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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2
작품/소설
2014. 10. 25. 03:59
"오빠."
현관 계단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 햐르타는 무척이나 가냘팠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부모로부터 나온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나와는 너무도 다른 여동생이다. 조그만 몸에 가냘픈 팔다리, 그리고 정반대의 성격. 햐르타를 보고 있자면 할아배가 말해줬던 유리라는 것이 생각난다. 바깥에서 반대편 바깥이 내다보이는, 투명하고 맑은 물건. 안드라 아저씨는 햐르타를 보고 유리 인형이라고 했다. 본 적은 없지만, 왠지 어울리는 말이었다. 햐르타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앞뒤로 몸을 흔들거리며 물었다. 나는 방금 잡아온 커다란 놈을 손질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별이라는 거 있잖아. 아저씨가 빌려준 책에서 읽었단 말야. 저어기 위에 반짝거리면서 빛나는 자그만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더라."
"응."
"근데 여기서는 왜 별이 안 보여? 책에서는 어디에 가도 밤이 되면 보인다고 했는데……."
나도 본 적 없단다. 인석아. 내게 물어 뭣하니.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글쎄. 구름님이, 읏차. 계셔서 그런거 아닐까?"
아가미 부분에서 칼이 걸려 애를 먹었다. 비늘이 잘 벗겨지지가 않았다. 햐르타는 생선을 손질하며 말한 것에 성의가 없다고 생각한건지, 그 내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단에 굴러다니던 자갈 하나를 집어 저 멀리 던졌다.
"구름님은 말야.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잠시 날아가셨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했단 말야."
"오빠는 잘 모르겠다야."
"구름님이 궁금하니?"
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디선가 우연히 듣고 있었던지, 아니면 엿듣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안드라 아저씨가 옆구리에 붓과 종이를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햐르타는 안드라 아저씨를 보자마자 잽싸게 튀어나갔다. 왠지는 몰라도 여동생은 아저씨를 잘 따른다. 나는 그와 반대로 내심 못마땅해 했는데, 그게 그냥 여동생과 친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보였는지는 몰라도, 그랬다.
"아저씨~" "읏차, 욘석."
아저씨는 햐르타를 안아 올리더니, 어깨 위로 무동을 태우곤 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 비늘이 어떻게 되먹었길래 이렇게 단단한거여.
"아저씨, 아저씨. 알려주세요. 왜 저 구름님들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거에요?"
햐르타는 호기심 충만한 눈빛으로 아저씨가 가리킨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물었다. 점심도 굶어놓고 꽤나 명랑한 목소리였다. 아저씨는 어깨 위에 올라탄 햐르타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날뛰어서 그런지 조금 버거워하며 자세를 다시 잡고는 말했다.
"욘석아, 나도 듣고 있어서 아니까 그렇게 재촉하지 마려무나."
"알려주세요~알려주세요~"
아저씨는 잠시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골랐다. 햐르타에게 옛날 이야기라던가 책을 읽어줄 때면 저렇게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나는 드디어 생선의 아가미를 잘라내고서야, 잠시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칼을 내려 놓았다. 햐르타는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아저씨의 가슴팍을 살짝씩 때리고 있었다.
"그건 말이다……"
"일어났어?"
햐르타의 목소리가 들려서 잠에 깬건지, 잠에 깼는데 햐르타의 목소리가 들린건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뒤척이려던 찰나 몸이 쑤셨다. 바람이 거세게 불려는 참인가보다. 그와 동시에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시야가 흐릿했다. 창가에 햐르타가 흔들의자 위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며 바람을 쐬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거죽으로 싸인 커다란 책이 놓여 있었다. 무겁지도 않나. 햐르타는 가냘픈 소녀에서 가냘픈 아가씨로 자라났다. 유리는 차갑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그와 동시에 햐르타는 내게 점점 차가워졌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그 차가움이 안에 남아 느껴졌다. 싸늘한 냉대가 아닌, 이야기를 한 이후,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딘가 한 구석에 남는 그런 서느럼이었다. 내가 미안할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지만, 미안했다.
"창문 좀 닫아줄래?"
햐르타는 나와는 정반대로 바람을 좋아했다. 나는 그 바람에서, 한 방울의 피로 알게 된 그 냄새의 종잡을 수 없는 거대한 의미가 싫었다. 열 아홉에 성인식을 하고 나서도 햐르타는 여전히 바람 쐬기를 좋아했다. 바람을 쐬는 것을 원래부터 좋아 했지만, 피 냄새를 알게 된 후에도 좋아하는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모른다. 뒤의 경우는 왠지 생각하기 싫었다. 단 하나 바뀐게 있다면, 예전의 그 초롱초롱하던, 바람님이라고 부르며 창가에 앉아 입을 벌리던 그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인형처럼 앉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책을 읽고, 바람에 쪽수가 넘어가도 그저 묵묵히 다시 되넘겨 책을 읽을 뿐이었다. 창문을 닫아달라는 나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햐르타는 가는 양 팔을 벌려 여닫이 창을 하나씩 힘겹게 닫았다. 그리고는 무릎 위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오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아저씨한테 들었어. 산으로 간다면서."
갑자기 사레가 들려 기침이 났다. 햐르타가 책을 덮고 내 옆, 침대 위에 걸터 앉아 등을 두들겨 줬다. 죄 짓는 것도 아닌데 왜 기침이 나는지 원. 등을 두들겨주며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왠지 더더욱 그런 느낌을 들게 했다. 기침이 멈췄는데도 계속 심술궂게 등을 두들기자 몸을 일으켜 햐르타를 바라봤다.
"너도 알잖아. 가야 한다는 거."
내 말에 햐르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빠도 알잖아. 되게 위험하다는 거."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햐르타는 살짝 웃으며, 다시 의자로 돌아가 몸을 푹 안긴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할아배가 햐르타더러 읽는 이라고 써놓은 그 쪽지를 아저씨가 보여줬을런지가 궁금하다. 읽는 자이기에 책을 저렇게 좋아하는걸까, 책을 원래부터 좋아하는데 읽는 자인걸까? 어렸을 때부터 봐왔으니 아마 후자겠지. 할아배는 햐르타를 본 적도 없고. 양 손을 머리에 베고 다시 누웠다. 햐르타는 계속 묵묵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난 아직 반 까막눈이라서 저렇게까지 빨리 읽진 못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여동생이 벌써 성인식을 치뤘다는 게 참 오묘할 따름이었다. 근데 왜 여자애들은 열 다섯에 성인식을 하는 걸까. 아저씨를 만나면 묻고 싶었다.
"괜찮아, 인마. 내가 뭐 그렇게까지 운이 없는 놈도 아니잖아. 잘 될거니까 괜찮아."
왠진 모르지만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건넸다.
"괜찮지 않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잖아.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고 하는게 좋다고 봐, 오빠."
얘 또 이런다. 구석에 또다시 싸늘함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그와 동시에 살짝 머쓱해졌다.
"뭐, 그, 그럴지도 모르지만 진짜로 괜찮어."
여동생의 옆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내 여동생 치고는 너무도 예쁜 얼굴이다.
벌어지리라. 어느샌가 모르게 일어나 점점 커져 마침내 대두 되었을 때는 그 누구도 겉잡을 수 없게 된 일이. 섬뜩하고 참혹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거의 모든 걸 집어 삼킨 그것의 위용은 마치 파도와 같을 것이다. 절벽을 향해, 굳건한 절벽을 향해 잡아먹을 듯 달려와 부딪고, 자신의 몸집의 두 배 가량 치솟아오르는 파도. 파도와 같으리라. 땅 위에 서있는 모든 것들을 바다로 밀어내어, 그 것들이 익사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서서히 가라앉고, 마침내 바닥에 다다를 즈음 육탈하여 덜그럭거릴 때, 땅 위는 온전히 그 것의 것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으레 음모라는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음모를 믿고, 그 일에 대비하며 살아오던 이들 또한. 그 일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 그 일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안아 추위를 버티며, 이 세상에 그들밖에 갖고 있지 않은 온기를 나누리라. 그렇게 살아가리라. 어느샌가 모르게, 언젠가는 그들이 실패하여 땅에서 몰아내어져 바다로 떨어지며 그들의 먼 조상을 만날지라도, 그들은 마지막까지 온기를 가진 이들로서 칭송받으리라.
저 멀리,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별들로부터.
작자 미상, 종말록終末錄 , 7장 116쪽.
「」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를 담은 말이 목구멍을 타고 입술이 채 열리기도 전에 「」의 이야기를 담은 이들의 목을 잘라 버린다. 어떤 것인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손에 쥐어보지도, 냄새를 맡고 들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단 하나는 장담할 수 있는데, 「」가 이 세상을 삼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의 행동의 의의를 그 누가 알랴. 하지만, 오래 전부터 전승해오는 말들에 의하면, 그저 싫어서라고 한다. 웃기지 않은가? 얼마나 거대한지도, 강력한지도 모르는 존재가 우리를 마치 우리가 개미 보듯 하는 심정으로, 그저 손에 쥐고 톡 터트려 죽이려고 한다.
「」의 손가락 안에는 작은 점만이 보일 뿐이겠지만, 그 안에는 필연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온기와 가정, 그리고 희망과 구원이 있으리라.
얼마나 우습고도, 무서운 일이랴.
히옌 카이그, 「」, 머릿글
진행을 좀 하려고 했으나 종말록까지 쓰고 날려 먹어서(...)
더 이상 생각이 뻗어나가질 않아 여기서 마칩니다.
하아...백스페이스에 지우기와 뒤로 가기 두 기능을 동시에 넣었을 디자이너, 누구냐 도대체!!
그럼 여기서 이만.
2014 10 25
0354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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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1
작품/소설
2014. 10. 21. 03:05
산맥은 그 둘레를 끊임없이 굽이치고 바람은 언제나처럼 동쪽에서 산맥이 열려 있는 서쪽으로 짙게 불며 흘러가기에 살고 있는 모든 나무와 풀들이 서쪽으로 휘어 곡야曲野라고 이름 지어진 곳이 있었다. 이따금씩 땅 밑에서 전갈이며 곤충들이 올라와 풀을 뜯어 보지만, 이 곡야에서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뭔가를 먹어보려고 하는 생물은 어릴대로 어린 녀석들인 것이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들이키게 되면 어떻지는 뻔하지 않은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대다수의 동물이 살아남지 못하는 곳임에도 식물들만은 잘만 버텨내고 있었다. 개체수의 증가도, 감소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이 옛날과 현재가 같아 기묘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 연유를 마치 커다랗고 날카로운 석회암 덩어리가 줄이어 서있는 듯, 보는 각도에 따라 하얗기도, 거뭇거뭇하기도, 회색빛이 돌기도 하는 저 산맥을 들어 얘기하곤 했다. 너무나도 드높아서, 구름 조차도 가운데의 몸뚱아리까지만을 삼키고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산맥에서 불어오는 거칠고 낮게 깔리는 바람을. 하지만 거기서 바람이 왜요? 라고 물어보아도, 곡야에 사는 모든 어린이들은 그들의 부모에게서 답을 듣지 못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꺼리는 것처럼 고개를 젓거나, 눈을 감는 부모의 모습을 봤다. 그리고, 그들이 자라나서 그들의 아이들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음을 들어도, 그들 또한 그렇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곡야는 그런 곳이다.
곡야는 마치 곶처럼 대륙의 동쪽 끝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 곡야의 서쪽으로 쭉 가다 보면, 까마득한 발치 저 밑으로 자줏빛이 도는 파도가 휘몰아치며 드높은 절벽을 깎아 내렸다. 곡야의 산맥을 그 누구도 넘어본 적이 없다고들 어른들은 말했다. 산맥은 한 치의 틈도 없이 곡야를 둘러 싸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곡야의 존재를 알리가 없었고, 우리도 반대로 그러했다. 그렇기에 얼마 안되는 곡야의 주민들은 소일거리 수준의 낚시와, 절벽에 거의 붙다시피 한 밭에서 일구는 채소들로 삶을 이어 나갔다. 이따금 산맥에서 불어와 바다로 나가려는 바람의 욕구가 거셀 즈음엔 벼랑 언저리에서 일을 하다 그 바람에 휩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한 가장의 이야기가 들리곤 했다. 슬픈 동네다. 너무나도 슬퍼 곡야에는 밤조차 오지 않는다. 밤이라는 개념이 없다. 마을에서 제일 똑똑한 할아버지의 말로는 구름이 너무나도 두꺼워 낮이 내려오는 동안에 구름 위로는 밤이 오고, 밤이 내려오려는 동안에 다시 낮이 된다고 하셨다. 하루에 딱 삼십 분, 잠깐 어두워졌다가, 잠깐 밝아질 뿐이었다. 그 잠깐 어두워지는 시간에 안드라 아저씨는 짧은 밤을 만끽하며 괭이를 잠시 내려놓고 그림을 그렸고, 그 잠깐 밝아지는 시간에 뒤엣뜨 아줌마는 치매가 있는 노모의 욕창에 햇볕을 쬐였다.
할아버지는 산맥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이 불 때마다 지팡이를 짚고 바깥으로 나와 바람을 쑀다. 약간 쇳맛이 나면서도 코나 목구멍에는 걸리는게 없는 그런 바람 맛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 쇳냄새가 바로 피 냄새라고 하셨다. 나는 피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기에 몰랐고, 실감도 나지 않는다. 그렇게 어르신은 바람을 쬐면서, 오늘 하루도 바람이 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산맥 너머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다. 어르신은 이렇게 말하셨다.
바람마저 불지 않으면 우리 또한 이 땅처럼 어제와 내일을 모르게 된다네.
어린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어린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해보고 싶어져서, 해야만 될 것 같아서 산맥 쪽으로 고개를 숙였었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할아버지는 그렇게 산맥처럼 가만히 굳은 채 어느 쪽에서는 거무죽죽하고 어느 쪽에서는 새하얀, 산이 되어버리셨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안드라 아저씨가 창밖을 내다보다 뭔가 이상해서 뛰쳐 나오셨을 때도 가만히 있었다. 스쟐 형과 글리덴 누나가 나와서 울먹이며 연신 할아배 할아배라고 말할 때조차 나는 그저 형을 올려다 보기만 했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돌이라고 부르기에는 맞지 않을, 어떤 존재로 굳어버리신 할아버지를 바라 보면서, 그저 할아버지께서 짚고 계신 지팡이를 살며시 손가락으로 콕, 짚었다.
할아배는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듯 싶더니, 바람에 가벼이 실려 드넓은 서쪽 바다로 날아 가셨다.
나는 그제서야 울기 시작했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사라졌을 때, 나는 다섯 살이었다. 그렇게 이십 년이 흘렀고, 나는 스물이 넘어 어른이 되었다. 스무살이 되던 날 안드라 아저씨는 마을 사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 앞에 서서 자신의 팔을 헝겊으로 꽁꽁 싸매시더니, 자신이 그림을 그리던 붓을 반으로 쪼개 그 날카로운 단면으로 솟아나온 핏줄을 살짝 찔렀다. 그리고 거기서 솟아나오는 핏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어 내 아랫입술에 바르시곤, 핥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피의 맛을 처음 봤고, 그때부터 나는 저 위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처럼 입을 가리기 시작했다.
스쟐 형과 글리덴 누나는 이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둔 부부가 되었고, 뒤엣뜨 아주머니는 노모를 떠나 보내시고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연신 뭔가를 바느질 하시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내 동생 햐르타는 이제 열 아홉이 되었고, 아버지는 넉 달 전에 돌아가셨다. 잠깐의 밤 동안 추억에 가득 잠긴 눈으로 산맥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시던 안드라 아저씨는 햐르타의 대부代父가 되어 햐르타를 가르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돌아가신 할아배를 대하는 마냥 안드라 아저씨를 할아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러했다. 할아배라고 불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안드라 아저씨의 머리카락은 모두 다 하얗게 샜다. 나는 그것에 대해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끝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세상이라는 곳은 이 곡야가 전부인지도 모른다. 산맥 뒤로는 그저 무無만이 있으며, 우리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갑자기 저 산맥의 존재가 매우 갑갑하고 답답하게 여겨졌다. 가슴 속에 무언가 푹 박힌 듯, 막혀 왔다. 그렇게 산맥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괭이를 손에서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마시다 바람이 그치면 낚싯대를 끌어 올려보고, 아무 것도 없으면 땅바닥의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 차고, 뭔가 낚여 올라오면 옆집사는 여자애 루타에게 가져가던 날이 계속 되었다. 산맥을 넘고 싶었다.
어느날 나는 뭔가에 씌였는지, 낚여 올라온 팔뚝만한 물고기를 꼬챙이에 꿰갖고는 안드라 아저씨네 집에 들렀다.
안드라 아저씨는 여전히 집 안에서 뭔가를 그리고 계셨다. 먹물을 붓에 머금게 하곤 손으로 살짝 짜내어, 뭔가 알 수 없는 글자를 휘갈기고 계셨다. 나는 꼬챙이에 꿰어 온 물고기를 주방으로 가져가 구석에 세운 후, 마루로 와 안드라 아저씨가 앉아 있는 마룻바닥 뒷편에 앉았다.
"아저씨."
"왜?" 안드라 아저씨는 눈 앞의 종이만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산을 넘고 싶어요."
종이 위로 붓이 미끄러져 뽀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아저씨는 잠시 굳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붓은 머금었던 먹물을 종이에 아낌 없이 뱉어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아저씨가 할아배 마냥 죽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아저씨는 붓을 옆에 내려 놓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셨다. 나는 갑자기 앉은 자리가 불편해 다리를 잠깐 고쳐 앉았다.
"이유가 뭐냐?"
"바람이 궁금해서요."
"바람이 궁금해?" 아저씨는 잠시 콧잔등에 길게 자란 수염을 꼬시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어째서 저 높은 산의 등짝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피비린내를 안아 오는건지가 궁금해요."
아저씨는 잠시 내 눈동자 너머를 들여다보셨다. 빤히. 나는 잠시 머쓱해져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아저씨를 봤지만, 그 때마다 아저씨는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나를 보고 계셨었다. 그렇게 두어 번 했을까, 아저씨가 갑자기 일어서서 문을 걸어 잠그곤 창문에 발을 내리셨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내 앞에 털썩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시곤, 한숨을 한 번 푹 쉬셨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바라보셨다.
"궁금하냐? 난 여태까지 네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줄로만 알았다만."
"어, 음, 그렇긴 한데, 할아배가 했던 말이 점점 진짜로 다가와서요."
"피맛을 본 이후부터냐?" 나는 다가오는 그 말의 빛깔에 흠칫 놀라 대답했다.
"네……."
내 대답에 아저씨는 다시 다리를 고쳐 앉으시고, 양 손으로 무릎을 굳게 쥐셨다. 나는 마치 꾸짖음을 당하는 어린아이 마냥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생선을 향해 어디선가 꼬여든 파리가 날아가는 낼갯소리가 들렸다.
"햐르타보다 아직 너는 모르는게 많다."
동생 이야기가 나왔기에 나는 살짝 긴장했다. 그 여리고 순박하며 생선이면 사족을 못 쓰는 가시내가 뭘 안다는 말일까?
"내가 너희 아버지를, 아, 너희 아버지 험담을 하려는 건 아니야. 긴장 풀어라. 너희 아버지 대신해서 햐르타를 거둔지가 어언 삼 년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햐르타를 내 집 대신 이 할아배가 살던 집에서 길러냈지. 왠지는 모른다. 그냥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랬다. 저만치 멀리 있는 내 집은 스쟐과 글리덴에게 넘겨주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 늦은 밤 애 울음소리는 서로에게 인상만 찌뿌릴 뿐이니까."
정좌를 하고 있었기에 다리가 살짝 저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저씨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그 동안 그 누구도 할아배의 집 문턱을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 나조차도 생선을 들고 찾아 뵈었으니까. 그 전에 할아배는 바람을 맞기 며칠 전에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내가 하늘을 날게 될 날이 있을거다. 그 날 이후로 네가 첫 번째로 보는 이 마을의 여자 아이에게 내 집에서 내 책들을 읽게 해라. 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을에 여자 아이가 햐르타 뿐이었나?
"그렇게 나는 할아배의 집에서 햐르타를 길러 냈지. 그건 너도 알거다. 할아배의 집에는 그 아무런 책도 없었어. 책이라는 것도 나는 말로만 들어서 뭔지도 몰랐다. 어느 날,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 무심코 창문을 열고 있었지. 바람이 집 안으로 불어 들어오더구나. 그 바람에 그 때 아마 다섯 살이었나, 햐르타가 재채기를 했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었지. 나는 어딘가 바람에 삭아서 망가졌나 해서 안뜰로 나와 집을 한번 찬찬히 둘러 봤었다. 아무 곳도 무너진 곳이 없어서 집 안으로 다시 들어왔는데 햐르타가 없더구나. 마루에 깔려 있던 융단이 살짝 걷어져 있고, 그 안으로 구멍이 있었지. 나는 그 안으로 햐르타를 불러 보다가, 계단이 보여 걸어 내려갔네."
누군지는 몰라도 침이 목젖을 살짝 들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나인 것 같다. 아저씨는 가래가 끓었는지 잠시 기침을 세게 하더니 말을 이으셨다.
"책이라는게 있더구나. 수북히. 책상이 하나 보였고, 호롱불이 켜져 있었단다. 아무래도 햐르타가 킨 것 같지는 않았어. 할아배가 날아가고서도 그 오랜 시간을 계속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 같다. 뭘 태워서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햐르타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수북한 책더미 사이에서 종이 조각 하나를 꺼내 들곤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종이 조각을 펼쳤고, 안에 글씨가 있었지. 쪽지더구나. 그 쪽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단다."
讀者인 자네가 이 쪽지를 맨 처음 봤을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다네.
記者인 햐르타에게 글씨를 읽는 법을 알려주게나. 그러면 햐르타가 알아서 깨우치고 익힐 것이라네.
때가 되어 햐르타가 자라고 吼者인 오라비가 피비린내를 알게 될 때, 산맥을 넘게 하게.
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에 그 둘이 닿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짜 숨을 쉴 수 있네.
"……무슨 뜻이에요?"
"너는 아직도 네 이름이 왜 마을 사람들과 다른 어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나 보구나."
"네? 제 이름이 왜요?" 그는 아주 의아한 건지, 알면서도 숨기는 건지 모르는 듯 반응을 보였다.
"네? 제 이름이 왜요?" 그는 아주 의아한 건지, 알면서도 숨기는 건지 모르는 듯 반응을 보였다.
"이 곡야는 말 그대로 세상의 끝이란다. 세상의 끝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백 번의 바람이 불 때마다 한 사람이 실려가고 한 사람이 불어온단다. 천 번의 바람이 불어오고 그 후로 백팔 번의 바람이 불어올 때 진실은 불어오고 다시 날아가며, 백육십이만 번의 바람이 불어올 때, 이 곡야는 점점 떠밀려오는 산맥에 짓눌려 비로소 하나의 산맥이 커다란 의意를 이루게 된단다."
정말로 모르는 모양인지, 그는 머리를 긁으며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무슨 뜻일까, 무슨 말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누리야. 왜 우리들, 마을 사람들은 항상 열두 명인건지 생각은 해 보았느냐? 어째서 마을 사람들이 나를 갑자기 할아배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 어째서 스쟐과 글리덴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하나씩 두고 있을까? 어째서, 저 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피비린내가 날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누리는 吼者, 우는 자로써 깨어났다.
세상은 이미 끝나 있었다. 어떠한 것이 어떠한 뜻으로 그러는지는 모른다. 얼마나 넓은 혹은 상상보다 작은, 산맥 너머의 땅들이 피비린내에 절어 있고, 얼마나 의미 없을 혹은 의미 있을 것들이 낮과 밤을 거두는 구름 너머로 자리 해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누리는 정말로 산맥을 넘고 싶었고, 그렇게 넘기로 결심했다. 드넓은 서쪽 바다로 떨어져 물고기 밥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보다, 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그 곳으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혈육인 햐르타를 데려 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이전까지의 누리와는 아무런 연관성이나 관련도 없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저 산을 넘어서면 드넓은 땅, 대륙大陸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그 대륙은 글자 그대로 대륙大戮인지라 그 옛날 저 산 너머 드넓은 곳이 다 사람 살만한 곳이었고, 산맥이 자그마한 봉우리였을 때조차 몰아내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곡야의 열 둘로는 역부족이리라. 먼 발치에서 피비린내를 맡으며 수많은 굴레 전의 혈욕을 충족시킬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굴레를 넘어 수많은 글자와 마음과 얼굴로 이 곡야에 다다랐다가 스쳐 지나갈 때, 그 무엇도 굴레를 기억할 수 없고 굴레를 돌이킬 수도 없다.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이리라. 웃음이 절로 나온다.
다만 손끝에 스치는 유일한 희망으로는 이 지팡이 하나와, 어디선가 불어 올 그 다섯 이者일 것이다.
언젠가는 이 굴레를 끝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때는 저주했던 이 무한의 굴레를.
몇 년만에 써보는 판타지인지 모르겠네요.
묘사가 감성적으로 젖어 있은지가 오래 되어 골자가 그 묘사에 흐려지는 것이 걱정입니다.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런지도 의문이네요. 워낙 갑자기 생각해낸 것들이라서요.
그럼 이만.
20141021
0302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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