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

작품/백업 2013. 11. 23. 03:59
이봐이봐

그는 피스타치오 하나를 까서 입에 넣고 있었다. 갓 구워 나온 것이라 그런지 향이 예까지 풍겼다.

어.
0으로 시작하는 번호판이 있던가?
그거 무슨 공무집행이라던가 그런 차 아냐?
맞아 맞아. 그런데 아무 것도 아닌 그냥 보통 차인데 시작이 0이었어.

그는 맥주를 목 말라 죽어가던 사람 마냥 벌컥벌컥 들이키곤 몸을 잠시 떨더니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이상한데. 그런 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그치만 존재했다구. 이거말야, 그저 상상일 뿐인데. 내가 자주 겪는 데자뷰와 더불어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의문의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 하나가 풍덩하고 빠진 걸 본 기분이라고.
B, 한 잔 더요. 네오인가. 모피어스는 어디 갔나?

나는 잠깐 킬킬대며 웃었다. 술이 오른 모양이다. 설탕에 절인 마냥 단 오징어를 집어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컨테이너 위에서 칼부림 중이셔. 전화 안 받네.

그는 B에게서 1파인트 짜리 잔을 받고는 단숨에 절반이나 마시곤 옷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바비 빈턴의 블루 벨벳이 인터미션 중이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혀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아까부터 바에서 나가면 바로 보이는 장례식장 입구를 자꾸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침에 아버님 만났었나?
어. 한 잔 하시지 않겠냐 물었는데 아직도 경황이 없으신가보더구만.
그런가.

그나저나 말야.
어.
껍질이 수북히 쌓인 나무 소반의 모서리에 피스타치오 과육을 눌러 비비며 깎고 있는 그의 손이 보였다. 그의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도.

잘 있을거라고 믿어.


그의 손이 잠시 멈췄고 그 때문에 피스타치오의 허리춤은 날씬함의 완성에서 잠시 멀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 견과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갖게 되었다. 자신이 원했을 것보다 더더욱. 그는 지갑을 꺼내어 자신 몫의 술값을 지폐로 잔 옆에 두고 일어났다. 나는 말없이 잔 안의 얼음을 쩔그렁거리며 내 앞 어딘가 종잡을 수 없는 시선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참 지랄맞게 오누만.
B가 그의 자리에 놓인 지폐를 가져가고 잔을 들어 싱크대에 얼음을 부어넣으며 말했다.

네. 지랄맞게 차가운 비네요.
나는 남은 술을 부어넣곤 멍하니 통유리 바깥을 내다보았다.






20130828
2316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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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의 핀볼 - 1

작품/백업 2013. 11. 23. 03:54

따르릉

따르릉

 

 

숙취와 젖은 공기, 낯선 천장이 오감으로 다가왔다.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 들렸지만 전화벨이 울린다는 것으로만 들렸지 그것이 어떤 의미로서 나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한동안은. 나는 서서히, 부스스 부푼 머리를 긁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다른 손으론 옆의 스톨을 더듬었다. 핸드폰이 잡혔고, 볼에 부벼 폴더를 열었다.

 

 

전화 너머론 아무론 조짐도 들려오질 않았다. 나는 잠시, 여보세요도 외치지 않고 멍하니 그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전달을 기다렸다. 하지만 소식은 없었다. 버튼을 눌러 통화를 끄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억 속에는 익숙하지만 몸으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의 기상은 항상 뭔가 잠이 덜 깨거나 뒤숭숭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낯선 책상. 내 쪽으로 조금 돌아와 있는 어떤 특이한 나이테의 나무로 만든 의자. 프란츠 카프카 전집. 나는 이윽고, 거의 모든 방 안의 풍경을 둘러보고는 주머니에서 세븐스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내 옆에, 상처받은 아이가 자는 마냥 한껏 웅크려 있는, 어떤 아름다운 곡선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방 바로 옆의 베란다로 나갔다. 찬바람이 살짝 불어와 그녀가 흠칫한 것 같았다.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내가 일어나면 바람을 쐬는 것을 아니까, 내가 일어난 것만 알아차릴 뿐 다시 잠들 것이다. 보름달을 가렸는지 하늘은 누렇게 밝은 빛을 띄었고 우중충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로 알 수 있었다. 가로등도 꺼지고 모든 아파트의 형광등이 다 내려진 지금, 알몸으로 바람을 쐬고 있었다.

 

 

무엇인가 기분이 들었다. 어떤 기분인지는 몰랐지만, 그 기분은 나를 바닥에 널브러놨던 속옷과 바지와 셔츠, 그리고 윈드브레이커를 입고 바깥에 나가게 만들었다. 내가 옷을 다 입었을 즈음, 그녀가 일어나 정수리를 벅벅 긁으며 내 세븐스타에서 두 개피를 꺼내 동시에 불을 붙였다. 피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 것으로 추락하는 비행기를 흉내내려는 듯 장난을 쳤다. 비행기 소리와 함께.

 

 

"나갔다 올게."

"어. 잘 다녀와. 총 안 맞게 조심해."

테러리스트가 있나보다. 나는 웃으며 그러지 라고 대답하곤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살살 이슬비가 가랑비로 바뀌던 즈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왜 내가 입은 윈드브레이커에는 후드가 없냐는 것이 아니라,

제이가 아직 셔터를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셔터는 반쯤 내려져 있었다. 나는, 매번 쥐가 그랬던 것 처럼 한 손으로 살며시 그걸 걷어올리곤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의 불은 거의 다 꺼져 있었다. 주방에서 나오는 흐릿한 백열전구의 빛이 카운터에 가까운 몇 식탁의 윤곽을 살짝 비추곤 닿지 않는 빛을 거두어 사라졌다. 제이는 카운터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제이의 바로 앞 오른쪽에 앉았다.

 

 

"늦게까지 있네요 오늘은?"

"비가 오니깐."

 

 

제이는 잠시 주방으로 갔다 돌아와선 내게 땀을 뻘뻘 흘리는 맥주병을 내밀었다. 그 땀방울들은 굳은 살이 배긴 손가락의 주름 사이를 스며들었다. 나는 카운터 모서리에 대고 병뚜껑을 따곤 며칠간 물 구경을 못한 사람처럼 단숨에 반절을 마셨다. 막혔던 터널에 발파 신호가 울렸다.

 

 

"잘 지냈나?"

"네. 이래저래 바빠서 자주 못 들렀어요."

바쁘다는 건 그냥 둘러대는 말이라는 것을 나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저,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끌림이 사라진 것이다. 으레 어떤 일에 사람이 몰입하고 나서 귀결이 지어지거나 그저 그 겉을 멤도는 시기가 지난 이후 있는 당연한 일이었다. 제이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뭐, 많이 바쁘겠지...쥐도 많이 바빠서 오질 못하니까."

"많이 바쁘겠죠, 그 녀석도. 이래저래 할 일이 손에서 떨어지질 않았던 녀석이니까요."

"그래. 인텔리로 갔으면 평생 일만 하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녀석이지. 생각해보면 다행이야."

나는 남은 맥주를 다 마셨다. 끄트머리에 남은 거품이 목구멍으로 떨어졌다.

 

 

"제이."

"어."

"...미안해요."
제이는 턱을 괴고 있던 자세 그대로 눈만을 움직여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쥐를 너무 늦게 찾은 것에 대해서요."

그리고 내가 그 완벽한 귀를 가진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 세상에 미안해요. 라고 덧붙이진 않았다.

 

 

"...어이."

그는 내 말을 듣곤 잠시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와서 내게 맥주를 한 병 더 내밀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자네도 이제, 우리 셋이 모였던 때의 내 나이만큼 나이를 먹었어. 그러니까 말 안해도 잘 알테지. 물론 자네가 말해준건 고마워. 말 안해도 안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하고 말 하는 것하곤 다르니까..."

병뚜껑이 뽕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뒤쪽으로 또르르르 하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지나갔어. 지나간 일이야.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일이야. 설령 신이 와도 할 수 없었을 일일테지...그러니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도 충분히, 그 녀석을 그리워 하고 있으니까 말야."

 

 

그리고 제이는 살며시 읊조렸다.

죗값을 나눠 받는 처지에 미안하고 자시고가 어디에 있겠냐...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풍경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직 새벽이라는 것과, 그녀가 침대에 일어나 앉아있다는 것. 다른 것은 그녀가 이제 비행기 두 대의 추락사건을 다루는 대신 그저 자신의 발가락을 바라보며 꼼지락거리며 발가락 사이사이를 벌렸다 좁혔다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고선 세븐스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곤 그녀가 정강이부터 배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내려, 그녀의 배에 머리를 살며시 기댔다.

 

 

"힘들었어?"

"어."

"힘들땐 푹 자는게 좋아."

"잠이 오질 않아."

"그럼 노래를 불러줄게."

 

 

그리고 그녀는 사이먼과 가펑클이라는 한 외국 청년이 스카보로 시장에 간 얘기를 조용하고 고요히 떠오르는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불렀다.

나는, 대체 이 누렇게 내리는 가랑비와 파슬리와 세이지와 쥐의 죽음과 제이의 우울과 내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완벽한 귀를 가졌던 그녀의 상실과 지금 내가 머리를 베고 누워 있는 그녀의 존재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다.

 

 

어떠한 연관도 있지 않았다. 단지 존재하는 것은 억지로 꿰매어진 누더기 옷일 뿐이었다.

모든 인간이 그럴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시간은 흐르고 흐르다보면 누더기로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세븐스타를 한 개피 다시 물었다.

 

 

소리가 침묵하는 모순된 상황을 들으면서, 나는 옷을 입은 채로 잠에 들었다.

 

 

 

 

 

 

 

 

 

2013 06 18

09 17

[N]

 

 

는 대놓고 하루키 핀볼 팬픽.

- 1 은 연재하려다 때려친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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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작품/백업 2013. 11. 23. 03:47

일어나.

들숨을 흐읍 들이쉼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잠에서 깼다. 창문에만 빛이 살짝 맺힌 듯, 피부로 느끼는 시간에 비해 방 안은 어두웠다. 룸메 형은 몸을 벽 쪽으로 돌려 자고 있었다. 어렴풋이 귓가에 지지직거리는 클래식이 울렸다. 알람 방송이 꺼진 직후인 듯 했다.

각막처럼 얇은 가느란 막이 하늘에 덧씌워진 듯 날씨는 비오는 날 만이 가질 수 있는 흐림과 우중충함과 가볍디 가벼운 추위를 안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핸드폰으로 엔하를 확인하고, 오른 쪽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뽑았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 다시 뒤로 풀썩 누웠다. 천장이 보였다. 집 천장과는 다르게 무늬가 없고 밋밋한 콘크리트 사막 같았다.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래. 니 말대로 일어났어.
근데 이제 뭘 해야 하는건데?

하지만 내 곁에는 대답해줄 그녀가 없었다. 이미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나는 뒤죽박죽이 된 기분과 머리를 안고 일어나 내 것이 아닌 라마의 이빨을 닦는 느낌으로 칫솔질을 했다.

세면대에 양칫물을 뱉던 순간, 내 모든 것을 토해내고 텅 비워버리고 싶어졌다. 입가에 거품을 묻힌 웃긴 꼬라지를 하곤, 세면대를 으스러져라 붙잡고 울어제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이었다.

2013 05 10
08 36 금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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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써야 널 쓸 수 있을까?

작품/백업 2013. 11. 23. 03:27

 

나는 아직도 너의 얼굴을 글로 써보지 않았다.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과연 내가 기억하고 있는 너의 얼굴을 묘사한다 해도,

그 묘사된 글이 과연 너의 얼굴 그대로일 것인가를 생각해보았고, 그 답은 부정이었다. 그 답으로부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좋아하는 네 얼굴조차 글로 써내리지 못할 진데, 내가 과연 그 누군가를 글로서 써서 그릴 수 있을까?

내게 있어서 유일한 너를, 내 일평생 단 하나의 도인 문학으로 쓸 수 없다면, 그건 내게 자격이 없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난 아직까지 너의 진짜 모습을 써본 적이 없다.

너와 똑같은 목도리를 한 여자. 너와 똑같은 말투를 쓰는 여자. 너와 똑같이 커피를 마실 때마다 머그잔이 아닌데도 양 손으로 살며시 잡고는 따스함을 느끼며 안의 내용물에 입김을 불어 그려져 나오는 파동의 무늬를 보며 좋아하는 여자. 항상 무언가 생각을 할 때는 턱을 괴고는 다른 손으로 턱을 괸 팔의 팔꿈치를 살며시 끄잡는 여자. 그림을 그릴 때 의자에 앉아 한 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왼 손으로 발목을 잡아 당기는 여자. 창문에 김이 서리면 항상 낙엽을 그리는 여자.


너의 조각 하나하나를 써넣었고, 그 조각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슬펐다. 온전히 글로 써진 너를 마주할 수 없다는 상실감과 허함이 나 자신에 스미었다. 항상 적막하고 정확한 표정을 하고선 아는 사람에게는 다정한 미소를 짓는 너 자신의 단편을 써내려보아도, 다른 단편과 합쳐보면 그건 네가 아니라 그저 비슷한 한 사람일 뿐이었다. 여자로서 다가오질 않았다. 내가 네게 품는 감정은 남자가 여자에게 품는 감정이므로 곧 너의 조각 하나하나를 합쳐놓고 봤을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사랑이어야 했을텐데, 아니었다.


그저 잃어버린 눈의 벌판에서 꽃 한 송이를 찾을 때, 중간 중간 보이는 풀뙤기로 밖에 느껴지질 않았다.

나는 방향을 돌렸다. 아니, 진작부터 흩어져 있는 네 조각을 이어맞추려 하기보단 그 조각 그대로 글 하나하나에 박제해두곤 언젠가는 떼어내어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하고 있다. 있었다. 다만 처음부터 이어온 방향을 바꾸려 할 뿐이다.


나 자신이 온전하지 않은데 온전한 널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온전하지 못한 손으로 널 만지고 온전하지 못한 펜으로 널 쓰고 온전하지 못한 발로 네게 걷고 향할 수 있을까? 그 답 또한 부정이었다. 고로 나는 나 자신의, 다 타버려 재밖에 남지 않은 마음을 손아귀에 한 움큼 움켜쥐고, 저 나락으로부터 천국으로 향하는 자그마한 빛 하나를 향해 한 손과 한 주먹으로 절벽을 타고 있다. 공허 그 자체보다 무의미하고 없음이고 동시에 그 자체만큼 깊은 재를 퍼올린지가 벌써 수십 번이다. 얼마나 더 퍼올려야 온전해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올라가야 닿을 수 있을까? 나 자신의 무수히 많이 조각난 마음을 하나하나 이어 붙이고, 다시 저 위로 또 올라가, 나의 회랑에서 박제된 너를 상처나지 않도록 조심스래 떼어내어 하나하나 잇고, 또다시 저 위로 올라가 비로소 온전한 나와 온전한 너로 마주하며 신나게 마지막의 춤을 추며 노래할 수 있을까? 교향곡을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얼마나 더 써야 널 쓸 수 있을까?




그 대답은,









END

2013 04 07 日

2311


Novelistar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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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흩날리던 흑백의 날

작품/백업 2013. 11. 23. 03:24

 

 

 

너에게만큼은 항상 말하고 싶었어.
헐떡이는 숨을 집어누르면 허파에 뚫린 샛바람구멍으로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가슴을 짓누르면 입으로 새어나왔다.
널 지키기 위해서, 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지.
그녀는 어느새 입 안에 또 다른 총알을 집어넣고 이빨 사이로 누르고 있었다.

 

그건 거짓말이지만,

그렇게 그들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철제 계단이라 그런지 소리가 공명해 우리에게는 커다란 행군가처럼 들렸다.

 

까득.
그녀가 어금니로 총알을 짓눌러 깨트렸다.
내 입에선 기침과 함께 피와 살점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더니 가슴팍에 손을 대 새어나오는 거품을 굳혔다.
하늘에선 흑백의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 마치 묵시록 같았다.
주변 고층 빌딩들의 헬리포트에서 안내등이 빨갛게 명멸하며 겹치는 빗방울에 산란해 눈을 찔렀다.
턱에 위아래로 족쇄라도 채인 듯 무거운 입을 열어 그녀에게 말을 하려 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옥상 문을 정면으로 보고 서고는 등 뒤의 Kar98k를 내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져가고, 나는 고개를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이 속눈썹, 뺨, 이마, 입술 언저리, 턱 끝에 떨어져 흘러내리며 물길을 그리다가 몇 개의 커다란 본류로 합쳐져갔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내가 지금 하려던 말을 하려고 해도, 그 말이 그녀에게 닿을 수 있을까.


그녀가 금간 7.92미리를 전장으로 장전하고는, 한 손으로, 여고생 사격선수처럼 문을 향해 조용히 겨누었다.
삭막한 빗소리와 어지러운 금속소리 사이에서도 그녀의 조준은 너무도 정적이었다. 원래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 듯 했다.


답이 나왔다.

 

닿을 수 없다.

 

타캉!
그렇게 산란하는 봄날의 벚꽃마냥, 어느 날의 흐트러지는 빗방울마냥,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해갔다.

 

 

 

 

 

느리게 지나가는 장면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그대로 바람에 맡긴 채 고고하게 서서 입구를 겨냥하고 있었다.
입구는 출구였고 출구는 생명이었다. 그녀의 총구와 그녀가 믿는 유일한 가늠좌인 그녀의, 한 쪽을 감은 왼 눈과 결속된 균열만이 그녀 안에서 박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들이쉬고 내쉬는 숨 하나마다 그녀의 가녀린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오직 그것만이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총성이 들렸다.
결속은 와해되어 산란해갔다.
헬멧에 탄환이 긁히는 바람소리와 같은 소리를 내며, 자그마한 먼지구름이 일었다가 황량히 사라졌다.

 

까각.

 

두 번째 탄환을 깨문 그녀의 얼굴에선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평상시 그대로의 무표정일까. 아니면, 그 때,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와 같이 사냥개의 표정을 품은 걸까.


나는 모른다. 다만 하나만은 장담할 수 있다.
비오는 날, 빛을 두르고 비를 맞으며 명멸하는 남산 타워가 내다보이는 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그녀는 또 하나의 탄창을 비웠다.
빈 탄창이 떨어져 덜그럭거리며 땅 위를 몇 번 버둥거리다 멈추는 그 소리의 사이에, 그녀는 빗물 사이로 울고 있었을 거라고.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 참.
그건 거짓말이었지만,

 

 

 

 

 

 

너만큼은 살아줬으면 좋겠다.


2013 03 25 2341 月

 

 


총기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써봤습니다.
원래는 모신 나강이었지만, 총열을 1.5배 쯤 늘이고 겨누는 그녀의 총의 이미지가 모신 나강보단 카98에 더 흡사하더군요.
실질적인 이미지에 치중해서 표현할지, 어느 물건이 가진 상징적인 이미지에 치중할지 고민하다가 이미지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어짜피 총기류에 대해 잘 모르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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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 카테고리 안내

작품/백업 2013. 11. 23. 03:00

엔젤하이로 커뮤니티에 썼던 글을 백업하는 카테고리입니다.

본인의 글임을 확인하는 스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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