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한 방울의 눈물이 되던 날

작품/소설 2014. 1. 1. 05:34

언젠가 세상에 이런 말이 던져진 적이 있다. 아주 먼, 머나먼 미래지만, 태양계의 주축이자 수많은 생명을 지구에 잉태시킨 태양이 활동을 멈춘다고. 하지만 너무나도 먼,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의 거리 너머에 놓인 미래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역사적인 날. 태양이 서서히 쪼그라들다 한 방울의 눈물로서 화하는 어찌 표현 해야할지 모를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이 날 이 풍경을 바라볼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태양은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다. 여태까지 늙어왔듯이 일정한 속도로,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죽어가고 있었다. 마치 경험 많은 마라토너처럼 꾸준하게, 천천히 페이스를 유지하며 그 순간, 그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지구 위에는 그 전에 있었던 문명들의 잿더미가 아직까지도 마저 다 깎여나가지 않아 수북이 쌓여 있다. 산과 들과 바다의 굴곡을 이루며 잠시나마 온전한 대자연 그 자체로 보일 정도로 너무나도 오랫동안 녹아들어 자연스러웠다.

 

햇빛은 해가 뜨건 지건 항상 노을빛이었고, 주홍빛으로 물든 산의 능선과, 저 너머 지평선에는 그렇게까지 찬란하게 빛나지 못하는 태양의 빛을 부드럽게 흩뿌려주는 여러 금속들이 쌓여 우그러들고 있다. 서서히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크기가 예전만치 못한 그 작은 태양은 마치 가을 날씨 마냥의 온도를 지구에 흩뿌리고 있었다. 나무들은 이미 몇몇 고목을 제하곤 절멸했고, 그 때문에 몇몇 텅 빈 황야와 사막에 덩그러니 서있는, 외로운 모냥으로 뻗어나가고 우그러든 고목들의 위로 그 오렌지 비취빛 노을이 비칠 때.

 

셀 수 없는 떠오름과 짐이 반복되었고, 서서히 그 약속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일부, 감성이 풍부하였던 이들의 준비물. 단 한번의 리허설도 있을 수 없는, 여타 피날레와는 달리 아주 방대하고 손아귀로 움켜쥘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사건. 어머니를 위한 피날레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양은 서서히 희옇게 변해갔다. 부플어오르는 정도는 서서히 커져갔고 시간도 빨리 흘러갔다. 호스티스 병상에 누워 창가의 햇빛을 바라보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말기 환자처럼.

 

 

하염없이 스쳐 지나가는 광경이 생경하여 다시금 알아차리고 난 뒤에 생각해보았다. 그 순간은 바로 내일로 다가와있었다. 수많은 카세트 테이프가 기관총의 총알처럼 끼워진 채 늘어져 있는 구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무사히 그 높은 쓰레기의 산에서 넘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쓰레기가 우그러들며 무너지며 감춰져 있던 몇몇이 드러났고, 애초부터 정상에 서서 태양을 바라보고 있던 고참들은 말 없이 신참들을 환영하며 그 날의 다가옴을 알렸다. 수많은 명화들과, 쓰리디 입체 이미지 상영기와, 수많은 책들의 산도 드러났다.

 

어찌보면,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어머니 태양의 임종을 잊어버리진 않았나보다.

 

 

 

문득, 너무나도 슬픈 햇빛이 살며시 일어나기에 바라보았다.

빛은 엄청나게 진한 오후의 것과 다름 없었고, 태양은 서서히, 마지막 등산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태양은 너무나도 거대하였지만 빛은 그렇지 아니했고, 그렇기에 마치 지구에 마지막 포옹을 하려는 것처럼 태양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듯 보였다. 빛이 서서히 지평선으로부터 올라왔고, 그 순간, 모든 라디오가. 덕지덕지 먼지가 쌓여있는 책들과 명화들과 상영기의 산 위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범위 안에서, 마지막 어머니의 일주를 응원하고 있다.

 

임종 직전 녹음하여 중간중간 거센 기침이 콜록이는 배철수의 DJ 멘트와 그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하는 롤링 스톤스의 Satisfaction이 살며시 지지직거리며 나오고 있었고, 수많은 상처입고 찌그러지고 군데군데 낡은 옛 백색 가로등들이 점멸하여 책들과 명화들을 비춰주고 있었다. 영사기에서는 인류가 이룩한 모든 영상매체들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나올 즈음에는 태양이 정오까지의 등정을 절반쯤 마친 상태였다.

 

수많은 에술인들의 한마디씩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태양의 임종 날짜를 알지 못해 준비하지 못한 이들도 문명의 도움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과 스케치는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며 밑자락을 찰랑였고, 베토벤과 모짜르트 등의 교향곡은 위에만 먼지가 쌓인 레코드 플레이어로 전 지구에서 동시에 웅장하고 아름답게 울려나오고 있다. 어머니에게 들릴까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언제나 그랬듯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으며, 헤밍웨이와 도데와 포와 그 외 수많은 책 속의 작가들은 그들의 책 페이지로나마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봄에 감사하듯 미풍에 천천히 펄럭이며 한 장 한 장 넘어가고 있다. 희미하게 설국이라 보이는 책의 주변엔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마치 눈보라처럼 책을 에두르고 있었고, 오웰은 왠지 모르게 슬퍼하는 듯 이따금 페이지를 멈춘다. 수많은 춤과 희극과 오페라들이 영사기를 통해 지나갔다. 피에타는 지는 태양을 향해 세워져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햇빛을 받는 예수의 얼굴에는 그늘이 지지 않았다. 피에타에만은 가로등이 켜있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런 예수를, 혹은 태양을 안고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머릿자락만이 지평선 너머로 보일 때. 마침맞게 지구와 머나먼 태양의 크기가 겹쳐졌고, 그렇게 모든 라디오가 서서히 지지직거리며 멈추었다. 어머니는, 기침을 한 번 크게 하시더니 적막함 속에 크게 팽창했다 그 반동으로 한없이 우그러드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 방울의 눈물이 되셨고, 칠흑같은 암흑 사이로 달과 별의 빛이 비치는 라디오에서는 그저 주인 모를 안녕 인사만이 나오고 있었다.

 

산 그 자체이거나 위에 놓여있던 인간의, 지구의 모든 것들은 거의 영원에 가까웠던 기다림을 끝내고 피날레에 만족한 듯 서서히 무너졌다. 비록 그 누구도 기억하거나 보지 못했을지라도.

 

 

 

 

Fin

 

 

 

 

 

 

 

 

The Day Sun becomes like a single drop of tear

 

2014 01 01

05 33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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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冬寒

작품/소설 2013. 12. 4. 04:34

찬 바람이 분다. 어느새 허여렇게 폐부에 스민 찬 바람은 어느 덧 젖어들어 따스한 몸을 부르르 떤다. 한사코 말려도 갈 것이고 오라고 재촉하여도 오지 않을 그런 것. 계절이 바뀌었다. 어느새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바깥바람은 쌀쌀하기 그지 없었다. 창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가 이불을 덮어 쓰며 리모컨을 이리저리 꾹꾹 눌러대며 채널을 돌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뉴스는 난장판이었고, 사놓은 귤은 거의 다 먹어서 심심할 때 요깃거리도 없었다. 계속 리모컨을 꾹꾹대다가 그만두고, 베란다로 나갔다.

 

바깥은 그저 새하얀 커버를 둘러쓴 듯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고 아무 것도 비쳐오지 않았다. 그저 하이얀 싸늘함 그대로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지구본이 놓인 책상 앞에 앉아 계속 그것을 돌리고 있는 마냥, 바깥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려는지 바람은 아무런 찰기 없이 싸늘했고, 오지 않으려는지 햇빛은 쨍쨍했다. 눈이 녹는지 그대로 굳어있을른지 알지 못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이얗게 새어나가는 입김의 살결을 헤아려보려는 듯 시선은 멀었고, 마음은 그저 비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나도 몰랐다. 그저 저기 어딘가에, 헤아림의 바깥, 어딘가에 두고 온 것만 같은 머나먼 것이 생각났고, 기억났고, 그리워졌다. 아무런 연고가 닿지 않을지라도 왠지 모르게 그러했다.

 

문명 사회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립된 무인도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나먼 것에 있는 것에 손을 뻗을진데 나는 그에 발끝만치도 닿지 못했다. 멀었다. 허공으로 사라져가는 내 숨결의 살결을 좇으려는 것 만큼이나 멀었고, 가느다랗고, 희였다. 지구본을 한없이 돌리다보면 멈춘 그 지점, 대서양이든 태평양이든 그 한 가운데에 마치 뭔가 지표라도 솟아나올 것처럼 그렇게 계속 이어나갔다. 돌리고 또 돌렸다. 돌리는 손짓과 돌아가는 그 지구본이 따로가 아닌 하나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해서 돌렸다. 스쳐가는 선과 점과 대륙이 검은 곡선과 색깔들로 보일 때까지.

 

멀다. 너무나도 멀다. 어딘가로 가야만 어디로든지 가까워질 것이 분명한데, 그렇지조차 않다. 나는 여기에 있고, 그건 저 곳에 있다. 서로 멈춰선 채 마치 팽팽한 전화선이 연결된 양끝자락처럼 미동조차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가선 안된다고 말하는 듯 하다. 양립한다. 가야한다는 마음과, 왠지 모를 주저와 불안과 안주와 체념이. 어쩌면 서로의 거리는 거기까지가 최근인지도 모른다…….

 

어디까지일까. 언제까지일까. 내 손등으로부터 팔, 팔꿈치를 지나 어깨, 목을 타고 올라가 머리. 거기까지의 살결을 헤아려본다. 무궁하고 무진하다. 그것들을 모두 하나하나 핀셋으로 집어 헤아려놓고 자, 여기 있습니다. 할 때까지일까? 별들이 다 떨어져 땅에 박히고 그 별들의 조각 하나씩을 모아 목걸이를 만들어 저 높은 달에 내걸어놓고 깊은 잠에 빠져들 때까지일까? 영원히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를 헤엄치다 지쳐 빠져 죽기 직전에 저 멀리 하느다랗게 보이는 육지의 끝자락을 눈물지으며 닿고자 할 때까지일까?

 

언제까지고 어디까지고 항상 해온 말이지만, 마치 겨울에 눈이 내리듯. 가을에 마치 살갗에 닿는 바람이 아닌 내 마음에 부는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봄에 항상 꽃들이 살갑게 피워오르듯. 그렇게, 언제까지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일까.

 

족쇄채워진 겨울맡의 지나온 발자국을 뒤돌아본다. 항상 그렇게, 눈은 언제고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지워 흐릿하게 했고, 나는 항상 내가 제자리임을 느끼고 뼈저리게 울었다. 겨울눈이 내리고, 봄눈이 녹을 때까지.

끌어안을 것도 없이 나 스스로의 양어깨를 끌어안고 움츠러든 채 등줄기에 내리는 싸락눈을 쉴 새 없이 맞는 것은 크나큰 고역이었다.

 

 

 

2013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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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葬

작품/소설 2013. 11. 23. 04:03

어느 날이었다. 펜을 받치는 오른 손 중지 언저리에 물집이 잡혀 펜을 잡을 때마다 찌릿거려 거슬리던 터였다. 항상 내게는 그랬듯, 사소한데서부터 평상시 밀려있던 안좋은 일들이 몰려오려는 듯 싶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펜을 멈추고 손을 내밀어 수화기를 들었다. 혹시나였고, 역시나였다. 닿지도 않았는데도 중지 아래 물집이 짓눌린 듯 아렸다.

 

오랜만에 본 녀석은 옛날과 변한 게 없었다. 이상했다. 응당 변했어야 마땅할 시간을 사이에 두고 만난 것일 진데 그렇지가 않았다. 문득 콧구멍으로 냄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육개장의 고춧기름 냄새. 온갖 떡의 고물이 너풀거리는 마냥 살며시 흩어져 섞인, 편육의 기름내와 새우젓의 비릿한 냄새.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신발을 벗은 내 두 발이 딛고 서있는 자리를 내려다봤다. 공산품이었지만, 지푸라기로 엮인 자리였다. 마지막으로, 저 멀리 처져 숨을 헐떡이는 후발주자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향내가 목마른 칼칼함을 치겨들고 콧속부터 내게 스미어왔다.

 

이미 염을 했었다고 한다. 나는 문득 그렇지 않음을 알지만, 경황이 없어 인편이 늦었음을 알지만 내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 너는 이 녀석이 염되고 나서 불릴 정도로 먼 사람이었는가?

 

이상하게도, 딱 떨어지는 부정이 뒤이어지진 않았다.

 

자리에 앉아 잠시 단을 바라봤다. 식장에 와서 몇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녀석에게 향을 지피지 않았다. 그저 서 있다가, 부조금을 넣은 봉투를 건네고, 짧은 말로 이름과 연락처를 말하고, 그제서야 아무 자리에나 앉아 옆에 있는 주방 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다들 바쁜 모양이지만, 기분 묘하게도 그 누구도, 어떤 아줌마도 내 앞에 편육 한 접시 놓고 가질 않았다.

 

문상객이 그리 많진 않았다. 반의반쯤 차있었다. 오후 여섯시 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드러내어 슬퍼하는 사람도 없는, 중간경계의 시간이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미소 지었다. 어째서인지 무르팍을 움켜잡은 손을 힘주었는지 모른다. 그제서야 한 상 차려져 왔고, 나는 묵묵히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접시의 랩을 뜯고 소주를 까 잔에 따랐다. 그리곤 마음속으로 말했다. 잔을 치켜들고서, 그 녀석을 향하고는.

 

건배. 네 안타까운 죽음에. 네가 뺏어간 그녀의 숨결에 애도의. 지금에 와서야 아무런 감정으로도 정리되지 않은 너의 면상을 목도하게 된 가련한 나에게. 그리고, 내가 네게 주먹을 휘둘러도 닿을 수 없음에 너의 행운에. 건배.

 

으레 그렇듯 피부 바깥이 쓸수록 넘어가는 술은 달았다. 미쳐버릴 것 같이 달았다.

 

탁.
편육 위에 새우젓과 김치 쪼가리를 올려 집으려던 찰나, 내 앞에 소줏잔이 상에 부딪는 소리가 났다. 검게 물들이인, 소매가 넓은 상복을 입은 한 여자였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목소리는 깊은 목마름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잘 여며졌던 듯, 살짝 느슨해진 매듭이 눈길을 끌었다. 거칠은, 옛것의 상복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핀을 꽂아 드러난 왼쪽 귀맡을 대충 쓸어 넘기곤 오른손에 잡고 있던 잔을 내밀었다. 나는 대충 두 손으로 따랐고, 그녀는 잔이 반 쯤 차오를 때까지 어디론가 보내놓은 넋을 부르지 않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넋이 돌아온 듯 상 아래에 내렸던 팔을 들어 두 손으로 받고는 내 눈치를 살짝 보았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줌마를 불러 육개장과 밥을 달라 했다. 그녀는, 괜찮다는 것인지 자기가 움직이겠다는 것인지 모를 손사래를 치다 단념했다. 김이 피어오르는 국물이 놓였고, 그녀는 잠시 속으로 숨을 삼킨 듯 멈칫하곤 잔을 들어 내게 살짝 내밀더니 그대로 들이키곤 국그릇을 들어 마셨다. 나는 재빨리 잔을 들어 맞배하곤 그녀를 바라보며 잔을 비웠다. 목구멍에 국물 넘어가는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 듯 했다.

 

쓰네요. 다른 의미라곤 없는, 적확한 말이었다. 그녀는 내 있지도 않은 시선이라곤 개의치 않고 밥을 퍼 국에 말곤 먹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자작하다가, 그녀 앞의 김치 그릇에 기름이 적은 수육 한 조각을 집어놓았다. 그녀는 숟가락에 밥을 뜬 채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놓곤 잔을 내밀었다. 나는 밑바닥까지 따라 간신히 찰랑였고, 그녀는 그 수육으로 그 잔을 비웠다.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한산했다.

 

친구인가요?
네. 그쪽은, 들었던 적이 있는데. 여동생 분이신지.
그녀는 귀맡을 쓸어 넘기곤 잠시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옆으로 쓸었다. 꽤나 예쁜 이마를 갖고 있었다.
네. 뭐, 오빠가 제 얘기를 다 하다니 뜻밖인걸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상 배다른 여동생이나 다름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나도 그 녀석이 왜 그랬는지는 이해가 가질 않아서였다. 자기가 받은 핏줄인 아버지조차 얘기를 꺼리는 놈이었으니.

 

여튼,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시잖아요? 저희 오빠란 사람은 뭐든지. 적지도 많지도 않은걸.
문상객조차도요. 라고 덧붙이진 않았다. 뭐,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가족인 여동생의 입에서, 그것도 상중에 나올 정도로 딱히 켕기는 점 없이 완벽하게도. 나는 그저 소주를 한 병 더 비틀어 열었다. 넌지시 눈빛으로 물어봤고,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손을 어깨 맡으로 올려 엄지로 등 뒤의 단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작했다.

 

아, 그리고 내일부턴 낮춰서 줘요. 두 손으로 받는 게 귀찮기도 하고.
내일? 나는 씹고 있던 인절미를 마저 씹어 삼키곤 물었다.
내일도 굳이 와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싫음 말고요. 오지 않을 이유도 있진 않잖아요?
잠시 머릿속으로 스케쥴을 떠올렸다. 그녀 말 대로였다. 하지만, 오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영정 사진을 볼 때마다, 그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어른거렸다. 둘이서 카메라에 꽤나 가깝게 찍힌 스티커 사진. 아무런 감흥 없이, 오랫동안 메말라 사이사이에 나락을 품은 듯 갈라진 논밭을 보는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슬픔도, 분노도, 허망함도 아니었다. 구역질이 났다. 밖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역겨워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숨이 붙어있을 때에 절대 보지도 만나지도 않겠다는 그 씹어뱉었던 다짐을 기한연장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잠시 나와 내 시선의 끝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팔을 올려 턱을 괴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라도 우광쾅 내려줬으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속을 폭풍우가 몰아치며 온갖 것을 휘젓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해당될지 몰랐다. 비록 그다지 슬프지 않은 혈육의 죽음일 것 같지만.

 

담배좀 피고 오겠다 하곤 구두를 신었다. 한쪽만 열린 창가엔 물에 꽁초가 담긴 종이컵이 놓여있었다. 그 앞에 서서 우중충하게 물들어 곧 뉘울, 햇빛인지 달빛인지 모를 빛을 받으며 불을 붙였다. 스몄다. 비웠다. 채웠다.

 

털었다…….

 

한 번, 깊게 타들었다. 그녀는 그 녀석과 삼 년을 사귀었다. 그녀는 스물넷이었고, 그는 다섯이었다. 한 살 차이는 곧 동갑이었다. 사귀기 한 달 전, 그녀가 갓 입학했을 때, 나와 그녀를 아는 사람은 우리가 진작부터 사귀는 줄 알았었고, 나는 그 추측을 진짜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정이 있어 가지 못한 MT 첫날, 밤 열두시에 걸려온 전화에서 그녀의 술 취한 목소리와 마지막, 그 녀석의 걱정마라는 말을 듣고 전화기를 벽에 던지지도 않고, 그저 무릎이 으스러지라고 꽉 쥐었을 뿐임에 화가 났다. 아마도, 아니, 확실히. 그녀의 처녀막은 그 새끼에게 찢겼다. 그리고서부터 나는 그 녀석을 멀리했다. 단 두 가지 생각에서부터였다. 반절이 탔다. 컵에 버리곤 하나 꺼냈다. 그 녀석의 면상을 보고 있자면 그 날, 취해있었을 그녀의 이빨 사이로 수작을 부렸을 그 새끼의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 그녀는 그 새끼와 사귀게 된 건지, 어떻게 그 자식을 좋아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머리가 아팠다. 내가 그를 멀리하려했음에도 그는 내가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여서인지 자꾸만 가까워지려 했다. 깊게 한 숨 빨았다. 찬 것 같지도 않았다. 밤은 점점 선명해져가 파고들었다.

 

……이윽고 나는 바깥에서마냥 불을 밟아 껐다. 보는 사람은 없었다. 대소에 관계없이, 무엇인가의 조재를 부수지 않고선 생각이 멈출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 존재는 참으로 소박하게도, 관짝 안에 누워있는, 배때지가 휑댕그레 비어있는 녀석의 골통이나 다른 것이 아닌. 피다 만 담배꽁초 하나였다…….

 

사실 그렇게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당연히 자기 것일 줄 알았던 것을 뺏긴 아이는 처음엔 울다가, 지쳐 잠들고, 이윽고 그 당연함이 새 주인에게 옮겨갔겠거니 하곤 수긍한다. 하려 한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수긍하게 된 자신을 보게 된다. 구두를 벗었다. 그녀는 안즉 앉아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그녀 앞에 가 앉았다. 그녀는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기분 좋게 알딸딸한 마냥 몸이 앞뒤로 일렁이고 있었다. 졸고 있는 성 싶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깨워 들어가 자게 할지, 아니면 깨지 않도록 일어나 내일 다시 올지를 고민했다. 잠시뿐이었고, 나는 그녀의 빈 잔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라낸 다음 일어났다. 신발장으로 가면서, 단을 힐끗 바라보았다. 영정 사진은 무덤덤했다. 나는 장례식의 최후의 최후까지 향을 올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 날 집에 가서 했던 일 중에 기억나는 것이라곤 반 쯤 마시다 변기에 부어버린 맥주와, 뉴스 기사의 토막난 부분부분과, 시리도록 멀리 느껴진 천장 뿐이었다.

 

 

 

다음 날, 느지막히 점심을 먹고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끌며 갔다. 끊임없이 되물었다. 왜 다시 가고 있는 거지? 어떤 이유에서?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내려오고 있는 그것을 기다릴 때, 이유를 찾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무 이유 없는 게 이유였다. 나는 씁쓸함을 다시며 3층을 눌렀다. 문이 닫혔다. 거울은 무한히 연속해있었다. 그 끝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이에도 무엇이 있을런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녀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상 앞에 앉아 작은 조각으로 잘리어 나온 오렌지를 한 손으로 집어 입에 넣으며 발라먹고 있었다. 단 왼쪽, 문이 열리며 약간 붕 뜬 머리를 한 그녀가 걸어 나왔다. 하품을 자그맣게 하더니, 버릇인 듯 귀맡을 쓸어넘기곤 아직 졸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내 쪽을 보고도 계속 시선을 돌리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혹은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궁금해졌던 찰나, 그녀가 내 앞에 천천히 다가와 앉았다. 잠시 멀뚱멀뚱 내 뒤 어딘가를 바라보다, 두 번째 하품을 하곤 말했다.

 

머리 많이 떴어요?
나는 잠시 대답들을 쏟아냈다.
상중인 여자는 항상 붕 뜬 머리를 하고 있어야 예의일 것 같은 정도로만.
뭐예요, 그게.
그녀는 피식 웃더니 묶지 않은 뒷머리를 양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리곤 잠시 나를 바라봤다.
몇 살이게요.
글쎄. 술 마신 다음날 늦게 일어나 세수를 했을 때 그렇게 물어보긴 했어. 스스로한테.

한두 살은 더 먹어 보이는데요, 어제보다.
떡국 곱하기 이는 소주 한 병. Q.E.D. 고마워, 조수.
뭘요, 박사님.
내가 농담하는 내색조차 않자 그녀는 오히려 자그맣지만 깊게 웃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턱을 괴곤 내게 되물었다.

 

정말로 몇 살이게요?
어찌 대답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는 척 했다가 대답했다.
스물 하나. 일부러 틀려보았다.
영계 좋아하시는구나?
이번엔 정말로 난감해져 내 표정이 어떤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잠시 웃더니 말했다.

아무 이유도 없는데 왔으니 수고비를 드릴게요.
무슨 이유에서?
그녀는 맨손으로 인절미 하나를 집어먹곤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무 이유 없어요.
노란 떡고물이 입술 근처에서 반들거렸다.

 

흐름은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부자연스러움과 당연함 사이에 연관성을 찾기란 힘들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당연함은 확고히 다가오려 했다. 당면한 당연함의 무게에 섬짓 발뺌할 새도 없이, 아니, 오히려 내가 당연함을 밀치며 벗기고 만지고 주물렀다. 그러면서 그가 죽은 이틀 후 그의 여동생을 안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답은 없었다. 서로 왠지 몰랐다. 만난 지 하루만에, 무슨 당위성이 내포되어 있어 몸을 섞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만큼이나 새하얘서 아무 것도 건져 올릴 것이 없었다. 그 무가치함을 우리는 서로의 몸에서 찾으려는 듯, 혹은 보상받으려는 듯 서로를 가졌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반반이 되었다. 누런 시트 위로 땀방울이 굴렀다. 만난 지 하루만에, 나는 녀석의 여동생의 처녀막을 찢었다.

 

모르겠다. 그녀를 안고 있는 지금 마음은 오히려 차분히 지금과 먼 어떠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느낄 수 있었다. 몸과는. 열기와는 거리가 먼 것을 몸으로 읽어낸다는 게 퍽 우스워 웃었다. 그녀가 움찔해왔다.

 

그녀를 안으며. 그녀가 타고 있었던 에스엠 파이브가 생각났다. 반파되어 있었다. 휀다부터 뒷좌석 도어까지. 프레임이 으스러져 있었다. 다이아몬드 크러쉬였다.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그녀의 죽음과 그의 생존의 흔적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속으로 내가 아는 식은 지식만을 되뇌일 뿐이었던 나 자신이 기억났다. 으스러진 뼈. 얼굴. 기름이 섞인 핏방울. 상처라도 없이 살아있었다면 차라리 신을 원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았다. 허벅지 아래로 아작난 그의 왼쪽 다리와 으깨진 왼손의 깁스를 뜯어 발겨버리고 싶은 마음을 씻어 흘리고 나는 병실을 나서 영안실로 갔다. 그는 나를 따라가지 그 곳에 가지 못하는 것에 슬퍼했다. 그리고나서 그 곳에서 그를 본 게 전부다. 숨이 차올랐다.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내 몸이 보기엔 이게 내 머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 같았고 내 머리가 보기엔 내 몸이 그러했다. 그녀가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알듯이 나 또한 그랬다.

 

그녀의 뒷태가 보였다. 앞으로 머리칼이 넘겨져, 가녀린, 쥐기만 해도 부수어질 마냥 얇고 고고한 목 뒷부분이 보였다. 나는 문득 살의를 느꼈다. 그녀에 대한 살의가 아니었다. 그녀의 고고함에 대한 살의였다. 부딪히고 끼어 으스러진 그녀의 상실에 대한 살의였다. 짓부숴버리고 싶어졌다. 그녀와 그녀의 고고함이 비슷하게 닿아옴에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짓눌린 몸 또한 비슷해야 하리라. 나는 그 논리에서 하등 오류를 찾을 수 없었다. 조심스레 감싸쥐었다. 두 손에 뒤에서 앞까지 닿아 닫혔다. 그녀는 잠시 느려졌을 뿐 계속이었다.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작은 가마와 풍성한 머리카락이 보였고, 귀맡의 살짝 튼 피부가 보였다. 매일같이 쓸어 넘기다보니 텄나 싶었다. 아름답게 굽이진 어깨 아래로 어깨뼈와, 살짝 튀나온 등뼈와 허리뼈, 그리고 엉덩이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목은 여전히 그러쥐고 있었다. 그녀가 자세를 바꾸려 하는 게 느껴졌다. 기회는 지금 뿐이라고 그녀가 메아리 질렀다. 지금이 아니면. 그가 내게 찔러오던 날 밤, 접점인 이 시선. 이 자세. 이 구도가 아니면 넌 할 수 없어. 라고 그녀가 되뇌어왔다. 무얼? 내가 묻자, 그녀는 내 뒤에서 내 양팔 위에 팔을 겹치곤 살며시 밀었다. 등에 그녀의 가슴이 닿아왔다.

 

네가 그토록 원하는 것.
그녀는 잠시 쉬고는 내 손에 힘을 주려 했다. 그녀의 목울대가 닿았고, 그녀는 움찔하며 살짝 멈췄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듯 느껴졌다.

 

내 존재.
그리고 손은 내 손이 아니게 됐다.

 

 


담배 연기가 침대 바로 위 환풍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내가 물었다.
……눈이 오겠지?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는 손바닥을 펴 그녀의 어깨부터 등허리까지 살며시 쓸어내렸다. 부드럽고 온기가 있었다. 그녀와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잠시 담배 한 숨의 틈을 두고 다시 물었다.

 

눈이 올테야.

 

그녀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내게 몸을 돌려 밀착해왔다. 춥다는 듯이. 너무 춥다는 듯이 내게 붙어오더니 들릴까 말까 한 크기로 말했다.

 

응.

 

 

End.
13 06 27
00 18-21 [N]

고개를 돌려 곧 얼어붙을 물방울 하나가 굳는걸 보곤 그녀를 끌어안았다. 추웠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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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작품/백업 2013. 11. 23. 03:59
이봐이봐

그는 피스타치오 하나를 까서 입에 넣고 있었다. 갓 구워 나온 것이라 그런지 향이 예까지 풍겼다.

어.
0으로 시작하는 번호판이 있던가?
그거 무슨 공무집행이라던가 그런 차 아냐?
맞아 맞아. 그런데 아무 것도 아닌 그냥 보통 차인데 시작이 0이었어.

그는 맥주를 목 말라 죽어가던 사람 마냥 벌컥벌컥 들이키곤 몸을 잠시 떨더니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이상한데. 그런 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그치만 존재했다구. 이거말야, 그저 상상일 뿐인데. 내가 자주 겪는 데자뷰와 더불어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의문의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 하나가 풍덩하고 빠진 걸 본 기분이라고.
B, 한 잔 더요. 네오인가. 모피어스는 어디 갔나?

나는 잠깐 킬킬대며 웃었다. 술이 오른 모양이다. 설탕에 절인 마냥 단 오징어를 집어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컨테이너 위에서 칼부림 중이셔. 전화 안 받네.

그는 B에게서 1파인트 짜리 잔을 받고는 단숨에 절반이나 마시곤 옷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바비 빈턴의 블루 벨벳이 인터미션 중이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혀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아까부터 바에서 나가면 바로 보이는 장례식장 입구를 자꾸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침에 아버님 만났었나?
어. 한 잔 하시지 않겠냐 물었는데 아직도 경황이 없으신가보더구만.
그런가.

그나저나 말야.
어.
껍질이 수북히 쌓인 나무 소반의 모서리에 피스타치오 과육을 눌러 비비며 깎고 있는 그의 손이 보였다. 그의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도.

잘 있을거라고 믿어.


그의 손이 잠시 멈췄고 그 때문에 피스타치오의 허리춤은 날씬함의 완성에서 잠시 멀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 견과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갖게 되었다. 자신이 원했을 것보다 더더욱. 그는 지갑을 꺼내어 자신 몫의 술값을 지폐로 잔 옆에 두고 일어났다. 나는 말없이 잔 안의 얼음을 쩔그렁거리며 내 앞 어딘가 종잡을 수 없는 시선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참 지랄맞게 오누만.
B가 그의 자리에 놓인 지폐를 가져가고 잔을 들어 싱크대에 얼음을 부어넣으며 말했다.

네. 지랄맞게 차가운 비네요.
나는 남은 술을 부어넣곤 멍하니 통유리 바깥을 내다보았다.






20130828
2316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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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잡는 자

작품/소설 2013. 11. 23. 03:58

태초의 사흘, 온 우주는 무한한 정지에 휩싸여 있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에 그 곳은 크기나 깊이라는 잣대를 댈 수조차 없는, 무한히 0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흘이라는 시간도 어느 누군가보다 조금 더 위대한 그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이르기 쉽도록 어림잡은 것일 뿐, 그 시간도 잡아먹힐 무無의 사건 동안 어떤 단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태초의 나흘 째. 사흘의 다음. 3시간의 다음. 3분의 다음. 3초의 다음. 그 아래로 무수히 쪼개진 세 번째들의 다음, 우주는 창조하기 시작했다. 우주 자체를 무대 삼아 누군지 모를 누군가가 창조하는 것이 아닌, 우주 스스로가 무엇인가를 창조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창조는 앞의 사흘 동안의 시간의 깊이에 비하면 턱없이 미약한 것이어서 그 창조는 우주 창조의 거룩함을 떠들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무시당하였다. 혹자는 그 미약함이 그 우수한 시간 층의 배열에 덮여 증식한 결과가 창조의, 과정에 비해 비약적인 수준의 결과물들의 시발점이라고 말했으나, 그 자들은 대부분 무시되었다.

 

태초의 아흐레 째. 미약하기 짝이 없는 우주의 처녀창조의 다음. 우주는 하나의 기관을 짜내었다. 폭발과 충돌과 변수와 의도가 뒤엉켜 우주 그 자신의 눈으로 보면 더럽다고 생각 되어질 정도로 유성油性 물감들이 수면에 뒤엉켜있는 모습에 비유할 수 있을 난장판이 만들어졌다. 그 난장판 속을 비집고 하나 둘 겨우 자신의 몸을 추스른 항성과 행성들은 마찬가지로 젖먹이인 서로끼리 뭉쳐 빙글빙글 돌며 일종의 족族을 형성했다. 수 억, 수 조, 수 경의 족들이 우주의 안속에서 떠돌아다녔다. 우주는 무한한 포만감을 느끼며 흐뭇해했다.

 

태초의 스물여덟 번째. 족의 형성과 우주의 그럴싸한 화장의 다음. 우주는 왠지 모를 기묘한 공허함을 느꼈다. 사실은 그(녀)의 안에 셀 수 없는 그(녀)들이 떠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노닥거리고 웃고 던지고 싸고 마시고 쥐어박고 자고 있었지만, 언젠가 선대에 있었다고 선문답 되어진, 그(녀)와 같은 존재들의 의무감 비슷한 것이 그(녀)를 덮친 것 같다. 그 의무감과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공허감은 그(녀)로 하여금 무언가 살아있는 것을 만들도록 하였다. 살아있는 것의 정의는, 그(녀)의 안에서 그(녀)의 ‘모든’ 규칙 아래에 살아 숨쉬는, 수동적인 존재의 반대의 것이라고 일단 그(녀)는 정의하였고, 그것을 기반으로 그(녀)는 창조하였다. 여태껏 그(녀) 주변에 있던 것과는 최소/최대 크기가 남달리 다른 물체를 수많은 실험장에 풀어놓으면서 그 의무감은 조금 옅어졌다.

 

태초의 백 아흔 세 번째. 창조자의 의무감과 우주적 균형감의 피조물이 탄생하고 번성하기에 이른 다음. 우주는 그(녀)안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을 오롯이 그 자신이 모두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신이 창조한 어느 생물체의 기초적 베이스로부터 비유하자면, 이미 그(녀)는 모든 창조성과 감수성이 서서히 감퇴되기 시작한 인생의 중간쯤에 와있는 것 같다는 판단이었고, 그 판단에 대한 반증으로 그(녀)가 그 즈음에 창조한 생명체중 몇몇은 균형에 맞지 않아 되돌려놓았다. 없던 일이었다. 우주는 그(녀)의 기초 중에서 가장 우월하면서도 균형에 어긋나지 않는 내외적 능력을 갖춘 생명체를 족장族長의 수만큼 창조하여 그 족장의 오두막 중앙, 깊숙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을 그 수와 그 자신만큼 나누어 자신과 연결하지 않고 어떤 쪽으로든 진보가 가능한 기초적인 자신만을 하나하나 그 생명체에 심고는, 그(녀) 자신은 작은 조각 하나만을 가지고 창조와 고뇌와 상념의 모든 과정을 잊고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돌아가는 것만을 바라보기로 하였다.

 

태초의 이백 쉰 세 번째. 침묵 속에 이루어진 우주의 은퇴선언과 파견자들의 첫 업무 시작 다음. 나는 그(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이 행성은 물이 육지보다 대략 1.8배쯤 많은 듯 했다. 자세한 비는 곧 있을 사흘쯤의 탐사로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갈 곳의 자세한 정보 대신 탐사를 지시하였고,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끝으로 우리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우리의, 아니 나의 영원한 일은 시작되었다.


균형 잡는 자
Stabilizer

 

 

----X:O / X- / XX

 

그(녀)가 미리 해놓은 작업 덕분에 이 행성에는 이상하리만치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내가 내려놓아진걸 알아차리고 나서 나는 하나의 행동과 둘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동은 즉각 이 행성의 생태계와, 특정 종/군/류의 번식 현황과, 온도/습도/대기 두께의 측정 등등 유지 보수 관리에 꼭 필요한 것들의 역사적인 첫 번째 확인이었고, 생각은 ‘그(녀)는 성별이 있다면 무엇일까?’ 라는 것과 또 하나는 ‘왜 이 족族은 족장이 항성이 아니고 행성일까’ 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생각은 그냥 내 자신이 마음 가는대로 그녀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것으로 해결했고, 두 번째 생각은 아마 이 족은 항성에는 생물이 살 수 없고 행성들 중에서 이 행성만이 생명 창궐에 적합한 환경을 부여받았나 라고 추측하여 해결하였다. 그렇게 세 가지 일을 해결하고 나니, 더 이상 내게는 당장에 닥친 과업이 없는 것 같아 잠을 청했다. 태생이 우주로부터인지라,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한 나로서는 일 또는 침묵밖에 몰랐고, 침묵은 곧 잠으로 통용되었다. 저 시린 혹은 뜨거운 공허함 속에서는.

 


----X:O / OO / XO

 

침묵을 푼 건 아마 이 행성의 대륙이 셀 수 없이 뒤틀리고 나서일 것이다. 종족 존속이 어려울 정도로 이상하리만치 커진 어느 조류의 날개를 적당히 줄이고, 침엽수 생태계가 파괴될 정도의 용각류龍脚類 번성에 대해서는 용각류들 스스로도 터무니없이 길어진 목의 길이에 각종 생물학적 질병을 수반하고 있었으므로 특별히 체중이 많은 종에 한해서만 멸종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나머지 아종亞種에 대해서는 무난한 균형이라 생각되어 놔뒀다.

 

생각해보니 내가 곧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녀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인식할 수 있는 걸까? 용각류 중 우월한 목 길이를 가진 종이 서서히 멸종해 가는걸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온도와 습도의 균형을 바다 한가운데의 태풍이 오른쪽에 있는 대륙을 휘젓는 것으로 맞춰감과 동시에 나는 그 궁금증을 되씹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곧 지난번과 같이 비정상적인 기온변화가 있을 것 같다. 균형에는 맞지 않는 일이지만, 내 안의 그녀가 이르길 그것은 먼 미래의 균형에 관여하는 일이라 하였다. 고로 나는 개의치 않고 다시금 침묵하였다.

 


---OO:X / OO / OO

 

그 먼 미래로 흘러가는 불균형이 몇 번이나 더 있은 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자그맣고 털 난 피조물들이 희뿌옇게 대륙을 채울 정도로 번성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습성을 대군집大群集에서 소군집小群集으로 조정하였고, 곧 하위 생태자가 최상위 생태자를 덮치는 일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거대 생물의 시대는 시행착오를 거쳐 지나갔고, 이제 한 군락으로 지역 생태계를 위협하는 정도의 거대 생물은 탄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일이 다듬고 깎고 줄이고 늘이고 찌우고 덧대고 죽이고 빚으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모든 생물들을 균형 잡힌 하나로 대체하지 않는 거죠?


그러자 그녀가 내게 빛을 내리며 일렀다.
창조자의 의무란다. 창조자는 모든 것을 빛내며, 최대한 적은 것을 그늘지게 하고, 최대한 넓은 곳에 그 빛을 내리느니라. 네 물음은 일단 빛은 하나의 빛깔로서 기워져 있는 게 아니라는 이름에서부터 대답할 수 있느니라.

 

그녀가 그렇게 이르자, 곧 그것이 참되게 되었다.

 


---XX:O / XX / OX

 

그녀의 이름이 있은 후로 단 한 순간도 난 침묵을 행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이른 것들은 내게 나 자신이 되어 지킴과 수행을 강요받듯 느껴졌다. 모든 것을 빛내라. 모든 피조물들은 적어도 하나씩의 빛을 품고 있게 되었다. 최대한 적은 것을 그늘지게 하라. 모든 피조물들은 많아야 다섯 이상의 천적을 갖게 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균형에 의해 그 불리한 시대와 장소를 타고 난 피조물이라 할지어도 그늘에서까지 빛을 뽑아다 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넓은 곳에 그 빛을 내리라 한 이름에서 난 다른 행성의 예와는 다르게, 나는 저 370 하타나 되는, 대륙 사이에 끼여 솟아오른 웅장한 산맥의 꼭대기에서부터, 537 하타 깊이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까지 생명의 빛을 내렸다.

 

날개달린 것들은 가급적 곤충과 열매, 풀뿌리를 먹도록 하여라.
내가 그렇게 이르자, 곧 그렇게 되었다.
무리 짓는 것은 섭리에 따라 그 이득만큼의 단점을 가지리라.
그렇게 이르자, 곧 그렇게 되었다.
하나를 버리면, 하나를 얻으라.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처럼 참되지는 않았다.

 


---XX:X / XO / XO

 

조각칼을 쥐듯 쥐되, 그것에 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말도록 하여라. 생명을 다루는 것은 마치 네 손아귀를 암컷의 자궁과 같이 하여, 그 안에서 웅크린 아기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스러워야 하느니라. 내 안의 그녀가 말했다. 오두막 안의 온도가 조금 올라가 후끈거렸다. 아마도 조만간 어딘가에 화산이 폭발할 모양이리라. 눈을 감고, 손을 들어올렸다. 우상귀에서 좌하귀로 날을 세워 그었다.

밭을 일구는 한 종족이 보였다.

 


--OXX:O / XX / OX

 

첫 번째로 문명에 의해 멸종한 종족이 보고됐다. 나는 열대우림의 한 구석진 곳에 하나의 씨앗을 심어, 비를 뿌렸다. 조만간 싹이 트리라. 그녀는 자그맣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온 우주가, 들이쉬고, 내쉬었다.

 


--XOO:X / OO / OX

 

 

바다의 왕자 하나가 문명의 창날 아래에 모습을 감추었다. 난 그 가녀린, 명이 다 한 종의 거두어진 씨앗을 조심스레 손아귀에 담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불렀다.
이 아이를 어찌 할까요?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일렀다.
가게 두거라.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간결함과, 냉정함이 이름 속에 스며들었다. 닿아온 차가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대로 손아귀에 담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따스한 한 종의 응축된 씨앗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뱃속을 열어 그 안에 살포시 놓고 닫았다. 따스함이 온 몸에 퍼졌다. 조만간 싹 틔울 날이 있으리라.

 


--XOO:X / OO / XO

 

문명으로 번성한 한 종족에 관심을 그다지 갖지 않는 것이, 족장의 관리자로서 내려온 자의 합당한 태도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문명보다는 원초적인 태초의 따스함을 품은 아이들이 더 관심이 갔기 때문이다. 그녀의 것. 아무 것도 스치지 않은, 오직 그녀 자신이자 족장의 바람과 흙과 물과 비와 눈과 천둥과 화염이 스친 것만이 사랑스러웠고 손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성스롭게까지 내게 비쳐지는 이 피조물들에 상처를 내는 문명이 증오스러웠다.

 

이 나의 감정이 합당하고 옳은 것인지 그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답이 없었다. 족장에게 물어볼까 했지만, 우주의 가칙家則에 예외인 이 족장은 권한이 없는 것인지, 혹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항상 침묵했다.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항상 그랬듯이,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듯, 하나의 생명의 씨앗이 거두어져, 내 안에 품어졌다. 나는 내 종족의 최초로 눈물을 쏟아낸 자가 되었다.

 


--XXX:X / OO / OO

 

충분히 수고했다. 이제 내가 얼마일지 모를 시간동안 그랬듯, 너도 충분히 자둘 필요가 있어 보이는구나.
그녀가 일러왔다.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두리번거리곤 대답했다.


어머니.
난 어느새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전 잘 수가 없습니다. 모든 생명이 균형 잡힌 것이어야 하듯 모든 생명의 죽임과 죽음은 합이 영零이 되어야 하늘, 어찌하여 어머니께선 저 하나 아래에 스러진 수백의 것의 합을 영이 아니라 부정하십니까. 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답하였다. 우주가 하나의 눈이듯 한번 크게 끔뻑거렸다.
흐르는 물과 같이. 뻗는 뿌리와 같이. 박히는 번개와 같이. 솟아오르는 화염과 같이. 자연스럽게, 네가 원하는 대로 흐를 것이니라. 그러니, 어서 자두어라.

 

그녀가 그렇게 이르자, 곧 그것이 참되게 되었다.

 

 

 

-XXXX:X / XX / XX

 

 

눈을 떴다. 오두막이 너무도 뜨거웠다. 나는 눈을 감고 온도를 낮추려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눈을 떴다. 내가 누워있는 돔의 벽 곳곳에 툭 튀어나온 송곳과 그것을 중심으로 퍼진 균열이 보였다. 붉은 빛 세상이 눈에 띄었다. 풀 한 포기 없이 파인 대지와, 송곳과 어느 둔탁한 덩어리가 땅을 파고든 모양만이 대지에 남아있었다. 대기는 검게 물들어 있었고, 나의 마지막 씨앗들이 내려갔어야 할 그 마지막 숲도 헐려있었다.

눈을 끔뻑거렸다.
어머니?
그녀는 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세차게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무언無言이었다. 균형은 없었다. 천칭을 대볼 생명은 오직 셋뿐이 남지 않았다. 그중의 하나를 보자마자, 나는 솟구쳐 오르는 무엇인가에 휩싸였다.
본래의 모습 따위는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생명이 아닌 생명이었다. 무엇인가에 생명을 감싸, 그것을 자신인 마냥 으스대고 다녔다.

어머니.

그녀는 여전히 무언無言이었다.

 

 

 

 

XXXXX:O / OO / OO

 

조각칼을 쥐듯 쥐되, 그것에 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말도록 하여라. 생명을 다루는 것은 마치 네 손아귀를 암컷의 자궁과 같이 하여, 그 안에서 웅크린 아기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스러워야 하느니라. 내 안의 그녀가 말했다.

 

손아귀.
그 안에서 웅크린 아기.
자궁.
생명.
칼.

 

눈을 떴다. 송곳은 온데간데없었다. 대기는 하이었고, 비가 내려 바다를 씻기고 있었다. 족장은 벗겨진 가죽을 서서히 끌어 모아 추스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손에 가득 감겨있던 가죽의 한 뭉텅이를 그에게 내어주고, 미안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아무런 변화 없이, 그 가죽을 받아 살을 이었다. 여기에 풀을 심어라. 단지 이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내가 도륙낸, 기억나지 않는 무엇인가의 수컷과 암컷이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손아귀 안에 웅크린 아기. 생각했다. 기억했다. 저 둘을 무無로 돌려버리려고 하기 직전에, 나는 그 둘의 눈물과, 서로를 껴안은, 잘 알지 못하는 어느 감정이 내 가슴을 파고드는 날카로움을 기억했다. 비교해보니 내가 그녀에게 품은 감정과 비슷했다. 그들의 생명을 감싼 어느 반질반질하고 딱딱한 뭉텅이들을 보자, 그녀의 말이 떠올라,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손아귀 안에 웅크린 아기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이 족속들이 나의 씨앗과 족장의 모든 것과(심지어 오두막까지도), 그녀의 업적을 결딴낸 것에 대해 기억해내는데 성공했다.

 

손을 들어 그들을 가리켰다. 족장은 내 옆에 웅크려 앉아 아랫부분의 가죽을 잇다가, 나를 올려다보곤, 다시 가죽을 이어갔다. 허공에 하나의 점을 찍고 들려있는 손의 끝은 처참함을 품고 있었다. 떨었다.

 

손아귀에 웅크린 아기.
그녀의 자궁 안에 웅크린 내가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앉아 그대로 잠을 자기로 했다. 너무도 생각할게 많았다. 너무도 생각하기 싫었다. 결국, 잠을 자면 해결되는 것이다. 잠을 자고 싶었다. 잠을 잔다. 눈을 감는다. 눈을 뜬다. 족장이 다 이어진 몸을 둘러보다 일어나 몸을 흔든다. 풀잎이 흔들리며 바람소리를 낸다. 나머지 둘이 눈을 뜬다. 쪼고, 다듬고, 파고, 돌리고, 붓고, 치고, 으깨고, 치댔던 내 모든, 그들에게서 알게 된 그녀를 향한 나의 감정의 귀결.

그들이 눈을 뜨고,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서로의 다리를 꼬고, 하나는 솟구치고 하나는 누워, 풀잎을 스치며 족장의 배꼽 위를 구를 때.

 

나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품에 안기어, 쓰다듬어지는 머리를 느끼며.
오두막의 불을 껐다.

 

 

 

 

 

태초의 셀 수 없는 영겁이 지나고 난 다음.

온 우주는 무한한 생동과 정적을 내포한 부동不動중이었다.
다음 날의 다음 날의 다음 날이 반복되어가며 우주, 즉 그(녀)는 서서히 굳어가는 몸을 어루만지다 천천히 식어갈 준비를 했다.

만 아홉 번째로 식은 족장의 오두막을 내다보자,
웅크린 채 돌이 되어 굳어있는 파견자와 그 옆에 서있는 족장이 보였다.
족장은 그(녀)가 보였는지, 고개를 쳐들곤 끄덕였다.
이 행성의 세 번째의 지혜가 사라졌소. 바다에서 무리 짓던, 곧잘 웃고 날 간질이던 그 고래의 아종亞種과, 당신의 자식이 멸절하려다 관둔 두 발 포유류. 그리고 이, 당신의 파견인.

 

그(녀)는 웃었다.
드디어, 알게 되었다.
크게 웃었다. 온 우주가 진동하였다. 깨어진 부동에 씨족과 족장들이 화들짝 놀라 살짜쿵 움직였지만, 별다른 이변은 없었다.

 

드디어, 운명이라는 것을. 순환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균형과, 가운데와, 적당함과, 중간과,
쓰여짐과, 사슬과 띠와, 운명과, 순환이라는 것을 알았다.

 

온 우주의 창조자답지 않은, 치우침을 품고서, 그(녀)는 차갑게 식어갔다.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만 아홉 번째의 파견자를 끌어안고서.

 

족장이 마지막 두 생명을 내려다보았다.
잠든 암컷의 허벅지에 흐르던 하얀 액체를 풀잎으로 닦아내었다.
족장은, 싸늘하게 식은 오두막에 서서, 어느 갈라지고 오래 된 돌덩이를 내려다보며 웃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END.
2013. 02. 06.
01. 32. 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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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작품/짧은 글 2013. 11. 23. 03:49

바람이 서느렀다. 이태까지의 바람과는 서뭇 다른 느낌이었다. 살갗을 넘어 뼛속 안에 닿아오는, 차가워오는 느낌이 없이 내 피부가 애초에 서늘했던 듯 느끼게 만드는 바람이요 흐름이었다. 이따금 그 것들이 흘러가다 나라는 둔덕을 넘어 갈때면 그들은 내게서 체온을 살며시 앗아갔다. 나는 죽은지 꽤 된 시체마냥 서늘해진 팔뚝을 비벼만지며 날씨를 즐겼다. 손바닥에 긁히는 팔의 살갗이 차가움에 달궈져 당기었다.

안개가 진함과 옅음의 차이가 없이 고르게 뿌리어있었다. 살며시 보이는 저 너머의 빌딩들이 내 고향에서의 풍경처럼 산이었으면 싶었다. 그 중간, 안개에 가리워진 것이 호숫가의 둔덕일 것이며, 안개가 서서히 저녁이 되어 걷어지고 나면 커다란 호수가 잔잔히 너울질하며 수면에 떠있는 풀잎이며 개구리밥을 좌우로 저울질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도시 한복판. 내가 그리던 그 광경은 이미 멀리 떠나왔고, 그리고 나는 방금 시체마냥 식은 팔뚝을 비비며 그 시림이 마찰열을 견디다 못해 가슴 한복판으로 가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추우니 여느 날처럼 반팔 입지 말고 잘 입고 다니라고 그녀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뭐라고 보내올까. 여느 때처럼 그래 고마워. 라고 보내올까. 아니면 이제 그만 연락해. 전에도 말했잖아. 자주 하지 말라고. 라고 할까.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어렸을 적 그 때 그 곳에서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던 그 서늘함을 온몸으로 맞서는 것이 너무 슬프다는 것 뿐이었다.

세월이 지나 나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데도 자라난 내 몸을 보고는 한기가 똑같이 자라나 나를 덮쳐온 성 싶었다. 그리고 난로는 있었지만, 그 난로에 딱 들어맞는 땔감은 저 멀리. 닿아본 적도 없는 호숫가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닿지 못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호숫가에 앉아서 짙게 깔린 안개를 보며 마음을 고이 접어 돛단배를 만들었다.

띄우지 않고 구겨 버린 종잇배들이 내 옆에 수없이 널브러져 있었고...


2013 05 29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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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작품/짧은 글 2013. 11. 23. 03:43
유리창에 영근 빗방울은 하천줄기마냥 여러갈래로 나뉘어 흐르다가 이내 실리콘으로 막음질된 모퉁이에서 흘러내려 사라졌다. 뭉게져 흩어져 흐름으로, 흐름에서 다시 뭉게져 하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 누구의 무언가와 같았다.

유리창에 대본 손에는 한기가 어렸다. 조금은 아득히 먼 어딘가에 지독한 추위가 있는 느낌이었다. 한기는 너무나도 선명해서 그 선명함으로 나를 베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선명함 자체에 얼음 송곳이 돋아 있는 듯이.

어린 아이의 것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항상 이 추위 앞에선 나는 브람스에서의 그 아이의 모습이다. 한없이 작았다. 우주적인 존재 앞에 선 느낌이었다. 절대영도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지독한 추위였지만, 결코 내가 죽거나 다치지는 않았고, 그저 그 선명함에 베여가며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할 뿐이었다.

어딘가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리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피겨 선수를 보던 시선이 따뜻한 스프와 양돈까스로 돌아갈 적에, 상처는 지혈되고 나는 그 아문 상처 안에 그 한없는 차가움의 씨앗을 문 채 그렇게 자랐다.

이따금, 비가 너무도 맑게 내려 운동장에 먼지을 흩뿌릴 것만 같은 날씨에, 축축하지 않고 선명하고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다보면, 문득 가슴 한 켠에 바람이 불어 내 살을 비집고 타들어온다.

그럴때면 그 선명함을 떠올리고는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창에는 아직도 수증기가 서려 얕게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손이 더러워진다며 야단치는 어머니를 듣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그 빳빳하면서도 사르륵거리는 냉기를 조심스래 활짝 핀 손바닥으로 훑어 피부로 그 맛을 봤다.



어느샌가부터, 유리창은 더더욱 차갑고 선명해져만 갔다. 내가 어른이 되고 부터는 더더욱...


2013 05 10
02 43

[N]

 

일일사진

작품/소설 2013. 11. 23. 03:28
사진관의 셔터를 열었다. 잠갔던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고, 컴퓨터와 프린터를 켜고, 배경판과 조사기를 체크했다. 삼각대를 바로잡았고, 셔터를 눌러보았다. 오늘도 필름에는 한 점 티없이 깨끗한 일상과 같은 모습이 찍혀나왔다. 뒷문을 열고 나가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다시 들어오니 한 젊은이가 카운터 앞 소파에 앉아있었다.

사진 찍으러 왔나? 나는 선반 위에 놓인 자일리톨을 한 움큼 털어 씹으며 젊은이에게 물었다. 둥글둥글한 인상이었다. 조금 살이 붙어있었고, 그 살들만 특히 볼살을 조금 빼면 날카롭고 멋있는 생김새가 될 것 같았다.

네. 여권사진 찍으려고요. 젊은이가 묵직하면서도 나긋나긋한 톤으로 말했다. 전화선 너머로 여자 여럿 울렸을 목소리같았다.

저기 앉게. 나는 사진기 앞에 있는 삼발이 의자를 가리키고는 목을 돌려 뼛소리를 내곤 잠시동안 바깥을 바라보았다. 비둘기 두세마리가 저 골목길 입구에서부터 날아 전신주를 훌쩍 넘어갔다. 몸을 돌려 사진기 앞에 섰다.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반쯤 눌러두었다.

좀 더 웃어. 그려. 그렇지. 인상 좋네. 찍겠네. 팡. 부드러운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스쳤고, 잠시 빛이 지나갔다. 컴퓨터모니터에 나온 젊은이의 모습은 꽤나 훤칠했다.

잘 나왔네. 몇 장 뽑을텐가? 그렇게 묻고는 마우스로 포토샵 작업을 좀 하려던 찰나, 젊은이가 내게 말했다.

포토샵 해주지 마시구요, 나온 모습 그대로 할게요. 그래, 뭐, 그렇게 해달라는 사람도 몇몇 있으니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몇장이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젊은이의 말이 곧 이어졌다.

여권 사진은 원래 사진을 축소한거죠?
어. 그렇지. 그게 왜?
그럼 방금 찍으신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뽑을 수 있을까요?

잠시 벙찐 나는, 이윽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이 젊은이, 보기와는 다르게 어디가 나사가 풀린건가? 아니면 불치병? 어찌되었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이, 젊은 나이에 무슨 사정인진 모르겠다만 그럴듯한 복장을 하고 찍어도 모자랄 생애 마지막 사진을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로 하겠다고?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앞으로 또 찍으러 올겁니다. 전 예전의 저와는 다르게 매일매일 살이 빠질거에요. 여태껏 살이 좀 있었던 제 모습을 마지막 모습으로 내걸고 싶진 않습니다. 저도 저 나름, 살 빠지면 괜찮은 인상이라 생각하거든요. 기왕 죽을거면, 제일 멋있는 모습으로 남고 싶지 않을까요?

젊은이의 말에 나는 망치로 후려쳐진 듯 잠시 생각에 공백이 생겼다. 공백이 지나가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불치병이로구나. 살이 매일 빠진다는 건.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말 멋진 젊은이로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선반 위의 설탕과 프림을 컵에 풀고 커피를 타서 그에게 주었다. 설탕이 들었음에도 그는 사양치 않고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이곤 소파에 앉았다. 설탕을 거부하지 않다니, 많이 심한가보다.

암인가? 몇 번의 홀짝임이 지나고 내가물었다.
네. 뇌종양입니다. 이미 끝자락이죠. 여기 오려고 몰핀을 두 배나 투여받고 왔어요.
어째서 이런 구석진 곳에?
그야, 이런 사연을 얘기하면서 바람잡을 곳은 당연히 낡고 오래된, 나이들고 멋진 백발을 가진 사진사가 있는 사진관 뿐이니 아니겠어요?

나는 간만에 호쾌하게 웃었다.



다음날. 말했던대로 젊은이는 왔다. 어제보다 약간 핼쓱해진 채. 유리문을 여는 것도 힘겨워보일 정도였다.

괜찮나?
네. 그냥 좀 기운이 없을 뿐이에요. 토스트 사왔는데, 드실래요?
고맙네. 커피는 내가 타지.

젊은이나 나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아침식사였던 듯 하다. 끼니를 마치고, 의자에 앉은 젊은이는 이리저리 머리를 만지더니,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었다. 가장, 최대한 아름다운 자신을 누군가에게 기뻐하며 보여주려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야말로 지상 제일의 웃음이었다. 나는 간만에, 젊은 날 지금은 세상에 없는 벗들과 탑골 공원에서 노인들의 사진을 찍던 나날과 같은 기쁨, 사진사의 보람을 느끼며 셔터를 눌러댔다.

기왕 피할 수 없다면 좀 더 좋은 걸 먹고 다니지 그러나?
사람이 무슨 대소사가 있다고 일상이 바뀌어지진 않더군요. 그녀에게도, 보여지진 않겠지만 제 일상, 저 자신 그대로 살다 가는 걸 보여주고 싶고요.
그녀를 위해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영정사진을 찍으려는건가, 자네?

그는 잠시, 인형줄이 끊어진 듯, 벽에 고개를 기대어 내 머리 위의 시계를 보다가, 이내 정신이 돌아온 듯 말했다.

네. 그녀에게만큼은 그 누구보다 멋진 삶을 살다 갔음을. 저를 잡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줄 정도로 멋진 저 자신만을 보여줄겁니다. 비록 저는 없겠지만요.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젊은이는 아침 일찍 사진관의 첫 손님이었다. 때로는 첫 손님이자 동시에 마지막 손님이었던 날도 있었다. 젊은이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진다기보단 알맞게 야위어가고 있었다. 본래의 그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본질 그 자체인 듯 느껴졌다. 곧 늘그막에 접어들어 가게를 닫을 것이었던 내게 그 젊은이는 마치 예수를 보는 기분을 들게 하였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젊은이는 빛을 잘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애써 힘겹게 웃었다. 미소지었다.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이런 멋진 사내를 힘겹게 하는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이런 사내가 자신의 마지막을 병실에서의 초췌함이 아닌 식장에서의 수수한 편린으로 알리고 싶을 정도로 생각을 해주는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

젊은이는 그저 물을 때마다 행복한 꿈을 꾸듯, 죽은 듯이 눈을 감고는 입가에 함박웃음을 짓다 다시 살아날 뿐이었다.

젊은이. 그러고보니 이름을 알지 못했구만. 이름이 무언가?
아저씨. 제게 이름은 중요치 않습니다. 곧 죽을 사람인데, 이름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커피잔을 잡은 그의 손이 흔들렸다.

뭐 그래도, 알고는 떠나보내야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단지, 제 모습만을 기억해주세요. 저 스스로가 보기에도, 오늘의 저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제 모습 같거든요.
젊은이는 하느랗게 미소지었다.

그럼, 뽑아갈게요.
그러게. 당장이라도 더 야위면 슬슬 안쓰러워질 것 같은 느낌이야. 오늘이 딱 적당해.
고마워요.

나는 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내의 사진을 열 장 뽑아다주었다. 그리고 내가 예상했듯, 당연하게도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장만을 집었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했다.

얼마죠?
어이, 젊은이. 나는 자네가 내게 돈을 받아가야한다고 생각허이. 늘그막의, 모든 꿈도 열정도 식은 황혼의 나날에 자네같은 멋진 불나방을 만나 마음에 요기를 했는데, 내가 무슨 낯으로 돈을 받겠나? 그냥 가게.

젊은이는 내가 액자 안에 넣어준 사진을 허리춤에 안고는 유리문을 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문 밖에서 안으로 쏟아져오는, 저 멀리 골목 입구에서부터 깔려오는 노을의 빛을 등지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처음 보았던,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커피, 맛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문을 닫고, 빛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카운터에 서서 양 손바닥을 유리에 짚고는, 멍청히 서서 그가 남겨두고 간 빛의 자락을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사라질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여느날처럼 셔터를 열고, 잠겨있던 문을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는 찰나, 내 발에 뭔가 턱하고 걸리는 소리가 났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하얀 편지봉투가 있었다.

나는 편지를 집어들고는 카운터 위에 놓고, 모든 해왔던 점검을 마치고서야 편지를 들고는 뒷문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댔다. 편지는 깔끔하게 봉이 뜯어졌다. 나는 봉투를 조심히 손가락 사이에 끼우곤 안에 든 편지를 읽었다.

자식. 가지도 않을거 알면서 멍청한 짓을.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담배를 손에 잡았다. 지붕 틈새로, 처마자락에 열린 고드름 때문에 굴절되지 않은 사이로 자그망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매일매일 맑았었다. 누구 말마따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젊은이의 사진을 뽑아 금테를 두른 액자에 넣어 사진관 쇼케이스에 비스듬히 세워놓고는, 셔터를 내렸다.

오늘은 평소에 피우지 못한 밀린 담배의 잔량을 해결해야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2013 04 13 토
02 20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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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을 배달받은 어느 날의 사나이

작품/소설 2013. 11. 23. 03:25

수업 중이었다. 가늘게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잠에서 반쯤 깼다. 졸고 있었던 걸까.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를 봤다.


02-332-2700

고시원입니다. 택배가 왔으니 받아가십시오.


뭐지. 택배? 택배 올 일이 없는데. 그렇게 잠시 갸우뚱하고는 잠시 눈을 비볐다.

아직 꿈에게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잡힌 상태였던 나는 이윽고 그에게 이끌려 그대로 깊은 잠에 들었다.


문득 후려쳐진 의식에 놀라 깨어나보니 아무도 없었다. 강의가 끝나고 십오 분 쯤 흘렀다.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휑한 강의실의 광경이 보였다. 맨 뒤에 바퀴 달린 거치대 위에 올려져 있는 갖가지 엔진들이 줄지어 서 기름 냄새를 바람에 흘리고 있었고, 파란 합성섬유를 깐, 유연한 디자인을 한 의자들은 하나같이 개성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정지해있었다. 문고리를 돌렸다 뗀 손에는 살며시 스쳐 지나갔던 스티어링 오일이 묻어 있었다. 기름때에 찌든 작업복을 락커룸에 넣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바로 앞에 있는 우레탄 농구장에서 한 쪽 농구대에서 개인전을 하는 한 무리의 학생이 보였다. 오늘도 여태까지와 같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은 마치 애초부터 난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회색을 띄며, 집중된 시선 속에 찬찬히 빛을 잃어갔다.

눈을 감았다 떼자, 다시금 연회색의 하늘이 보였고, 그와 동시에 나는 오늘 하루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여태까지와 같이. 여태까지의 몇 년간 들었던 느낌 이었다. 얼마나 많은 나날을 잃어버리고 산걸까, 나는.


밤 여덟 시의 길을 걸었다. 시간과는 맞지 않는, 어둡지 않고 탁해서 평소보다 조금은 밝은 하늘이 어색했다. 잃어버린 시간의 틈새 속에 끼인 듯한 느낌이었다. 길은 굴곡이 있어 살짝 숨이 찼고, 지나가던 예쁜 여자의 향이 스칠 때 숨을 크게 들이쉬는 순간이 되어 살짝 흠칫했다. 오른쪽, 자그만 대학가 상가에 늘어선 삼겹살 집 세 군대에서 여러 부위의 돼짓기름 냄새와 파 냄새가 섞이어 났다. 저 멀리에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크락션을 울리던 차의 정체는 사고가 난 SUV를 끌고 가던, 비상등을 킨 푸른 레카차였다. 조금 더 걸으면 오른 쪽에 정문을 오롯이 닫고 있는 초등학교의 바로 옆 문구점에선 주인이 키가 작아 닿지 않는 셔터 끈을 까치발을 하며 간신히 잡아내렸고, 언제나처럼 그 모퉁이에서 언제나 쌓여있는 쓰레기를 먹는, 진한 회색의 비둘기는 인도에서 발 밑, 도로를 쳐다보고는 모둠발로 뛰어내려 총총이며 걸어갔다.


언제나 풍경만을 보고 있다. 그 풍경은 항상 내게 말이나 글로서는 남지 않으며 오직, 그것도 슬프게 오롯이 기억으로만 남는다. 지나온 나날의 비디오 테잎은 서랍장을 채우고도 남아 이제 집 안의 공간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렇게 난 지쳤다. 테잎을 옮겨 적어야 이루어지는 나의 소망은 이미 저 먼 선 캄브리아기에 멈춰서서 고고히 금이 간 채 하찮은 듯이 나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날, 오돌오돌 떨던 몸을 겨우 이끌고 지친 듯 문을 열어 난롯불 앞에 앉았을 때 지나온 눈길의 고난을 잊는 것처럼, 말 그대로 눈 녹듯이 나의 하루하루의 가치와 의미는 사라져갔다. 그저 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된 것이다. 하루하루, 찍어서 살며시 잡고는 팔랑팔랑 흔들어 압정에 꽂아 어느 한 구석의 벽에 찔러넣고는, 그 사진만을 보며 매일같이 생각하고 느끼는 나 자신이 보인다. 하얗고 빈 방 안에서, 그 누구도 보러 와주지 않는 나 혼자의 박물관을 지키며…….


골목에서 나와 금요일 밤의 이태원의 거리를 걷는다. 연인. 삐끼. 상인. 외국인. 클럽 매니저. 섹스숍의 전단지. 바닥에 널브러진 뉴 인터페이스 포스터. 어느 바에서 흘러나오는 프랑스 여 가수의 꾸밈없는 목소리와 그 옆의 옛날 클럽 비트인 We are electric의 스쳐가는 한 부분.


위 아 일렉트릭.

아무 의미도 없는 한 구절이 그렇게 내 속을 흐르며 헤멘다. 걷는 거리마다 연인들이 서로의 겨드랑이에 팔을 얽거나 서로의 손바닥에 손바닥을 포개어 놓은 모습이 지나간다. 삐끼는 나를 제외한 앞뒷사람에게만 삐끼질을 했다. 한 외국인 남자가 한국인 여자를 꼬시곤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해는 저 멀리의 이름 모를 산의 둔덕에 손을 짚고 부드럽게 월담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거리. 늘어선 프랜차이즈 옷집들과 음식점들. 외국 음식 전문점. 클럽. 지하의 클럽. 상층의 클럽.

IP부티크 호텔. 해밀튼 호텔. 이태원 역. 버스 정류장. 외제차.


그 모든 네온과 LED와 HID와 모닥불과 백열등을 지나서. 온누리에 내린 빛과 영광의 곁길, 가파른 언덕으로 올라가는 포장이 좋지 못한 길 위에 내가 있다. 빛도 영광도 그 모든 것도 닿지 않는 곳에, 관보다는 조금 넓은 방 한 칸에 나는 그렇게 숨죽여 하루하루 찍었던 사진을 꺼내어 늘어놓고는 혼자 소리죽여 울고 웃는다…….


정작 슬픈 일은, 현상액이 없어서, 얼마 전부터 저 먼 날의 잊고 싶지 않은 기억과 마음들이 서서히 우그러들어 먼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다른 공기가 흐르는 보이지 않는 벽의 결계의 손잡이를 돌려 열고는 발을 들여놓았다. 좁디 좁은 통로와, 그 통로에서 한 번 왼쪽으로 돌아 세 걸음을 걸으면, 나의 현상실이 있다. 침대 위에 가방과 겉옷을 벗어 내려놓고 문을 닫았다. 다시 앞으로 다섯 걸음. 왼쪽으로. 앞으로 열네 걸음. 오른쪽에 있는 관리실의 문을 열고 총무에게 택배를 받았다. 책 한 권 크기의 자그마한 택배 상자였다. 작은 것 치곤 무거웠다.


그대로 방금 전 왔던 길을 되돌아가 방문을 열고 침대 위에 택배를 던지곤 의자에 앉아 상반신을 길게 폈다. 책상 아래 냉장고 때문에 다리는 침대에서나 필 수 있다. 컴퓨터를 켰다. 오래 된 컴퓨터라 팬이 잠시 굉음을 내며 웅웅대더니 잠잠해졌다. 그 굉음의 잠깐동안 옆 방에서 벽을 두들겨왔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잠시 얼마 높지도 않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보다 높은 천장을 바라본지가 얼마나 됬는지가 기억이 났다. 몇 년 전, 전주의 그리운 집에서였다. 그 때 올려다본 천장은 참 많은 생각을 들게 했었다. 천장과 얘기를 했고, 천장을 보며 살그레 웃었었다. 천장에 나 자신이 비쳐보이는 듯 해서 그 곳에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다 대려고 하면 슬퍼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약간 베이지 빛이 도는, 까슬까슬한 벽지가 발라져 있는 채로 정지해있는 천장이 내 모습과 같았다고 생각이 들었었을까.


문득 택배가 생각이 났다. 바로 팔을 뻗어 잡고는 무릎 위로 올려놓고 얼마 전 깎은 손톱으로 힘겹게 테이프를 뜯었다. 골판지가 해체되고 난 자리엔 여태껏 만져본 적 없는, 아주 부드러운 검은 천으로 겹겹이 싸여진 무거운 무엇인가가 있었다. 뭔가 중대한 의미가 있어보이는, 혹은 있어보이도록 생겨먹은 그 검은 천을 천천히 걷어내자, 권총 하나가 보였다.



무슨 권총인지는 모른다. 게임에서 봤던 것 중에서 기억나는 이름은…콤팩트? 무슨 콤팩트인진 모르겠지만 콤팩트와 똑같이 생겼다. 아니, 여튼간에 중요한건 왜 권총이 나한테 왔냐는 거다. 어디의 누가 언제 어디서 보낸 것일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오발송? 아니, 애초에 대한민국에서 권총이라는 흉기를 누군가에게 택배로 보내는게 가능하나? 비록 보낸다 쳐도 그런 물건을 보내는데 실수를 해서 나 같은 사람에게 온다는 것 자체가 또 가능할까?


여러가지 망상과 잡념이 머릿 속을 옭아메어갔다. 나는 기름냄새가 나는, 거의 새것과 같아보이는 권총을 양 손으로 으스러질 것만 같이 세게 쥐고는 한참을 제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 생각이 미쳤다.


총알이 장전되어 있을까?

어느 곳을 누르면 탄창이 나오는지 몰라 잠시 헤메다가, 손잡이 근처를 마구잡이로 문대다보니 탈칵 하고 탄창이 열렸다. 조심스래 꺼내자 금속성의 긁히는 소리가 났고, 곧바로 탄창이 빠져나왔다.


안이 비어있었다. 잘 보이지 않아서 형광등 바로 아래 쪽에 빛을 받게 해보자, 딱 한 발이 맨 아래에 간신히 보일 듯 말 듯 장전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잠시 가만히 멈춘 채 앉아 있었다. 무엇인가 많은 생각이 들지만 정작 그 생각이 무언지를 보려고 하면 어딘가로 사라져 생각할 수가 없었다. 권총을 잠시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곤, 머리를 싸매쥐고는 한번 뒤로 쓸어넘겼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죽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이 났다. 잘 살아오고 있던 어느 나날의 밤에 내게 실수로 배달되어진 권총이 나에게 오만가지 추억과 기억을 끄집어내게 만들고 있었다. 잘 살아오고 있던 어느 나날의 끝자락에 마침맞게 내게 배달되어진 권총이 나에게 두 가지 생각과 그 결과의 파동만을 생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그러들었던 먼지들조차 다시 모여들어 사진이 되었고, 잃어버렸던 추억과 기억들은 하나하나 세세하게 되살아나 숨쉬었다.

되짚어보자. 권총이란걸 안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이 것으로 죽음을 맞든, 혹은 그저 갑자기 나에게 삶의 존속여부를 시험에 들게 한 이 불청객을 무시하고 앞으로의 나날을 더 살아가든, 일단, 지나왔던 나의 소중한 것들을 되짚어보기로 결심했다.



언제인진 모르겠지만, 내 인생 최초의 기억 때부터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있었다.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같은 차에 타 어딘가에 가고, 같은 집에서 잠을 자도 두 사람은 어딘가가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12mm 볼트에 13mm 복스알을 가져다 댄 듯 어딘가가 헛돌고 맞물리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서, 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무렵. 고등학교 이 학년 때에 나는 두 사람이 진작에 헤어진 것을 알았다. 아마 그 최초의 기억으로부터 멀지 않은 순간이었던 것으로 안다. 몇 월 몇 일인지까지도 기억하고 있었지만, 밝든 밝지 않든간에 내 자신 그 자체의 것을 잊지 않으려 하는 나 자신조차도 그 사실은 잊고 싶었던지, 내 나이 몇에 일어난 일인지도 모른다.


치졸한 이유로 왕따를 당했다. 초등학교 이 학년 때부터였다. 친구가 열 댓 명은 있었고, 반 애들과도 말은 하고 다녔다. 그저, 몇몇 일진들에게만 당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 동안 나를 좀먹고 얽메어오고 내 행동을 강제하여 마침내 지금의 나 자신에게 조건반사 비슷한 것을 일으키게 한 점까지, 그 녀석들은 나라는 존재를 파괴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방해하는데는 완벽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었다. 몇 년에 걸쳐 몇 명인지도 모를 그 녀석들은 지금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복수하고 싶어서라기보다, 그저, 이미 죽어버린 마음을 끌어안고 죽기 전의 감정으로 상처를 보듬어보려 해도 부질없는 짓이기에, 죽은 마음으로 생각한 거다. 참는게 좋은거다. 용서하면 이기는거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집안이 불우하다거나, 어딘가 아픈 과거가 있다거나…….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좀먹어가며 쪼그라드는 반쪼가리 천사, 점점 자라나는 반쪼가리 악마가 되어갔다. 원래의 의지를 꺾어 선함으로 돌려놓으려는, 비록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이 싫었을 뿐인 그 때의 생각은 점점 그렇게, 앞 면에서는 남을 용서하고 한없이 착한 나 자신을 보여주었고, 뒷 면에서는 한없이 어두운 자신을 끌어안으며 뜯어먹으며 그 피를 마시곤 아파서 울고 있었다. 스스로 너무나 외로워서 스스로를 물어 뜯어 살을 삼켰다. 따뜻한 피를 마셨다. 그렇게 하면 잠시라도 빈 가슴이 채워졌으니까.


가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몇몇 매체에서는 텅 빈 가슴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내가 겪은 바로는 사람이 정말 외로울 때는 가슴이 텅 빈 듯, 공허하게 느껴져서, 갓 탄 커피를 담은 머그컵을 가슴팍에 비비면 그렇게 따뜻하고 채워지는 느낌이 들 수가 없었다. 베개를 끌어안으면 그 안이 스며드는 듯 해서 행복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 때부터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의 정글을 살아가며, 반쪼가리 천사와 악마가 되었고, 그 외로움을 풀어가는 폴라로이드 인생을 시작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온전한 가족이 갖고 싶었다. 가족 구성원이 모두가 서로 정상이라면 그 가족의 일상은 어떤 것일까가 궁금했다. 서로가 웃으며 식탁에 앉은 채 농담을 하고, 생선을 발라서 올려주고, 소파에 앉아 과일을 깎아 나눠 먹으며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매일 아침 좋은 아침이라고 말하며 생긋 웃을까?


서로가 무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누가 먼저 일어나는지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 서둘러 먹고는 무미건조한 말 두 세마디면 집에서 벗어나 그제서야 그나마 개운한 마음으로 아침의 시린 공기를 마시면서 그 공기가 가슴팍에 스며들 때 애써 모른 척 하며 가야할 길을 마지못해 가는 것과는 얼마나 다를까?


오히려 나 자신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아니, 개의치 않는 것처럼 살아왔다. 어렸을 적부터 별명이 애어른이었으니까. 애어른처럼. 어른처럼. 모든 고난은 지나가리라. 참고 참으면 행복이 오리라.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백 번 세고 다시 이백 번 세면 끝나있을 것이다. 내가 참으면 나 혼자의 아픔으로 끝나지만 내가 참지 않으면 모두의 아픔으로 끝날 것이라는 생각. 나 자신도 챙기지 못했으면서 남을 챙겼던 나의, 지금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이타주의적 태도가 너무도 좆같았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이 수 만 번도 넘게 나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의 대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었다.

나 자신이 상처를 너무도 많이 입었으니까. 그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를 아니까. 남들에게 그런 상처를 입히는건 죽어도 싫어서였어.




좆까라, 병신아.

힘내라, 병신아.

아직 수 만 장 중에 한 장 뿐일 사진 하나를 움켜쥐고 나는 끅끅대며 소리를 죽인 울음을 울었다.






따돌림은 중학교 때도 계속되었고, 중학교 이 학년 때 즈음부터 글을 쓰는 것이나 책을 읽는 것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던터라 삼 학년 때는 점심을 굶고 도서관에 있었을 정도였다. 덕분에 오후 수업때는 배에서 자꾸만 소리가 나서 난처했던 적도 많았다. 그리고, 그 삼 학년에, 나는 사랑이란 것에 눈을 떴다. 이런 류였다. 누구 누구가 좋아한대요 라고 몰아세우면 당사자들은 정작 마음도 없어서 불편해하고 싫다고 손사래를 치고 화를 내지만, 그게 오래 되면 어느 한 쪽이나 드문 경우, 양 쪽 다 마음이 생기는 경우였다.


당연하게도 난 그 한 쪽이었다.

빼빼로 데이에 짝꿍이었던 그녀 책상 서랍 안에 몰래 넣었던 서투른 비밀 선물은 바로 들통이 나버려, 그녀가 직접 말하는 것도 아닌 그녀와 친한 여자애가 전해준 싫대. 라는 말과 함께 되돌아왔었다. 그리고 그녀는 많이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자신에게 고백을 했으니 불편할 수 밖에 없다. 내 잘못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을 품고는, 포기했다.


어느 가을 날, 아직 하복을 입을 때. 자고 일어나보니 삼 학년이 점심을 먹는 시간이라 층 전체가 비어있었(을 것이)다. 내 옆자리에는 그녀의 하늘색-파란색의 부드러운 면 체육복이 있었다. 변태적인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저, 마지막으로 그녀에 관한 무언가를 기억하고서 그녀를 내 마음 안에서 놓아보내기로 했었다. 그런 생각 비슷했었다. 그녀의 체육복은 마치 군데군데 실이 뭉쳐 보풀어오른 것이 만져져 약간 헤진 느낌이 들었고, 부드러웠다. 살며시 코 앞으로 가져가자 살 냄새가 났다. 창 밖에는 햇빛이 약간 황금빛에 물든 채 비스듬히 내리쬐여 스며들고 있었고, 낙엽은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개미마냥 창가에 소리없이 쌓여갔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놓았다. 그녀의 이마고는 그렇지 못했지만.

웃는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겪어보지 못해 초짜였던 인터넷 상의 인연에게도 푹 빠졌었고, 시간이 지난 지금 한 여름날의 추억처럼 가끔씩 입에 올리며 그녀와 얘기를 한다. 하지만 곁가지일 뿐이다. 또 한 사람은 우습게도 나와 내 친구, 물론 인터넷 상의 친구가 동시에 고백을 했었다. 그녀와 나는 영혼을 함께 하는 친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로 내게 위안과 힘이 되어줬고, 서로에게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며 좋은 친구로 지낼 수도 있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정말 내 반 쪽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진정한 사랑인 것 같다는 허영감에 부푼 진심에 그 안정감을 깨고 고백을 했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조각이 나 흩어졌다. 지금도 친하지만, 흩어진 그녀의 모습이 아쉬울 뿐이다.


그렇게 외롭게. 외로운 마음을 채우려고 헤메었다. 설상가상으로 고등학교 일 학년 때에는 무척이나 퇴폐적인 감상주의에 젖어들어 우울증에 시달렸었다. 덕분에 글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그 푹 젖어 축 늘어진 허탈함과 공허함, 그리고 슬픔과 허무가 내 자신의 대부분이자 내 자신 그 자체여서 이따금 힘이 든다. 하여간에, 그 우울과, 내가 여태까지 안고 있었던, 친한 동생이 말해줬던 것과 같은 걸지도 모르는 '너무 착해서 자기 자신을 악마로 만들고 있잖아' 와 같은 내 자신 안에 내재된 무엇인가가 그동안 쌓여왔던, 죽어버린 내 심장에 한줄기 남아있었던 발화점을 건드려버렸는지, 고등학교 삼 학년에 나는 불량아가 되었다.


결과 130 여 일. 결석 80 여 일. 매일같이, 비오는 아침에도, 눈오는 흐린 날에도, 쨍쨍한 볕 아래서도 PC방에 갔다.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는진 기억이 안 나지만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학교 빠진걸 들키고,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실망시켰다는 죄책감과 가면 어떻게 혼날지 걱정되었던 두려움과 불안함이 범벅이 되어 나 자신을 죽였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되살아나 모순을 저지르고, 다시 실망시켰다는 죄책감이 다가와 내 목을 조른다. 더욱 더 커져서 돌아와서는…….


고등학교 일 학년 때부터, 이 학년 때까지 마주칠 수 있었던 그녀 생각에 그렇게 목을 맨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녀도 인터넷 상에서 만났다. SNS에서. 헬리젯이라는 곳에서 만났다. 그녀는 내 우상 그 자체였다. 깨져버린 이미지의 그녀로 나는 예술하는 여자에 대한 이마고를 갖게 되었고, 중학교 시절의 그녀로 웃는 얼굴이 예쁘거나 성격이 밝은 여자에 대한 이마고를 가지게 되었다. 어느 한 여자로 인해 어른스러운, 성숙미를 가진 여자에 대해 이마고를 가졌고, 그 모든 것은 그녀에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것들을 제하고서라도,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던 여자였다.


하지만, 관심종자에 조울증 증상이 보였던 나는 SNS에 여러가지 글들을 쓰다가 관심 받고 싶다는 투의 글을 써가면서, 점점 사람들과 멀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와 가까이였지만. 그러다 결국 나는 회의감을 느껴 탈퇴를 했고, 잠시 바쁜 공부를 해가면서 몇 개월 쯤 그녀를 잊고 살아갔다. 그 이후, 헬리젯에 다시 가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없었다. 아니, 헬리젯 자체가 없었다.


네이트온이 유일한 동앗줄이었다.

그리고 그 동앗줄은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녀가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헬리젯에서 보았고, 그녀의 기념일 사진을 미니홈피에서 보았다. 그리고 진작에, 헬리젯에서 그 소식을 봤을 때부터 나는 그녀를 포기했다. 헬리젯 안에서 그녀와 함께였던 어느 한 사람의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그녀와 헤어졌음에도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병신같은 말들 속에서도 반박을 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난 그녀가 그렇게도 갖고 싶었고, 그와 반대로 그렇게도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가 행복하다면 나는 아무런 문제 없어. 상관 없어. 그녀가 행복하다는데 내가 괜히 나 자신을 위해서 끼어들어서 무슨 상관인데?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이따금 고개를 치켜드는 내 뒷 면에 의해 파훼당했다.


너 자신도 못 챙기는 주제에 남을 챙겨? 자, 너 스스로를 위해 한번 행동해보라고.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몇 달에 한 번 메일을 남겼고, 쪽지를 보냈고, 괜히 나 스스로가 그녀에게 50을 받았음에도 그 50이 나에게는 500이어서 500을 받은 것처럼 그녀에게 행동했다. 그녀는 당연히 부담스러워했(을테)고, 그렇게 서서히 나는 그녀를 나 자신으로부터, 결과적으로는, 떼어놓았다. 은연중에 내가 바란건지도 모른다. 내 앞 면이 이긴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제작년, 내 뒷 면이 저지른 또 하나의 일 때문에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얻었다. 카카오톡 친추를 했다. 하지만 소식은 없었다….




권총을 손에 쥐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쳤다. 딱딱하고 묵직한 느낌이 손 안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 안에서 불효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아버지의 친구분들의 소리없는 질타를 받으며 상을 치렀다. 나 혼자서. 어머니와 누나들은 오지 않았다. 때려 죽이고 싶었다. 슬픔보다 이 세상에게 품은 분노가 너무도 커서, 나는 한 방울도 울지 않고 아버지를 하관하고, 뗏장을 밟고, 약주를 뿌려드렸다. 소나무 가지를 쳐낼 때, 새하얀 하늘 색을 품은 하늘을 어디선가 날아든 학이 날개를 펴고 가로지를 때, 나는 무너졌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내가 아버지의 장례식 때에 아버지를 비호했던 것과, 아버지의 일생, 당신들을 위해 살아왔던 일생이 어머니로 인해 왜곡되고 와전되어 누나들에게 아버지가 뼈를 가는 증오와 분노를 받았던 것을 이를 갈며 얘기한 뒤로 연락을 끊었다. 반 년째 앓는 폐병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어 근근히 아르바이트로만 생계를 잇고 있다. 등록금은 국가장학금으로 내고 있고.




하루하루가 너무도 살기가 싫다.

권총을 잡은 내가 그렇게 말했다.


하루하루가 그나마 견딜만 했다. 세상은 아직 아름답고, 듣지 못한 음악과 보지 못한 영화와 그림들이 널려있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너무도, 내 주변에서조차 셀 수 없이 많았다. 무엇보다, 아직 나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권총을 받기 전의 내가 말했다.


여태까지 내가 왜 참고만 살았는지, 당하고만 살았는지 너무도 울분이 터진다. 내 자신이 왜 참았는지도 나 자신을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럽고 후회하고 있다. 왜 나는 그렇게 병신같이 당하기만 했지? 어째서? 진작부터 죽어버리고 싶었잖아. 이제 수단이 생겼으니 죽을거야. 반드시.

권총을 잡은 내가 말했다.


나는 남들을 너무도 좋아해. 내 주변 사람들을 좋아해. 그 사람들이 내 죽음으로 인해 받을 고통을 상상해보았어. 그리고 나는 단념했어. 비록 나 자신이 지옥불에 서서히 사그라들지라도 내 주변 사람들이 웃어준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견딜만 했으니까. 나는 애어른이야. 죽고 싶다는 생각따위, 현실로 일으키는 일은 없어. 절대로. 모든 것은 부질없는데 나 자신을 죽이는 것조차 부질없잖아?

운동장에서 다리가 어딘가에 걸려 넘어져 진흙투성이가 된 내가 말했다.












죽어버리자.

언젠가는 죽을 거였잖아.

죽고 싶었잖아.

너무도 외로웠잖아.

단 한 사람만이라도 너를 이해해줬다면 세상을 줬을거라는 너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먼지가 쌓여 부르터버렸잖아.

그녀를 그렇게도 그리워해서 썼던 글들 조차 이제는 한낱 지난 날의 치기어린 꿈에 불과하잖아.


네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죽어도, 네가 맘에 걸려하는 네 주변 사람들의 고통? 그런거 없어.



죽어도 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끼기긱거리는 소리가 우퍼를 통해 들려오는 듯 무지막지했다.

서서히, 당겨져오는 압력이 손가락에 느껴져왔다.


앞으로 조금만 더 당기면,

난……





















아직 그녀를 만나지 못했어.

그게 너무도 억울해서 눈물을 쏟아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왜 그녀를 만날 수 없으면 안되지? 왜?

내가 그녀를 사랑까진 아니더라도, 그저, 죽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만나봤으면 좋겠어.


아니, 시도라도 해보고 죽었으면 좋겠어.


잠깐만.


나는 권총을 내려놓고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그녀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저..내가 뭔가를 잘못한건 알아. 말실수를 한 것도 알고. 잘은 모르겠지만, 알아.

날 차단했는지도 알어. 그냥 네가 잘 되길 바란 마음과 앞으로의 행복과 행운을 빌어주는 마음이었어.

잘 지내고, 건강해.


































카톡.

























고마워..







그렇게 난 세상을 다 가졌다.






금년 한 해의 엔진 조립 실습이 모두 끝나고, 뒷풀이를 했다. 치킨과 맥주를 먹었고, 강당 안에 울려퍼지는 과가科歌를 마지막으로 모두들 흩어졌다. 언제고 그랬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어둠이 얇게 펼쳐져 있었고, 이따금 별이 빛나는 걸 볼 수 있었다. 신호등이 파란부로 바뀌었고, 그 빛이 사글사글 산란하며 어둠을 비추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삼겹살 집을 지나, 저 앞에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문구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구점에서 뭔가 찾을 게 있었다. 카운터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고, 이윽고 유희왕 카드를 찾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육 학년 때, 애들끼리 열었던 교내 대회에서 우승한 다음 날 어머니가 카드를 버렸던 것이 떠올랐다. 별의별 팩이 다 나와있었다. 그 중에서 그나마 제일 오래되보이는 것을 열 뭉태기 골라 값을 치르고, 주인아저씨의 궁금증 어린 시선을 등진 채 입구의 쓰레기통 옆으로 가 하나하나, 설레는 마음으로 뜯었다.


제발, 제발 있어라.






아홉 번째 뜯고서 카드를 넘겨보던 순간,

나는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죽은자의 소생.




END.

2013 04 06 02 14 土

[N]






네 생각이 났다. 미안하다. 너를 품은 이야기를 담은 글은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했었지만,

너를 완전히 털어버리려면 이 방법이 나은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미안하고, 해서는 안될 말이지만,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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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에 관한 추억

작품/소설 2013. 11. 23. 02:53

브람스에 관한 추억

 

브람스. 나에게 브람스는 추억의 한 단편이다. 펼쳐들고 보면 짧디 짧은 단편이지만, 그 단편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게 이어져오는 하나의 장편이다. 내 유년시절의 것들은 모두 좋던 싫던 간에 지금의 나에게는 모두 이어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장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람스에 관한 추억도 서재에 꽂혀있는 수많은 장편들 중 하나이다.


어렸을 적 내가 살던 3LDK(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아파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는 아이스링크장이 있었다. 가깝고도 가까운 곳이지만,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스케이트를 타본 것은 정작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백 미터쯤 될까. 난 그 작지도 그렇다고 넓지도 않은, 새하얗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직 비치지 않고 남아있는, 모든 것을 비출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빙판을 바라보았다. 아이스링크의 2층에는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난 그 레스토랑에 갈 때마다 창가에 앉아 잘 닦인(혹은 청소차량이 닦고 있는 중의) 은반銀盤을 보곤 했다. 그 레스토랑의 이름은, 브람스였다.

 

그곳에서 실제로 브람스의 음악을 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아니었을 거다. 클래식을 튼 건 기억나지만, 왠지 모르게 브람스는 아닌 것 같다. 브람스의 것을 들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은 어디선가 불어온 확신을 안고서 자신을 고정시켰다. 나는 자주 그곳에 가서, 이탈리안 돈까스를 시켜먹었다. 어쩌다가 궁금해서 햄버그스테이크와 폭찹 스테이크를 시켜본 기억이 난다. 주문을 하고 나면, 시원한 얼음물(혹은 콜라)가 한 잔 나오고, 가벼운 맛이 나는 모닝빵과 진한 스프가 나오는 그런 양돈까스 집이었다. 요즘엔 없는, 그런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의, 앞뒤가 트여있는 의자에 앉아, 더러우니까 만지지 말라는 엄마나 누나의 말을 듣지 않고 통유리 창에 손을 댄 채 입김을 새겨가며 빙판 위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그랬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진. 그리고 다 먹고 나서도. 빙판은 한사코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빙판도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서로 시선만을 주고받을 뿐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시선에 비치는 그 풍경을 우리는 좋아했던 듯 싶다. 가끔씩 내가 앉은 뒤쪽에 손님들이 앉아있으면 창문과 의자의 틈새로 빼꼼히 바라보기도 했었다. 그런 장난을 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난 잠시 동안만 하고나서 바로 돌아왔다. 그러곤 다시금 새하얀 빙판을 바라다보곤 했다. 어째서인지 그 빙판의 새하얌은 지금도 선명해서, 냉기가 서린 그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보는 흐릿한 광경. 그 광경 그대로 내 시선과 마음속에 살아있다. 어딘가 뿌옇게 면서도, 친근하도록 선명한 그 풍경 위로는 가끔씩 스케이트 선수로 보이는 여자가 진짜 피겨스케이트복을 입고서 이리저리 다니며 시연을 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레스토랑 주인이 정기적인 이벤트로 준비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린 시절 자주 다니던 브람스는 초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아마 중반쯤), 아이스링크장과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아이스링크 안의 은반은 어딘가로 싹 다 녹아내려 흘러가버린 듯 없어졌고, 그와 동시에 벌린 입에서 적당히 먹기 좋게 쫄깃한 치즈를 늘어트리는 바삭한 돈까스와, 따스한 스프의 감촉과, 손바닥을 대고 입김을 후후 불어 그림을 그릴 때마다 정말. 정말로 친숙한 냉기를 가졌던 통유리도……모두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없이 빙판 위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비추었던 소년의 광경도 없어졌다.

 

아이스링크장 건물에는 마트가 들어섰고, 그 마트는 지금까지도 영업 중이다. 오백 미터 이내에 초대형 마트 체인이 들어서서인지, 요즘은 영 풀이 죽어있는 눈치다. 일 년 전 쯤 마지막으로 들어가 봤을 때, 입구의 족발집과 종합 화장품 판매 부스와 종업원들과 진열된 상품들 모두 침울해보였다. 마치 회색빛 공기가 감돌 듯 모두들 기운이 없어 보였다. 겉으로는 모두 밝았지만, 속에서 내비쳐보이는 그 무엇인가는 밝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심지어 퉁명스럽게 백 원짜리 동전을 내뱉는 쇼핑카트조차도.

 

그 무엇도 지난 날에 이 장소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려주지 못하는 곳에 서서, 나는 지나버린 순간과 장소의 것을 찾고 있었다. 간단하게 장을 보고서, 카트를 집어넣고, 백 원짜리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서 마트를 나왔다. 바깥은 많이 추웠다. 나는 검은 색 트렌치코트의 금빛 단추를 잠갔다. 도로변의 상록수가 머리를 털었다.

 

 

 

후일, 나는 어디선가 1층에 아이스링크가 있고 2층에 레스토랑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대학교 동기이자 내 애인인 그녀를 데리고 갔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녀를 데리고 간 이유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와 나는 똑같이 이탈리안 돈까스를 시켰고, 앞서 나오는 스프와 빵을 먹었다. 그리고 유리창에 이마를 데고, 바깥을 잠시 바라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소파 비슷한 의자며, 자리가 앞뒤로 맞닿아있는 구조며 모든 것이 그때 그 시절의 것과 비슷했다. 심지어 의자의 겉면이 부드러운, 갈붉은색과 검은색이 X자로 체크무늬가 그려져 있는 벨벳이라는 것도.

 

계산을 마치고 열린 자동문 사이로 걸어나가면서, 나는 지배인이 건네준 성냥갑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종이박스와 같이 살짝 꺼끌꺼끌한 작은 펄프 성냥갑이었다. 그리고 그 위엔 가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브람스. 라고.

 

 

 

 

 

그로부터 정확히 세 달 하고도 열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그녀와 이별했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내 쪽에서도, 그녀 쪽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담백히 보이려고 애쓴 이별이었다. 그 해의 마지막 동아리를 마치고 나서, 동아리방 문을 닫고 나서는 내 손은 성냥갑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때 그 성냥갑을 말이다. 열어보자 그 안에는 여전히 세 달 전의 황 냄새를 풍기는 성냥들이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그 중에서 하나를 꺼내 이유 없이 그어보았다. 불이 붙었다. 그리고, 꺼졌다.

 

 

 

브람스에 관한 추억은 이게 전부다. 그 이후에 다시는 찾아가지 않은, 그 레스토랑은 소문에 의하면 없어졌다고 한다. 소리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내 유년시절의 브람스의 주인이었던 그때 그 지배인도 마찬가지로.

 

 

그때와 똑같은 한기를 풍기고 있는 겨울을 걷는다. 아이스링크의 하이얀 은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지울 수 없는 무게를 가진 한기에 젖은 유리창. 그 유리창으로부터 살며시 침습해오는 한기와 함께 겨울의 레스토랑 특유의 온기가 맞닿아있는 그때 그 공간. 그 장소. 유리창의 한없이 차가운 감촉. 모든게 생각나는, 비슷한 겨울을 걷고 있다.

 

 

그때가, 내 어렸을 적이든 몇 달 전이든 간에 그때가 생각날 때는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내 만진다. 펄프 특유의 촉감은 이미 부드러워져있었다. 성냥갑 안을 비스듬히 민다. 성냥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는 향을 가지고 나열羅列되어있었다.


하나 꺼내어 그셔본다.
바람이 불어 금세 사그라든다. 초침만큼이나 빠르게, 스케이트 날만큼이나 적확的確하게.

 

 

20111130 0124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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