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에 관한 추억

작품/소설 2013. 11. 23. 02:53

브람스에 관한 추억

 

브람스. 나에게 브람스는 추억의 한 단편이다. 펼쳐들고 보면 짧디 짧은 단편이지만, 그 단편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게 이어져오는 하나의 장편이다. 내 유년시절의 것들은 모두 좋던 싫던 간에 지금의 나에게는 모두 이어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장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람스에 관한 추억도 서재에 꽂혀있는 수많은 장편들 중 하나이다.


어렸을 적 내가 살던 3LDK(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아파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는 아이스링크장이 있었다. 가깝고도 가까운 곳이지만,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스케이트를 타본 것은 정작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백 미터쯤 될까. 난 그 작지도 그렇다고 넓지도 않은, 새하얗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직 비치지 않고 남아있는, 모든 것을 비출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빙판을 바라보았다. 아이스링크의 2층에는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난 그 레스토랑에 갈 때마다 창가에 앉아 잘 닦인(혹은 청소차량이 닦고 있는 중의) 은반銀盤을 보곤 했다. 그 레스토랑의 이름은, 브람스였다.

 

그곳에서 실제로 브람스의 음악을 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아니었을 거다. 클래식을 튼 건 기억나지만, 왠지 모르게 브람스는 아닌 것 같다. 브람스의 것을 들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은 어디선가 불어온 확신을 안고서 자신을 고정시켰다. 나는 자주 그곳에 가서, 이탈리안 돈까스를 시켜먹었다. 어쩌다가 궁금해서 햄버그스테이크와 폭찹 스테이크를 시켜본 기억이 난다. 주문을 하고 나면, 시원한 얼음물(혹은 콜라)가 한 잔 나오고, 가벼운 맛이 나는 모닝빵과 진한 스프가 나오는 그런 양돈까스 집이었다. 요즘엔 없는, 그런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의, 앞뒤가 트여있는 의자에 앉아, 더러우니까 만지지 말라는 엄마나 누나의 말을 듣지 않고 통유리 창에 손을 댄 채 입김을 새겨가며 빙판 위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그랬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진. 그리고 다 먹고 나서도. 빙판은 한사코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빙판도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서로 시선만을 주고받을 뿐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시선에 비치는 그 풍경을 우리는 좋아했던 듯 싶다. 가끔씩 내가 앉은 뒤쪽에 손님들이 앉아있으면 창문과 의자의 틈새로 빼꼼히 바라보기도 했었다. 그런 장난을 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난 잠시 동안만 하고나서 바로 돌아왔다. 그러곤 다시금 새하얀 빙판을 바라다보곤 했다. 어째서인지 그 빙판의 새하얌은 지금도 선명해서, 냉기가 서린 그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보는 흐릿한 광경. 그 광경 그대로 내 시선과 마음속에 살아있다. 어딘가 뿌옇게 면서도, 친근하도록 선명한 그 풍경 위로는 가끔씩 스케이트 선수로 보이는 여자가 진짜 피겨스케이트복을 입고서 이리저리 다니며 시연을 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레스토랑 주인이 정기적인 이벤트로 준비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린 시절 자주 다니던 브람스는 초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아마 중반쯤), 아이스링크장과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아이스링크 안의 은반은 어딘가로 싹 다 녹아내려 흘러가버린 듯 없어졌고, 그와 동시에 벌린 입에서 적당히 먹기 좋게 쫄깃한 치즈를 늘어트리는 바삭한 돈까스와, 따스한 스프의 감촉과, 손바닥을 대고 입김을 후후 불어 그림을 그릴 때마다 정말. 정말로 친숙한 냉기를 가졌던 통유리도……모두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없이 빙판 위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비추었던 소년의 광경도 없어졌다.

 

아이스링크장 건물에는 마트가 들어섰고, 그 마트는 지금까지도 영업 중이다. 오백 미터 이내에 초대형 마트 체인이 들어서서인지, 요즘은 영 풀이 죽어있는 눈치다. 일 년 전 쯤 마지막으로 들어가 봤을 때, 입구의 족발집과 종합 화장품 판매 부스와 종업원들과 진열된 상품들 모두 침울해보였다. 마치 회색빛 공기가 감돌 듯 모두들 기운이 없어 보였다. 겉으로는 모두 밝았지만, 속에서 내비쳐보이는 그 무엇인가는 밝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심지어 퉁명스럽게 백 원짜리 동전을 내뱉는 쇼핑카트조차도.

 

그 무엇도 지난 날에 이 장소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려주지 못하는 곳에 서서, 나는 지나버린 순간과 장소의 것을 찾고 있었다. 간단하게 장을 보고서, 카트를 집어넣고, 백 원짜리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서 마트를 나왔다. 바깥은 많이 추웠다. 나는 검은 색 트렌치코트의 금빛 단추를 잠갔다. 도로변의 상록수가 머리를 털었다.

 

 

 

후일, 나는 어디선가 1층에 아이스링크가 있고 2층에 레스토랑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대학교 동기이자 내 애인인 그녀를 데리고 갔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녀를 데리고 간 이유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와 나는 똑같이 이탈리안 돈까스를 시켰고, 앞서 나오는 스프와 빵을 먹었다. 그리고 유리창에 이마를 데고, 바깥을 잠시 바라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소파 비슷한 의자며, 자리가 앞뒤로 맞닿아있는 구조며 모든 것이 그때 그 시절의 것과 비슷했다. 심지어 의자의 겉면이 부드러운, 갈붉은색과 검은색이 X자로 체크무늬가 그려져 있는 벨벳이라는 것도.

 

계산을 마치고 열린 자동문 사이로 걸어나가면서, 나는 지배인이 건네준 성냥갑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종이박스와 같이 살짝 꺼끌꺼끌한 작은 펄프 성냥갑이었다. 그리고 그 위엔 가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브람스. 라고.

 

 

 

 

 

그로부터 정확히 세 달 하고도 열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그녀와 이별했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내 쪽에서도, 그녀 쪽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담백히 보이려고 애쓴 이별이었다. 그 해의 마지막 동아리를 마치고 나서, 동아리방 문을 닫고 나서는 내 손은 성냥갑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때 그 성냥갑을 말이다. 열어보자 그 안에는 여전히 세 달 전의 황 냄새를 풍기는 성냥들이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그 중에서 하나를 꺼내 이유 없이 그어보았다. 불이 붙었다. 그리고, 꺼졌다.

 

 

 

브람스에 관한 추억은 이게 전부다. 그 이후에 다시는 찾아가지 않은, 그 레스토랑은 소문에 의하면 없어졌다고 한다. 소리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내 유년시절의 브람스의 주인이었던 그때 그 지배인도 마찬가지로.

 

 

그때와 똑같은 한기를 풍기고 있는 겨울을 걷는다. 아이스링크의 하이얀 은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지울 수 없는 무게를 가진 한기에 젖은 유리창. 그 유리창으로부터 살며시 침습해오는 한기와 함께 겨울의 레스토랑 특유의 온기가 맞닿아있는 그때 그 공간. 그 장소. 유리창의 한없이 차가운 감촉. 모든게 생각나는, 비슷한 겨울을 걷고 있다.

 

 

그때가, 내 어렸을 적이든 몇 달 전이든 간에 그때가 생각날 때는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내 만진다. 펄프 특유의 촉감은 이미 부드러워져있었다. 성냥갑 안을 비스듬히 민다. 성냥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는 향을 가지고 나열羅列되어있었다.


하나 꺼내어 그셔본다.
바람이 불어 금세 사그라든다. 초침만큼이나 빠르게, 스케이트 날만큼이나 적확的確하게.

 

 

20111130 0124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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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가 올린 소설 중 날짜가 과거의 것인 경우엔 과거에 제가 그 글을 썼던 날짜입니다. 제 스스로만 갖고 있던 글이거나 과거 다른 곳에 올렸던 글을 다시 올린 것이죠.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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