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 있던 한 움큼의 공기

작품/소설 2016. 4. 7. 15:47

내 방에 있던 한 움큼의 공기

 

 

 

이별했었다. 정중앙에 서서 남쪽으로 북쪽으로 동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각각 멀어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어느 곳으로도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옆에는 멀어져가며 턱 밑으로 무언가 한순간 반짝이는 그녀의 고개 숙인 옆모습이 똑같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목도리를 입가까지 올리던 그녀의 턱은 오랜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봐서인지 너무도 갸름했다. 손을 대면 부서져 내릴 것 같이 부드럽게 날카로워보였다. 너무 깎아지르지도, 너무 완만하지도 않았다. 난 그 순간까지도 그녀의 턱만을 보고 있었다.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차가운 바람이 눈가를 스쳐 눈을 꾹 감고 나서 다시 뜨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의 앞모습은 없었다. 그녀의 앞모습은 이제 종이쪽에서나 핸드폰 사진 보관함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방문이 열리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휘이잉 하고 분 바람에 그녀의 눈물과는 상관없이 현관문은 거세게 닫혔다. 평상시의 그녀라면 다시 열어서 고개를 쑥 내밀고 미안, 세게 닫은 거 아냐. 바람 불어서 그랬어. 잘 자. 라고 얼굴이 빨개진 채 말하고는 천천히, 닫힐 때까지. 차가운 손잡이가 손의 온기로 따스해질 때까지 잡고, 문 틈새로 바람소리가 후웅 하고 들릴 때는 더더욱 손에 힘을 줘서 잡고 있다가 꼬옥 닫히고 나서 발걸음을 돌렸을 텐데. 얼마 못가서 고개를 돌려 내 방의 창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곤 문득 찡그리는 별 하나를 발견하곤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집까지 걸어갈 텐데.

 

너무도 잘 알았다. 커튼이 쳐진 창문 사이로 빼꼼히 쳐다보면서, 가끔씩은 넘어지는 그녀 뒷모습에 피식 웃으면서도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만날 그녀를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배웅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나치게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서로의 장점을 너무도 지나치게 좋아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너무 빨리 먹어 체했었나보다.

 

다음 날, 팬티를 거꾸로 입고 집을 나서 하루 종일 이상한 느낌에 신경이 쓰였고, 서빙을 하다가 국을 엎질렀고 그 날 알바비는 마이너스가 됐다. 집에 와서 요리를 하다가 손을 세 번이나 베였고, 쓰던 원고지에 커피를 엎질러 짜증이 났다. 비는 하루 종일 내리고 있었고, 바람이 불어 차가운 이불의 느낌에 몸을 기분 좋게 비비며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커튼 사이로 창밖의, 집 앞의 골목을 내다보았다. 파란색 우산이 보일 때마다 오른손으로 커튼을 아주 조금 더 걷어보았다.

 

책상의 한 가운데, 벽에 뒷면이 붙어있는 TV겸 모니터를 틀어 리모컨으로 영화목록을 뒤졌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제, 물고기, 그리고 호랑이들. 아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최신영화 두 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아래, 아래, 확인. 랜덤 재생.

 

 

 

잉그리드 버그만을 난 좋아한다.

 

 

 

그녀는 누워있는 내 옆, 내 가슴께에 걸터앉아 다리를 번갈아가며 휘젓다가 이따금 침대 밑에 발뒤꿈치를 부딪쳐 울상을 지었다. 커튼으로 가려진 채 열려있는 창문 덕에 연주홍빛 까칠한 커튼이 펄럭여 내 뺨과 그녀 목덜미를 스쳤다. 바람은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을 찰랑였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왼손을 살며시 고고한 듯 들어 올려 어깨 맡에서 머리끝을 만졌다. 오른팔을 베고 있던 나는 왼팔을 쭉 뻗어 리모컨으로 모니터를 조작했다. 우리 둘은 아무 말이 없었고, 긴 정적의 순간 동안 침대 옆 자그만 탁자 겸 속옷장 위에 놓인, 이미 식어버린 커피와 허브티와 푸석푸석한 맛의 다과에는 커튼의 무늬가 선명히 도장 찍힌 햇빛이 천천히 모양 입혀지고 있었다. 나는 리모컨으로 영화를 틀었고, 어쩌다보니 영화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되어버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내 방안에서도 보풀보풀한 하얀색 손뜨개 목도리와 깔끔한 겉옷을 벗지 않았는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왜 현관에서부터 잠깐 거실에 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는지를. 로제는 담배를 폈고, 폴은 시몽을 만났다. 어디선가 많이 다른 상황이었지만, 우리 둘은 충분히 그리고 말없이 그 영화를 보고 있었다.

 

뭔가 다툴 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우리 두 사람은. 나는 CD플레이어를 틀었고, 그녀는 거의 동시에 영화를 보면서 무슨 음악이냐고 말했다.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슬펐다. 미친 듯이 서로가 서로의 헤집어진 심장을 보듬고 싶어 했고 자신들의 심장을 꺼내 자, . 내 마음이 얼마나 갈기갈기 할퀴어졌는지를. 안아줘. 이해해줘. 사랑해줘. 따뜻한 말을 해줘. 라고 요구하고 그렇게 해주고 싶어 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바람은 거세게 불다가 그쳐 그녀의 뺨과 떨리는 목소리를 차갑게 변장해주었고 나의 오른쪽 눈가에 맺힌 눈물을 말려주었다. 나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어울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고 그녀는 오른손으로 이불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인 채

 

어울릴 리가 없잖아…….” 라고 말했다.

 

시몽! 시몽! 계단을 돌아 내려가는 시몽을 잉그리드 버그만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버그만의 눈동자는 슬프도록 투명했고, 그 눈동자를 우리 두 사람은 좋아했었다. 같은 배우를 좋아했고, 같은 시대를 좋아했다. 남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녀는 그 말을 끝내고 잠시, 이불을 움켜쥔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은 너무도 더뎠다. 시몽이 난간을 움켜쥔 손이 회전하는 것도, 바람이 불어 커튼이 출렁이는 것도, 내 눈물이 감았다 뜬 눈의 속눈썹 사이로 맺혀 나왔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떨며 일그러졌다가 하늘로 사라지는 것도 느렸다. 너무나도 느렸고 너무나도 더뎠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그 하얗고 부드러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그녀의, 여리고 가여워 부러질지 몰라 항상 목도리로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줬던 그녀의 목을 보고 있었다.

 

시몽은 사라졌고, 그녀는 킁 하고 한번 막힌 코로 숨을 쉬더니, 움켜쥔 오른손을 풀고 눈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잘 있어.” 라고 말하곤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마침표가 딱 잘라 말하는 듯 해 가슴이 아려왔다. 차가운 문고리를 잡곤, 따뜻한 그녀 손이 문고리에 하얗게 서리는 낙인을 새기는 동안 그곳에 서서, 눈에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곤 문을 열고 나갔다. 열렸던 문이 되돌아오는 동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닫히기 직전 현관문은 거세게 반문했다. 방문이 닫혔고, 버그만은 로제를 꼭 껴안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왼손을 베고 그녀가 누웠던 자리와 그녀가 움켜쥔 침대의 자국에 살며시 손과 시선을 얹었고, 잠시 후 고개를 들어 그녀가 잡았던 문고리를 보았다. 그녀의 새하얀 서리가 녹아내려 지문이 보일 때까지.

 

커튼은 그녀가 가는 것을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활짝 펄럭여있었다. 어서 내다보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듯이 그 주홍빛을 오후에 걸맞는 색깔에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떠나가는 뒷모습 같은 거, 평상시와 다른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볼걸 그랬다. 그래도 안 본다면 그녀의 슬픔이 아스팔트 위를 긁고 지나간 자국이라도……볼걸 그랬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녀가 봉지를 까놓은 다과를 아직도 속옷장 위에 놓아두고 있고 그녀의 입술이 닿은 허브티의 자그만 컵을 씻지 않았고 그녀가 떠나갈 때 작은 빛으로 화면에서 스며 나왔던 버그만의 얼굴을 돌려놓지 않았으며 그녀가 발을 부딪던 침대 아래의 나무 모서리에 묻은 핏자국을 닦지 않았다. 발을 절룩였을려나.

 

리모컨을 떨어트렸다. 건전지가 빠져나왔고 다시 끼워 넣고 작동되나 확인하려고 아무 버튼이나 누른다는 게 그만 재생을 눌러버렸다. 버그만이 나왔다. 시몽은 계단 난간을 잡고 내려갔고, 폴의 눈에는 시몽의 팔과 손 그리고 가끔씩 비치는 머리만이 보였다. 검은색 나무 계단의 난간은 위에서 보면 볼수록 슬펐다. 시몽! 시몽! 폴이 시몽을 불렀다. 폴은 시몽을 애타게 불렀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불렀고 고맙다는 인사를 담아 불렀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담아 불렀고 안녕이라는 미소 지을 수 없지만 애써 짓는 미소와 의도와는 상관없이 터져 나온 눈물 한 방울을 담아 불렀다.

 

나도 그녀를 그렇게 불렀어야 했나보다. 다과 봉지와 투명한 립글로즈가 묻은 찻잔과 어쩌면 나 혼자 누워도 좁아 보이기 때문에 그녀가 떠나갔을까라고 터무니없이 생각해본 그녀와 나의 붉은 침대와 연주홍빛 커튼.

 

그리고 잉그리드 버그만의 지나간 젊음을 담은 사랑 영화가 나오던 그 순간 내 방 안에 있던 한 움큼의 공기에서. 차가운 이불을 움켜잡고 차가운 문고리를 움켜잡던 그 공기에서. 나는 그녀를 불렀어야 했나보다.

 

 

 

 

 

 

 

 

 

[N]

   

20120122 0135 

쓰면서 자꾸 딸기100% 츠바사가 생각났는데, 왠지 이거.

'작품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양의 끝에는 누군가 서있었다  (0) 2016.04.07
아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태양  (0) 2016.04.07
가로놓인 정원수 사이에서 20120124 0300  (0) 2016.04.07
눈 빛  (0) 2016.04.07
결심  (0) 2015.06.30

가로놓인 정원수 사이에서 20120124 0300

작품/소설 2016. 4. 7. 15:47

가로놓인 정원수 사이에서

 

 

 

 

 

너는 나를 부른다.

나는 너를

 

 

 

 

 

꿈을 꿨다. 포플러나무. 호랑가시나무. 그 두 가지 외에는 이름을 전혀 모르는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늘어서 있는 그런 정원에 나는 서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흠뻑 젖어있어 이른 새벽이거나 저녁의 안개 같았고, 알맞게 깎인 잔디를 밟고 선 내 앞에는 무언가 커다란 겨울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 반대편을 가로놓고 있었다. 나무의 밑동 사이로 보이는 조금의 공간이 반대편에 공간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구름이 많았고, 마치 검은색을 섞은 남색처럼. 저녁의 해가 지고 나서 세상에 잠시 동안 달도 북극성도 없을 무렵의 색깔이 보였다. 시간상으로는 맞지 않지만 무척이나 어울렸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찌릿찌릿 아려왔다.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사람이 있는 걸까. 그 목소리는 어디선가 왜곡되고 일그러져 불분명하게 들려왔다. 무언가가 목소리의 진로 사이에 놓여 여러 번 부딪치고 찌그러져 간신히 만신창이의 몸을 이끌고 건너온 듯 한 그런 소리였다. 목소리는 잠시 간격을 두고 한 번 더 들렸다. 건너편이었다. 저 이름 모를, 키가 무지하게 큰 침엽수의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목소리는 간신히 뭔가를 실어왔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목소리의 꼬리를 잡고 귓가로 끌어당겨 간신히 콘센트를 꽂았다.

 

나는 잠시, 물끄러미 서서 저녁의 안개 혹은 새벽의 갓 난 공기를 조용히, 깊게 들이쉬고 있었다. 목소리를 타고 넘어온 그 무엇인가를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아주 애타게, 그러면서도 겨우 들릴 듯 한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마치 단단히 겁에 질렸거나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해 기쁨 혹은 슬픔에 차있는 것 같은, 내보내려 해도 나오지 않는 그런 목소리로. 그런 목소리로 그녀는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꿈은 거기서 끝났다. 난 문득 눈을 떠 이마에 대고 있던 손등으로 살짝 맺힌 땀을 닦고,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천장의 색깔을 확인하고, 반쯤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은 채 꿈의 내용을 생각했다. 아무런 노력도,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목소리를 듣고, 알아차리고, 숨을 쉬고, 꿈은 끝이 난다.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밑동 사이의 틈새로 그녀를 보려 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부르는 게 나와 관계없는 머나먼 것일지라도 크게 소리를 질러 그녀를 부르지도 않았다. 며칠의 낮과 밤을 그런 꿈으로 지내다가 깨달은 사실은, 꿈속에서 나는. 나는 그저 그녀를 지켜보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꾸는 꿈이라는 것이다.

 

 

 

2.

 

나는 여태껏 많은 장례식을 봐왔다. 내 주변에서는 내가 알건 알지 못하건 많은 사람들이 죽고 태어나고 헤어지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영원하지 못했다. 영원하지 못한 것을 기리고 평생 간직하기 위하여 또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순간 이후의 결과가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부정하기 위하여 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저 무덤덤하게, 두 손을 깍지 낀 채 늘어트려 바라보거나 이따금씩 박수를 쳐주며, 혹은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으며 지나왔다. 하지만 언젠가, 엊그제 같으면서도 마치 수백 년이나 지난 듯 느껴지는 그 순간은 예외였다. 나는 울고, 깔려있던 까칠까칠한 돗자리를 주먹에 피가 맺힐 때까지 내려치고, 술잔을 들었다 내렸다 반복하다가 기어이 깨트려버리고, 향냄새가 가득 차 누군가가 기침을 할 때까지 한가득, 멎어버린 눈동자로 향을 계속 꽂았다. 향이 많이 피어오르면 피어오를수록 그녀가 좋은 곳에라도 가는 듯이.

 

난 살아오면서 미친 짓을 많이 했었다. 여자 뺨도 때려봤고, 바람도 펴봤고, 한밤중에 술집에서 패싸움도 해봤다. 그 미친 짓들이 끝나고 쓸쓸히 혹은 몸도 마음도 아픈 채 어딘가 내가 있어야 할 장소 혹은 의지할 수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길 때, 고개를 들어 찌들어있는 나와 달리 언제고 맑은 별을 보면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의 살아생전에도 그녀가 죽고 나서도. 그녀는 내게 전화를 많이 했었다. 문자도 많이 보냈었다. 소녀틱한 내용의 문자가 많아 나는 얼굴에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으므로, 나란 사람은 당연히 더 너머를 원하고 더 너머를 바라봤다. 바로 내 등 뒤에 나를 껴안은 채 사랑해라고 속삭이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머로 걷는 걸음에 무게만 더 실어주는 짐일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짐이 된 것이다.

 

그녀가 보낸 문자에 보내는 답장의 길이는 점점 짧아졌지만 그녀는 전혀 문자의 내용을 줄일 생각을 안했다. 오히려 그녀의 문자는 거의 매 건마다 편지 수준의 길이를 자랑했다. 전파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어딘가 울림을 가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울림을 귀찮게 생각했다. 뭔가, 부여잡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울림이었지만…….

 

 

.

어이.” 눈앞에서 불똥이 튀어 정신을 차려보니, 점장이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고 있었다.

, . 죄송합니다.” 모자의 끈을 다시 동여매고, 튀김기계 앞에 가서 감자반죽을 넣었다. 뜰채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동안, 끓어오르는 튀김기름의 거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겨울이라 장사도 안 되는데다가 따뜻한 바람 솔솔 나온다고 졸면 안 되지.” 점장이 계산대에서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 좀 졸려서요. 얼마 안 안 남았으니까 정신 차려야죠.”

그래. 그래야지. 그나저나 크리스마스에 쉬나?”

, , 약속이 있어서요.”

그런가……. , 어서 오세요, 손님.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튀기고, 튀기고, 튀겼다. 아직 프렌치프라이에 머물러 있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가게 문을 닫고 외투자락을 여미며 밤의 공기를 마셨다. 몸은 무겁고, 등이며 온몸이며 춥고 배고팠다. 오늘은 꿈 없이 잠을 잘 수 있을까. 아니면, 꿈이 더 나아갈 수 있을까.

 

 

 

 

3.

 

꿈이다. 이번엔 다른 꿈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관 앞에 서있는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녀의 전화다. 전용 컬러링이 울리고 있는 그 전화기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영원히 울릴 기세였고, 나는 받았다. 받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꿈의 길이 이쪽으로 그려져 있나 궁금해서 보고 있었을 뿐이다.

 

어어.” 나는 여느 때처럼 무덤덤했고,

.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점심 먹었어?” 그녀는 여느 때처럼 다정했고 포근했다. 나는 뭔가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먹었어. 뭐하고 있었어?”

, 그냥 뜨개질 좀 하고 있었어. 목도리 짜느라고.” 1. 유난히도 추웠던 그 달의 과거였다.

여태까지 짜네. , 할 말 있어?” 꿈은 여전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내가 한 말은 아니었다. 꿈은 때로는 뭔가가 산산조각 나도록 냉정하다.

아니……. , 미안해. 갑자기 전화해서…….”

……. 니가 왜 미안하냐. 미안한건 백 번 천 번 나다.

. 알면 됐어. 끊는다. 밥 잘 챙겨먹어라.”

핸드폰이 부서지도록 세게 움켜잡았다. 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나는 이대로 핸드폰이 부서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부서지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안녕.” .

종료 버튼을 누르고, 통화는 끝났다. 유난히도 내 기억 속을 휘젓던, 안녕이라는 말의 울림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우물에서 길어 올린 깊은 차가움과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의 공기. 어딘가 단념하고 결심하고 체념한, 마지막의 울림을 가진 안녕. 그 안녕 뒤에 나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까. .

 

 

 

그로부터 세 시간 삼십팔 분 후, 그녀는 그녀의 방에서, 침대에 누워 내가 선물해준 곰 인형을 푹 끌어안은 채,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인형의 등에 적시며 세상을 떠났다. 웃는……얼굴이었다. 어찌 보면 우는 얼굴이었을지도……모르겠다. 엄마 품의 아이처럼, 인형을 꼭 껴안은 채로…….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유서는 단 두 줄뿐이었다. 우편함을 열어보니 유서는 한 달 전의 날짜로 적힌 채 들어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내 방 안에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아 봉투를 뜯었다. 봉투를 뜯고 종이를 펼치고 나서야 그게 유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유서까지도 포근한 분위기를 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거야. 즐거웠어. 그리고……정말 미안해. 바이바이.

 

 

 

그녀의 손으로 쓴 글씨가 이렇게 눈가에 들어온 적은 처음 시절 이후로 거의 처음이었다. , 난 어째서 이렇게 소홀했을까? 나는 그 자리에서 마지막 글자가 번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었다. 울음을 그치고 나서 번진 글자를 손으로 매만지며, 묻어나온 잉크를 보곤 고개를 들어 천장의 색깔을 확인했다. 검은색이 섞인 남색이었다.

 

 

 

4.

 

꿈이다.

 

 

 

 

 

 

정원 꿈이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공기. 안개. 내가 서있는 위치. 나무의 종. 침엽수의 키와 잎의 무성한 정도. 밑동과 밑동 사이의 간격. 잔디가 자란 정도. 울타리. 그리고 목소리.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한 건반 한 건반, 그러다가 마디의 소리가 들렸고 천천히 울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안개에 젖은 듯 했다. 목소리가 들렸고,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세 번째로 가로놓인 정원수를 넘어왔다. 그 옛날, 그녀가 세상을 떠난 날의 전화통화의 목소리였다. 안녕. 여태까지 내가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는 안녕이라는 두 글자였다. 안녕. 안녕. 안녕. 첫 번째와 두 번째 안녕의 사이에는 영원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는 듯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운명과 냉정함을 느끼며 눈앞에 가로놓인 침엽수의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안녕의 사이에는 거센 바람이 불었다. 영원히 불 것만 같은 그런 바람이. 모든 걸 뒤흔들고 뒤섞고 몰아세우고 그러다가 다시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 지워냈던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 같은 그런 바람이 불었다.

 

생각했다. 나는 왜 그때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까. 왜 그녀의 말 속에서 기묘한 울림을 눈치 채고선 물어보지 않았을까.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이상하네. 이렇게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된 것을. ? 아무 일도 없어. 설마 있기를 바라는 거야? 라고 하면? 당연히, 그녀는 그런 말을 할리가 없다. 만약 했다고 해도, 그저 오지랖이 넓은 걸로 한 번보인 것뿐이잖아. 말 한 번 들은 거니까 그냥 넘어가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보이는 게 싫어서 그녀가 그런 결정을 하기 전에 그녀 편이 되어주지 못한 건가. 그런 건가, 나란 사람은. 그런 생각을 했다. 영원이 모든 시간을 삼키고 끝내는 0으로 만들고, 바람이 모든 것을 지우고 다시 돌려놓으려 하는 그 순간에. 저녁은 슬슬 걷혀 밤노을이 지려고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순간 바람이 멎었고, 휘날리던 옷소매와 머리카락은 일순간 푹 꺼졌다. 침엽수는 춤을 그만뒀고, 모든 잔디는 똑같이 바로 서서 혹은 약간 뉘여서 숨죽인 채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불렀다.

 

 

 

 

 

5.

 

모든 감각을 재가동시켰다. 다시 한 번 말해줘. 뭐라고 말했는지를. 감각이 떨렸다. 곤두세운 촉각이 서로 딱딱 부딪혔고, 나는 알았다. 그녀가 나를 불렀다.

 

여깄어.” 뭔가 어색한 투로 가로놓인 정원수 위를 향해 크게 말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나는 두리번거리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왜 대답이 없는지 궁금해 하며 조금 안절부절해했다.

거기……있어?”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또 울컥했다. 겁에 질렸던 목소리가 조금은 밝아졌고, 환해졌다. 나 같은 것 따위의 목소리로 그렇게나 안심이 되는 거냐, 너라는 사람은.

. 여기 있어. 그러니까 그렇게 막 안 불러도 돼.”

……다행이다.” 그녀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약간 목이 메어 기침을 하고, 말라붙은 입술을 간신히 떼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듣고 있다간 나도 좀 슬플 것 같아 말을 했다.

, 그러니까 이거,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밥 잘 먹고 다니지?”

그녀가 이 꿈속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모르니까 일단 뒤의 것으로 물어봤다.

. 덕분에 항상. 고마워.” 점점 더 밝아진 목소리는 마치 정원수에 가로막혀 상처 입었던 처음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했다. 바로 옆에 있는 느낌이 들어 껴안고 싶어져 옆을 돌아다봤지만,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잔디와 저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울타리뿐이었다.

……미안하다.” 나는 묵묵히 말을 건넸고,

? 뭐가?” 그녀는 여전히 밝았다.

그냥, 모든 게. 평소에 좀 뭐라고 해야 하나, 못해준 느낌이 들어서.”

괜찮아. 미안해할 거 없어. 너무 잘해주는걸. 항상 고마워.”

제기랄. 이거 나 울리려고 꿈이 일부러 이렇게 되가는 거지? 이빨을 꽉 깨물고, 잠깐 숨을 고르게 쉬었다. 저 너머, 정원수를 사이에 두고서 침엽수의 밑동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신발과 종아리는 너무도 선명했다. 안개가 하얗게 끼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거 알아?”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렸다. 나는 푹 젖었고, 침엽수도 푹 젖어 서서히 고개를 늘어트렸다. 이파리들은 물방울을 하나 둘 떨구면서 수그러들었고, 침엽수들은 키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내 턱 앞까지 작아졌다.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까치발을 하면 그녀의 옆얼굴이 반쯤 보였다.

그녀의 눈은 너무도 슬퍼보였고, 혼자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뭔가 슬퍼서 견딜 수가 없어. 나는 너를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데, 나는 어째서……어째서 죽은 걸까?” 그녀의 눈이 젖어들었다. 비는 계속 내렸고, 언제 멎은 지도 몰랐던 피아노 소리가 다시 들렸다. 비는 바람을 손잡고 데려왔고, 바람은 비와 손을 잡고 이리저리 뛰놀았다. 안개를 흩뿌리면서. 그녀를 눈물짓게 하면서.

너무나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해봐도 여전히 미안해. 너에게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그저, 그저 뭔가……정해져 있는 걸 거야. 우리 둘이 헤어진다는 거……말야.” 도저히 무슨 말인지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했지만 나는 왠지 납득이 갔다. 이해할 수 있었다. 뭔가,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그녀를 말하게 했고 나를 납득시켰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나는 어느새 그녀의 부재를 납득하고 있었다. 나쁜 뜻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조용하고 고요하게 그녀는 내 곁에 있으면서도 없었다는 걸 알았다. 모든 게, 모든 사랑과 인연이 그렇다는 걸 그녀는 말했다.

 

내가 없어도 잘 지내줄 거라 믿어. 너는 강하니까. 그러면 된 거야. 언제나 너는 괜찮을 거야. 내가 없어도.” 그녀는 나의 대답 같은걸 구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그 말은 여러 낮과 밤의 꿈을 거쳐서 내게 당도했다. 그 말이 이제 끝나려 하고 있었고, 피아노 소리와 함께 나는 두 손을 맞잡고 어딘가로 말했다.

 

말이 끝나고, 비가 그치고 바람이 거세게 일순간 몰아치는 때 침엽수는 모두 사라졌고 가로놓인 정원수의 이별은 풀어졌다. 그녀가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갔고, 그녀는 달려오는 나를 웃으며 반겼다. 서로가 서로의 등에 팔을 둘렀고, 손가락을 펼쳐 조금이라도 더 서로를 넓게 안으려 했다. 밤의 들판에는 해가 걷혀 달도 북극성도 없는 순간이 잠시 동안 이어졌지만, 이윽고 달과 북극성은 누가 뭐라고 말하건 간에 떠올라 제 자리를 지켰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떠올라 자신이 비춰야 할 곳을 비추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갔고, 바람은 할 일을 다 마치고도 뭔가를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이 끊임없이 불었으며, 영원은 순간을 벗어나 계속 영원했으며, 그녀의 사라져가는 모습과 멎어가는 피아노 소리를 느끼면서 나는 조용히 웃으며 내가 있었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몸을 돌려 원래 바라보던 곳을 바라보며. 그녀가 있었던 곳을 마주보며 서자, 침엽수가 원래처럼 서있었고, 수그러들었던 이파리는 고개를 들었으며, 빗방울을 배불리 머금은 줄기와 가지들은 전과 같이 서서 이 꿈속을 반절로 가로놓은 채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밑동의 간격들도 모두 그대로였다. 땅바닥에 엎드려 그 사이의 틈새로 반대편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고 겉을 두르던 갖가지 정원수들의 울타리는 내가 가까이 가자 활짝 열린 채 나를 지나가게 해주었다. 바람은 비에게 손을 흔들어 나중에 또 놀자고 말하며 내 뒤를 따라왔고 저 손이 닿지 않을 먼 거리를 걷고 있는 북극성과 달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로놓인 정원수의 만남을 뒤로 하고 나는 꿈속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녀를 안은 손에는 아직도 감촉이 남아있었다. 그래. 나는 용서받았지만 앞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거로도 뭐 됐어. 나는 앞으로도 살아갈 거고, 살아가면서 용서받을 테니까.

 

살아간다는 것으로 용서를 받아낼 테니까.

 

 

 

 

 

 

 

 

 

 

 

[N]

 

 

 

 

 

 

 

 

 

 

 

 

 

 

 

 

영화 별의 목소리’,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초속 5cm’ 사운드 트랙.

<Through the Year and Far Away>, <너의 목소리>, <くの>

'작품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태양  (0) 2016.04.07
내 방에 있던 한 움큼의 공기  (0) 2016.04.07
눈 빛  (0) 2016.04.07
결심  (0) 2015.06.30
흰 나비 춤을 추며 上  (0) 201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