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핀볼 - 1

작품/백업 2013. 11. 23. 03:54

따르릉

따르릉

 

 

숙취와 젖은 공기, 낯선 천장이 오감으로 다가왔다.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 들렸지만 전화벨이 울린다는 것으로만 들렸지 그것이 어떤 의미로서 나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한동안은. 나는 서서히, 부스스 부푼 머리를 긁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다른 손으론 옆의 스톨을 더듬었다. 핸드폰이 잡혔고, 볼에 부벼 폴더를 열었다.

 

 

전화 너머론 아무론 조짐도 들려오질 않았다. 나는 잠시, 여보세요도 외치지 않고 멍하니 그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전달을 기다렸다. 하지만 소식은 없었다. 버튼을 눌러 통화를 끄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억 속에는 익숙하지만 몸으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의 기상은 항상 뭔가 잠이 덜 깨거나 뒤숭숭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낯선 책상. 내 쪽으로 조금 돌아와 있는 어떤 특이한 나이테의 나무로 만든 의자. 프란츠 카프카 전집. 나는 이윽고, 거의 모든 방 안의 풍경을 둘러보고는 주머니에서 세븐스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내 옆에, 상처받은 아이가 자는 마냥 한껏 웅크려 있는, 어떤 아름다운 곡선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방 바로 옆의 베란다로 나갔다. 찬바람이 살짝 불어와 그녀가 흠칫한 것 같았다.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내가 일어나면 바람을 쐬는 것을 아니까, 내가 일어난 것만 알아차릴 뿐 다시 잠들 것이다. 보름달을 가렸는지 하늘은 누렇게 밝은 빛을 띄었고 우중충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로 알 수 있었다. 가로등도 꺼지고 모든 아파트의 형광등이 다 내려진 지금, 알몸으로 바람을 쐬고 있었다.

 

 

무엇인가 기분이 들었다. 어떤 기분인지는 몰랐지만, 그 기분은 나를 바닥에 널브러놨던 속옷과 바지와 셔츠, 그리고 윈드브레이커를 입고 바깥에 나가게 만들었다. 내가 옷을 다 입었을 즈음, 그녀가 일어나 정수리를 벅벅 긁으며 내 세븐스타에서 두 개피를 꺼내 동시에 불을 붙였다. 피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 것으로 추락하는 비행기를 흉내내려는 듯 장난을 쳤다. 비행기 소리와 함께.

 

 

"나갔다 올게."

"어. 잘 다녀와. 총 안 맞게 조심해."

테러리스트가 있나보다. 나는 웃으며 그러지 라고 대답하곤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살살 이슬비가 가랑비로 바뀌던 즈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왜 내가 입은 윈드브레이커에는 후드가 없냐는 것이 아니라,

제이가 아직 셔터를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셔터는 반쯤 내려져 있었다. 나는, 매번 쥐가 그랬던 것 처럼 한 손으로 살며시 그걸 걷어올리곤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의 불은 거의 다 꺼져 있었다. 주방에서 나오는 흐릿한 백열전구의 빛이 카운터에 가까운 몇 식탁의 윤곽을 살짝 비추곤 닿지 않는 빛을 거두어 사라졌다. 제이는 카운터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제이의 바로 앞 오른쪽에 앉았다.

 

 

"늦게까지 있네요 오늘은?"

"비가 오니깐."

 

 

제이는 잠시 주방으로 갔다 돌아와선 내게 땀을 뻘뻘 흘리는 맥주병을 내밀었다. 그 땀방울들은 굳은 살이 배긴 손가락의 주름 사이를 스며들었다. 나는 카운터 모서리에 대고 병뚜껑을 따곤 며칠간 물 구경을 못한 사람처럼 단숨에 반절을 마셨다. 막혔던 터널에 발파 신호가 울렸다.

 

 

"잘 지냈나?"

"네. 이래저래 바빠서 자주 못 들렀어요."

바쁘다는 건 그냥 둘러대는 말이라는 것을 나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저,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끌림이 사라진 것이다. 으레 어떤 일에 사람이 몰입하고 나서 귀결이 지어지거나 그저 그 겉을 멤도는 시기가 지난 이후 있는 당연한 일이었다. 제이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뭐, 많이 바쁘겠지...쥐도 많이 바빠서 오질 못하니까."

"많이 바쁘겠죠, 그 녀석도. 이래저래 할 일이 손에서 떨어지질 않았던 녀석이니까요."

"그래. 인텔리로 갔으면 평생 일만 하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녀석이지. 생각해보면 다행이야."

나는 남은 맥주를 다 마셨다. 끄트머리에 남은 거품이 목구멍으로 떨어졌다.

 

 

"제이."

"어."

"...미안해요."
제이는 턱을 괴고 있던 자세 그대로 눈만을 움직여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쥐를 너무 늦게 찾은 것에 대해서요."

그리고 내가 그 완벽한 귀를 가진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 세상에 미안해요. 라고 덧붙이진 않았다.

 

 

"...어이."

그는 내 말을 듣곤 잠시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와서 내게 맥주를 한 병 더 내밀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자네도 이제, 우리 셋이 모였던 때의 내 나이만큼 나이를 먹었어. 그러니까 말 안해도 잘 알테지. 물론 자네가 말해준건 고마워. 말 안해도 안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하고 말 하는 것하곤 다르니까..."

병뚜껑이 뽕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뒤쪽으로 또르르르 하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지나갔어. 지나간 일이야.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일이야. 설령 신이 와도 할 수 없었을 일일테지...그러니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도 충분히, 그 녀석을 그리워 하고 있으니까 말야."

 

 

그리고 제이는 살며시 읊조렸다.

죗값을 나눠 받는 처지에 미안하고 자시고가 어디에 있겠냐...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풍경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직 새벽이라는 것과, 그녀가 침대에 일어나 앉아있다는 것. 다른 것은 그녀가 이제 비행기 두 대의 추락사건을 다루는 대신 그저 자신의 발가락을 바라보며 꼼지락거리며 발가락 사이사이를 벌렸다 좁혔다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고선 세븐스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곤 그녀가 정강이부터 배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내려, 그녀의 배에 머리를 살며시 기댔다.

 

 

"힘들었어?"

"어."

"힘들땐 푹 자는게 좋아."

"잠이 오질 않아."

"그럼 노래를 불러줄게."

 

 

그리고 그녀는 사이먼과 가펑클이라는 한 외국 청년이 스카보로 시장에 간 얘기를 조용하고 고요히 떠오르는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불렀다.

나는, 대체 이 누렇게 내리는 가랑비와 파슬리와 세이지와 쥐의 죽음과 제이의 우울과 내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완벽한 귀를 가졌던 그녀의 상실과 지금 내가 머리를 베고 누워 있는 그녀의 존재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다.

 

 

어떠한 연관도 있지 않았다. 단지 존재하는 것은 억지로 꿰매어진 누더기 옷일 뿐이었다.

모든 인간이 그럴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시간은 흐르고 흐르다보면 누더기로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세븐스타를 한 개피 다시 물었다.

 

 

소리가 침묵하는 모순된 상황을 들으면서, 나는 옷을 입은 채로 잠에 들었다.

 

 

 

 

 

 

 

 

 

2013 06 18

09 17

[N]

 

 

는 대놓고 하루키 핀볼 팬픽.

- 1 은 연재하려다 때려친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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