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끝에는 누군가 서있었다

작품/소설 2016. 4. 7. 15:49

태양의 끝에는 누군가가 서있었다

 

 

 

길고 끝없는 태양의 늘어짐이 거울에 비치듯 비치는 모래 위를 걸었다.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고 모래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은 이곳에는 죽음의 공기도 살 썩는 냄새도 없다. 그저 비어있었다. 구두를 파고드는 모래가 꺼끌거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모래 속에 처박았다. 그렇게 발만이라도 사막 그 자체로 변해보니 한결 편했다. 지나가는 시선으로 어느 말라붙은 식물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슬펐다.

 

모든 것은 햇볕 아래서 평등했고 공정했다. 태양이 내리쬐며 내 머리카락을 달구었고, 내 몸의 모든 곳의 체온은 평등해졌고 공정해졌다. 모든 것이 공정한 이곳에서 나는 그 누군가에게 공정하지 못했던 범죄자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이곳에 들어섰고, 피고인은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려 한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미안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사실이었다. 지나고 보니 정말로 미안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지나기 전에 미안했으면 될 일이 아닌가……. 주황색 점퍼를 벗어 처박았고 검은 긴팔 티셔츠를 벗어 찢었다. 내 몸을 감싼 것은 옷 안에 입는 흰색 티셔츠와 카키색 면바지뿐이었다. 햇빛 때문에 덥다던가 모래가 뜨겁다던가 해서 벗은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이 주체하지 못 할 정도로 미안함의 미열에 휩싸여 벗은 것이다. 죄책감에도 열이 있다.

 

고개를 숙인 채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를 세어가는 것처럼 걸어가다가 문득 뭔가가 눈에 띄었다. 일일이 연한 색이던 바닥에 진한 색이 하나 스쳐갔다. 그 앞에 멈춰 서서 모래를 손으로 긁어내어갔다. 생각보다 잘 파이지 않았다. 파내는 작업과 그 주변의 모래가 흘러내려 메워지는 작업이 반복되었다. 팔까지 긁혀가며 파내자, 진한 색깔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입었던 카디건이었다. 색은 바래어 그저 자주-보랏빛 계통의 어느 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채 모래 속에서 파헤쳐낸 그 헤진 카디건을 보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었다. 나 그리고 저 높이 솟아있는, 찬란한 코로나의 태양은…….

 

나는, 그녀를 조심스레 양 손으로 안아들고, 여태 왔던 발걸음보다 더 짧은 발걸음으로 천천히 사막을 걸어갔다. 그녀를 안아든 채 바라보면서, 이 사막을 나가기 위해서. 그렇게라도 하면 속죄할 수 있을 성 싶어서.

 

 

 

 

 

20120110 1634

N


먼젓일의 개념. 아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태양이 뒤.

아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태양

작품/소설 2016. 4. 7. 15:49

아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태양

 

 

 

 

 

 

발밑의 모래는 밟을 때마다 부드러운 감촉에 기분이 좋았다. 이따금씩 발가락 사이로 차오르는, 비단같이 곱고 애매한 따스함의 색을 지닌 모래알갱이들을 볼 때마다 희미하게 웃었다. 끝없이 눈앞에 펼쳐진, 구불구불함이 밋밋하게 드러나는 모래 쌓인 지평선과 그 위에 곧바로 맞닿아있는, 투명하고 높은 하늘이 보인다. 하늘은 마치 가을처럼 진하고 높고, 그리고 숨 쉬어 흐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데도 햇빛은 목 뒤를 따갑게 대신 따뜻하게 부드럽게 그러쥐어주었다. 하얗게 휘날리는 내 머리카락이 바람의 손에 맡겨져 자연스러웠다. 가끔씩 뒷바람이 불어 뒤집히는 것조차도.

 

모든 것이 부드러웠다. 발밑과 앞으로 밟게 될 눈앞의 모래도, 짙게 흐드러진 햇빛과 바람결도, 입고 있는 옷자락이 산들산들 휘날리고 있는 흰색 가디건도. 씁쓸하게, 부수어진 심장에서 새어나오는 검은색 액체는 모래 위로 떨어지자마자 눈 녹듯 파묻혔다. 마치 스타킹 위를 걷는 느낌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태양은 드높은 쨍쨍함에서 서서히 기울은 파스텔 톤의, 가을날 수풀 사이로 드러누운 이마 위처럼, 바뀌어갔다. 지평선은 가만있다가도 계속 꾸불거렸고, 가끔씩 지나치는 말라붙은 풀뙈기는 한층 사실 같았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나는 천천히, 빠르지 않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구월 초의 너른거리는 하늘 아래 서서는 누군가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이 떠오를 수 없었다. 발가락 틈새로 삐져나오는 모든 영롱함을 세다보면 상실의 슬픔 따위는 쉽게 잊혀졌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 시간, 이 장소 안에서. 사막 위를 걸으면서도 전혀 위급감이라던가 그런 것 없이, 그저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걷는 것 자체가 좋았다. 평소같이 무릎이 아프지도 않았고, 연갈빛이 도는 하얀 머리카락이 주목받을 일도 없었다. 그와의 말다툼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여기서 혼자라는거. 아무도 없었다. 그게 좋다.

 

 

그에게는 또 다른 피앙세가 있었다. 손에 품고서 따스히 뺨을 비빌 새가 한 마리 더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서 떠나가 그 이에게 옮겨갔다. 모성(母星)의 굴레를 벗어난 작은 왜성은 서서히 길을 잃었다. 모래가 살며시 나를 안아 올렸다. 하지만 너무도 작고 연약해 발에서 그친다. 그런 발밑을 향해 미소 짓는다.

 

, 이제는 상관없다. 이곳에서라면야. 이곳에 서서 걷고 있는 동안에는 엊그제의 일도 없었던 일이고 몇 년 전의 일도 없었던 일이다. 이곳에서라면야 그 무엇인가라도 나를 상처 입히지 못해. 나는 아름답고 가녀린 한 여자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니까. 이곳에서라면야. 햇살은 산맥에 걸린 듯이 진홍빛 잔영을 살며시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햇빛의 태반은 노오란 하얀색이다. 연하양빛의 햇살이 따뜻해서 기분 좋았다. 나른한 달콤함이 햇빛을 쬐는 곳마다 피어올랐다.

 

지평선의 접점에선 하늘빛 하얀색, 그 위로는 점점 파래져 시원하게 끌어올려지는 드높은 하늘. 그리고 그 아래에는 그도, 그의 애인도 없다. 여기엔 오직 나 하나뿐이야. 죽도록 싫었던 고독조차 달콤한 풍경.

 

피아노 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아니, 피아노 소리다. . 잘못 들은 거겠지.

계속 걷는다. 수북히, 마치 염전에서 긁어 올려 쌓은 소금산처럼 저 너머에는 모랫둑이 보였다. 그나마도 작은 크기. 넓고 평평히, 끝이 없는 이 모래벌판에서 기쁜 듯이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태양은 아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나는 바람 부는 가디건을 한 차례 모아잡고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반백발을 휘날리며 잩게 스며드는 모래의 바다를 걸었다. 애써서 쓸쓸치 않으려는 듯 보이겠지, 나와 모래벌판을 비스듬히 품고 찍는 사진은.

 

하늘 위로는 차마 숨지 못한 별 두어 개가 나지막히 총총이었다.

 


 

 

 

20110923 17:24PM~17:57PM / 23:06PM

텍스트 백업 : 20110924 23:39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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