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葬

작품/소설 2013. 11. 23. 04:03

어느 날이었다. 펜을 받치는 오른 손 중지 언저리에 물집이 잡혀 펜을 잡을 때마다 찌릿거려 거슬리던 터였다. 항상 내게는 그랬듯, 사소한데서부터 평상시 밀려있던 안좋은 일들이 몰려오려는 듯 싶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펜을 멈추고 손을 내밀어 수화기를 들었다. 혹시나였고, 역시나였다. 닿지도 않았는데도 중지 아래 물집이 짓눌린 듯 아렸다.

 

오랜만에 본 녀석은 옛날과 변한 게 없었다. 이상했다. 응당 변했어야 마땅할 시간을 사이에 두고 만난 것일 진데 그렇지가 않았다. 문득 콧구멍으로 냄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육개장의 고춧기름 냄새. 온갖 떡의 고물이 너풀거리는 마냥 살며시 흩어져 섞인, 편육의 기름내와 새우젓의 비릿한 냄새.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신발을 벗은 내 두 발이 딛고 서있는 자리를 내려다봤다. 공산품이었지만, 지푸라기로 엮인 자리였다. 마지막으로, 저 멀리 처져 숨을 헐떡이는 후발주자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향내가 목마른 칼칼함을 치겨들고 콧속부터 내게 스미어왔다.

 

이미 염을 했었다고 한다. 나는 문득 그렇지 않음을 알지만, 경황이 없어 인편이 늦었음을 알지만 내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 너는 이 녀석이 염되고 나서 불릴 정도로 먼 사람이었는가?

 

이상하게도, 딱 떨어지는 부정이 뒤이어지진 않았다.

 

자리에 앉아 잠시 단을 바라봤다. 식장에 와서 몇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녀석에게 향을 지피지 않았다. 그저 서 있다가, 부조금을 넣은 봉투를 건네고, 짧은 말로 이름과 연락처를 말하고, 그제서야 아무 자리에나 앉아 옆에 있는 주방 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다들 바쁜 모양이지만, 기분 묘하게도 그 누구도, 어떤 아줌마도 내 앞에 편육 한 접시 놓고 가질 않았다.

 

문상객이 그리 많진 않았다. 반의반쯤 차있었다. 오후 여섯시 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드러내어 슬퍼하는 사람도 없는, 중간경계의 시간이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미소 지었다. 어째서인지 무르팍을 움켜잡은 손을 힘주었는지 모른다. 그제서야 한 상 차려져 왔고, 나는 묵묵히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접시의 랩을 뜯고 소주를 까 잔에 따랐다. 그리곤 마음속으로 말했다. 잔을 치켜들고서, 그 녀석을 향하고는.

 

건배. 네 안타까운 죽음에. 네가 뺏어간 그녀의 숨결에 애도의. 지금에 와서야 아무런 감정으로도 정리되지 않은 너의 면상을 목도하게 된 가련한 나에게. 그리고, 내가 네게 주먹을 휘둘러도 닿을 수 없음에 너의 행운에. 건배.

 

으레 그렇듯 피부 바깥이 쓸수록 넘어가는 술은 달았다. 미쳐버릴 것 같이 달았다.

 

탁.
편육 위에 새우젓과 김치 쪼가리를 올려 집으려던 찰나, 내 앞에 소줏잔이 상에 부딪는 소리가 났다. 검게 물들이인, 소매가 넓은 상복을 입은 한 여자였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목소리는 깊은 목마름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잘 여며졌던 듯, 살짝 느슨해진 매듭이 눈길을 끌었다. 거칠은, 옛것의 상복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핀을 꽂아 드러난 왼쪽 귀맡을 대충 쓸어 넘기곤 오른손에 잡고 있던 잔을 내밀었다. 나는 대충 두 손으로 따랐고, 그녀는 잔이 반 쯤 차오를 때까지 어디론가 보내놓은 넋을 부르지 않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넋이 돌아온 듯 상 아래에 내렸던 팔을 들어 두 손으로 받고는 내 눈치를 살짝 보았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줌마를 불러 육개장과 밥을 달라 했다. 그녀는, 괜찮다는 것인지 자기가 움직이겠다는 것인지 모를 손사래를 치다 단념했다. 김이 피어오르는 국물이 놓였고, 그녀는 잠시 속으로 숨을 삼킨 듯 멈칫하곤 잔을 들어 내게 살짝 내밀더니 그대로 들이키곤 국그릇을 들어 마셨다. 나는 재빨리 잔을 들어 맞배하곤 그녀를 바라보며 잔을 비웠다. 목구멍에 국물 넘어가는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 듯 했다.

 

쓰네요. 다른 의미라곤 없는, 적확한 말이었다. 그녀는 내 있지도 않은 시선이라곤 개의치 않고 밥을 퍼 국에 말곤 먹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자작하다가, 그녀 앞의 김치 그릇에 기름이 적은 수육 한 조각을 집어놓았다. 그녀는 숟가락에 밥을 뜬 채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놓곤 잔을 내밀었다. 나는 밑바닥까지 따라 간신히 찰랑였고, 그녀는 그 수육으로 그 잔을 비웠다.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한산했다.

 

친구인가요?
네. 그쪽은, 들었던 적이 있는데. 여동생 분이신지.
그녀는 귀맡을 쓸어 넘기곤 잠시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옆으로 쓸었다. 꽤나 예쁜 이마를 갖고 있었다.
네. 뭐, 오빠가 제 얘기를 다 하다니 뜻밖인걸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상 배다른 여동생이나 다름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나도 그 녀석이 왜 그랬는지는 이해가 가질 않아서였다. 자기가 받은 핏줄인 아버지조차 얘기를 꺼리는 놈이었으니.

 

여튼,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시잖아요? 저희 오빠란 사람은 뭐든지. 적지도 많지도 않은걸.
문상객조차도요. 라고 덧붙이진 않았다. 뭐,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가족인 여동생의 입에서, 그것도 상중에 나올 정도로 딱히 켕기는 점 없이 완벽하게도. 나는 그저 소주를 한 병 더 비틀어 열었다. 넌지시 눈빛으로 물어봤고,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손을 어깨 맡으로 올려 엄지로 등 뒤의 단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작했다.

 

아, 그리고 내일부턴 낮춰서 줘요. 두 손으로 받는 게 귀찮기도 하고.
내일? 나는 씹고 있던 인절미를 마저 씹어 삼키곤 물었다.
내일도 굳이 와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싫음 말고요. 오지 않을 이유도 있진 않잖아요?
잠시 머릿속으로 스케쥴을 떠올렸다. 그녀 말 대로였다. 하지만, 오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영정 사진을 볼 때마다, 그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어른거렸다. 둘이서 카메라에 꽤나 가깝게 찍힌 스티커 사진. 아무런 감흥 없이, 오랫동안 메말라 사이사이에 나락을 품은 듯 갈라진 논밭을 보는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슬픔도, 분노도, 허망함도 아니었다. 구역질이 났다. 밖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역겨워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숨이 붙어있을 때에 절대 보지도 만나지도 않겠다는 그 씹어뱉었던 다짐을 기한연장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잠시 나와 내 시선의 끝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팔을 올려 턱을 괴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라도 우광쾅 내려줬으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속을 폭풍우가 몰아치며 온갖 것을 휘젓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해당될지 몰랐다. 비록 그다지 슬프지 않은 혈육의 죽음일 것 같지만.

 

담배좀 피고 오겠다 하곤 구두를 신었다. 한쪽만 열린 창가엔 물에 꽁초가 담긴 종이컵이 놓여있었다. 그 앞에 서서 우중충하게 물들어 곧 뉘울, 햇빛인지 달빛인지 모를 빛을 받으며 불을 붙였다. 스몄다. 비웠다. 채웠다.

 

털었다…….

 

한 번, 깊게 타들었다. 그녀는 그 녀석과 삼 년을 사귀었다. 그녀는 스물넷이었고, 그는 다섯이었다. 한 살 차이는 곧 동갑이었다. 사귀기 한 달 전, 그녀가 갓 입학했을 때, 나와 그녀를 아는 사람은 우리가 진작부터 사귀는 줄 알았었고, 나는 그 추측을 진짜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정이 있어 가지 못한 MT 첫날, 밤 열두시에 걸려온 전화에서 그녀의 술 취한 목소리와 마지막, 그 녀석의 걱정마라는 말을 듣고 전화기를 벽에 던지지도 않고, 그저 무릎이 으스러지라고 꽉 쥐었을 뿐임에 화가 났다. 아마도, 아니, 확실히. 그녀의 처녀막은 그 새끼에게 찢겼다. 그리고서부터 나는 그 녀석을 멀리했다. 단 두 가지 생각에서부터였다. 반절이 탔다. 컵에 버리곤 하나 꺼냈다. 그 녀석의 면상을 보고 있자면 그 날, 취해있었을 그녀의 이빨 사이로 수작을 부렸을 그 새끼의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 그녀는 그 새끼와 사귀게 된 건지, 어떻게 그 자식을 좋아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머리가 아팠다. 내가 그를 멀리하려했음에도 그는 내가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여서인지 자꾸만 가까워지려 했다. 깊게 한 숨 빨았다. 찬 것 같지도 않았다. 밤은 점점 선명해져가 파고들었다.

 

……이윽고 나는 바깥에서마냥 불을 밟아 껐다. 보는 사람은 없었다. 대소에 관계없이, 무엇인가의 조재를 부수지 않고선 생각이 멈출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 존재는 참으로 소박하게도, 관짝 안에 누워있는, 배때지가 휑댕그레 비어있는 녀석의 골통이나 다른 것이 아닌. 피다 만 담배꽁초 하나였다…….

 

사실 그렇게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당연히 자기 것일 줄 알았던 것을 뺏긴 아이는 처음엔 울다가, 지쳐 잠들고, 이윽고 그 당연함이 새 주인에게 옮겨갔겠거니 하곤 수긍한다. 하려 한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수긍하게 된 자신을 보게 된다. 구두를 벗었다. 그녀는 안즉 앉아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그녀 앞에 가 앉았다. 그녀는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기분 좋게 알딸딸한 마냥 몸이 앞뒤로 일렁이고 있었다. 졸고 있는 성 싶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깨워 들어가 자게 할지, 아니면 깨지 않도록 일어나 내일 다시 올지를 고민했다. 잠시뿐이었고, 나는 그녀의 빈 잔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라낸 다음 일어났다. 신발장으로 가면서, 단을 힐끗 바라보았다. 영정 사진은 무덤덤했다. 나는 장례식의 최후의 최후까지 향을 올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 날 집에 가서 했던 일 중에 기억나는 것이라곤 반 쯤 마시다 변기에 부어버린 맥주와, 뉴스 기사의 토막난 부분부분과, 시리도록 멀리 느껴진 천장 뿐이었다.

 

 

 

다음 날, 느지막히 점심을 먹고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끌며 갔다. 끊임없이 되물었다. 왜 다시 가고 있는 거지? 어떤 이유에서?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내려오고 있는 그것을 기다릴 때, 이유를 찾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무 이유 없는 게 이유였다. 나는 씁쓸함을 다시며 3층을 눌렀다. 문이 닫혔다. 거울은 무한히 연속해있었다. 그 끝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이에도 무엇이 있을런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녀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상 앞에 앉아 작은 조각으로 잘리어 나온 오렌지를 한 손으로 집어 입에 넣으며 발라먹고 있었다. 단 왼쪽, 문이 열리며 약간 붕 뜬 머리를 한 그녀가 걸어 나왔다. 하품을 자그맣게 하더니, 버릇인 듯 귀맡을 쓸어넘기곤 아직 졸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내 쪽을 보고도 계속 시선을 돌리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혹은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궁금해졌던 찰나, 그녀가 내 앞에 천천히 다가와 앉았다. 잠시 멀뚱멀뚱 내 뒤 어딘가를 바라보다, 두 번째 하품을 하곤 말했다.

 

머리 많이 떴어요?
나는 잠시 대답들을 쏟아냈다.
상중인 여자는 항상 붕 뜬 머리를 하고 있어야 예의일 것 같은 정도로만.
뭐예요, 그게.
그녀는 피식 웃더니 묶지 않은 뒷머리를 양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리곤 잠시 나를 바라봤다.
몇 살이게요.
글쎄. 술 마신 다음날 늦게 일어나 세수를 했을 때 그렇게 물어보긴 했어. 스스로한테.

한두 살은 더 먹어 보이는데요, 어제보다.
떡국 곱하기 이는 소주 한 병. Q.E.D. 고마워, 조수.
뭘요, 박사님.
내가 농담하는 내색조차 않자 그녀는 오히려 자그맣지만 깊게 웃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턱을 괴곤 내게 되물었다.

 

정말로 몇 살이게요?
어찌 대답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는 척 했다가 대답했다.
스물 하나. 일부러 틀려보았다.
영계 좋아하시는구나?
이번엔 정말로 난감해져 내 표정이 어떤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잠시 웃더니 말했다.

아무 이유도 없는데 왔으니 수고비를 드릴게요.
무슨 이유에서?
그녀는 맨손으로 인절미 하나를 집어먹곤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무 이유 없어요.
노란 떡고물이 입술 근처에서 반들거렸다.

 

흐름은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부자연스러움과 당연함 사이에 연관성을 찾기란 힘들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당연함은 확고히 다가오려 했다. 당면한 당연함의 무게에 섬짓 발뺌할 새도 없이, 아니, 오히려 내가 당연함을 밀치며 벗기고 만지고 주물렀다. 그러면서 그가 죽은 이틀 후 그의 여동생을 안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답은 없었다. 서로 왠지 몰랐다. 만난 지 하루만에, 무슨 당위성이 내포되어 있어 몸을 섞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만큼이나 새하얘서 아무 것도 건져 올릴 것이 없었다. 그 무가치함을 우리는 서로의 몸에서 찾으려는 듯, 혹은 보상받으려는 듯 서로를 가졌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반반이 되었다. 누런 시트 위로 땀방울이 굴렀다. 만난 지 하루만에, 나는 녀석의 여동생의 처녀막을 찢었다.

 

모르겠다. 그녀를 안고 있는 지금 마음은 오히려 차분히 지금과 먼 어떠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느낄 수 있었다. 몸과는. 열기와는 거리가 먼 것을 몸으로 읽어낸다는 게 퍽 우스워 웃었다. 그녀가 움찔해왔다.

 

그녀를 안으며. 그녀가 타고 있었던 에스엠 파이브가 생각났다. 반파되어 있었다. 휀다부터 뒷좌석 도어까지. 프레임이 으스러져 있었다. 다이아몬드 크러쉬였다.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그녀의 죽음과 그의 생존의 흔적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속으로 내가 아는 식은 지식만을 되뇌일 뿐이었던 나 자신이 기억났다. 으스러진 뼈. 얼굴. 기름이 섞인 핏방울. 상처라도 없이 살아있었다면 차라리 신을 원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았다. 허벅지 아래로 아작난 그의 왼쪽 다리와 으깨진 왼손의 깁스를 뜯어 발겨버리고 싶은 마음을 씻어 흘리고 나는 병실을 나서 영안실로 갔다. 그는 나를 따라가지 그 곳에 가지 못하는 것에 슬퍼했다. 그리고나서 그 곳에서 그를 본 게 전부다. 숨이 차올랐다.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내 몸이 보기엔 이게 내 머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 같았고 내 머리가 보기엔 내 몸이 그러했다. 그녀가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알듯이 나 또한 그랬다.

 

그녀의 뒷태가 보였다. 앞으로 머리칼이 넘겨져, 가녀린, 쥐기만 해도 부수어질 마냥 얇고 고고한 목 뒷부분이 보였다. 나는 문득 살의를 느꼈다. 그녀에 대한 살의가 아니었다. 그녀의 고고함에 대한 살의였다. 부딪히고 끼어 으스러진 그녀의 상실에 대한 살의였다. 짓부숴버리고 싶어졌다. 그녀와 그녀의 고고함이 비슷하게 닿아옴에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짓눌린 몸 또한 비슷해야 하리라. 나는 그 논리에서 하등 오류를 찾을 수 없었다. 조심스레 감싸쥐었다. 두 손에 뒤에서 앞까지 닿아 닫혔다. 그녀는 잠시 느려졌을 뿐 계속이었다.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작은 가마와 풍성한 머리카락이 보였고, 귀맡의 살짝 튼 피부가 보였다. 매일같이 쓸어 넘기다보니 텄나 싶었다. 아름답게 굽이진 어깨 아래로 어깨뼈와, 살짝 튀나온 등뼈와 허리뼈, 그리고 엉덩이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목은 여전히 그러쥐고 있었다. 그녀가 자세를 바꾸려 하는 게 느껴졌다. 기회는 지금 뿐이라고 그녀가 메아리 질렀다. 지금이 아니면. 그가 내게 찔러오던 날 밤, 접점인 이 시선. 이 자세. 이 구도가 아니면 넌 할 수 없어. 라고 그녀가 되뇌어왔다. 무얼? 내가 묻자, 그녀는 내 뒤에서 내 양팔 위에 팔을 겹치곤 살며시 밀었다. 등에 그녀의 가슴이 닿아왔다.

 

네가 그토록 원하는 것.
그녀는 잠시 쉬고는 내 손에 힘을 주려 했다. 그녀의 목울대가 닿았고, 그녀는 움찔하며 살짝 멈췄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듯 느껴졌다.

 

내 존재.
그리고 손은 내 손이 아니게 됐다.

 

 


담배 연기가 침대 바로 위 환풍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내가 물었다.
……눈이 오겠지?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는 손바닥을 펴 그녀의 어깨부터 등허리까지 살며시 쓸어내렸다. 부드럽고 온기가 있었다. 그녀와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잠시 담배 한 숨의 틈을 두고 다시 물었다.

 

눈이 올테야.

 

그녀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내게 몸을 돌려 밀착해왔다. 춥다는 듯이. 너무 춥다는 듯이 내게 붙어오더니 들릴까 말까 한 크기로 말했다.

 

응.

 

 

End.
13 06 27
00 18-21 [N]

고개를 돌려 곧 얼어붙을 물방울 하나가 굳는걸 보곤 그녀를 끌어안았다. 추웠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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