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사진

작품/소설 2013. 11. 23. 03:28
사진관의 셔터를 열었다. 잠갔던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고, 컴퓨터와 프린터를 켜고, 배경판과 조사기를 체크했다. 삼각대를 바로잡았고, 셔터를 눌러보았다. 오늘도 필름에는 한 점 티없이 깨끗한 일상과 같은 모습이 찍혀나왔다. 뒷문을 열고 나가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다시 들어오니 한 젊은이가 카운터 앞 소파에 앉아있었다.

사진 찍으러 왔나? 나는 선반 위에 놓인 자일리톨을 한 움큼 털어 씹으며 젊은이에게 물었다. 둥글둥글한 인상이었다. 조금 살이 붙어있었고, 그 살들만 특히 볼살을 조금 빼면 날카롭고 멋있는 생김새가 될 것 같았다.

네. 여권사진 찍으려고요. 젊은이가 묵직하면서도 나긋나긋한 톤으로 말했다. 전화선 너머로 여자 여럿 울렸을 목소리같았다.

저기 앉게. 나는 사진기 앞에 있는 삼발이 의자를 가리키고는 목을 돌려 뼛소리를 내곤 잠시동안 바깥을 바라보았다. 비둘기 두세마리가 저 골목길 입구에서부터 날아 전신주를 훌쩍 넘어갔다. 몸을 돌려 사진기 앞에 섰다.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반쯤 눌러두었다.

좀 더 웃어. 그려. 그렇지. 인상 좋네. 찍겠네. 팡. 부드러운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스쳤고, 잠시 빛이 지나갔다. 컴퓨터모니터에 나온 젊은이의 모습은 꽤나 훤칠했다.

잘 나왔네. 몇 장 뽑을텐가? 그렇게 묻고는 마우스로 포토샵 작업을 좀 하려던 찰나, 젊은이가 내게 말했다.

포토샵 해주지 마시구요, 나온 모습 그대로 할게요. 그래, 뭐, 그렇게 해달라는 사람도 몇몇 있으니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몇장이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젊은이의 말이 곧 이어졌다.

여권 사진은 원래 사진을 축소한거죠?
어. 그렇지. 그게 왜?
그럼 방금 찍으신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뽑을 수 있을까요?

잠시 벙찐 나는, 이윽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이 젊은이, 보기와는 다르게 어디가 나사가 풀린건가? 아니면 불치병? 어찌되었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이, 젊은 나이에 무슨 사정인진 모르겠다만 그럴듯한 복장을 하고 찍어도 모자랄 생애 마지막 사진을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로 하겠다고?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앞으로 또 찍으러 올겁니다. 전 예전의 저와는 다르게 매일매일 살이 빠질거에요. 여태껏 살이 좀 있었던 제 모습을 마지막 모습으로 내걸고 싶진 않습니다. 저도 저 나름, 살 빠지면 괜찮은 인상이라 생각하거든요. 기왕 죽을거면, 제일 멋있는 모습으로 남고 싶지 않을까요?

젊은이의 말에 나는 망치로 후려쳐진 듯 잠시 생각에 공백이 생겼다. 공백이 지나가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불치병이로구나. 살이 매일 빠진다는 건.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말 멋진 젊은이로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선반 위의 설탕과 프림을 컵에 풀고 커피를 타서 그에게 주었다. 설탕이 들었음에도 그는 사양치 않고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이곤 소파에 앉았다. 설탕을 거부하지 않다니, 많이 심한가보다.

암인가? 몇 번의 홀짝임이 지나고 내가물었다.
네. 뇌종양입니다. 이미 끝자락이죠. 여기 오려고 몰핀을 두 배나 투여받고 왔어요.
어째서 이런 구석진 곳에?
그야, 이런 사연을 얘기하면서 바람잡을 곳은 당연히 낡고 오래된, 나이들고 멋진 백발을 가진 사진사가 있는 사진관 뿐이니 아니겠어요?

나는 간만에 호쾌하게 웃었다.



다음날. 말했던대로 젊은이는 왔다. 어제보다 약간 핼쓱해진 채. 유리문을 여는 것도 힘겨워보일 정도였다.

괜찮나?
네. 그냥 좀 기운이 없을 뿐이에요. 토스트 사왔는데, 드실래요?
고맙네. 커피는 내가 타지.

젊은이나 나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아침식사였던 듯 하다. 끼니를 마치고, 의자에 앉은 젊은이는 이리저리 머리를 만지더니,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었다. 가장, 최대한 아름다운 자신을 누군가에게 기뻐하며 보여주려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야말로 지상 제일의 웃음이었다. 나는 간만에, 젊은 날 지금은 세상에 없는 벗들과 탑골 공원에서 노인들의 사진을 찍던 나날과 같은 기쁨, 사진사의 보람을 느끼며 셔터를 눌러댔다.

기왕 피할 수 없다면 좀 더 좋은 걸 먹고 다니지 그러나?
사람이 무슨 대소사가 있다고 일상이 바뀌어지진 않더군요. 그녀에게도, 보여지진 않겠지만 제 일상, 저 자신 그대로 살다 가는 걸 보여주고 싶고요.
그녀를 위해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영정사진을 찍으려는건가, 자네?

그는 잠시, 인형줄이 끊어진 듯, 벽에 고개를 기대어 내 머리 위의 시계를 보다가, 이내 정신이 돌아온 듯 말했다.

네. 그녀에게만큼은 그 누구보다 멋진 삶을 살다 갔음을. 저를 잡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줄 정도로 멋진 저 자신만을 보여줄겁니다. 비록 저는 없겠지만요.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젊은이는 아침 일찍 사진관의 첫 손님이었다. 때로는 첫 손님이자 동시에 마지막 손님이었던 날도 있었다. 젊은이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진다기보단 알맞게 야위어가고 있었다. 본래의 그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본질 그 자체인 듯 느껴졌다. 곧 늘그막에 접어들어 가게를 닫을 것이었던 내게 그 젊은이는 마치 예수를 보는 기분을 들게 하였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젊은이는 빛을 잘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애써 힘겹게 웃었다. 미소지었다.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이런 멋진 사내를 힘겹게 하는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이런 사내가 자신의 마지막을 병실에서의 초췌함이 아닌 식장에서의 수수한 편린으로 알리고 싶을 정도로 생각을 해주는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

젊은이는 그저 물을 때마다 행복한 꿈을 꾸듯, 죽은 듯이 눈을 감고는 입가에 함박웃음을 짓다 다시 살아날 뿐이었다.

젊은이. 그러고보니 이름을 알지 못했구만. 이름이 무언가?
아저씨. 제게 이름은 중요치 않습니다. 곧 죽을 사람인데, 이름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커피잔을 잡은 그의 손이 흔들렸다.

뭐 그래도, 알고는 떠나보내야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단지, 제 모습만을 기억해주세요. 저 스스로가 보기에도, 오늘의 저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제 모습 같거든요.
젊은이는 하느랗게 미소지었다.

그럼, 뽑아갈게요.
그러게. 당장이라도 더 야위면 슬슬 안쓰러워질 것 같은 느낌이야. 오늘이 딱 적당해.
고마워요.

나는 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내의 사진을 열 장 뽑아다주었다. 그리고 내가 예상했듯, 당연하게도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장만을 집었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했다.

얼마죠?
어이, 젊은이. 나는 자네가 내게 돈을 받아가야한다고 생각허이. 늘그막의, 모든 꿈도 열정도 식은 황혼의 나날에 자네같은 멋진 불나방을 만나 마음에 요기를 했는데, 내가 무슨 낯으로 돈을 받겠나? 그냥 가게.

젊은이는 내가 액자 안에 넣어준 사진을 허리춤에 안고는 유리문을 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문 밖에서 안으로 쏟아져오는, 저 멀리 골목 입구에서부터 깔려오는 노을의 빛을 등지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처음 보았던,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커피, 맛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문을 닫고, 빛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카운터에 서서 양 손바닥을 유리에 짚고는, 멍청히 서서 그가 남겨두고 간 빛의 자락을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사라질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여느날처럼 셔터를 열고, 잠겨있던 문을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는 찰나, 내 발에 뭔가 턱하고 걸리는 소리가 났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하얀 편지봉투가 있었다.

나는 편지를 집어들고는 카운터 위에 놓고, 모든 해왔던 점검을 마치고서야 편지를 들고는 뒷문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댔다. 편지는 깔끔하게 봉이 뜯어졌다. 나는 봉투를 조심히 손가락 사이에 끼우곤 안에 든 편지를 읽었다.

자식. 가지도 않을거 알면서 멍청한 짓을.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담배를 손에 잡았다. 지붕 틈새로, 처마자락에 열린 고드름 때문에 굴절되지 않은 사이로 자그망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매일매일 맑았었다. 누구 말마따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젊은이의 사진을 뽑아 금테를 두른 액자에 넣어 사진관 쇼케이스에 비스듬히 세워놓고는, 셔터를 내렸다.

오늘은 평소에 피우지 못한 밀린 담배의 잔량을 해결해야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2013 04 13 토
02 20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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