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가을 - 上

작품/소설 2014. 12. 18. 02:49

잠에서 깼다. 잠으로부터 억지로 끌어내진 것이 아닌 아침에 일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 일어남에 나는 한 동안 우두커니 앉아 눈을 끔뻑이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나를 잠에서 깨운 건지 내 기상에 마침맞게 소리가 나는 건지는 몰랐다. 아직 방 안은 어두컴컴했고 나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그 어둠에 지금이 새벽임을 알았다. 그제서야 그 소리가 휴대전화에서 나는 것임을 알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 시간 사이에서도 계속해서 그 벨은 끊이지 않고 마치 내 방에서 원래 나는 소리처럼 자연스럽게 계속되며 스스로의 중요성을 알렸다. 나는 느리게 전화로 손을 가져가 폴더를 열어 귀에 가져다 댔다. 수화기 너머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 그리 하라고 말한 것처럼 나 또한 아무 말 없이 전화를 귀에 댄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를 받고 있음에도 전화에는 의식이 가지 않았다. 문득 나 자신이 나무늘보가 된 것 같았다.


창문 너머로 자동차 전조등이 두 번, 오토바이 마후라 소리가 한 번 지나갔다. 침묵은 계속되었지만 그 침묵에 위화감은 없었다. 자연스러운 기상이었고 자연스러운 침묵이었다. 저 멀리 어딘가의 기지국으로 향하였다 다시 돌아온 수신 대기음이 돌아올 때까지 나는 그렇게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나는 폴더를 닫고 휴대전화를 옆에 내려놓은 다음 잠시 불려나온 잠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문은 열렸고 다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문 너머로 키 작은 누군가 내게 옆구리에 끼고 있는 숙제를 내밀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스쳤고, 나는 그저 아무런 치우침 없이 중얼거리며 잠으로 돌아갔다. 누구였을까.



칫솔질을 하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팬을 달구기 위해 가스를 당겼다. 틱틱거리는 점화음의 한 음절마다 덜 깬 잠으로부터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불이 온전히 붙었음에도 얼마간 그렇게 당기고 있었고,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고 온전해졌다. 세면대에 양칫물을 뱉고 입 안을 헹구었다. 세면대에 손을 짚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무의미와 유의미 사이의 틈바구니에 끼인 습관이었다. 딱히 의미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행동이었다. 하지만 여태 그 것으로부터 의미를 찾을 순 없었다. 그저 거울 너머로 전날 오버한 주량이 얼굴을 할퀴고 간 생채기만이 보였을 뿐이다. 계란을 깨 프라이팬에 넣었다. 흰자와 노른자의 경계는 또렷했다. 감싸고 있는 껍데기가 사라짐에도 그 경계의 신뢰는 변함 없음이 항상 신기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다시금 그가 내 어깨를 건드리며 숙제를 내밀었다. 누구였을까. 하지만 나는 아무런 고의성도 없이 그 숙제를 마치 명 받은 것처럼 신경쓰지 않으며 프라이팬을 공중에서 한 번 뒤집었다. 노른자가 깨지지 않고 온전히 뒤집혔고, 나는 만족했다. 나에게 그 무언의 전화를 할 친구도 딱히 없으며 최근에 있었던 일도 별로 없었다. 그저 아침을 먹으며 든 생각은 어제의 전화보단 계란에 소금을 덜 넣었다는 생각 뿐이었다.


출근길 버스에 탔다. 운 좋게 옆자리까지 빈 창가 쪽 자리가 있었기에 냉큼 가 앉았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손에 괴고선 바깥을 바라보았다. 가로수. 쌓인 눈. 빙판길. 한 아가씨가 입고 있는 더플 코트의 마음에 드는 디자인. 쇼윈도에 놓여 있는 앵클 부츠와 옥스퍼드 구두.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 지팡이를 짚으며 미끄러질까 천천히 얼어붙은 인도 위를 걷는 노인. 책가방을 맨 체 하품을 하곤 눈치를 보며 피시방으로 들어가는 학생. 문득 버스 유리창은 바깥이 내다보이는 게 아니라 언젠가 있었던 동시간대의 길거리를 녹화한 영상을 틀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게 지나갔다.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했다. 동료는 역시나 외근 아닌 외근을 나가 있었고, 나는 돈을 받지 않고 아니라 주는 입장이었기에 동료의 외근을 이용해 설렁설렁 일했다. 여직원이 내게 그리스어를 가져다 주었고, 나는 책상 한 구석에 그것을 아무렇게나 치워둔 후 여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문득 그리스를 생각하니 요거트가 먹고 싶어져 여직원에게 같이 가 먹자고 했고, 언제나 그런 쪽으로는 공범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나는 사무실 문을 잠시 잠그고 바로 앞 카페로 가 요거트 빙수를 먹었다. 혀에 닿는 요거트의 새콤씁쓸함과 얼음의 차가움이 극단적이어서 좋았다. 그녀는 엊그제 다이어트를 포기한 탓인지 식욕에 불이 당겨져 있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다이어트 하기에는 몸매가 너무 좋은 것 아니냐는 말에 사장님은 여자를 몰라요 라는 소리까지 들었었지. 그녀는 기어코 초코 파르페까지 시켰고, 그렇게 배탈이 났다. 그녀는 화장실을 들락날락한 끝에 탈진 직전의 몰골을 한 채 책상 위에 쓰러져 잠들었고 나는 그녀의 외투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외투가 어디서 본 것 같아 찬찬히 살펴보니 아침에 봤던 그 더플 코트였다. 보랏빛. 벨벳인지 부직포인지 모를 투박하면서도 포근한 감촉이었다. 문득 바비 빈턴의 블루 벨벳 가사가 생각났다. 나는 조용히 흥얼거리며 열쇠를 그녀 앞에 놓아두고 퇴근해도 좋다는 쪽지를 남긴 채 사무실을 나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을 무렵의 귀가는 언제나 여러 생각이 들게 했다.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집에 막 돌아왔을 때 감도는 공기는 언제나 익숙하지 않았다. 불을 켜고 찌개에 불을 올렸다. 그제서야 사람 사는 느낌이 났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와 냉장고를 열어 찬거리를 봤다. 맨 밑의 야채 칸을 열자 대파가 보였다. 나는 아주 잠시 그 대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장 본 기억이 없는 대파였다. 전기 생각이 나 일단 대파를 꺼내고 냉장고를 닫았다. 대파는 검은 비닐봉투에 밑단이 담긴 채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작은 봉투로도 충분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투 생각을 하자 문득 생각 외의 방향에서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그 기억은 마치 누가 일부러 지워놓은 듯 희미하여 바로 읽지는 못하였다. 왠지 모르게 내 스스로가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떠오른 생각은 항상 그렇듯 무신경으로 향하려 할 수록 반대로 더 거세게 달려갔고, 이윽고 온전히 드러났다.


한 달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집에 찾아왔던 날의 대파였다.


대파를 만져봤다. 그저 냉장고에 넣어져 있었기에 차가울 뿐인데 그 차가움은 다른 차가움과는 언뜻 다른 것이었다. 고개를 내민 빙산은 서서히 밑에 달려 있는 더 거대한 것들을 끌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 생각이었다. 약간 어눌한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었다. 뭔가를 말하려 할 때마다 그보다 더 수 많은, 그리고 그 말과는 관계 없는 것까지도 곰곰히 생각했었기에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계속 입을 오물거리는 토끼 같았다. 이따금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바라보며 걷다가 걸음이 느려져 잠시 후 후닥닥 달려와 당황하며 내 옷자락을 잡았었다. 단 둘이 있었을 때는 전자레인지에서 덥혀온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즐겨 봤었고, 토론할 때 만큼은 연인이라기보단 사이가 안 좋은 동호회 사람과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일본 영화를 되게 좋아했다. 라쇼몽과 죠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정말 좋아했다. 나 또한 영화를 계속해서 다시 보는 것을 좋아했기에, 일 년 반 동안 두 영화만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다. 나는 잠시 그렇게 대파가 그녀인 것처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고, 찌개가 끓어 뚜껑을 치고 올라오는 증기 소리에 문득 돌아와 황급히 가스 불을 껐다.


그깟 대파가 뭔지. 나는 애써 짧은 실소를 흘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잠시 멍하니 찌개가 담긴 그릇을 바라보다가 냉장고로 가 칭다오 한 캔을 꺼내왔다. 뚜껑을 따자 소리가 났다. 왠지 모르게 갇혀 있느라 답답했다는 말이 들리는 듯 했다. 맥주는 마치 기관지로 넘어가는 듯 얼얼한 냉기로 폐부를 적셨다. 식탁 위에는 여전히 검은 비닐봉다리에 담긴 대파가 가로로 놓여 있었다. 그 대파의 존재가 마치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것과 같이 느껴져 나는 그 생각의 어이없음에 실소했다.



한 캔을 더 까곤 바닥에 앉아 소파에 엉거주춤 기댔다. 팔을 편하게 걸치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영화 상실의 시대가 나오고 있었다. 원작을 끔찍이 아끼기에 영화화 됬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보고 싶지 않았다. 흥미 또한 동하지 않았다. 옛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영화의 제목은 내 머리를 강제로 젖혀보곤 어디선가 실 한 올을 가져다가 연결하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영화화 된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설레어 있었지만 나는 당시에 감독이 내게 무슨 해꼬지를 한 것 마냥 영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퉜다. 다퉜다기보단 내가 그녀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묵살했다. 그녀는 그렇게 혼자 보게 될거라면 보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녀가 그 영화를 봤는지 어쨌는지는 알지 못했다. 기억 너머로 그 때는 몰랐었던 그녀의 표정이 다른 것에 비해 너무나도 또렷히 보였다. 표정이 점점 가까이 보일 즈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렸다.


그 영화 지금은 봤을까.

그 때 그 전화, 그녀였나.

담배가 어느 정도 타들어갔을 즈음의 생각이었다.




End

20141218 0248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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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昧葬의 후일담後日談

작품/소설 2014. 11. 10. 02:54
흙이 덕지덕지 묻어 굳은 채로 떨어지지 않는 삽날을 발 끝으로 긁어내다 포기하고, 옆으로 던졌다. 쓰러지듯 주저 앉아, 주린 목을 적셔줄 웅덩이라도 있는 마냥 절실함을 담아 세 발짝 쯤 되는 거리를 기어가, 아직 옷도 입히지 못한 봉분을 최대한 팔을 벌려 안았다. 으레 이 다음은 모두들 울지 못해 죽은 귀신처럼 울더만, 어째 나는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최대한 울지 않고 그녀를 떠나 보내는 것이 그녀가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될 수 있는대로 어딘가를 깨물었다. 입술이 찢어지고 이빨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내 것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멀게 들렸다. 어디선가 황조롱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귀뚜라미 소리와 비슷한 그 소리. 여름이 생각났다. 그녀와 함께 걷고팠던 그 여름날의 갈대밭. 함께 바닷가에 차를 몰고 가선 밀려오는 파도에 실린 바닷바람의 짠 내를 맡고 싶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소금기가 아름답게 꽃송이처럼 맺혀 있었으리라. 그녀를 잠시 쓰다듬곤, 미안하다고 말하고 봉분을 등에 베고 누웠다. 야속하게도 하늘은 구름 한 점 끼어있지 않았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누옇도록 짙어 금방이라도 소맷자락에 이슬 맺힐 것 같았다. 차갛게. 차갛게라는 단어를 하나 지어냈다. 차갑고 하얗게. 차갑고 누옇게. 차갑고……. 뒤엎어진 흙이 아직 추위에 굳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단어를 뱉어내고 있는가. 실소가 흘러 나왔다. 실소는 곧 울음으로 번졌다. 참기로 했는데, 참아지지가 않았다. 물러터진 입술의 상처 사이로 흘러 들어가 욱신거렸다. 그 욱신거림의 고동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느껴져, 내 자신이 살아있음에 그리고 그녀는 누워있음에 더더욱 울었다. 의문이었다. 나는 계속 살아 숨쉬며 박동하고 있는데 그녀는 어찌하여 차디 찬 곳에 누워 있는가. 하다못해 그 여름, 바닷바람으로부터 맺힌 소금기가 가시기 전에. 아직 흙이 따뜻할 적에 묻어주고 싶었다. 야속하게도 옅은 안개마저 어디선가 흘러 들어와 그녀를 적셨다.

태양이 거세게 내리쬐는 사막, 가녀린 맨발로 눈부시게 아름답고 고운 모래밭 위를 걷는 그녀가 보였다. 하이얀 원피스를 입고선 멋드러지게, 가느라면서도 균형있게 살집이 잡힌 다리를 내비치며 머리에 쓴 챙 모자를 바로 잡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하며, 태양을 등지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태양더러 돌아서라 말했다. 태양은 돌아섰고, 마침내 그녀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걷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한낱 꿈을 꾼 걸까, 나는. 그녀는 꿈 속에서 나와 시간을 보냈고, 실제로는 같이 자리하지도 않았던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아, 그녀는 진짜구나. 진짜 내 옆에 있었어.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아보려면 볼을 꼬집는다고들 하지 않는가…. 나는 그 물음으로 내 볼을 힘차게 꼬집었고, 정말로 아팠다. 아프다 못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황조롱이는 또 한 번 날아가며 울었고, 날갯짓으로 바닷바람을 실어왔다. 새벽의 선명하고 짙은 공기에서, 나는 울었다.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짚고는 일어섰다. 어딘가 아픈 곳도 없고 지치지도 않았을진데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났다. 그녀의 마지막을 나와 함께 한, 널브러져 있는 삽을 주워 발 끝으로 날을 털었다. 흙은 안개를 머금어 금방 떨어졌다. 힘 없이 삽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가면 그녀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치며 '사내 녀석이 기 펴고 다녀야지?' 라고 할까봐, 없는 힘을 쥐어 짜서 삽을 어깨에 메고 걸어 갔다. 그녀의 아리따운 머리 위로 갓 심어놓은 풀들이 다 자라 그녀의 자랑이었던 기다란 머리카락 마냥 늘어질 때에 다시 올 것이다.



그렇게 멀어졌다. 그녀의 봉분이 등 뒤로 보였다. 닿지 않아도 보였다. 알 수 있었다. 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내 어깨 위로는 아직 그녀의 무게가 실려있다. 그녀의 무게. 그녀는 아직 내 위로 살아 숨쉬고 있다. 그녀의 생존에 대한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는. 그녀…는.

열한 번째의 봉분을 만들면서, 나는 드디어 지쳤다. 추억과 망각 사이에 끼어 치던 발버둥. 종각에 다다른 것일까. 다시는 그녀를 묻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다 묻었기에. 묻어버렸기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는 너를 묻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녀는 내게─



END
2014 11 10 02 52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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