

나는 반문했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암이에요. 암 중에서 그나마 조금 점잖은 암이라고 해두죠. 후후.”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우스웠던 듯 살짝 실소를 내뱉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모든 연을 끊고 하던 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고 여기에 집을 짓고 살고 있어요. 뭐, 그런거죠.”

그녀의 말에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유감입니다 라는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막 찾아온 이방인이기 때문이었고 나는 그런 나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녀는 무언가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 말을 끊었다. 나는 억지로 말을 이었다.

“일이라면 어떤 일이죠?”

자기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지 그녀는 웃으며 머그잔을 내려놓고 일어서 따라오라고 말했다. 나 또한 소파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텔레비전 왼쪽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작업실로 보였다. 컴퓨터가 있었고, 책장이 양쪽에 있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마주보는 쪽에는 바깥으로 나있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고선 방향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소소하게 글을 쓰는 일이에요. 작가죠 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어떤 글인지 물어봐도…….”

“알고 나서도 굳이 찾아볼 마음은 들지 않을건데요?”

나는 그 말에 잠깐 당황했고 그녀는 또 다시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성인 소설이니까요. 여성들을 위한. 웃기죠? 세상으로부터 연을 끊고 혼자 칩거해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여자가 쓰는 소설이 성인 소설이라니.”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괜찮다는 미소를 띄우곤 말을 이었다.

“뭐, 그런거예요. 그렇게 살고 있는데, 오늘 마침 되게 흥미로운 사람. 당신이 이렇게 찾아온거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전 그런 거 좋아하니까.”

그녀는 자신이 할 말에 대해 각오하라는 듯 잠시 숨을 고르곤 말했다.

“친구가 되어주시겠어요? 얼마 남지 않은 삶, 친구 하나는 가진 채 보내고 싶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일어나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생머리가 휘날리며 샴푸 냄새가 날아왔다. 모든 순간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지금 불어오고 있는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휘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조팝나무가 생각났다. 메타세쿼이어같은 느낌도 났지만 조팝나무였다.

 

“그러죠. 기꺼이. 스물 여덟. 이시헌이라고 해요.”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서른 넷 먹은 이혜인이라고 하는 늙은 여자에요. 가슴도 작고 볼품 없고 죽어가는 성인 소설 작가.”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소리나게 웃더니 몸을 돌려 내 쪽으로 걸어와 내게 안겼다. 그 어떤 육체적 목적도 없었다. 그저 안겼다. 나는 조용히 그런 그녀에게 기댈 곳이 잠시 되어주었다. 꿈결 같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끌려서 찾아온 곳에는 매력적이지만 죽어가는 한 여자가 있었고 그런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죽기 전까지 그녀를 찾아와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주며 친구가 되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역할이라고 하니 뭔가 억지로 한 것 같이 들린다. 기꺼이 맡은 것이다.

 

그 날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그녀의 이야기였다. 스물이 되었을 즈음 불문과에서 만나 처음으로 사귄 연인은 군대에 가서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프랑수아즈 사강을 읽기 시작했고 자판을 두들기며 글을 썼다고 한다.

“야한 것을 야하게 보이지 않게 하면서도 야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내 글의 궁극적인 목표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내게 그녀의 글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 이야기로 돌아와서, 대학을 그저 무난히 졸업하고 이런저런 번역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쓰러졌고 검진을 받아보니 암이었다고 한다. 그 때 그녀의 나이 스물 아홉. 나는 그녀에게 왜 입원해서 치료를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든 채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족할 수가 없어서. 암을 고치고 더 오래 산다고 해도 내가 살아가면서 만족할 수 있는 삶일까 싶어서야. 그리고 내게 주어질 그 기회. 삶을 더 이어나갔을 때 내가 더 알차고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고. 그래서 그냥 그 기회는 누군가에게 주기로 했어. 하늘이 내게 기회를 준 것은 곧 누군가가 그 기회를 잃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나는 나지막히 이렇게 말한거지. ‘신이시여, 제게 그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리고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저는 합당치 않사옵니다. 그러니 그 기회를 저보다 더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으나 멈춰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저보다 더 어리고 더 사람된 사람에게 주시옵소서.’ 하고 송장을 떼지 않은 채 바로 반송을 한거지. 딱.”

 

그녀는 말 끝에 손가락을 튕겼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밤이 늦어 돌아갔다. 방을 하나 비울테니 자고 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다음에 와서 그러기로 했다. 갈아입을 옷이며 칫솔 치약이며 안 가져왔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실례하고 싶진 않았다. 연인 사이라면 괜찮은 일들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돌아갔다. 그녀는 내게 조팝나무 산책길에서 자기네 집으로 걸어올 때 사인을 주라고 말하고 잠시 그 사인의 내용에 대해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서 놀아라.

학교 가는 뒷동산에

해는 아직 쨍쨍한데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서 놀아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놀아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서 나와 놀자.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약간 벙 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는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왜, 좋잖아. 딱 맞네. 내가 바둑이고 네가 철수니까.”

왜 그녀가 바둑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렇게 그녀는 바둑이가 되었다.

 

2015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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