切段

작품/소설 2014. 10. 21. 01:06

그렇게 해서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날처럼, 그저 반복되는 무직으로서의 무전취식의 일상의 한복판에서 깨달았다. 얼마 전 그저 문득, 단 하나의 메세지조차 오지 않는 카카오톡 친구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녀의 프로필을 눌러보았다. 오랜만에 바뀐 프로필 사진은 그녀가 그녀의 애인과 화목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녀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충만했는데, 이제는 반 반으로 나뉘어 느껴졌다. 그녀가 행복해보이니 잘된 거야. 라고 위안하는 절반과, 왜 아직도 헤어지지 않은거지. 하는 절반이었다. 나는 후자의 나 자신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라 그 생각을 접으려고 했다. 접으려고 할 수록 그 동안 억눌러 두었던 그림자 진 마음은 솟아오를 뿐이었고,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고 돌 수록 점점 더 비참해져만 갔다. 이런 내가, 거의 폐인에 가까운 내가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다 해도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녀가 머무를까. 그렇게 점점, 그녀를 생각하던 내 마음은 몇 년에 걸쳐 부수어지고 조각이 나뉘어가며 내 마음을 난자해왔고, 문득 이제 곧 조각조차 남지 않아 가루로서 빻아져 내 마음 안에 그대로 묻어서 알게 모르게 스며가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의 조각조차도 남지 않게 된 내 마음은 도대체 이제 무엇을 부수며 나아갈까. 상실해버린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하며, 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부수어가며 그나마 근근히 앞으로 나아가던 내 고장난 마음은 이제는 나 자신을 부숴가야만 그것을 연료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울고 싶었다. 아니, 마음은 울었다. 눈물샘은 말라 비틀어져 이제 모든 것에 대해 무덤덤하게 대응할 뿐이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알았다. 동시에 우습다는 것도.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워가면서도 글은 진전이 없었고, 잃어버린 음악들과 예술들의 방대한 바구니의 틈바구니에서 그 것들을 다시 그러모으려던 시도는 번번히 중단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내 잃어버린 소중한 방 하나를 되찾았다. Moby의 음악이었다. 떨어진 담배를 사러 가기 위해, 담뱃재와 밤샘으로 인해 약해진 몸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온갖 두려움을 헤치고 새벽의 편의점을 갔다 왔다. 그 왕래의 순간에조차 나는 끝까지 이어폰을 빼먹지 않았다. 학창 시절, 열정과 의지로 꿋꿋히 글을 써가던 나 자신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항상 미니스톱이 박힌 비닐 봉투를 든 채 집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렇게, 이 의자에 앉았다.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불을 붙이고, 잃어버렸던, 유실流失되었던 내 마음의 조각들 중 하나를 꺼내어 먼지를 털고 오랜만이야. 라고 속삭인 다음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 음악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만났던 때의 그 폐부에 차갑게 스며들면서도 깔끔하게 내쉬어지는 얕고도 무거운 공기. 갈대는 마치 훨훨 부는 바람에 머리를 말리듯 이리 저리 너울대었고, 나는 그 갈대숲을 사이에 두고 천변을 걸으며 찬란하게 별이 빛나던 밤 하늘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었다. 지금은 별조차도 내 눈에 띄지 않는다. 작은 알갱이 하나 하나가 크게 이루어진 청사진이며 온갖 문양들을 이루던 그 밤하늘조차 그저 새카맣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각 조각을 이어 붙여보니 어느새 그 때의 나 자신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왜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까. 왜 애써 보지 않으려 했었을까. 나 자신은 항상 산산히 부숴져 흩어지지만 그 모든 나 자신들을 모아줄 구심점이 하나씩은 있었는데, 왜 그것들을 돌아보지 않고 애써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항상 이렇게 깨닫지만서도, 벌써 나이는 첫 번째 파산波散 이후 두 해가 지나 스물 하나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룬 건 아무것도 없고,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저 한 여자만을 생각하다 아무 일도 못하게 된 병신으로밖에 쓸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은 내 스스로 걷어차 부수어트렸고, 신뢰하던 사람들은 항상 내가 그들을 저버렸으며, 나 자신마저도 항상 극한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건,


뭘 해도 나는 이렇게 살 놈이였어. 라는 쓰디 쓰면서도 나 자신에게 왠지 모르게 냉소를 짓게 만드는 도돌이표였다.




이 곡을 들으면서 나는 한 남자에게 저버려진 어떤 여자의 사막에서의 방황과 눈물로 점철된 만족스러운 점멸漸滅을 썼고, 이 곡을 들으면서는 어떤 그림을 그리는 여자의 깔끔하면서도 한 남자에게는 그녀를 찾아 나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도록 만들 만큼 지저분하게 추억을 점철한 실종을 썼고, 이 곡을 들으면서는…….


나는 잠시 음악을 멈추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웅크려 울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썼던 모든 글들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모두, 타의에 의해 실종된…….


그녀에 대한 생각을 했다. 하지 않으려 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면 할 수록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어쩌랴. 하게 되는 것을. 그녀의 가녀리면서도 확실한 손놀림으로 인해 완성되어가는 캔버스가 보였다. 그녀의 아름답고도 수려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녀의 둥글둥글하면서도 나름 매서운 곳이 있는, 그로 인해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해선 똑부러지는 성격이 보였다. 그녀의……그녀의……그녀의……그녀의…….




그녀가 나를 보며 왜 이러고 있어? 일어나. 예전처럼 나하고 같이 놀자. 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나를 보며 왜 이러고 있어? 예전의 네가 아니야.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리고 그저 유실자 n번째로 남으려는거야? 실망이야. 라며 나를 등지고 돌아서서 저 멀리로 걸어가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돌고 돈다.

이 세상에 내 존재를 그녀에게 알리기 위해 글을 쓰자고 하던 학창 시절의 내가 보였다.

이 세상에 내 존재를 그녀에게 글로나마 알리기 위해 글을 쓰던 스무 살의 내가 보였다.

이 세상에 보잘 것 없는 내 존재를 그녀에게 단 한 조각이나마 알리기 위해 글을 쓰던 내가 보였다.



그렇게, (        )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Moby - The Dogs





End.


Novelistar / [N]

이제는 네 이름을 쓰기조차 미안해져, E.


20140827

0412

[N]



title P.S : 切斷의 오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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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遠 - 3

작품/소설 2014. 10. 21. 01:06

'내 어린 시절은 참으로,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랬었지.'

선생님은 조용히 머그잔을 두 손으로 그러잡고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었다. 뭔가 어디론가 멀리 나가 있어 닿지 못하고 그릴 수 밖에 없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초점은 저 멀리를 향해 있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손에 쥐고 있던, 선생님이 내게 주셨던 검은 자줏빛의 표지를 하고 있는 책을 펼쳐 보았다. 한 쌍의 노트였다. 선생님은 그 책과 짝을 이루는, 연한 베이지 색의 책을 일기장으로 쓰셨다. 나는 받은 책으로 글을 썼었다. 밤의 들판. 어딘가, 머나 멀면서도 손에 잡힐 듯한 그 이름이 좋았다. 선생님의 그 표정이 생각났고, 어딘가 닮아 있는 그와 나의 공통점이 어렴풋이 느껴져서 좋았다.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모든 것들…, 그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나 자신. 그렇게 자라왔어.'
평소에, 자신의 옛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안 하시던 분이었다. 마치 생판 다른 사람의 일생을 묘사하듯, 선생은 그렇게 흔들의자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읊조렸었다. 그리고, 집 안에는 언제부턴가 내가 볼 때마다 항상 굳게 닫혀 있었던 문 하나가 있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푸른 책만을 손에 안고서, 눈 내리던 들판을 지나 세상으로 나갔었다.

그 눈 내리던 날, 떠나는 자와 남은 자 모두의 고독이 청량한 추위로 뼈까지 스며오던 날이 몇 년 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어,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생각 속에 젖어있던 의식을 일으켰다. 나를 뜻하는 눈치였다.
"시헌始獻. 비로소 시에 바칠 헌. 씨는 붙여도 되고 안 붙여도 되. 편한 대로 불러."
어느샌가 그녀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 신경 쓰였다.
"선생님이 시헌씨에게 남겨 놓은 쪽지가 있어요."
나는 그저 천천히 찻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카우치에서 일어나 선생님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선생님의 일기장을 꺼냈다. 변한 건 하나 없는데도 어딘가 낡아 있는, 오래된 물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담배를 태우고 싶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일기장의 페이지 정 가운데를 헤쳐 열어, 뒤로 조금 넘겼다. 선생님의 고요하면서도 천천히 흐르는 손글씨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출 무렵, 그녀는 페이지 사이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일기장을 천천히 닫고 조용히, 소중한 듯 원래 있던 그대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려 하는 듯 놓고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내게로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내 것만 있는 건 아니지? 너는?"
그녀는 내 옆에 앉기가 조금 어색한 듯 앉고 나서 손으로 몸을 끌어 거리를 조금 벌리는 중이었고, 그래선지 내가 말을 걸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제게 쓰실 내용도 거기에 쓰셨다고 들었어요."
"누구한테?" 나는 호기심에 그녀에게 되물었다.
"선생님 친구 분이자 변호사요."

나는 대답을 듣고 수긍한 다음, 그녀에게서 조용히, 양피지와 비슷한 투박한 재질의 손바닥 만한 크기로 접혀 있는 쪽지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것이 마치 화산 폭발 이후 발굴된 유물이라도 되는 듯 행여 바스러질까 걱정하며 펼치기 시작했다. A4 크기로 두 장이 펼쳐졌고, 선생님의 손글씨가 보였다.

나일세.
이 글을 읽고 있을 때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는 진부한 문장은 쓰지 않겠네.
이미 써버렸구먼. 지울 수도 없고 이거 원. 여하튼, 미안하네. 자네는 자네 나름 잘 헤쳐 나가겠지만
혜인이를 남기고 가는게 마음에 걸리는구만. 궁금한게 많을테지. 오랜만의 만남이 이런 식이라서 또 미안하네.
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가고 싶었을 뿐이라고 답하는게 평소의 나다운 대답이겠지.
누군가 날 불렀네. 어디선가 머나 먼, 시간이 지나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도 안되며 서로가 서로를
만나보았자 서로가 서로의 과거의 모습만을 간직하는 게 서로를 더 위한 것이 되버린 그런 사람이.
날 불렀어. 어떻게, 어디선가 불렀는지는 나도 모르네. 자네도 알잖나.
그저, 하늘에서 하나 둘 내려오는 눈송이가 그 사람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한 자음 한 모음이었고,
나는 항상 흔들의자 위에서 그 눈에 담긴 말들을 눈으로 그러 모으고 있었네. 그리움이라는 단어의 낭만적인 표현이 되겠군 이건.
혜인이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을테지. 그저, 운명으로 이끌린 한 여자아이라네. 내 딸처럼 키워냈고.
자네와는 다른 느낌으로 '키우고' 싶었다네. 그렇기에 자네가 왔을 때 혜인이로 하여금 자네를 만나지 않게끔 한거고.
늙은이가 교편을 잡고 남의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맘에 안 들었을 혜인이에게 미안하구먼.

혜인이 울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곁눈으로도 보였다. 글을 읽는 속도가 나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나는 계속 쪽지를 읽을지, 그녀를 감싸 안고 다독일지 망설이다가 쪽지를 계속 읽어 내려가기로 했다.

이 집은 자네 좋을대로, 혜인이 좋을대로 지내도 되네. 그러라고 지었던 집이니까. 몇십 년 전에 말야.
자네를 이렇게나마 보게 되어서 정말 좋구먼. 가기 전에 보았었으면 더더욱 좋았을 것을.
그래도, 조금 잔인한 표현이지만 이것도 나름 낭만이 있구먼. 내가 남긴 말을 누군가 읽었는지의 여부를 절대로 확인할 수 없는 글이라….
미안하네. 말이 조금 샜구먼.

종이의 용량이 거기서 끝나 나는 잠시 혜인을 위해 기다렸다가, 뒤로 넘겨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항상 내 호號를 잊지 말게. 침심. 알지? 마음에 잠기게 항상. 해답은 마음 속에 있어.
그렇기에 내가 부름에 답해 따라 나가기로 결정 했던 것이고 말야. 주변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을 좇아
이기적으로 행동하는게 나 아니었는가. 하하. 이기적인 최후라 미안허이.
하지만 말야, 내 나름으로는 이게 최선이었다네.

가까워 질 수 없으면서도 보고 싶은 사람. 아침에 일어나 차를 끓이고 수저를 들 때면 옆에 있는 혜인이가 그 사람으로 보였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볼 때면 문득 팔을 옆으로 뉘여 그 사람이 베고 잘 수 있도록 하고 있었네. 그러다보니, 점점 초췌해져 갔어. 마음이 말야.
황새냉이라고 알지? 내가 자주 차를 끓였던 그 풀 말일세. 그 풀의 흙내 나면서도 텁텁하고, 여운이 남는 맛. 그러면서도 깊게 쓴…그 맛 말일세.
그 맛이 너무도 나랑 닮아 있더군. 꽃말조차도. 그럴 수 밖에 없었네.
그 사람과의 생각. 그 사람과 함께 있다는 생각을 접어 둔지가 벌써 몇십 년 전인데도 이렇게 다시금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건 두 가지 의미라고 생각했네.
죽을 때가 됬거나, 내가 회춘했거나 말일세. 하하. 농담이야 농담. 너무나도 선명하여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내 마음인지 그리움인지 집착인지
그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딱 정점에, 나는 그렇게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네. 닿지도 않을 이상향理想鄕을 향하여.
머나 먼 때에,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가 원망할 수 밖에 없던, 가족이었던 동시에 한 고아의 어머니였던 한 사람과,
그보다는 조금 더 뒤의 시간에,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다가 시간의 순리대로 흘러가 어딘가 항구에 닻을 내린 한 여자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그 닻을 잘라버리고 내가 키를 잡고 싶었던 그런 집착과, 조금 뒤의 포기와 절망을 내게 안겨줬던, 하지만 아직 유일하게 사랑하는 한 여자.
눈은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날씨야. 눈이 따뜻한 날씨에 내린다면 눈은 과연 슬픈 날씨였을까, 시헌이?
다시 말하지만, 거 참. 나는 이렇게 미련이 많은데도 떠나다니, 정말 멍청하고 우둔한 놈이 아닐 수 없네.
자네에게 미안하네. 오랜만의 해후가 이런 식이라니 자네에겐 정말로 미안해. 남겨질 혜인이를 잘 부탁하네.
주변이 아무리 황량하여도 싹을 틔우면 그게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 주변에 꽃이 싱그럽게 할 그런 아이라네.
삶의 시간이 맞물리지 못하여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고 가지 못하는 것이 내 유일한 응어리일세.

황새냉이 차, 맛은 어떤가? 괜찮은가? 내 장담하지. 혜인이가 나보다는 차를 더 잘 끓인다네.
그 아이 곁에서 항상 그 차를 마셔주길 바라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일세.
말이 길었구먼. 못난 스승 만나 맘고생 하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서로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던, 그런 못난 날 따라줘서 정말 고맙네.
세상에서 제일 남사스럽고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말이지만 이건 글이니 내 그 옛부터 내려온 금언禁言을 깨고 한 글귀 쓰지.

띄엄띄엄 벌어진 때와 장소의 편린이나마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고, 사랑하네.


마지막 문장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잉크가 번져 있었다. 나는 그저, 마음이 텅 비어버린 사람처럼, 쪽지를 털썩 무릎 위에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어디선가, 멀리서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혜인이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쪽지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려 끌어당긴 후, 그녀를 안았다. 어깨를 안은 팔로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다가, 눈물이 고였는지, 코를 훌쩍이며 그저 계속 흘러나올 뿐인 눈물을 손으로 닦고 또 닦고, 이따금씩 입고 있는 옷자락에 그 눈물을 닦았다.

나는 여전히 천장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천장의 마감재로 쓰인 통나무 한 기둥 한 기둥의 옹이의 문양을 세어나갔다. 뺨자락에 차가운 뭔가가 하나 굴러가며 스쳤다.








나는 그녀가 추위에 덜덜 떨고 있기라도 한 마냥 혜인의 어깨를 끌어 안고 집을 나서 문을 잠갔다. 펼친 손바닥 위에는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열쇠와, 혜인을 한 차례 번갈아 보았고, 혜인은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미소 지으며, 내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깊게 쌓인 눈밭을 헤치며 이따금씩 비틀거리며,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창 밖으로는 아직 눈이 내리고, 흔들의자는 누군가 아직 앉아 있는 듯 계속 흔들리며, 찻주전자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거실 책상 위에는 살짝 구겨진 종이 두 장이 펼쳐진 채 살짝 하늘거리는 선생의 집을 잠시 뒤로 한 채.

뒤돌아서 바라본 집 주변으로 노을이 서서히 지평선으로 스며 들며 들판을 밤으로 물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의 들판夜이었고, 기억 속에서부터 항해해온,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머나먼 눈밭이었다.


2014 10 15
0449 [N]



영상 퍼가기도 안 되다니.

Christopher Norman - Volat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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