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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題
도어락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밤 늦은 찬 바람이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것을 느낀 듯, 집 안의 인기척이 부스럭댔다. 그녀였다. 메리야스와 반바지 차림을 하곤 오늘도 묶은 머리를 한 채 아직 구두를 벗고 있던 내 앞으로 다가와 웃었다. 어서 와 라는 그 말에 나는 웃으며 구두를 다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서류 가방을 내려 놓고 끌러 아직 남아있는 잔업을 꺼내 들곤 외투를 벗어 행거에 걸었다. 그리곤 방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컴퓨터 옆 침대 위에 앉아 벽에 기댄 채 들고 왔던 두터운 종이 뭉치를 읽기 시작했다.
안 씻어? 그녀는 커피를 가져와 침대 옆 콘솔에 올려두곤 컴퓨터 앞에 앉아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씻을 시간도 없다는 뜻을 담은 그 말에 그녀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포토샵의 남은 작업을 계속했다. 스웨덴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헝가리라는 단어의 어감이 좋았다. 아주 아름답고 수려한 여자의 이름이 헝가리라면 그녀를 부를 때마다 입 안에 맴도는 헝가리라는 단어의 어감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이 세상 바깥의 느낌을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헝가리어는 알지 못했다. 헝가리어는 내일 다시 가져가 대사관 쪽 지인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다. 번역 일에서 정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향하는 구조 무전이다. 식구가 세 명 뿐인 번역 사무실의 사람들이 모든 언어를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왼손으론 턱을 괸 채 모니터와 눈 싸움을 하는 마냥 뚫어져라 쳐다보며 오른손으로는 타블렛 펜을 잡고 끄적이고 있었다. 그녀가 작곡한 앨범의 커버를 만드는 중이었다. Metro line and Blue Velvet on the Ground. 앨범 이름이 너무 긴 거 아니냐고 이름 지어줬던 내게 물어왔던 그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었다. 아무리 길고 아무리 불편해도 들을 사람은 다 들어. 그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알았다고 말하곤 커버를 만들어줄 사람을 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뭐든지 비싸지기 마련이었고, 그녀는 그 돈이 너무 아깝다고 말하며 자기 스스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돈이야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녀 자신의 작품이기에 그녀가 만드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종지부라 생각하여 그만 두었다.
그렇게 같은 포트에서 끓인 커피를 같은 공간에서 마시며 서로의 일을 하고 있었다. 둥글게 말린 형광등은 천장을 그리고 방 안을 새하얗게 칠하려는 듯 밝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 빛에 물든 천장의 벽지 무늬에 시선을 뺏긴 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듯 잠시 펜을 놓고 의자를 돌려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 위에 얼굴을 파묻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알지 못하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녀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아채곤 웃으며 마주 보았다.
커피 더 가져다줄까?
괜찮아. 더 마시면 못 잘 것 같아.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모자란 미소를 짓고는 의자를 돌려 다시 펜을 잡았다. 타블렛 위로 펜 끝을 두들기는 소리가 살짝씩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잠시 어디론가 잠겨 있던 내 의식을 박자에 맞춰 끌어 올리려는 듯 선명했다. 톡. 톡. 톡. 불어 한 페이지와 독일어 세 페이지, 그리고 영어 열다섯 페이지를 번역한 후 랩탑을 꺼내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녀의 키보드 소리와 내 키보드 소리가 맞물려 방 안은 마치 점심시간이 지난 후의 회사 사무실을 연상케 했다. 조수도 집 안에선 저렇게 허물없는 모습으로, 배가 드러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채 키보드를 두들기며 컴퓨터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회사에서처럼 조신한 모습으로 조용히 앉아 바른 자세로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마우스 휠을 굴리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앞선 생각이 다시 내 의식을 따라와 넌지시 만져왔다. 메리야스가 작은 모양인지 그녀의 허리께 살이 드러나보였다. 그저 '순수하게' 섹시해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려 놓고선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았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생각나는 앨범커버 작업본이 보였다.
수정한 거야? 그녀는 내가 인기척을 내지 않았던 듯 깜짝 놀라며 펜을 멈추고 돌아봤다.
놀랬잖아. 소리도 없이. …응. 조금 고쳐봤어. 너무 어두운 것 같아서 톤을 조금 높였어.
노을이 적막하게 내리쬐는 주홍빛 오후의 하늘과 어딘가로 뻗어있는 기차 레일. 시작은 누구나 같은 곳에서이지만 향하는 곳은 제각각 다를지도 모르는 무지향성을 느끼게 하는 앨범 커버였다.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쓸쓸함에 그녀를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오늘 조금 쌀쌀맞은 것 같아.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내가 그랬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곧 고쳤다. 그녀가 그렇다고 한다면 내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것이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어디서 쌀쌀했던 걸까. 그 포인트를 빨리 짚어내고자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어김없이 늦을 것이다.
모르는구나. 역시나 늦었다. 그녀는 뒤로 쓸어 넘긴 채 묶어 드러난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 하는 것 같았다. 눈치채지 못한 내 자신을 그제서야 다그쳤다. 전에도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그녀가 아무리 내게 그렇게 말하더라도 그녀가 말하기 전에 눈치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에 함께 지내는 것이니까. 그녀도 그렇게까지 화 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빨리 씻고 와서 스킨십을 하던, 피곤해 보인다고 말을 건네며 오늘은 이만 자자고 말해주던 해줘. 나 잘 알잖아. 먼저 뭐 하자고 말하기에는 네가 너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같아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서 싫어.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저 묵묵히 일어서 그녀의 뒤로 가 어깨를 감싸곤 그대로 목 부근을 안았다. 그녀는 아직 토라진 듯 그저 가만히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슬며시 손을 올렸다. 가녀린 손끝이 내 팔에 닿았다. 그녀는 마치 내 팔에 난 털이 처음 알게 된 것이라도 되는 듯 살며시 쓰다듬더니 그대로 몸을 푹 기대어 내 뺨에 뺨을 맞대었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원한다던가 하는 타이밍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 커피 몇 잔, 담배 몇 개피보다 더 위안이 되고 푸근한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니터는 계속해서 '어디론가' 뻗어있는 기차 레일 그리고 마치 누군가를 떠나 보낸 날의 노을처럼 적막하고 정확하게 마음 속을 스며 찌르는 은은한 파스텔 톤의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앨범 커버. 불어. 독일어. 헝가리. ……헝가리어. 형광등. 천장. 메리야스. 만지면 부수어질 것만 같은 그녀의 어깨. 쇄골. 나의 두터운 팔뚝. 머리를 묶어 올려 살며시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 그녀의 어깨에 스치는 와이셔츠 옷자락의 촉감. 늦은 밤이었다.
헝가리. 무심결에 그 단어를 읊조렸다. 그녀는 살짝 흠칫하다가 의자를 돌려 나를 꼭 안았다. 날갯죽지에 그녀의 길고 가녀린 손가락들이 감싸왔다. 그녀는 잠시 내 어깨 위에 턱을 올려놓곤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응. 왜?
END
2015 02 20
2004 Copyright [N]
Keyword : 니트
Music : Casker - 후유
https://www.youtube.com/watch?v=hIvpijob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