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나비 춤을 추며 上

작품/소설 2015. 5. 14. 18:30

꿈결처럼 지나간 사람들이 있다. 같이 있을 때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그들과 함께 누리는 시간이 값지고 아름답고 즐거웠으나 눈꺼풀을 들어올리고서 기억을 더듬어보면 멀리 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 떠올라 손끝으로 더듬어 찾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인연이 있다. 많다. 그 옛날 같이 피아노 의자 옆에 앉아 아무런 음율 없이 이리저리 건반을 서로 두들기며 웃고 떠들던 여자가 있었고 들판이라면 어디든 가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보온병에 타온 커피를 함께 따라 마시며 불어오는 바람을 서로의 얼굴 사이에 두고 웃기만 하며 행복해하던 여자가 있었다. 웃고 떠들며 무슨 주제던 간에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던 녀석도 있었고 함께 드라이브를 떠나 벚꽃을 보며 말 없이 손을 잡고서 손에 고이는 땀을 부비던 정말 사랑스럽던 그녀가 있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 내 손에 딱 들어맞던 그 가녀린 손을 안고서 저 아래 땅 밑에서 한 평도 안되는 땅만을 부여받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다. 고요히 잠들어 있으리라. 그랬으면 좋겠다.

 

수많은 이별을 지나고 인연이 끝날 즈음 온종일 미동도 않는 휴대전화 액정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더 이상 인연을 찾기 위해 연연하지 않으리라. 오는 인연 오게 하고 가는 인연 여태껏 꿈결처럼 그래왔듯 보내리라. 그렇게 결심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그녀의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활짝 웃는 미소가 화면 안에 한가득이었다. 울적해지지도 않았고 보면서 미소가 지어지지도 않았다. 이런 시기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인연은 떠나가면서 머무르는 사람을 늙게 만든다. 나는 내 나이에 비하면 너무 늙은 것이리라. 울고 싶었지만 내 안에 그들이 남기고 떠난 그들이 원래 살아갔어야 할 시간들은 나를 울게 놔두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제각각의 시간이 초침을 똑딱이며 내 안에 죽은 채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 똑딱임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이제는 거슬렸다. 잊기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 이차선 도로를 건너 계단을 내려가 하천변의 산책로를 걸었다. 하염없이 걸었다. 다리 하나를 지나고 이전보다 조금 더 멀찍이 떨어져 놓인 다리 하나를 또 건넜다.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하천변의 모양을 조금 바꿔놓은 탓인지 이전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경했고 그 생경함에 분노했다. 다시금 꿈결처럼, 억새가 너울거리는 이 천변에서 있었던 추억들이 내 안에서 똑딱였다. 더 멀리 갔다. 중인리 쪽으로 향했다. 조팝나무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마치 자라나다 멈추어 그 왜소함에 만족한 듯 고요히 늘어서있는 조팝나무들이 늙은 퇴역군인처럼 느껴졌다. 조팝나무 산책길 왼쪽으로는 이름 모를 나무가 오름 위에서 군락을 이루어 오름을 뒤덮은 모습이 보였다. 삼림풍이 불어왔다. 삼림풍의 끝자락에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삼층집이 보였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창고에는 태양열 발전판이 지붕을 덮고 있었다.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서있는 외딴 그 집의 고고함이 왠지 모를 이끌림으로 조금씩 나를 끌어당겼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활짝 피다 못해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잠겨갔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제시 쿡의 플라멩코 기타 소리가 울렸다. 조팝나무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너풀거리고 싶음에도 크기의 작음에 슬퍼하며 조금씩 펄럭였다. 그래도 그들은 만족하는 것처럼 흥겹게 너울거렸다. 산책로는 길었고 그 긴 산책로를 걷는 동안에 그 집은 항상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 집의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한 여자가 보였다.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머그잔에 포트에 담긴 물을 따라 다시 소파로 가던 도중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렇게 한동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왠지 모르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조금 되기에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계속해서 나는 왠지 모를 이끌림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를 만났을 때와 같은 이끌림이었다. 빛깔도 강도도 비슷했다. 어찌 흘러가던 간에 인연을 지어야 한다고 운명지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이끌림이었다. 부여받은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강한 이끌림이었다. 창밖으로 나를 내다보고 있는 그녀는 머그잔을 내려놓곤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발걸음을 돌려 그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쪽으로 향하는 날 본 것인지 머그잔을 들고서 소파로 향했다.

 

초인종을 눌렀다. 으레 이 근처에 별장을 지어둔 사람들은 마당에 개를 묶어놓는데 이 집은 그렇지 않았다. 고요했다. 불어오는 바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슬리퍼를 신은 발소리가 점점 현관문으로 가까워져왔다. 그리고 그녀는 현관문 렌즈로 바깥을 내다보더니 나를 발견한 듯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 돌아가는 소리조차 조용했다. 문이 열리고 나온 여성은 키가 조금 큰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생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고 얼굴은 조금 수척하지만 기품이 느껴졌다. 생기와 기품을 맞바꾼 것처럼 보였다. 하늘색 티셔츠와 베이지색 긴 바지를 입고서 문을 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잠시 머뭇거렸고 그녀는 살짝 웃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녀가 금방이라도 바람에 실려 날아갈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바깥에서 산책하다가 봤는데 이 집 디자인이 되게 멋져서요. 사진이라도 찍을까 해서 허락 맡고 싶어서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그녀는 내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사진 찍으신다는 분들은 대부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니시던데 그 쪽은 아니시네요?”

아차 하고 카메라를 들고 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야 나중에 가져와서 찍어도 되죠. 해도 졌고 해서. 노을진 풍경을 찍고 싶어서요.”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고 그녀는 여전히 문고리를 잡은 채 웃고 있었다.

“여긴 밤풍경도 멋있어요. 손님을 밖에 세워두긴 뭐하니 들어오셔요.”

그녀는 문고리를 놓고서 안으로 들어가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놓았다. 나는 문이 닫히기 전에 팔로 살짝 연 후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발냄새가 나진 않을까 조금 신경이 쓰였다. 집 안은 엊그제 벽지를 바른 듯 정갈했고 은은한 커피향이 났다. 아까 머그잔에 따른 물은 커피 끓인 것이리라. 그제서야 내 옷차림이 어떻게 보일지가 신경쓰이기 시작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금 와서 다시 옷을 갈아입는 것은 불가능하고 갈아입을 옷도 없기 때문이었다. 일층에는 책장에 온갖 책이 가득했다. 우측에 원래 거실 용도로 디자인된 공간에는 사방에 책장이 놓여 있었고 현관문 바로 맞은 편에는 나선형으로 계단이 보였다. 그녀는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살짝 바라보곤 그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일층과 이층 사이엔 천장이 뚫려 있었다. 이층에서 일층 서재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소파와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이 보였고 그 뒤 창가 쪽으로 주방이 보였다. 그녀는 어깨를 반대쪽 손으로 긁더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누추한 곳이에요. 저 혼자 살고 있고요. 커피, 드실래요?”

냄새로 보건데 원두커피였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분 혼자 사는 집에 낯선 남자를 들일 때 의심하는 것이 보통 아닌가요?”

그녀는 그 말이 상당히 즐겁게 들렸던 듯 여태껏 지었던 미소보다 더 크게 웃고선 말했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당신은 의심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자, 앉으셔요.”

나는 그 말을 듣고서 거울이 어딨는지 물어보려는 마음을 꾹 참았다. 내 눈빛이 어떻게 보이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던 것이 갑자기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가 권한대로 소파에 앉았다. 딱딱하지도 푹신하지도 않은 적당한 소파였다. 그녀는 그녀의 것과 똑같이 생긴 빨간 머그잔을 들고 와 내게 건넸다. 커피잔을 양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졌다. 그녀는 내 옆에 너무 멀찍이는 아닌 거리를 두고 앉아 말했다.

 

“여기에 사람이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선뜻 들인걸지도 모르겠구요. 더욱이 아까 창밖에서 왠지 모르게 이쪽을 계속 쳐다보시길래.”

나는 그 말에 커피를 조금 뿜을 뻔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무척이나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미소였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라던가 뭐 옛날 중세시대에 귀족들이 작업 걸 때 하던 멘트가 나오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문을 열었거든요. 근데 그런 건 아니라서 다행이기도 하고, 오히려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여자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거,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커피를 홀짝이며 시선만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가재도구는 별로 없어보였다. 그제서야 혼자 사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그 사람만의 온기를 집안에 드리우는 편이 많은데 이 집에는 온기가 그득했기 때문이다. 가녀린 몸 안에 품은 소소한 온기가 이 집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다.

“꽤나 오랫동안 혼자 지내셨던 것 같아요.”

그녀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되게 외로웠기도 하고 유유자적함을 즐기기도 하고 뭐 그렇죠. 거의 다 죽어가는 여자를 누가 만나러 오겠어요?”

그녀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 마냥 흐르듯 흘러간 그 말에 나는 머그잔을 조금 세게 잡았다.

“네?”

나는 반문했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암이에요. 암 중에서 그나마 조금 점잖은 암이라고 해두죠. 후후.”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우스웠던 듯 살짝 실소를 내뱉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모든 연을 끊고 하던 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고 여기에 집을 짓고 살고 있어요. 뭐, 그런거죠.”

그녀의 말에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유감입니다 라는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막 찾아온 이방인이기 때문이었고 나는 그런 나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녀는 무언가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 말을 끊었다. 나는 억지로 말을 이었다.

“일이라면 어떤 일이죠?”

자기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지 그녀는 웃으며 머그잔을 내려놓고 일어서 따라오라고 말했다. 나 또한 소파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텔레비전 왼쪽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작업실로 보였다. 컴퓨터가 있었고, 책장이 양쪽에 있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마주보는 쪽에는 바깥으로 나있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고선 방향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소소하게 글을 쓰는 일이에요. 작가죠 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어떤 글인지 물어봐도…….”

“알고 나서도 굳이 찾아볼 마음은 들지 않을건데요?”

나는 그 말에 잠깐 당황했고 그녀는 또 다시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성인 소설이니까요. 여성들을 위한. 웃기죠? 세상으로부터 연을 끊고 혼자 칩거해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여자가 쓰는 소설이 성인 소설이라니.”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괜찮다는 미소를 띄우곤 말을 이었다.

“뭐, 그런거예요. 그렇게 살고 있는데, 오늘 마침 되게 흥미로운 사람. 당신이 이렇게 찾아온거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전 그런 거 좋아하니까.”

그녀는 자신이 할 말에 대해 각오하라는 듯 잠시 숨을 고르곤 말했다.

“친구가 되어주시겠어요? 얼마 남지 않은 삶, 친구 하나는 가진 채 보내고 싶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일어나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생머리가 휘날리며 샴푸 냄새가 날아왔다. 모든 순간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지금 불어오고 있는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휘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조팝나무가 생각났다. 메타세쿼이어같은 느낌도 났지만 조팝나무였다.

 

“그러죠. 기꺼이. 스물 여덟. 이시헌이라고 해요.”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서른 넷 먹은 이혜인이라고 하는 늙은 여자에요. 가슴도 작고 볼품 없고 죽어가는 성인 소설 작가.”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소리나게 웃더니 몸을 돌려 내 쪽으로 걸어와 내게 안겼다. 그 어떤 육체적 목적도 없었다. 그저 안겼다. 나는 조용히 그런 그녀에게 기댈 곳이 잠시 되어주었다. 꿈결 같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끌려서 찾아온 곳에는 매력적이지만 죽어가는 한 여자가 있었고 그런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죽기 전까지 그녀를 찾아와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주며 친구가 되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역할이라고 하니 뭔가 억지로 한 것 같이 들린다. 기꺼이 맡은 것이다.

 

그 날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그녀의 이야기였다. 스물이 되었을 즈음 불문과에서 만나 처음으로 사귄 연인은 군대에 가서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프랑수아즈 사강을 읽기 시작했고 자판을 두들기며 글을 썼다고 한다.

“야한 것을 야하게 보이지 않게 하면서도 야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내 글의 궁극적인 목표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내게 그녀의 글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 이야기로 돌아와서, 대학을 그저 무난히 졸업하고 이런저런 번역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쓰러졌고 검진을 받아보니 암이었다고 한다. 그 때 그녀의 나이 스물 아홉. 나는 그녀에게 왜 입원해서 치료를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든 채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족할 수가 없어서. 암을 고치고 더 오래 산다고 해도 내가 살아가면서 만족할 수 있는 삶일까 싶어서야. 그리고 내게 주어질 그 기회. 삶을 더 이어나갔을 때 내가 더 알차고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고. 그래서 그냥 그 기회는 누군가에게 주기로 했어. 하늘이 내게 기회를 준 것은 곧 누군가가 그 기회를 잃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나는 나지막히 이렇게 말한거지. ‘신이시여, 제게 그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리고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저는 합당치 않사옵니다. 그러니 그 기회를 저보다 더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으나 멈춰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저보다 더 어리고 더 사람된 사람에게 주시옵소서.’ 하고 송장을 떼지 않은 채 바로 반송을 한거지. 딱.”

 

그녀는 말 끝에 손가락을 튕겼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밤이 늦어 돌아갔다. 방을 하나 비울테니 자고 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다음에 와서 그러기로 했다. 갈아입을 옷이며 칫솔 치약이며 안 가져왔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실례하고 싶진 않았다. 연인 사이라면 괜찮은 일들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돌아갔다. 그녀는 내게 조팝나무 산책길에서 자기네 집으로 걸어올 때 사인을 주라고 말하고 잠시 그 사인의 내용에 대해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서 놀아라.

학교 가는 뒷동산에

해는 아직 쨍쨍한데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서 놀아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놀아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서 나와 놀자.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약간 벙 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는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왜, 좋잖아. 딱 맞네. 내가 바둑이고 네가 철수니까.”

왜 그녀가 바둑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렇게 그녀는 바둑이가 되었다.

 

2015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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