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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잡는 자
태초의 사흘, 온 우주는 무한한 정지에 휩싸여 있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에 그 곳은 크기나 깊이라는 잣대를 댈 수조차 없는, 무한히 0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흘이라는 시간도 어느 누군가보다 조금 더 위대한 그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이르기 쉽도록 어림잡은 것일 뿐, 그 시간도 잡아먹힐 무無의 사건 동안 어떤 단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태초의 나흘 째. 사흘의 다음. 3시간의 다음. 3분의 다음. 3초의 다음. 그 아래로 무수히 쪼개진 세 번째들의 다음, 우주는 창조하기 시작했다. 우주 자체를 무대 삼아 누군지 모를 누군가가 창조하는 것이 아닌, 우주 스스로가 무엇인가를 창조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창조는 앞의 사흘 동안의 시간의 깊이에 비하면 턱없이 미약한 것이어서 그 창조는 우주 창조의 거룩함을 떠들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무시당하였다. 혹자는 그 미약함이 그 우수한 시간 층의 배열에 덮여 증식한 결과가 창조의, 과정에 비해 비약적인 수준의 결과물들의 시발점이라고 말했으나, 그 자들은 대부분 무시되었다.
태초의 아흐레 째. 미약하기 짝이 없는 우주의 처녀창조의 다음. 우주는 하나의 기관을 짜내었다. 폭발과 충돌과 변수와 의도가 뒤엉켜 우주 그 자신의 눈으로 보면 더럽다고 생각 되어질 정도로 유성油性 물감들이 수면에 뒤엉켜있는 모습에 비유할 수 있을 난장판이 만들어졌다. 그 난장판 속을 비집고 하나 둘 겨우 자신의 몸을 추스른 항성과 행성들은 마찬가지로 젖먹이인 서로끼리 뭉쳐 빙글빙글 돌며 일종의 족族을 형성했다. 수 억, 수 조, 수 경의 족들이 우주의 안속에서 떠돌아다녔다. 우주는 무한한 포만감을 느끼며 흐뭇해했다.
태초의 스물여덟 번째. 족의 형성과 우주의 그럴싸한 화장의 다음. 우주는 왠지 모를 기묘한 공허함을 느꼈다. 사실은 그(녀)의 안에 셀 수 없는 그(녀)들이 떠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노닥거리고 웃고 던지고 싸고 마시고 쥐어박고 자고 있었지만, 언젠가 선대에 있었다고 선문답 되어진, 그(녀)와 같은 존재들의 의무감 비슷한 것이 그(녀)를 덮친 것 같다. 그 의무감과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공허감은 그(녀)로 하여금 무언가 살아있는 것을 만들도록 하였다. 살아있는 것의 정의는, 그(녀)의 안에서 그(녀)의 ‘모든’ 규칙 아래에 살아 숨쉬는, 수동적인 존재의 반대의 것이라고 일단 그(녀)는 정의하였고, 그것을 기반으로 그(녀)는 창조하였다. 여태껏 그(녀) 주변에 있던 것과는 최소/최대 크기가 남달리 다른 물체를 수많은 실험장에 풀어놓으면서 그 의무감은 조금 옅어졌다.
태초의 백 아흔 세 번째. 창조자의 의무감과 우주적 균형감의 피조물이 탄생하고 번성하기에 이른 다음. 우주는 그(녀)안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을 오롯이 그 자신이 모두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신이 창조한 어느 생물체의 기초적 베이스로부터 비유하자면, 이미 그(녀)는 모든 창조성과 감수성이 서서히 감퇴되기 시작한 인생의 중간쯤에 와있는 것 같다는 판단이었고, 그 판단에 대한 반증으로 그(녀)가 그 즈음에 창조한 생명체중 몇몇은 균형에 맞지 않아 되돌려놓았다. 없던 일이었다. 우주는 그(녀)의 기초 중에서 가장 우월하면서도 균형에 어긋나지 않는 내외적 능력을 갖춘 생명체를 족장族長의 수만큼 창조하여 그 족장의 오두막 중앙, 깊숙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을 그 수와 그 자신만큼 나누어 자신과 연결하지 않고 어떤 쪽으로든 진보가 가능한 기초적인 자신만을 하나하나 그 생명체에 심고는, 그(녀) 자신은 작은 조각 하나만을 가지고 창조와 고뇌와 상념의 모든 과정을 잊고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돌아가는 것만을 바라보기로 하였다.
태초의 이백 쉰 세 번째. 침묵 속에 이루어진 우주의 은퇴선언과 파견자들의 첫 업무 시작 다음. 나는 그(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이 행성은 물이 육지보다 대략 1.8배쯤 많은 듯 했다. 자세한 비는 곧 있을 사흘쯤의 탐사로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갈 곳의 자세한 정보 대신 탐사를 지시하였고,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끝으로 우리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우리의, 아니 나의 영원한 일은 시작되었다.
균형 잡는 자
Stabilizer
----X:O / X- / XX
그(녀)가 미리 해놓은 작업 덕분에 이 행성에는 이상하리만치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내가 내려놓아진걸 알아차리고 나서 나는 하나의 행동과 둘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동은 즉각 이 행성의 생태계와, 특정 종/군/류의 번식 현황과, 온도/습도/대기 두께의 측정 등등 유지 보수 관리에 꼭 필요한 것들의 역사적인 첫 번째 확인이었고, 생각은 ‘그(녀)는 성별이 있다면 무엇일까?’ 라는 것과 또 하나는 ‘왜 이 족族은 족장이 항성이 아니고 행성일까’ 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생각은 그냥 내 자신이 마음 가는대로 그녀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것으로 해결했고, 두 번째 생각은 아마 이 족은 항성에는 생물이 살 수 없고 행성들 중에서 이 행성만이 생명 창궐에 적합한 환경을 부여받았나 라고 추측하여 해결하였다. 그렇게 세 가지 일을 해결하고 나니, 더 이상 내게는 당장에 닥친 과업이 없는 것 같아 잠을 청했다. 태생이 우주로부터인지라,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한 나로서는 일 또는 침묵밖에 몰랐고, 침묵은 곧 잠으로 통용되었다. 저 시린 혹은 뜨거운 공허함 속에서는.
----X:O / OO / XO
침묵을 푼 건 아마 이 행성의 대륙이 셀 수 없이 뒤틀리고 나서일 것이다. 종족 존속이 어려울 정도로 이상하리만치 커진 어느 조류의 날개를 적당히 줄이고, 침엽수 생태계가 파괴될 정도의 용각류龍脚類 번성에 대해서는 용각류들 스스로도 터무니없이 길어진 목의 길이에 각종 생물학적 질병을 수반하고 있었으므로 특별히 체중이 많은 종에 한해서만 멸종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나머지 아종亞種에 대해서는 무난한 균형이라 생각되어 놔뒀다.
생각해보니 내가 곧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녀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인식할 수 있는 걸까? 용각류 중 우월한 목 길이를 가진 종이 서서히 멸종해 가는걸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온도와 습도의 균형을 바다 한가운데의 태풍이 오른쪽에 있는 대륙을 휘젓는 것으로 맞춰감과 동시에 나는 그 궁금증을 되씹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곧 지난번과 같이 비정상적인 기온변화가 있을 것 같다. 균형에는 맞지 않는 일이지만, 내 안의 그녀가 이르길 그것은 먼 미래의 균형에 관여하는 일이라 하였다. 고로 나는 개의치 않고 다시금 침묵하였다.
---OO:X / OO / OO
그 먼 미래로 흘러가는 불균형이 몇 번이나 더 있은 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자그맣고 털 난 피조물들이 희뿌옇게 대륙을 채울 정도로 번성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습성을 대군집大群集에서 소군집小群集으로 조정하였고, 곧 하위 생태자가 최상위 생태자를 덮치는 일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거대 생물의 시대는 시행착오를 거쳐 지나갔고, 이제 한 군락으로 지역 생태계를 위협하는 정도의 거대 생물은 탄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일이 다듬고 깎고 줄이고 늘이고 찌우고 덧대고 죽이고 빚으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모든 생물들을 균형 잡힌 하나로 대체하지 않는 거죠?
그러자 그녀가 내게 빛을 내리며 일렀다.
창조자의 의무란다. 창조자는 모든 것을 빛내며, 최대한 적은 것을 그늘지게 하고, 최대한 넓은 곳에 그 빛을 내리느니라. 네 물음은 일단 빛은 하나의 빛깔로서 기워져 있는 게 아니라는 이름에서부터 대답할 수 있느니라.
그녀가 그렇게 이르자, 곧 그것이 참되게 되었다.
---XX:O / XX / OX
그녀의 이름이 있은 후로 단 한 순간도 난 침묵을 행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이른 것들은 내게 나 자신이 되어 지킴과 수행을 강요받듯 느껴졌다. 모든 것을 빛내라. 모든 피조물들은 적어도 하나씩의 빛을 품고 있게 되었다. 최대한 적은 것을 그늘지게 하라. 모든 피조물들은 많아야 다섯 이상의 천적을 갖게 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균형에 의해 그 불리한 시대와 장소를 타고 난 피조물이라 할지어도 그늘에서까지 빛을 뽑아다 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넓은 곳에 그 빛을 내리라 한 이름에서 난 다른 행성의 예와는 다르게, 나는 저 370 하타나 되는, 대륙 사이에 끼여 솟아오른 웅장한 산맥의 꼭대기에서부터, 537 하타 깊이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까지 생명의 빛을 내렸다.
날개달린 것들은 가급적 곤충과 열매, 풀뿌리를 먹도록 하여라.
내가 그렇게 이르자, 곧 그렇게 되었다.
무리 짓는 것은 섭리에 따라 그 이득만큼의 단점을 가지리라.
그렇게 이르자, 곧 그렇게 되었다.
하나를 버리면, 하나를 얻으라.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처럼 참되지는 않았다.
---XX:X / XO / XO
조각칼을 쥐듯 쥐되, 그것에 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말도록 하여라. 생명을 다루는 것은 마치 네 손아귀를 암컷의 자궁과 같이 하여, 그 안에서 웅크린 아기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스러워야 하느니라. 내 안의 그녀가 말했다. 오두막 안의 온도가 조금 올라가 후끈거렸다. 아마도 조만간 어딘가에 화산이 폭발할 모양이리라. 눈을 감고, 손을 들어올렸다. 우상귀에서 좌하귀로 날을 세워 그었다.
밭을 일구는 한 종족이 보였다.
--OXX:O / XX / OX
첫 번째로 문명에 의해 멸종한 종족이 보고됐다. 나는 열대우림의 한 구석진 곳에 하나의 씨앗을 심어, 비를 뿌렸다. 조만간 싹이 트리라. 그녀는 자그맣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온 우주가, 들이쉬고, 내쉬었다.
--XOO:X / OO / OX
바다의 왕자 하나가 문명의 창날 아래에 모습을 감추었다. 난 그 가녀린, 명이 다 한 종의 거두어진 씨앗을 조심스레 손아귀에 담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불렀다.
이 아이를 어찌 할까요?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일렀다.
가게 두거라.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간결함과, 냉정함이 이름 속에 스며들었다. 닿아온 차가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대로 손아귀에 담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따스한 한 종의 응축된 씨앗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뱃속을 열어 그 안에 살포시 놓고 닫았다. 따스함이 온 몸에 퍼졌다. 조만간 싹 틔울 날이 있으리라.
--XOO:X / OO / XO
문명으로 번성한 한 종족에 관심을 그다지 갖지 않는 것이, 족장의 관리자로서 내려온 자의 합당한 태도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문명보다는 원초적인 태초의 따스함을 품은 아이들이 더 관심이 갔기 때문이다. 그녀의 것. 아무 것도 스치지 않은, 오직 그녀 자신이자 족장의 바람과 흙과 물과 비와 눈과 천둥과 화염이 스친 것만이 사랑스러웠고 손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성스롭게까지 내게 비쳐지는 이 피조물들에 상처를 내는 문명이 증오스러웠다.
이 나의 감정이 합당하고 옳은 것인지 그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답이 없었다. 족장에게 물어볼까 했지만, 우주의 가칙家則에 예외인 이 족장은 권한이 없는 것인지, 혹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항상 침묵했다.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항상 그랬듯이,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듯, 하나의 생명의 씨앗이 거두어져, 내 안에 품어졌다. 나는 내 종족의 최초로 눈물을 쏟아낸 자가 되었다.
--XXX:X / OO / OO
충분히 수고했다. 이제 내가 얼마일지 모를 시간동안 그랬듯, 너도 충분히 자둘 필요가 있어 보이는구나.
그녀가 일러왔다.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두리번거리곤 대답했다.
어머니.
난 어느새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전 잘 수가 없습니다. 모든 생명이 균형 잡힌 것이어야 하듯 모든 생명의 죽임과 죽음은 합이 영零이 되어야 하늘, 어찌하여 어머니께선 저 하나 아래에 스러진 수백의 것의 합을 영이 아니라 부정하십니까. 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답하였다. 우주가 하나의 눈이듯 한번 크게 끔뻑거렸다.
흐르는 물과 같이. 뻗는 뿌리와 같이. 박히는 번개와 같이. 솟아오르는 화염과 같이. 자연스럽게, 네가 원하는 대로 흐를 것이니라. 그러니, 어서 자두어라.
그녀가 그렇게 이르자, 곧 그것이 참되게 되었다.
-XXXX:X / XX / XX
눈을 떴다. 오두막이 너무도 뜨거웠다. 나는 눈을 감고 온도를 낮추려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눈을 떴다. 내가 누워있는 돔의 벽 곳곳에 툭 튀어나온 송곳과 그것을 중심으로 퍼진 균열이 보였다. 붉은 빛 세상이 눈에 띄었다. 풀 한 포기 없이 파인 대지와, 송곳과 어느 둔탁한 덩어리가 땅을 파고든 모양만이 대지에 남아있었다. 대기는 검게 물들어 있었고, 나의 마지막 씨앗들이 내려갔어야 할 그 마지막 숲도 헐려있었다.
눈을 끔뻑거렸다.
어머니?
그녀는 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세차게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무언無言이었다. 균형은 없었다. 천칭을 대볼 생명은 오직 셋뿐이 남지 않았다. 그중의 하나를 보자마자, 나는 솟구쳐 오르는 무엇인가에 휩싸였다.
본래의 모습 따위는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생명이 아닌 생명이었다. 무엇인가에 생명을 감싸, 그것을 자신인 마냥 으스대고 다녔다.
어머니.
그녀는 여전히 무언無言이었다.
XXXXX:O / OO / OO
조각칼을 쥐듯 쥐되, 그것에 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말도록 하여라. 생명을 다루는 것은 마치 네 손아귀를 암컷의 자궁과 같이 하여, 그 안에서 웅크린 아기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스러워야 하느니라. 내 안의 그녀가 말했다.
손아귀.
그 안에서 웅크린 아기.
자궁.
생명.
칼.
눈을 떴다. 송곳은 온데간데없었다. 대기는 하이었고, 비가 내려 바다를 씻기고 있었다. 족장은 벗겨진 가죽을 서서히 끌어 모아 추스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손에 가득 감겨있던 가죽의 한 뭉텅이를 그에게 내어주고, 미안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아무런 변화 없이, 그 가죽을 받아 살을 이었다. 여기에 풀을 심어라. 단지 이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내가 도륙낸, 기억나지 않는 무엇인가의 수컷과 암컷이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손아귀 안에 웅크린 아기. 생각했다. 기억했다. 저 둘을 무無로 돌려버리려고 하기 직전에, 나는 그 둘의 눈물과, 서로를 껴안은, 잘 알지 못하는 어느 감정이 내 가슴을 파고드는 날카로움을 기억했다. 비교해보니 내가 그녀에게 품은 감정과 비슷했다. 그들의 생명을 감싼 어느 반질반질하고 딱딱한 뭉텅이들을 보자, 그녀의 말이 떠올라,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손아귀 안에 웅크린 아기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이 족속들이 나의 씨앗과 족장의 모든 것과(심지어 오두막까지도), 그녀의 업적을 결딴낸 것에 대해 기억해내는데 성공했다.
손을 들어 그들을 가리켰다. 족장은 내 옆에 웅크려 앉아 아랫부분의 가죽을 잇다가, 나를 올려다보곤, 다시 가죽을 이어갔다. 허공에 하나의 점을 찍고 들려있는 손의 끝은 처참함을 품고 있었다. 떨었다.
손아귀에 웅크린 아기.
그녀의 자궁 안에 웅크린 내가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앉아 그대로 잠을 자기로 했다. 너무도 생각할게 많았다. 너무도 생각하기 싫었다. 결국, 잠을 자면 해결되는 것이다. 잠을 자고 싶었다. 잠을 잔다. 눈을 감는다. 눈을 뜬다. 족장이 다 이어진 몸을 둘러보다 일어나 몸을 흔든다. 풀잎이 흔들리며 바람소리를 낸다. 나머지 둘이 눈을 뜬다. 쪼고, 다듬고, 파고, 돌리고, 붓고, 치고, 으깨고, 치댔던 내 모든, 그들에게서 알게 된 그녀를 향한 나의 감정의 귀결.
그들이 눈을 뜨고,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서로의 다리를 꼬고, 하나는 솟구치고 하나는 누워, 풀잎을 스치며 족장의 배꼽 위를 구를 때.
나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품에 안기어, 쓰다듬어지는 머리를 느끼며.
오두막의 불을 껐다.
태초의 셀 수 없는 영겁이 지나고 난 다음.
온 우주는 무한한 생동과 정적을 내포한 부동不動중이었다.
다음 날의 다음 날의 다음 날이 반복되어가며 우주, 즉 그(녀)는 서서히 굳어가는 몸을 어루만지다 천천히 식어갈 준비를 했다.
만 아홉 번째로 식은 족장의 오두막을 내다보자,
웅크린 채 돌이 되어 굳어있는 파견자와 그 옆에 서있는 족장이 보였다.
족장은 그(녀)가 보였는지, 고개를 쳐들곤 끄덕였다.
이 행성의 세 번째의 지혜가 사라졌소. 바다에서 무리 짓던, 곧잘 웃고 날 간질이던 그 고래의 아종亞種과, 당신의 자식이 멸절하려다 관둔 두 발 포유류. 그리고 이, 당신의 파견인.
그(녀)는 웃었다.
드디어, 알게 되었다.
크게 웃었다. 온 우주가 진동하였다. 깨어진 부동에 씨족과 족장들이 화들짝 놀라 살짜쿵 움직였지만, 별다른 이변은 없었다.
드디어, 운명이라는 것을. 순환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균형과, 가운데와, 적당함과, 중간과,
쓰여짐과, 사슬과 띠와, 운명과, 순환이라는 것을 알았다.
온 우주의 창조자답지 않은, 치우침을 품고서, 그(녀)는 차갑게 식어갔다.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만 아홉 번째의 파견자를 끌어안고서.
족장이 마지막 두 생명을 내려다보았다.
잠든 암컷의 허벅지에 흐르던 하얀 액체를 풀잎으로 닦아내었다.
족장은, 싸늘하게 식은 오두막에 서서, 어느 갈라지고 오래 된 돌덩이를 내려다보며 웃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END.
2013. 02. 06.
01. 32. 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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