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 있던 한 움큼의 공기

작품/소설 2016. 4. 7. 15:47

내 방에 있던 한 움큼의 공기

 

 

 

이별했었다. 정중앙에 서서 남쪽으로 북쪽으로 동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각각 멀어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어느 곳으로도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옆에는 멀어져가며 턱 밑으로 무언가 한순간 반짝이는 그녀의 고개 숙인 옆모습이 똑같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목도리를 입가까지 올리던 그녀의 턱은 오랜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봐서인지 너무도 갸름했다. 손을 대면 부서져 내릴 것 같이 부드럽게 날카로워보였다. 너무 깎아지르지도, 너무 완만하지도 않았다. 난 그 순간까지도 그녀의 턱만을 보고 있었다.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차가운 바람이 눈가를 스쳐 눈을 꾹 감고 나서 다시 뜨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의 앞모습은 없었다. 그녀의 앞모습은 이제 종이쪽에서나 핸드폰 사진 보관함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방문이 열리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휘이잉 하고 분 바람에 그녀의 눈물과는 상관없이 현관문은 거세게 닫혔다. 평상시의 그녀라면 다시 열어서 고개를 쑥 내밀고 미안, 세게 닫은 거 아냐. 바람 불어서 그랬어. 잘 자. 라고 얼굴이 빨개진 채 말하고는 천천히, 닫힐 때까지. 차가운 손잡이가 손의 온기로 따스해질 때까지 잡고, 문 틈새로 바람소리가 후웅 하고 들릴 때는 더더욱 손에 힘을 줘서 잡고 있다가 꼬옥 닫히고 나서 발걸음을 돌렸을 텐데. 얼마 못가서 고개를 돌려 내 방의 창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곤 문득 찡그리는 별 하나를 발견하곤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집까지 걸어갈 텐데.

 

너무도 잘 알았다. 커튼이 쳐진 창문 사이로 빼꼼히 쳐다보면서, 가끔씩은 넘어지는 그녀 뒷모습에 피식 웃으면서도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만날 그녀를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배웅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나치게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서로의 장점을 너무도 지나치게 좋아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너무 빨리 먹어 체했었나보다.

 

다음 날, 팬티를 거꾸로 입고 집을 나서 하루 종일 이상한 느낌에 신경이 쓰였고, 서빙을 하다가 국을 엎질렀고 그 날 알바비는 마이너스가 됐다. 집에 와서 요리를 하다가 손을 세 번이나 베였고, 쓰던 원고지에 커피를 엎질러 짜증이 났다. 비는 하루 종일 내리고 있었고, 바람이 불어 차가운 이불의 느낌에 몸을 기분 좋게 비비며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커튼 사이로 창밖의, 집 앞의 골목을 내다보았다. 파란색 우산이 보일 때마다 오른손으로 커튼을 아주 조금 더 걷어보았다.

 

책상의 한 가운데, 벽에 뒷면이 붙어있는 TV겸 모니터를 틀어 리모컨으로 영화목록을 뒤졌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제, 물고기, 그리고 호랑이들. 아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최신영화 두 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아래, 아래, 확인. 랜덤 재생.

 

 

 

잉그리드 버그만을 난 좋아한다.

 

 

 

그녀는 누워있는 내 옆, 내 가슴께에 걸터앉아 다리를 번갈아가며 휘젓다가 이따금 침대 밑에 발뒤꿈치를 부딪쳐 울상을 지었다. 커튼으로 가려진 채 열려있는 창문 덕에 연주홍빛 까칠한 커튼이 펄럭여 내 뺨과 그녀 목덜미를 스쳤다. 바람은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을 찰랑였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왼손을 살며시 고고한 듯 들어 올려 어깨 맡에서 머리끝을 만졌다. 오른팔을 베고 있던 나는 왼팔을 쭉 뻗어 리모컨으로 모니터를 조작했다. 우리 둘은 아무 말이 없었고, 긴 정적의 순간 동안 침대 옆 자그만 탁자 겸 속옷장 위에 놓인, 이미 식어버린 커피와 허브티와 푸석푸석한 맛의 다과에는 커튼의 무늬가 선명히 도장 찍힌 햇빛이 천천히 모양 입혀지고 있었다. 나는 리모컨으로 영화를 틀었고, 어쩌다보니 영화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되어버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내 방안에서도 보풀보풀한 하얀색 손뜨개 목도리와 깔끔한 겉옷을 벗지 않았는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왜 현관에서부터 잠깐 거실에 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는지를. 로제는 담배를 폈고, 폴은 시몽을 만났다. 어디선가 많이 다른 상황이었지만, 우리 둘은 충분히 그리고 말없이 그 영화를 보고 있었다.

 

뭔가 다툴 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우리 두 사람은. 나는 CD플레이어를 틀었고, 그녀는 거의 동시에 영화를 보면서 무슨 음악이냐고 말했다.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슬펐다. 미친 듯이 서로가 서로의 헤집어진 심장을 보듬고 싶어 했고 자신들의 심장을 꺼내 자, . 내 마음이 얼마나 갈기갈기 할퀴어졌는지를. 안아줘. 이해해줘. 사랑해줘. 따뜻한 말을 해줘. 라고 요구하고 그렇게 해주고 싶어 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바람은 거세게 불다가 그쳐 그녀의 뺨과 떨리는 목소리를 차갑게 변장해주었고 나의 오른쪽 눈가에 맺힌 눈물을 말려주었다. 나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어울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고 그녀는 오른손으로 이불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인 채

 

어울릴 리가 없잖아…….” 라고 말했다.

 

시몽! 시몽! 계단을 돌아 내려가는 시몽을 잉그리드 버그만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버그만의 눈동자는 슬프도록 투명했고, 그 눈동자를 우리 두 사람은 좋아했었다. 같은 배우를 좋아했고, 같은 시대를 좋아했다. 남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녀는 그 말을 끝내고 잠시, 이불을 움켜쥔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은 너무도 더뎠다. 시몽이 난간을 움켜쥔 손이 회전하는 것도, 바람이 불어 커튼이 출렁이는 것도, 내 눈물이 감았다 뜬 눈의 속눈썹 사이로 맺혀 나왔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떨며 일그러졌다가 하늘로 사라지는 것도 느렸다. 너무나도 느렸고 너무나도 더뎠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그 하얗고 부드러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그녀의, 여리고 가여워 부러질지 몰라 항상 목도리로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줬던 그녀의 목을 보고 있었다.

 

시몽은 사라졌고, 그녀는 킁 하고 한번 막힌 코로 숨을 쉬더니, 움켜쥔 오른손을 풀고 눈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잘 있어.” 라고 말하곤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마침표가 딱 잘라 말하는 듯 해 가슴이 아려왔다. 차가운 문고리를 잡곤, 따뜻한 그녀 손이 문고리에 하얗게 서리는 낙인을 새기는 동안 그곳에 서서, 눈에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곤 문을 열고 나갔다. 열렸던 문이 되돌아오는 동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닫히기 직전 현관문은 거세게 반문했다. 방문이 닫혔고, 버그만은 로제를 꼭 껴안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왼손을 베고 그녀가 누웠던 자리와 그녀가 움켜쥔 침대의 자국에 살며시 손과 시선을 얹었고, 잠시 후 고개를 들어 그녀가 잡았던 문고리를 보았다. 그녀의 새하얀 서리가 녹아내려 지문이 보일 때까지.

 

커튼은 그녀가 가는 것을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활짝 펄럭여있었다. 어서 내다보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듯이 그 주홍빛을 오후에 걸맞는 색깔에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떠나가는 뒷모습 같은 거, 평상시와 다른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볼걸 그랬다. 그래도 안 본다면 그녀의 슬픔이 아스팔트 위를 긁고 지나간 자국이라도……볼걸 그랬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녀가 봉지를 까놓은 다과를 아직도 속옷장 위에 놓아두고 있고 그녀의 입술이 닿은 허브티의 자그만 컵을 씻지 않았고 그녀가 떠나갈 때 작은 빛으로 화면에서 스며 나왔던 버그만의 얼굴을 돌려놓지 않았으며 그녀가 발을 부딪던 침대 아래의 나무 모서리에 묻은 핏자국을 닦지 않았다. 발을 절룩였을려나.

 

리모컨을 떨어트렸다. 건전지가 빠져나왔고 다시 끼워 넣고 작동되나 확인하려고 아무 버튼이나 누른다는 게 그만 재생을 눌러버렸다. 버그만이 나왔다. 시몽은 계단 난간을 잡고 내려갔고, 폴의 눈에는 시몽의 팔과 손 그리고 가끔씩 비치는 머리만이 보였다. 검은색 나무 계단의 난간은 위에서 보면 볼수록 슬펐다. 시몽! 시몽! 폴이 시몽을 불렀다. 폴은 시몽을 애타게 불렀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불렀고 고맙다는 인사를 담아 불렀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담아 불렀고 안녕이라는 미소 지을 수 없지만 애써 짓는 미소와 의도와는 상관없이 터져 나온 눈물 한 방울을 담아 불렀다.

 

나도 그녀를 그렇게 불렀어야 했나보다. 다과 봉지와 투명한 립글로즈가 묻은 찻잔과 어쩌면 나 혼자 누워도 좁아 보이기 때문에 그녀가 떠나갔을까라고 터무니없이 생각해본 그녀와 나의 붉은 침대와 연주홍빛 커튼.

 

그리고 잉그리드 버그만의 지나간 젊음을 담은 사랑 영화가 나오던 그 순간 내 방 안에 있던 한 움큼의 공기에서. 차가운 이불을 움켜잡고 차가운 문고리를 움켜잡던 그 공기에서. 나는 그녀를 불렀어야 했나보다.

 

 

 

 

 

 

 

 

 

[N]

   

20120122 0135 

쓰면서 자꾸 딸기100% 츠바사가 생각났는데, 왠지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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