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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빛
上편은 되게 호흡이 길고 어색함. 下편과 달리 느낌대로 이어나가질 않고 억지로 쓰려고 해서 그런 듯. 거북함에 사과드림.
꿈결처럼 지나간 사람들이 있다. 같이 있을 때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그들과 함께 누리는 시간이 값지고 아름답고 즐거웠으나 눈꺼풀을 들어올리고서 기억을 더듬어보면 멀리 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 떠올라 손끝으로 더듬어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연이 있다. 많다. 그 옛날 같이 피아노 의자 옆에 앉아 아무런 음율 없이 이리저리 건반을 서로 두들기며 웃고 떠들던 여자가 있었고 들판이라면 어디든 가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보온병에 타온 커피를 함께 따라 마시며 불어오는 바람을 서로의 얼굴 사이에 두고 웃기만 하며 행복해하던 여자가 있었다. 웃고 떠들며 무슨 주제던 간에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던 녀석도 있었고 함께 드라이브를 떠나 벚꽃을 보며 말 없이 손을 잡고서 손에 고이는 땀을 부비던 정말 사랑스럽던 그녀가 있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 내 손에 딱 들어맞던 그 가녀린 손을 안고서 저 아래 땅 밑에서 한 평도 안되는 땅만을 부여받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다. 고요히 잠들어 있으리라. 그랬으면 좋겠다.
수많은 이별을 지나고 인연이 끝날 즈음 온종일 미동도 않는 휴대전화 액정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더 이상 인연을 찾기 위해 연연하지 않으리라. 오는 인연 오게 하고 가는 인연 여태껏 꿈결처럼 그래왔듯 보내리라. 그렇게 결심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그녀의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활짝 웃는 미소가 화면 안에 한가득이었다. 울적해지지도 않았고 보면서 미소가 지어지지도 않았다. 이런 시기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인연은 떠나가면서 머무르는 사람을 늙게 만든다. 나는 내 나이에 비하면 너무 늙은 것이리라. 울고 싶었지만 내 안에 그들이 남기고 떠난 그들이 원래 살아갔어야 할 시간들은 나를 울게 놔두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제각각의 시간이 초침을 똑딱이며 내 안에 죽은 채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 똑딱임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이제는 거슬렸다. 잊기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 이차선 도로를 건너 계단을 내려가 하천변의 산책로를 걸었다. 하염없이 걸었다. 다리 하나를 지나고 이전보다 조금 더 멀찍이 떨어져 놓인 다리 하나를 또 건넜다.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하천변의 모양을 조금 바꿔놓은 탓인지 이전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경했고 그 생경함에 분노했다. 다시금 꿈결처럼, 억새가 너울거리는 이 천변에서 있었던 추억들이 내 안에서 똑딱였다. 더 멀리 갔다. 중인리 쪽으로 향했다. 조팝나무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마치 자라나다 멈추어 그 왜소함에 만족한 듯 고요히 늘어서있는 조팝나무들이 늙은 퇴역군인처럼 느껴졌다. 조팝나무 산책길 왼쪽으로는 이름 모를 나무가 오름 위에서 군락을 이루어 오름을 뒤덮은 모습이 보였다. 삼림풍이 불어왔다. 삼림풍의 끝자락에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삼층집이 보였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창고에는 태양열 발전판이 지붕을 덮고 있었다.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서있는 외딴 그 집의 고고함이 왠지 모를 이끌림으로 조금씩 나를 끌어당겼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활짝 피다 못해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잠겨갔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제시 쿡의 플라멩코 기타 소리가 울렸다. 조팝나무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너풀거리고 싶음에도 크기의 작음에 슬퍼하며 조금씩 펄럭였다. 그래도 그들은 만족하는 것처럼 흥겹게 너울거렸다. 산책로는 길었고 그 긴 산책로를 걷는 동안에 그 집은 항상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 집의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한 여자가 보였다.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머그잔에 포트에 담긴 물을 따라 다시 소파로 가던 도중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렇게 한동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왠지 모르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조금 되기에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계속해서 나는 왠지 모를 이끌림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를 만났을 때와 같은 이끌림이었다. 빛깔도 강도도 비슷했다. 어찌 흘러가던 간에 인연을 지어야 한다고 운명지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이끌림이었다. 부여받은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강한 이끌림이었다. 창밖으로 나를 내다보고 있는 그녀는 머그잔을 내려놓곤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발걸음을 돌려 그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쪽으로 향하는 날 본 것인지 머그잔을 들고서 소파로 향했다.
초인종을 눌렀다. 으레 이 근처에 별장을 지어둔 사람들은 마당에 개를 묶어놓는데 이 집은 그렇지 않았다. 고요했다. 불어오는 바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슬리퍼를 신은 발소리가 점점 현관문으로 가까워져왔다. 그리고 그녀는 현관문 렌즈로 바깥을 내다보더니 나를 발견한 듯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 돌아가는 소리조차 조용했다. 문이 열리고 나온 여성은 키가 조금 큰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생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고 얼굴은 조금 수척하지만 기품이 느껴졌다. 생기와 기품을 맞바꾼 것처럼 보였다. 하늘색 티셔츠와 베이지색 긴 바지를 입고서 문을 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잠시 머뭇거렸고 그녀는 살짝 웃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녀가 금방이라도 바람에 실려 날아갈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바깥에서 산책하다가 봤는데 이 집 디자인이 되게 멋져서요. 사진이라도 찍을까 해서 허락 맡고 싶어서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그녀는 내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사진 찍으신다는 분들은 대부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니시던데 그 쪽은 아니시네요?”
아차 하고 카메라를 들고 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야 나중에 가져와서 찍어도 되죠. 해도 졌고 해서. 노을진 풍경을 찍고 싶어서요.”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고 그녀는 여전히 문고리를 잡은 채 웃고 있었다.
“여긴 밤풍경도 멋있어요. 손님을 밖에 세워두긴 뭐하니 들어오셔요.”
그녀는 문고리를 놓고서 안으로 들어가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놓았다. 나는 문이 닫히기 전에 팔로 살짝 연 후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발냄새가 나진 않을까 조금 신경이 쓰였다. 집 안은 엊그제 벽지를 바른 듯 정갈했고 은은한 커피향이 났다. 아까 머그잔에 따른 물은 커피 끓인 것이리라. 그제서야 내 옷차림이 어떻게 보일지가 신경쓰이기 시작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금 와서 다시 옷을 갈아입는 것은 불가능하고 갈아입을 옷도 없기 때문이었다. 일층에는 책장에 온갖 책이 가득했다. 우측에 원래 거실 용도로 디자인된 공간에는 사방에 책장이 놓여 있었고 현관문 바로 맞은 편에는 나선형으로 계단이 보였다. 그녀는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살짝 바라보곤 그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일층과 이층 사이엔 천장이 뚫려 있었다. 이층에서 일층 서재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소파와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이 보였고 그 뒤 창가 쪽으로 주방이 보였다. 그녀는 어깨를 반대쪽 손으로 긁더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누추한 곳이에요. 저 혼자 살고 있고요. 커피, 드실래요?”
냄새로 보건데 원두커피였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분 혼자 사는 집에 낯선 남자를 들일 때 의심하는 것이 보통 아닌가요?”
그녀는 그 말이 상당히 즐겁게 들렸던 듯 여태껏 지었던 미소보다 더 크게 웃고선 말했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당신은 의심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자, 앉으셔요.”
그녀는 정중한 손짓으로 소파를 가리키곤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 거울이 어딨는지 물어보려는 마음을 꾹 참았다. 의심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눈빛은 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했지만, 이내 그녀가 권한대로 소파에 앉았다. 딱딱하지도 푹신하지도 않은 적당한 소파였다. 그녀는 그녀의 것과 똑같이 생긴 빨간 머그잔을 들고 와 내게 건넸다. 커피잔을 양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졌다. 그녀는 내 옆에 너무 멀찍이는 아닌 거리를 두고 앉아 말했다.
“여기에 사람이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선뜻 들인걸지도 모르겠구요. 더욱이 아까 창밖에서 왠지 모르게 이쪽을 계속 쳐다보시길래.”
나는 그 말에 커피를 조금 뿜을 뻔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무척이나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미소였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라던가 뭐 옛날 중세시대에 귀족들이 작업 걸 때 하던 멘트가 나오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문을 열었거든요. 근데 그런 건 아니라서 다행이기도 하고, 오히려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여자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거,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커피를 홀짝이며 시선만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가재도구는 별로 없어보였다. 그제서야 혼자 사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그 사람만의 온기를 집안에 드리우는 편이 많은데 이 집에는 온기가 그득했기 때문이다. 가녀린 몸 안에 품은 소소한 온기가 이 집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다.
“꽤나 오랫동안 혼자 지내셨던 것 같아요.”
그녀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되게 외로웠기도 하고 유유자적함을 즐기기도 하고 뭐 그렇죠. 거의 다 죽어가는 여자를 누가 만나러 오겠어요?”
그녀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 마냥 흐르듯 흘러간 그 말에 나는 머그잔을 조금 세게 잡았다.
“네?”
나는 반문했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암이에요. 암 중에서 그나마 조금 점잖은 암이라고 해두죠. 후후.”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우스웠던 듯 살짝 실소를 내뱉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모든 연을 끊고 하던 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고 여기에 집을 짓고 살고 있어요. 뭐, 그런거죠.”
그녀의 말에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유감입니다 라는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막 찾아온 이방인이기 때문이었고 나는 그런 나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녀는 무언가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 말을 끊었다. 나는 억지로 말을 이었다.
“일이라면 어떤 일이죠?”
자기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지 그녀는 웃으며 머그잔을 내려놓고 일어서 따라오라고 말했다. 나 또한 소파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텔레비전 왼쪽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작업실로 보였다. 컴퓨터가 있었고, 책장이 양쪽에 있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마주보는 쪽에는 바깥으로 나있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고선 방향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소소하게 글을 쓰는 일이에요. 작가죠 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어떤 글인지 물어봐도…….”
“알고 나서도 굳이 찾아볼 마음은 들지 않을건데요?”
나는 그 말에 잠깐 당황했고 그녀는 또 다시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성인 소설이니까요. 여성들을 위한. 웃기죠? 세상으로부터 연을 끊고 혼자 칩거해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여자가 쓰는 소설이 성인 소설이라니.”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빈 말일 뿐인 위로조차. 그녀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괜찮다는 미소를 띄우곤 말을 이었다.
“뭐, 그런거예요. 그렇게 살고 있는데, 오늘 마침 되게 흥미로운 사람. 당신이 이렇게 찾아온거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전 그런 거 좋아하니까.”
그녀는 자신이 할 말에 대해 각오하라는 듯 잠시 숨을 고르곤 말했다.
“친구가 되어주시겠어요? 얼마 남지 않은 삶, 친구 하나는 가진 채 보내고 싶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일어나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생머리가 휘날리며 샴푸 냄새가 날아왔다. 죽어가는 사람으로부터 나는 냄새라기엔 향기로웠다. 마주치는 모든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지금 불어오고 있는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휘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조팝나무가 생각났다. 메타세쿼이어같은 느낌도 났지만 조팝나무였다.
“그러죠. 기꺼이. 스물 여덟. 이시헌이라고 해요.”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서른 둘 먹은 이혜인이라고 하는 늙은 여자에요. 가슴도 작고 볼품 없고 죽어가는 성인 소설 작가.”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소리나게 웃더니 몸을 돌려 내 쪽으로 걸어와 내게 안겼다. 그 어떤 육체적 목적도 없었다. 그저 안겼다. 나는 조용히 그런 그녀에게 기댈 곳이 잠시 되어주었다. 꿈결 같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끌려서 찾아온 곳에는 매력적이지만 죽어가는 한 여자가 있었고 그런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죽기 전까지 그녀를 찾아와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주며 친구가 되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역할이라고 하니 뭔가 억지로 한 것 같이 들린다. 기꺼이 맡은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말을 놓게 되었다. 주로 그녀의 이야기였다. 스물이 되었을 즈음 불문과에서 만나 처음으로 사귄 연인은 군대에 가서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프랑수아즈 사강을 읽기 시작했고 자판을 두들기며 글을 썼다고 한다.
“야한 것을 야하게 보이지 않게 하면서도 야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내 글의 궁극적인 목표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내게 그녀의 글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 이야기로 돌아와서, 대학을 그저 무난히 졸업하고 이런저런 번역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쓰러졌고 검진을 받아보니 갑상선 암 말기였다고 한다. 그 때 그녀의 나이 스물 아홉. 나는 그녀에게 왜 입원해서 치료를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든 채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족할 수가 없어서. 암을 고치고 더 오래 산다고 해도 내가 살아가면서 만족할 수 있는 삶일까 싶어서야. 그리고 내게 주어질 그 기회. 삶을 더 이어나갔을 때 내가 더 알차고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고. 그래서 그냥 그 기회는 누군가에게 주기로 했어. 하늘이 내게 기회를 준 것은 곧 누군가가 그 기회를 잃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나는 나지막히 이렇게 말한거지. ‘신이시여, 제게 그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리고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저는 합당치 않사옵니다. 그러니 그 기회를 저보다 더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으나 멈춰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저보다 더 어리고 더 사람된 사람에게 주시옵소서.’ 하고 송장을 떼지 않은 채 바로 반송을 한거지. 딱.”
그녀는 말 끝에 손가락을 튕겼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밤이 늦어 돌아갔다. 방을 하나 비울테니 자고 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다음에 와서 그러기로 했다. 갈아입을 옷이며 칫솔 치약이며 안 가져왔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실례하고 싶진 않았다. 연인 사이라면 괜찮은 일들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돌아가기로.
“아쉽네, 칫솔하고 치약이며 옷가지 다 빌려줄 수 있는데. 빌려준다는 표현을 쓰기엔 조금 그렇지만. 친구 사이잖아?” 그녀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내게 조팝나무 산책길에서 자기네 집으로 걸어올 때 사인을 주라고 말하고 잠시 그 사인의 내용에 대해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서 놀아라.
학교 가는 뒷동산에
해는 아직 쨍쨍한데
바둑아 바둑아
이리 나와 놀아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놀아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 나와 놀자.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약간 벙 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는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왜, 좋잖아. 딱 맞네. 내가 바둑이고 네가 철수니까. 부끄러운 거라면 신경 쓸 필요 없어. 저 길은 거의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산책길이니까. 철수라는 몰개성한 이름이 싫으면 다른 걸로 바꿔줄까?”
나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저었다. 내가 철수인 건 둘째치고 왜 그녀가 바둑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렇게 그녀는 바둑이가 되었다.
2015 05 14
18 23
上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베란다로 나있는 창 틈 사이로 스며오는 냉기에 깜짝 놀라 이불을 두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푸거리며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다. 어제만 해도 볼만하게 나있던 수염은 이제 덥수룩해져있었다. 작년만 해도 삼 일에 한 번 꼴로 면도를 해야 한다는 점이 싫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런 것까지 싫어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끔하게 수염을 깎은 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보일러를 끄고 수도가 얼지 않게 수도꼭지를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도록 열어놓은 후 옷을 입었다. 목을 푼 와이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위에는 가벼운 윈드브레이커를 걸친 후 속옷과 양말 그리고 세면도구를 넣은 더플백을 메고 로퍼를 신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선 후 가까운 꽃집을 찾아 장미 한 송이를 샀다. 별다른 뜻은 없다. 그녀가 빨간 것을 좋아하는 것 같길래 샀을 뿐이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갔다. 20분 쯤 걸었을까, 조팝나무 길이 보였다. 나는 주변에 누가 없나 살핀 후 헛기침을 하곤 노래를 불렀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서 놀아라. 학교 가는 뒷동산에 해는 아직 쨍쨍한데 바둑아 바둑아 이리 나와 놀아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놀아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 나와 놀자.
노래가 딱 끝나자마자 신기하게도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멈춰섰다. 노래의 길이가 적절했기 때문이리라.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현관문 앞에 멈춘 후 초인종을 눌렀다. 꽃은 등 뒤에 감춰둔 채. 잠시 후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녀는 밤색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머리에 물기가 남아있는 걸로 보아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나보다.
“안녕하세요.”
“일찍 왔네? 어서와. 아침은 먹었어?”
그녀는 내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다가 잠시 움직임을 멈춘 다음 배시시 웃었다.
“거기 등 뒤에 감춰둔 것의 정체를 소녀가 여쭤봐도 되렵니까?”
나는 어떻게 맞춰줄지 잠시 난감해하다 말했다.
“그냥 좀, 어떠려나 해서 사봤어요. 이런 거 받아본 건 오랜만일까 해서.”
그리고 꽃을 내밀었다. 다행히 아직 시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시들면 현대 플라워리스트들의 체면이 울겠지만. 그녀는 가녀린 두 손으로 장미를 받아들곤 잠시 멈춰서서 꽃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곤 윗층 주방으로 후다닥 가버렸다. 물 소리가 났고 이윽고 장미 한 송이가 꽂힌 샴페인글라스를 들고 왔다.
“이렇게 해도 오래 가진 못하겠지만 일 주일은 가겠지. 고마워. 조금 놀랐네. 다른 사람한테서 꽃이란 걸 받아본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 보답으로 아침 해줄게. 들어와서 앉아. 추워.”
나는 문을 닫아 잠그고 신발을 벗은 다음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거실에 있는 탁자에 샴페인글라스를 놓고선 주방으로 가 가스불을 켰다. 나는 윈드브레이커를 벗어 대충 접은 다음 옆에 놓고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틀었다.
“노래 틀건데 티비 계속 볼거야?”
주방 쪽에서 그녀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뭔가를 굽고 있는 건지 크게 말하지 않았으면 소리가 묻힐 뻔 했다.
“아뇨, 그다지 볼 것도 없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리모컨 버튼을 꾹 눌러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주방 쪽에서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접시 두 개를 들고서 내게 다가왔다.
“에릭 클랩튼인가요?”
그녀는 탁자에 접시를 놓고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접시에는 계란과 베이컨, 햄 그리고 식빵이 있었다.
“응. 녀석,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네.”
“왜, 왜요?”
당황해하는 날 보며 그녀는 크게 웃고는 주방으로 가 포크와 나이프 두 짝을 가져온 후 내 옆에 앉았다.
“그냥, 취향이 잘 맞아서? 크로스로드 페스티벌 2013년 라이브야. 괜찮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옆에 딱 붙어선 칼질을 잠시 요리저리 하더니 탁자에 포크와 칼을 내려놓고 접시를 집어들었다. 소파 위에 발을 모아 앉더니 햄과 계란을 잘 끌어모은 빵을 한 손으로 집은 채 먹기 시작했다.
“네. 트랙 순서로 봐선 조만간 <티어즈 인 헤븐>이 나올 차례 같은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그녀를 따라 빵을 대각선으로 자른 다음 위에 계란과 햄을 끌어모은 후 집어들었다. 그러자 노른자가 터져 다리 사이 소파로 조금 떨어졌다.
“아.”
“기술이 부족하네, 기술이. 칼로 옮기다가 노른자를 터트려서 그래.”
그녀는 팔을 뻗어 탁자에 놓여있던 물티슈를 열어 뽑아 건넸다.
“자, 떨어진 위치가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알아서 닦아.”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에요?”
나는 물티슈를 받아들곤 닦으며 웃었다.
“하는 일이 일이니만큼 버릇이 들더라고. 신경 쓰지마. 혹시 불편해?”
“그런 건 아니지만…음, 조금 주의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맛있네요.”
그녀가 해준 간단한 식사는 베이컨을 좋아하기도 하는지라 입맛에 딱 맞았다. 그러자 그녀가 웃었다.
“혼자 산지가 십 년은 더 되니까 말야. 조금은 변덕에 맞춰줘. 미안해.”
“변덕이었나요. 버릇이라면 맞춰줄 수 있는데.”
그녀가 주먹을 쥐곤 내 어깨를 장난스럽게 쳤다. 노른자가 또 흘렀고 물티슈 한 장을 더 뽑았다. 그렇게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아침식사를 마쳤다.
서재에서 나는 창가에 서서 커피를 마시고 그녀는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던 차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엔 하이얀 눈송이가 천천히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기지개를 펴곤 다른 눈송이들을 불러오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발은 점점 빽빽해져갔다. LP플레이어 위엔 켄트의 <Vapen & Ammuniton>이 조용히 돌고 있었다. 트랙 중간이리라. 이윽고 <Socker>가 나오기 시작했다. 노래 소리 말고는 이따금씩 내가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와 그녀가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있었다. 이윽고 그 적막의 틈바구니에 눈발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더해지자 그녀가 물어왔다.
“우산, 가져왔어?”
“아니요. 눈이 온다는 건 일기예보로 들었는데 이렇게 세게 내릴 줄은 몰랐네요.”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내게 다가와 머그잔을 받아들곤 계단을 올라가며 말했다.
“오늘은 꼼짝없이 갇혔네. 여기 이래뵈도 산골이거든. 한 삼십 센치는 쌓일거야.”
“안 그래도 챙겨 왔거든요. 다행히.”
나는 가만히 서서 땅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도 논도 이윽고 눈에 묻히고 길에는 표면 위로 머리를 빼꼼 내민 조팝나무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야, 그래도 이건 좀 심하네. 올해 첫 눈일텐데.”
그녀가 양손에 각각 머그잔을 잡은 채 돌아와 내게 한 쪽을 내밀었다. 나는 받아들고는 홀짝였고 그녀는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커피 좋아하나보네.”
“그다지요. 그냥 커피가 맛있어서 자꾸 마시게 되네요.”
타이핑 소리가 멈췄다. 그녀가 의자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많이 마시면 밤에 지도 그린다?”
“나이가 몇인데요.”
“그래도 나한텐 왠지 아기처럼 보여.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그나저나 의외네. 두근거리게 하는 말도 할 줄 알고.”
“스물 여덟인데 모태솔로인 줄 아셨나요.”
나는 살짝 토라진 채 커피를 계속 홀짝였다.
“그건 아니지. 내가 걱정했던 건 한창일 나이에 나 같은 사람하고 시간을 보내도 괜찮나 해서 말야. 어느 날 아침에 누가 문을 두들겨서 나갔는데 젊은 여자가 서있고 다짜고짜 뺨을 맞고 싶지는 않거든.”
“그럴 걱정은 안 하셔도 되요. 지금은 혼자니까.”
나는 눈길을 돌려 바깥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있는 재떨이를 끌어당기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 소리에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말했다.
“담배 태우면서도 삼 년을 살았으니 걱정 마. 행여나 안 태웠으면 더 살 거란 말은 말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렇게 말해도 걱정되기는 마련이라 내가 물었다.
“몇 미리 짜린데요.”
“1미리. 왜?”
“6미리면 뺏어서 바로 끄려고 했죠.”
“에이, 나도 그렇게 대책 없는 여자는 아냐.”
그녀는 허공에 연기를 내뱉곤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선 다시 조금 토라진 채로 창밖을 바라보다 그만두고 소파에 마주앉았다.
“응? 갑자기 왜?”
“창밖을 보는 건 질려서요.”
“그래. 서서히 관둘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어. 여자한테는 관심 없고 눈이나 비같은 무생물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상성애자인가 의심하려던 때였어.”
나는 그녀의 농담에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자 그녀도 만족한 듯 웃었고.
“그것도 그렇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응?”
“아니에요.”
나는 단념한 채 그저 그녀가 담배 태우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고파져서 주머니를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더플백에 넣어놓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담배갑을 열어 내밀었다.
“귀찮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한 개피 꺼내어 물었다. 그녀가 불을 당겨주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담배 태우는 광경을 소중히 봐두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잠시동안 소파에 앉아 연기를 마셨다 뱉었다 바라보았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계속 물어봐도 돼?”
담배를 문 채 눈썹을 으쓱하며 되묻자 그녀가 말했다.
“아까 그거. 이별 이야기. 그냥 좀 참고가 되려나 싶어서.”
“의외네요. 일 핑계를 대다니. 그냥 재밌어보여서 라고 하셔도 되는데.”
그녀가 내숭을 부리는 것 마냥 배시시 웃었다.
“좋아요. 대신 LP판 좀 바꿔줘요. 스노우 패트롤 있어요?”
“있다마다. 취향이 정말 잘 맞는다니까?”
“<업 투 나우> 2번 디스크 6번 트랙 좀 틀어줘요. 듣고 싶네요.”
“오키도키.”
그녀는 켄트의 것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고 커버에 꽂고선 책장으로 가 시선으로 뒤적이더니 LP를 커버에서 꺼내 플레이어에 놓고 틀었다. 그리고 소파로 와 앉은 다음 담배갑을 내밀었다.
“담배도 하필이면 맨솔이라니, 정말 취향 참 잘 맞는다니까요.”
그녀는 웃었고 나는 한 개피 꺼낸 다음 그녀가 대주는 불을 받아 한 모금 빤 다음 말했다.
“그냥 오래 알고 지내던 후배였어요. 대학 복학하고 알게 되었는데 교양과목까지 해서 강의 네 개를 같이 듣고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그냥저냥 오고가다 강의 사이 비는 시간에 커피 한 잔씩 마시고, 강의를 같이 들으니 찾는 자료도 같아서 도서관에 같이 가서 자료 찾아보고 이따금씩 도와주고. 그러다보니까 애가 저한테 고백하더라고요. 그래서 사귀었죠.”
담배를 빨아들이는 중간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무릎을 모아앉고서 거기에 턱을 괸 채 듣고 있었다.
“근데 한 이 년 반인가 지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왜 얘하고 사귀었지? 하는 생각 말이죠. 서로 좋아하는 것도 완전히 다르고. 응석만 부리고 기대어오기만 하고. 만날 때마다 저만 왠지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서 옷도 안 갈아입은 채 침대 위에 드러누워선 퍼진 채 천장만 보고 있고. 근데 웃긴 건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제 자신이 참 미운 거 있죠. 그렇게 생각이 되면 그냥 헤어지지 왜 붙잡고 있는지가. 아무라도 좋지만 완전히 좋은 건 아니면서 왜 사람 마음을 갖고 놀고 있는지가 밉더라고요. 그래서 진작 내렸어야 할 결단을 그때서야 내렸죠. 헤어진거예요.”
그렇게 말을 하고선 담배를 바라보니 벌써 절반이나 타 있었다. 회색 재가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었다. 재털이에 털고 난 후 천장을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고등학교 때였나, 정말로 좋아했던 여자애가 있었죠. 뭐 여느 이야기가 그렇듯이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던 찰나에 어딘가로 떠나고 없었고, 연줄도 없고 만날 방법도 없고. 그렇게 스물 다섯까지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간에 만났던 여자들은 마음은 가지 않았지만 그녀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하기에 그냥 사귀었었죠. 참 개자식 같은 마인드였죠. 만약 지금 그때의 저를 만날 수 있다 하면 당장에 보자마자 한 대 쳐도 될 만큼의 마인드. 하지만 그 후배는 달랐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도 그 아이를 조금이나마 좋아했거든요. 헤어지고 나니까 문자하고 전화가 계속 오고…제가 뭘 잘못했나요 하는 이야기였죠. 잘못한 건 없어요. 아니 있다면 하나겠죠.”
잠시 쉬며 담배를 빨아들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한 게 잘못이다……그 말이야?”
“네.”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아, 너.”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이니까요.”
그녀는 여전히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조금 달랐다. 눈빛이 슬퍼보였다. 아픈 짐승을 바라보는 또 다른 짐승의 눈빛이었다. 아픈 곳을 샅샅이 훑어보는 조금은 부끄럽고 조금은 아픈 눈빛. 나랑 똑같다는 눈빛.
“담배 피고 싶은 기분이네.”
그녀는 자세를 풀고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허리는 여전히 숙여 허벅지에 손을 괴어 턱을 올려놓은 채. 내 것은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천천히 타는 담배인 것 같다.
“그래서 말야. 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이번 건 조금 각오해.”
“뭔데요?”
그녀는 화두를 던져놓고선 조용히 담배를 세 모금이나 흩뿌렸다. 짧은 적막의 시간 동안에 트랙은 벌써 <다크 로만 와인>이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하면, 넌 어쩔거야?”
그녀의 말에 나 또한 담배를 다 탈 때까지 연거푸 피우곤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녀는 약간 긴장한 듯 그 시간 동안 입에 대지 않고 계속 재만 털고 있었다.
“전 또, 뭐라고. 난 사실 외계인이야. 아니면 난 사실 뱀파이어인데 네 목 좀 씻고 오면 안될까? 하는 그런 건 줄 알았는데요.”
농담을 던졌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곤 말을 이었다.
“글쎄요. 당장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제 마음 속으로부터 싫다 라는 말이 올라오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격렬하게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은은하게, 누나가 타준 커피처럼 은은하게 좋은 느낌이에요.”
그제서야 그녀는 담배를 한 모금 태우더니 내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거면 족해. 누나라는 말도 들었고. 하지만 말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나보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평소의 나처럼 계속 지내면서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 하지만 난 시간이 없어. 너도 알다시피.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걱정이 돼. 네가 나를 연민해서 좋아한다던가. 그런 느낌에 동정 받아도 좋은 마음이야. 그 정도로 시간이 없어. 그래서 되묻고 싶어.”
그녀는 마지막 모금을 태우고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뭐지? <업 투 나우>에 더 라이트닝 스트라이크가 있었나? 내 머릿속에서 언제부턴가 계속 그 노래가 울리고 있었다.
“나를 동정하는 것도 좋아. 나를 연민하는 것도 좋아. 대놓고 말해서 불쌍히 여겨도 좋아. 그러니까, 한 번만. 좋아해줘.”
서로의 눈빛이 바뀌었다. 내 눈빛을 내가 스스로 볼 순 없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상처를 바라보는 쪽은 나일 것이다. 그녀의 눈빛에는 마치 안구 그 자체가 갈기갈기 찢긴 것 마냥 상처가 보였다. 깊은 상처였다. 흉터에는 구더기가 끓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약초를 찢어 발라야만 할 것처럼 깊고 곪아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았지만 눈치챈 걸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상처였다. 그녀는 내 눈을 깊이 바라보며 구조 요청을 보내고 있었다. 대답해야만 한다. 가可. 불가不可.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옆으로 갔다. 그녀는 어느새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옆에 앉은 걸 알아채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눈망울 아래로 눈물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조팝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단풍이었다. 이파리를 다 떨어트리곤 서서히 말라가는 단풍나무였다. 안아보니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렇게 그녀를 안는 나를 끌어안았다. 가슴팍이 축축해져갔지만 뭐 괜찮았다. 따뜻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 품 안에서 나지막히 말했다.
“나, 신이란 걸 믿어보려고.”
“왜요?”
“아프고 나서부터 정말 싫어했던 사람이거든. 근데 말야, 네가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 건 그 사람 뜻이 아닌가 해서……그래서 믿어보려고.”
“누나 곁에 나라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몇 초 만에 바람 필 궁리 하려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웃으며 검지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참내. 얼마만에 우는 건지. 커피 가져올게.”
그렇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고 나는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발은 여전히 빽빽했다. 누가 단체로 바구니에서 한 아름 집어들고서 바깥으로 냅다 뿌리는 것 마냥 흩날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그녀가 커피를 가지고 왔다.
“좀 늦었네요. 또 거기 가서 운 거 아니에요?
“아닌데. 아싸 좋아라 하면서 춤추고 난리치다 왔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내민 커피를 받았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 다가오며 말했다.
“보통은 웃으면서라도 부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방금 농담?”
“누나 성격이면 정말로 그럴 것 같아서요.”
그녀는 내 머리에 장난스럽게 딱밤을 먹이곤 잔을 내밀었다. 나는 잠깐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잔을 부딪혔다.
“와인 있는데, 따올까?”
“좀 이따가 점저 먹을 때요.”
“점저가 뭐야?”
“점심 겸 저녁.”
그녀는 웃으며 일어나 의자로 가 앉았다가 다시 돌아왔다. 일이 손에 안 잡힌다면서.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은 손에 잡히잖아요. 라고 말했고 그녀는 웃으며 손을 잡았다. 장미도 애인도 있겠다, 이따가 간만에 솜씨 발휘 좀 해야겠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기대 천장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물었다. 근데 왜 제가 철수면 누나는 영희여야지 바둑이에요?
그녀는 탁자에 머그잔을 내려놓고선 몸을 휙 돌려 소파에 무릎을 꿇은 채 내 쪽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봐봐.
뭘요?
꼬리 살랑거리는 거, 안 보여?
下 END
2016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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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취
술에 취했던 날 밤이면 항상 밤하늘에 떠있는 별의 갯수가 평소보다 많아 보였다. 그리고 평소에 올려다 보던 그 밤하늘보다 가까웠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 몰려 날던 나방들도 집에 돌아가던 늦은 밤. 위아래로 요동치는 시야에 따라 올라오던 구역질. 가끔 목젖을 타고 넘어와 그 사람의 어깻죽지를 적셔도 멈추지도 묵언 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내게 곧 있을 도착을 알리던 등 너머의 목소리. 한 손으로 나를 지탱해주며 힘겹게 길고도 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들어설 때 그 문지방을 밟던 구두의 따각거리는 소리. 거의 반 송장이 된 채 과한 음주에 계속해서 헛구역을 해대는 나를 침대에 내동댕이 치도 않고 살며시 내려놓으며 그제서야 소맷자락으로 훔치는 이마의 땀방울. 숙면과 가위 그 사이를 외줄타듯 휘청이다 밤을 넘기고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코 끝을 간질이던 갓 뜯은 말린 북어 냄새. 목이 주려 눈에 뵈는 것 없이 물가로 달음박질 치는 영양처럼 식탁에 앉아 북엇국 한 모금 들이키고 나면 그제서야 뒤에 널브러져 있는 그가 덮어줬던 이불.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사람이 떠난 후 다시는 술에 취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맹세는 구긴 종잇장처럼 어딘가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휴지통에 정확히 스트라이크로 꽂혀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술에 취한 채 길거리를 휘청이며 걷고 있다. 집 주소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사람 곁에서 취했을 때 있었던 일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선명하게 쑤셔온다. 가슴에 박동이 뛸 때마다 혈관을 타고 기억이 날 선 유리 조각을 든 채 머릿 속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어 덮치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왔고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들은 여느 때보다 가까웠다. 그 사람과 나의 눈높이 차이 만큼 가까워졌다. 위장이 한번 더 역동했다. 토사물이 길가 배수구를 적셨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자 묻어나온 위액의 냄새와 입 안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함께 머릿속을 진동했다.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싶었다. 물 한 컵을 마시고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면 모두 다 씻겨 나갈 것 같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그와 동시에 집 주소가 기억이 났다. 힐을 벗어 양 손에 들고 스타킹 바람으로 걸었다. 나 자신은 모르겠지만 분명 비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도어락 버튼을 누르는 검지 끝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실수로 누르면 다시 눌러야 한다는 것이 그토록 신경 쓰인 적이 없었다. 면접날 스타킹에 구멍이 나고 시간도 근처에 편의점도 없는 상황과 비슷한 크기의 위기감에 신중하게 버튼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가며 간신히 문을 열었다.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자 마자 바로 구두를 현관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벽에 기대어 스타킹을 벗어 던지고 치마를 끌렀다. 블라우스 버튼을 끌러 벗고 바로 욕실로 향했다. 욕실 불을 키고서 블라우스가 구겨지진 않을까 뒤를 돌아보자 벗어 놓은 옷들이 보였다. 널브러져 마치 변태 직전에 위험을 감지하고 필사적으로 도망가며 성충이 된 매미의 허물처럼 보였다. 내일 세탁소 쉬는 날인 것 같은데. 손톱을 기르고 있던 것도 깜빡하고 논 갈아엎듯 뒤통수를 벅벅 긁적였다. 여드름을 건드렸다. 뒤통수는 아프고 머리는 깨질 것 같고 브라와 팬티는 벗겨지질 않았다. 될대로 되라. 입은 채로 샤워기 물을 틀었다. 물이 아니라 얼음장으로 몸을 씻는 것 같았다. 그 상태로 한참을 욕조 안에 쭈구려 앉은 채 물을 맞았다. 냉장고를 열어 국거리를 찾는 소리와 벗어놓은 옷가지를 치워줄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떠나가고. 곁에.
샴푸를 했는지. 린스를 했는지. 바디워시로 몸을 닦았는지. 클렌징으로 화장을 지웠는지. 양치는 했는지. 드라이로 머리를 말렸는지. 문은 제대로 잠겼는지. 옷은 구겨지지 않게 잘 치웠는지. 씻고 몸은 말렸는지. 안 말렸다면 감기 들지 않게 베란다 문은 닫았는지. 잠에서 깸과 동시에 수많은 의문이 기다렸다는 듯 발했다. 그 의문을 다 밀어 제끼고 내 몸은 그저 눈을 감은 채 반사적으로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았다. 북어 냄새는 나지 않았다. 가스렌지에는 엊그제 어머니가 보내주어 반 쯤 먹다 만 김치찌개가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눈을 떴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 쓰고 소리 없이 울었다. 베개를 집어 던졌다. 어디에 맞았는 지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잘못했던 모든 일들과 내가 고마웠던 모든 일들이 뒤섞여 엉망진창으로 이불자락을 적실 뿐이었다.
이별, 일 주일 하고도 네 시간 삼십이 분 후의 일이었다.
20150726 0205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