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昧葬의 후일담後日談

작품/소설 2014. 11. 10. 02:54
흙이 덕지덕지 묻어 굳은 채로 떨어지지 않는 삽날을 발 끝으로 긁어내다 포기하고, 옆으로 던졌다. 쓰러지듯 주저 앉아, 주린 목을 적셔줄 웅덩이라도 있는 마냥 절실함을 담아 세 발짝 쯤 되는 거리를 기어가, 아직 옷도 입히지 못한 봉분을 최대한 팔을 벌려 안았다. 으레 이 다음은 모두들 울지 못해 죽은 귀신처럼 울더만, 어째 나는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최대한 울지 않고 그녀를 떠나 보내는 것이 그녀가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될 수 있는대로 어딘가를 깨물었다. 입술이 찢어지고 이빨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내 것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멀게 들렸다. 어디선가 황조롱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귀뚜라미 소리와 비슷한 그 소리. 여름이 생각났다. 그녀와 함께 걷고팠던 그 여름날의 갈대밭. 함께 바닷가에 차를 몰고 가선 밀려오는 파도에 실린 바닷바람의 짠 내를 맡고 싶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소금기가 아름답게 꽃송이처럼 맺혀 있었으리라. 그녀를 잠시 쓰다듬곤, 미안하다고 말하고 봉분을 등에 베고 누웠다. 야속하게도 하늘은 구름 한 점 끼어있지 않았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누옇도록 짙어 금방이라도 소맷자락에 이슬 맺힐 것 같았다. 차갛게. 차갛게라는 단어를 하나 지어냈다. 차갑고 하얗게. 차갑고 누옇게. 차갑고……. 뒤엎어진 흙이 아직 추위에 굳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단어를 뱉어내고 있는가. 실소가 흘러 나왔다. 실소는 곧 울음으로 번졌다. 참기로 했는데, 참아지지가 않았다. 물러터진 입술의 상처 사이로 흘러 들어가 욱신거렸다. 그 욱신거림의 고동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느껴져, 내 자신이 살아있음에 그리고 그녀는 누워있음에 더더욱 울었다. 의문이었다. 나는 계속 살아 숨쉬며 박동하고 있는데 그녀는 어찌하여 차디 찬 곳에 누워 있는가. 하다못해 그 여름, 바닷바람으로부터 맺힌 소금기가 가시기 전에. 아직 흙이 따뜻할 적에 묻어주고 싶었다. 야속하게도 옅은 안개마저 어디선가 흘러 들어와 그녀를 적셨다.

태양이 거세게 내리쬐는 사막, 가녀린 맨발로 눈부시게 아름답고 고운 모래밭 위를 걷는 그녀가 보였다. 하이얀 원피스를 입고선 멋드러지게, 가느라면서도 균형있게 살집이 잡힌 다리를 내비치며 머리에 쓴 챙 모자를 바로 잡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하며, 태양을 등지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태양더러 돌아서라 말했다. 태양은 돌아섰고, 마침내 그녀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걷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한낱 꿈을 꾼 걸까, 나는. 그녀는 꿈 속에서 나와 시간을 보냈고, 실제로는 같이 자리하지도 않았던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아, 그녀는 진짜구나. 진짜 내 옆에 있었어.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아보려면 볼을 꼬집는다고들 하지 않는가…. 나는 그 물음으로 내 볼을 힘차게 꼬집었고, 정말로 아팠다. 아프다 못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황조롱이는 또 한 번 날아가며 울었고, 날갯짓으로 바닷바람을 실어왔다. 새벽의 선명하고 짙은 공기에서, 나는 울었다.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짚고는 일어섰다. 어딘가 아픈 곳도 없고 지치지도 않았을진데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났다. 그녀의 마지막을 나와 함께 한, 널브러져 있는 삽을 주워 발 끝으로 날을 털었다. 흙은 안개를 머금어 금방 떨어졌다. 힘 없이 삽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가면 그녀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치며 '사내 녀석이 기 펴고 다녀야지?' 라고 할까봐, 없는 힘을 쥐어 짜서 삽을 어깨에 메고 걸어 갔다. 그녀의 아리따운 머리 위로 갓 심어놓은 풀들이 다 자라 그녀의 자랑이었던 기다란 머리카락 마냥 늘어질 때에 다시 올 것이다.



그렇게 멀어졌다. 그녀의 봉분이 등 뒤로 보였다. 닿지 않아도 보였다. 알 수 있었다. 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내 어깨 위로는 아직 그녀의 무게가 실려있다. 그녀의 무게. 그녀는 아직 내 위로 살아 숨쉬고 있다. 그녀의 생존에 대한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는. 그녀…는.

열한 번째의 봉분을 만들면서, 나는 드디어 지쳤다. 추억과 망각 사이에 끼어 치던 발버둥. 종각에 다다른 것일까. 다시는 그녀를 묻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다 묻었기에. 묻어버렸기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는 너를 묻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녀는 내게─



END
2014 11 10 02 52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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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2

작품/소설 2014. 10. 25. 03:59
"오빠."
현관 계단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 햐르타는 무척이나 가냘팠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부모로부터 나온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나와는 너무도 다른 여동생이다. 조그만 몸에 가냘픈 팔다리, 그리고 정반대의 성격. 햐르타를 보고 있자면 할아배가 말해줬던 유리라는 것이 생각난다. 바깥에서 반대편 바깥이 내다보이는, 투명하고 맑은 물건. 안드라 아저씨는 햐르타를 보고 유리 인형이라고 했다. 본 적은 없지만, 왠지 어울리는 말이었다. 햐르타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앞뒤로 몸을 흔들거리며 물었다. 나는 방금 잡아온 커다란 놈을 손질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별이라는 거 있잖아. 아저씨가 빌려준 책에서 읽었단 말야. 저어기 위에 반짝거리면서 빛나는 자그만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더라."
"응."
"근데 여기서는 왜 별이 안 보여? 책에서는 어디에 가도 밤이 되면 보인다고 했는데……."
나도 본 적 없단다. 인석아. 내게 물어 뭣하니.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글쎄. 구름님이, 읏차. 계셔서 그런거 아닐까?"
아가미 부분에서 칼이 걸려 애를 먹었다. 비늘이 잘 벗겨지지가 않았다. 햐르타는 생선을 손질하며 말한 것에 성의가 없다고 생각한건지, 그 내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단에 굴러다니던 자갈 하나를 집어 저 멀리 던졌다.
"구름님은 말야.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잠시 날아가셨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했단 말야."
"오빠는 잘 모르겠다야."
"구름님이 궁금하니?"

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디선가 우연히 듣고 있었던지, 아니면 엿듣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안드라 아저씨가 옆구리에 붓과 종이를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햐르타는 안드라 아저씨를 보자마자 잽싸게 튀어나갔다. 왠지는 몰라도 여동생은 아저씨를 잘 따른다. 나는 그와 반대로 내심 못마땅해 했는데, 그게 그냥 여동생과 친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보였는지는 몰라도, 그랬다.
"아저씨~" "읏차, 욘석."
아저씨는 햐르타를 안아 올리더니, 어깨 위로 무동을 태우곤 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 비늘이 어떻게 되먹었길래 이렇게 단단한거여.
"아저씨, 아저씨. 알려주세요. 왜 저 구름님들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거에요?"
햐르타는 호기심 충만한 눈빛으로 아저씨가 가리킨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물었다. 점심도 굶어놓고 꽤나 명랑한 목소리였다. 아저씨는 어깨 위에 올라탄 햐르타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날뛰어서 그런지 조금 버거워하며 자세를 다시 잡고는 말했다.
"욘석아, 나도 듣고 있어서 아니까 그렇게 재촉하지 마려무나."
"알려주세요~알려주세요~"
아저씨는 잠시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골랐다. 햐르타에게 옛날 이야기라던가 책을 읽어줄 때면 저렇게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나는 드디어 생선의 아가미를 잘라내고서야, 잠시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칼을 내려 놓았다. 햐르타는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아저씨의 가슴팍을 살짝씩 때리고 있었다.

"그건 말이다…"





"일어났어?"

햐르타의 목소리가 들려서 잠에 깬건지, 잠에 깼는데 햐르타의 목소리가 들린건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뒤척이려던 찰나 몸이 쑤셨다. 바람이 거세게 불려는 참인가보다. 그와 동시에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시야가 흐릿했다. 창가에 햐르타가 흔들의자 위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며 바람을 쐬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거죽으로 싸인 커다란 책이 놓여 있었다. 무겁지도 않나. 햐르타는 가냘픈 소녀에서 가냘픈 아가씨로 자라났다. 유리는 차갑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그와 동시에 햐르타는 내게 점점 차가워졌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그 차가움이 안에 남아 느껴졌다. 싸늘한 냉대가 아닌, 이야기를 한 이후,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딘가 한 구석에 남는 그런 서느럼이었다. 내가 미안할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지만, 미안했다.

"창문 좀 닫아줄래?"
햐르타는 나와는 정반대로 바람을 좋아했다. 나는 그 바람에서, 한 방울의 피로 알게 된 그 냄새의 종잡을 수 없는 거대한 의미가 싫었다. 열 아홉에 성인식을 하고 나서도 햐르타는 여전히 바람 쐬기를 좋아했다. 바람을 쐬는 것을 원래부터 좋아 했지만, 피 냄새를 알게 된 후에도 좋아하는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모른다. 뒤의 경우는 왠지 생각하기 싫었다. 단 하나 바뀐게 있다면, 예전의 그 초롱초롱하던, 바람님이라고 부르며 창가에 앉아 입을 벌리던 그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인형처럼 앉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책을 읽고, 바람에 쪽수가 넘어가도 그저 묵묵히 다시 되넘겨 책을 읽을 뿐이었다. 창문을 닫아달라는 나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햐르타는 가는 양 팔을 벌려 여닫이 창을 하나씩 힘겹게 닫았다. 그리고는 무릎 위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오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아저씨한테 들었어. 산으로 간다면서."
갑자기 사레가 들려 기침이 났다. 햐르타가 책을 덮고 내 옆, 침대 위에 걸터 앉아 등을 두들겨 줬다. 죄 짓는 것도 아닌데 왜 기침이 나는지 원. 등을 두들겨주며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왠지 더더욱 그런 느낌을 들게 했다. 기침이 멈췄는데도 계속 심술궂게 등을 두들기자 몸을 일으켜 햐르타를 바라봤다.
"너도 알잖아. 가야 한다는 거."
내 말에 햐르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빠도 알잖아. 되게 위험하다는 거."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햐르타는 살짝 웃으며, 다시 의자로 돌아가 몸을 푹 안긴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할아배가 햐르타더러 읽는 이라고 써놓은 그 쪽지를 아저씨가 보여줬을런지가 궁금하다. 읽는 자이기에 책을 저렇게 좋아하는걸까, 책을 원래부터 좋아하는데 읽는 자인걸까? 어렸을 때부터 봐왔으니 아마 후자겠지. 할아배는 햐르타를 본 적도 없고. 양 손을 머리에 베고 다시 누웠다. 햐르타는 계속 묵묵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난 아직 반 까막눈이라서 저렇게까지 빨리 읽진 못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여동생이 벌써 성인식을 치뤘다는 게 참 오묘할 따름이었다. 근데 왜 여자애들은 열 다섯에 성인식을 하는 걸까. 아저씨를 만나면 묻고 싶었다.

"괜찮아, 인마. 내가 뭐 그렇게까지 운이 없는 놈도 아니잖아. 잘 될거니까 괜찮아."
왠진 모르지만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건넸다.
"괜찮지 않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잖아.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고 하는게 좋다고 봐, 오빠."
얘 또 이런다. 구석에 또다시 싸늘함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그와 동시에 살짝 머쓱해졌다.
"뭐, 그, 그럴지도 모르지만 진짜로 괜찮어."

여동생의 옆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내 여동생 치고는 너무도 예쁜 얼굴이다.





벌어지리라. 어느샌가 모르게 일어나 점점 커져 마침내 대두 되었을 때는 그 누구도 겉잡을 수 없게 된 일이. 섬뜩하고 참혹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거의 모든 걸 집어 삼킨 그것의 위용은 마치 파도와 같을 것이다. 절벽을 향해, 굳건한 절벽을 향해 잡아먹을 듯 달려와 부딪고, 자신의 몸집의 두 배 가량 치솟아오르는 파도. 파도와 같으리라. 땅 위에 서있는 모든 것들을 바다로 밀어내어, 그 것들이 익사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서서히 가라앉고, 마침내 바닥에 다다를 즈음 육탈하여 덜그럭거릴 때, 땅 위는 온전히 그 것의 것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으레 음모라는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음모를 믿고, 그 일에 대비하며 살아오던 이들 또한. 그 일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 그 일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안아 추위를 버티며, 이 세상에 그들밖에 갖고 있지 않은 온기를 나누리라. 그렇게 살아가리라. 어느샌가 모르게, 언젠가는 그들이 실패하여 땅에서 몰아내어져 바다로 떨어지며 그들의 먼 조상을 만날지라도, 그들은 마지막까지 온기를 가진 이들로서 칭송받으리라.

저 멀리,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별들로부터.

작자 미상, 종말록終末錄 , 7장 116쪽.



「」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를 담은 말이 목구멍을 타고 입술이 채 열리기도 전에 「」의 이야기를 담은 이들의 목을 잘라 버린다. 어떤 것인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손에 쥐어보지도, 냄새를 맡고 들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단 하나는 장담할 수 있는데, 「」가 이 세상을 삼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의 행동의 의의를 그 누가 알랴. 하지만, 오래 전부터 전승해오는 말들에 의하면, 그저 싫어서라고 한다. 웃기지 않은가? 얼마나 거대한지도, 강력한지도 모르는 존재가 우리를 마치 우리가 개미 보듯 하는 심정으로, 그저 손에 쥐고 톡 터트려 죽이려고 한다.

「」의 손가락 안에는 작은 점만이 보일 뿐이겠지만, 그 안에는 필연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온기와 가정, 그리고 희망과 구원이 있으리라.
얼마나 우습고도, 무서운 일이랴.

히옌 카이그, 「」, 머릿글







진행을 좀 하려고 했으나 종말록까지 쓰고 날려 먹어서(...)
더 이상 생각이 뻗어나가질 않아 여기서 마칩니다.
하아...백스페이스에 지우기와 뒤로 가기 두 기능을 동시에 넣었을 디자이너, 누구냐 도대체!!

그럼 여기서 이만.


2014 10 25
0354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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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1

작품/소설 2014. 10. 21. 03:05

산맥은 그 둘레를 끊임없이 굽이치고 바람은 언제나처럼 동쪽에서 산맥이 열려 있는 서쪽으로 짙게 불며 흘러가기에 살고 있는 모든 나무와 풀들이 서쪽으로 휘어 곡야曲野라고 이름 지어진 곳이 있었다. 이따금씩 땅 밑에서 전갈이며 곤충들이 올라와 풀을 뜯어 보지만, 이 곡야에서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뭔가를 먹어보려고 하는 생물은 어릴대로 어린 녀석들인 것이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들이키게 되면 어떻지는 뻔하지 않은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대다수의 동물이 살아남지 못하는 곳임에도 식물들만은 잘만 버텨내고 있었다. 개체수의 증가도, 감소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이 옛날과 현재가 같아 기묘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 연유를 마치 커다랗고 날카로운 석회암 덩어리가 줄이어 서있는 듯, 보는 각도에 따라 하얗기도, 거뭇거뭇하기도, 회색빛이 돌기도 하는 저 산맥을 들어 얘기하곤 했다. 너무나도 드높아서, 구름 조차도 가운데의 몸뚱아리까지만을 삼키고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산맥에서 불어오는 거칠고 낮게 깔리는 바람을. 하지만 거기서 바람이 왜요? 라고 물어보아도, 곡야에 사는 모든 어린이들은 그들의 부모에게서 답을 듣지 못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꺼리는 것처럼 고개를 젓거나, 눈을 감는 부모의 모습을 봤다. 그리고, 그들이 자라나서 그들의 아이들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음을 들어도, 그들 또한 그렇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곡야는 그런 곳이다.


곡야는 마치 곶처럼 대륙의 동쪽 끝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 곡야의 서쪽으로 쭉 가다 보면, 까마득한 발치 저 밑으로 자줏빛이 도는 파도가 휘몰아치며 드높은 절벽을 깎아 내렸다. 곡야의 산맥을 그 누구도 넘어본 적이 없다고들 어른들은 말했다. 산맥은 한 치의 틈도 없이 곡야를 둘러 싸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곡야의 존재를 알리가 없었고, 우리도 반대로 그러했다. 그렇기에 얼마 안되는 곡야의 주민들은 소일거리 수준의 낚시와, 절벽에 거의 붙다시피 한 밭에서 일구는 채소들로 삶을 이어 나갔다. 이따금 산맥에서 불어와 바다로 나가려는 바람의 욕구가 거셀 즈음엔 벼랑 언저리에서 일을 하다 그 바람에 휩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한 가장의 이야기가 들리곤 했다. 슬픈 동네다. 너무나도 슬퍼 곡야에는 밤조차 오지 않는다. 밤이라는 개념이 없다. 마을에서 제일 똑똑한 할아버지의 말로는 구름이 너무나도 두꺼워 낮이 내려오는 동안에 구름 위로는 밤이 오고, 밤이 내려오려는 동안에 다시 낮이 된다고 하셨다. 하루에 딱 삼십 분, 잠깐 어두워졌다가, 잠깐 밝아질 뿐이었다. 그 잠깐 어두워지는 시간에 안드라 아저씨는 짧은 밤을 만끽하며 괭이를 잠시 내려놓고 그림을 그렸고, 그 잠깐 밝아지는 시간에 뒤엣뜨 아줌마는 치매가 있는 노모의 욕창에 햇볕을 쬐였다.

할아버지는 산맥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이 불 때마다 지팡이를 짚고 바깥으로 나와 바람을 쑀다. 약간 쇳맛이 나면서도 코나 목구멍에는 걸리는게 없는 그런 바람 맛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 쇳냄새가 바로 피 냄새라고 하셨다. 나는 피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기에 몰랐고, 실감도 나지 않는다. 그렇게 어르신은 바람을 쬐면서, 오늘 하루도 바람이 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산맥 너머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다. 어르신은 이렇게 말하셨다.

바람마저 불지 않으면 우리 또한 이 땅처럼 어제와 내일을 모르게 된다네.

어린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어린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해보고 싶어져서, 해야만 될 것 같아서 산맥 쪽으로 고개를 숙였었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할아버지는 그렇게 산맥처럼 가만히 굳은 채 어느 쪽에서는 거무죽죽하고 어느 쪽에서는 새하얀, 산이 되어버리셨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안드라 아저씨가 창밖을 내다보다 뭔가 이상해서 뛰쳐 나오셨을 때도 가만히 있었다. 스쟐 형과 글리덴 누나가 나와서 울먹이며 연신 할아배 할아배라고 말할 때조차 나는 그저 형을 올려다 보기만 했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돌이라고 부르기에는 맞지 않을, 어떤 존재로 굳어버리신 할아버지를 바라 보면서, 그저 할아버지께서 짚고 계신 지팡이를 살며시 손가락으로 콕, 짚었다.

할아배는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듯 싶더니, 바람에 가벼이 실려 드넓은 서쪽 바다로 날아 가셨다.
나는 그제서야 울기 시작했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사라졌을 때, 나는 다섯 살이었다. 그렇게 이십 년이 흘렀고, 나는 스물이 넘어 어른이 되었다. 스무살이 되던 날 안드라 아저씨는 마을 사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 앞에 서서 자신의 팔을 헝겊으로 꽁꽁 싸매시더니, 자신이 그림을 그리던 붓을 반으로 쪼개 그 날카로운 단면으로 솟아나온 핏줄을 살짝 찔렀다. 그리고 거기서 솟아나오는 핏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어 내 아랫입술에 바르시곤, 핥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피의 맛을 처음 봤고, 그때부터 나는 저 위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처럼 입을 가리기 시작했다.

스쟐 형과 글리덴 누나는 이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둔 부부가 되었고, 뒤엣뜨 아주머니는 노모를 떠나 보내시고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연신 뭔가를 바느질 하시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내 동생 햐르타는 이제 열 아홉이 되었고, 아버지는 넉 달 전에 돌아가셨다. 잠깐의 밤 동안 추억에 가득 잠긴 눈으로 산맥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시던 안드라 아저씨는 햐르타의 대부代父가 되어 햐르타를 가르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돌아가신 할아배를 대하는 마냥 안드라 아저씨를 할아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러했다. 할아배라고 불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안드라 아저씨의 머리카락은 모두 다 하얗게 샜다. 나는 그것에 대해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끝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세상이라는 곳은 이 곡야가 전부인지도 모른다. 산맥 뒤로는 그저 무無만이 있으며, 우리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갑자기 저 산맥의 존재가 매우 갑갑하고 답답하게 여겨졌다. 가슴 속에 무언가 푹 박힌 듯, 막혀 왔다. 그렇게 산맥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괭이를 손에서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마시다 바람이 그치면 낚싯대를 끌어 올려보고, 아무 것도 없으면 땅바닥의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 차고, 뭔가 낚여 올라오면 옆집사는 여자애 루타에게 가져가던 날이 계속 되었다. 산맥을 넘고 싶었다.

어느날 나는 뭔가에 씌였는지, 낚여 올라온 팔뚝만한 물고기를 꼬챙이에 꿰갖고는 안드라 아저씨네 집에 들렀다.
안드라 아저씨는 여전히 집 안에서 뭔가를 그리고 계셨다. 먹물을 붓에 머금게 하곤 손으로 살짝 짜내어, 뭔가 알 수 없는 글자를 휘갈기고 계셨다. 나는 꼬챙이에 꿰어 온 물고기를 주방으로 가져가 구석에 세운 후, 마루로 와 안드라 아저씨가 앉아 있는 마룻바닥 뒷편에 앉았다.

"아저씨."
"왜?" 안드라 아저씨는 눈 앞의 종이만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산을 넘고 싶어요."
종이 위로 붓이 미끄러져 뽀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아저씨는 잠시 굳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붓은 머금었던 먹물을 종이에 아낌 없이 뱉어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아저씨가 할아배 마냥 죽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아저씨는 붓을 옆에 내려 놓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셨다. 나는 갑자기 앉은 자리가 불편해 다리를 잠깐 고쳐 앉았다.

"이유가 뭐냐?"
"바람이 궁금해서요."
"바람이 궁금해?" 아저씨는 잠시 콧잔등에 길게 자란 수염을 꼬시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어째서 저 높은 산의 등짝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피비린내를 안아 오는건지가 궁금해요."
아저씨는 잠시 내 눈동자 너머를 들여다보셨다. 빤히. 나는 잠시 머쓱해져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아저씨를 봤지만, 그 때마다 아저씨는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나를 보고 계셨었다. 그렇게 두어 번 했을까, 아저씨가 갑자기 일어서서 문을 걸어 잠그곤 창문에 발을 내리셨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내 앞에 털썩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시곤, 한숨을 한 번 푹 쉬셨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바라보셨다.

"궁금하냐? 난 여태까지 네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줄로만 알았다만."
"어, 음, 그렇긴 한데, 할아배가 했던 말이 점점 진짜로 다가와서요."
"피맛을 본 이후부터냐?" 나는 다가오는 그 말의 빛깔에 흠칫 놀라 대답했다.
"네……."
내 대답에 아저씨는 다시 다리를 고쳐 앉으시고, 양 손으로 무릎을 굳게 쥐셨다. 나는 마치 꾸짖음을 당하는 어린아이 마냥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생선을 향해 어디선가 꼬여든 파리가 날아가는 낼갯소리가 들렸다.

"햐르타보다 아직 너는 모르는게 많다."
동생 이야기가 나왔기에 나는 살짝 긴장했다. 그 여리고 순박하며 생선이면 사족을 못 쓰는 가시내가 뭘 안다는 말일까?
"내가 너희 아버지를, 아, 너희 아버지 험담을 하려는 건 아니야. 긴장 풀어라. 너희 아버지 대신해서 햐르타를 거둔지가 어언 삼 년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햐르타를 내 집 대신 이 할아배가 살던 집에서 길러냈지. 왠지는 모른다. 그냥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랬다. 저만치 멀리 있는 내 집은 스쟐과 글리덴에게 넘겨주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 늦은 밤 애 울음소리는 서로에게 인상만 찌뿌릴 뿐이니까."
정좌를 하고 있었기에 다리가 살짝 저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저씨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그 동안 그 누구도 할아배의 집 문턱을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 나조차도 생선을 들고 찾아 뵈었으니까. 그 전에 할아배는 바람을 맞기 며칠 전에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내가 하늘을 날게 될 날이 있을거다. 그 날 이후로 네가 첫 번째로 보는 이 마을의 여자 아이에게 내 집에서 내 책들을 읽게 해라. 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을에 여자 아이가 햐르타 뿐이었나?

"그렇게 나는 할아배의 집에서 햐르타를 길러 냈지. 그건 너도 알거다. 할아배의 집에는 그 아무런 책도 없었어. 책이라는 것도 나는 말로만 들어서 뭔지도 몰랐다. 어느 날,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 무심코 창문을 열고 있었지. 바람이 집 안으로 불어 들어오더구나. 그 바람에 그 때 아마 다섯 살이었나, 햐르타가 재채기를 했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었지. 나는 어딘가 바람에 삭아서 망가졌나 해서 안뜰로 나와 집을 한번 찬찬히 둘러 봤었다. 아무 곳도 무너진 곳이 없어서 집 안으로 다시 들어왔는데 햐르타가 없더구나. 마루에 깔려 있던 융단이 살짝 걷어져 있고, 그 안으로 구멍이 있었지. 나는 그 안으로 햐르타를 불러 보다가, 계단이 보여 걸어 내려갔네."
누군지는 몰라도 침이 목젖을 살짝 들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나인 것 같다. 아저씨는 가래가 끓었는지 잠시 기침을 세게 하더니 말을 이으셨다.

"책이라는게 있더구나. 수북히. 책상이 하나 보였고, 호롱불이 켜져 있었단다. 아무래도 햐르타가 킨 것 같지는 않았어. 할아배가 날아가고서도 그 오랜 시간을 계속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 같다. 뭘 태워서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햐르타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수북한 책더미 사이에서 종이 조각 하나를 꺼내 들곤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종이 조각을 펼쳤고, 안에 글씨가 있었지. 쪽지더구나. 그 쪽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단다."

讀者인 자네가 이 쪽지를 맨 처음 봤을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다네.
記者인 햐르타에게 글씨를 읽는 법을 알려주게나. 그러면 햐르타가 알아서 깨우치고 익힐 것이라네.
때가 되어 햐르타가 자라고 吼者인 오라비가 피비린내를 알게 될 때, 산맥을 넘게 하게.
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에 그 둘이 닿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짜 숨을 쉴 수 있네.



"…무슨 뜻이에요?"
"너는 아직도 네 이름이 왜 마을 사람들과 다른 어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나 보구나."
"네? 제 이름이 왜요?" 그는 아주 의아한 건지, 알면서도 숨기는 건지 모르는 듯 반응을 보였다.
"이 곡야는 말 그대로 세상의 끝이란다. 세상의 끝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백 번의 바람이 불 때마다 한 사람이 실려가고 한 사람이 불어온단다. 천 번의 바람이 불어오고 그 후로 백팔 번의 바람이 불어올 때 진실은 불어오고 다시 날아가며, 백육십이만 번의 바람이 불어올 때, 이 곡야는 점점 떠밀려오는 산맥에 짓눌려 비로소 하나의 산맥이 커다란 의意를 이루게 된단다."
정말로 모르는 모양인지, 그는 머리를 긁으며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무슨 뜻일까, 무슨 말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누리야. 왜 우리들, 마을 사람들은 항상 열두 명인건지 생각은 해 보았느냐? 어째서 마을 사람들이 나를 갑자기 할아배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 어째서 스쟐과 글리덴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하나씩 두고 있을까? 어째서, 저 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피비린내가 날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누리는 吼者, 우는 자로써 깨어났다.
세상은 이미 끝나 있었다. 어떠한 것이 어떠한 뜻으로 그러는지는 모른다. 얼마나 넓은 혹은 상상보다 작은, 산맥 너머의 땅들이 피비린내에 절어 있고, 얼마나 의미 없을 혹은 의미 있을 것들이 낮과 밤을 거두는 구름 너머로 자리 해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누리는 정말로 산맥을 넘고 싶었고, 그렇게 넘기로 결심했다. 드넓은 서쪽 바다로 떨어져 물고기 밥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보다, 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그 곳으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혈육인 햐르타를 데려 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이전까지의 누리와는 아무런 연관성이나 관련도 없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저 산을 넘어서면 드넓은 땅, 대륙大陸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그 대륙은 글자 그대로 대륙大戮인지라 그 옛날 저 산 너머 드넓은 곳이 다 사람 살만한 곳이었고, 산맥이 자그마한 봉우리였을 때조차 몰아내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곡야의 열 둘로는 역부족이리라. 먼 발치에서 피비린내를 맡으며 수많은 굴레 전의 혈욕을 충족시킬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굴레를 넘어 수많은 글자와 마음과 얼굴로 이 곡야에 다다랐다가 스쳐 지나갈 때, 그 무엇도 굴레를 기억할 수 없고 굴레를 돌이킬 수도 없다.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이리라. 웃음이 절로 나온다.

다만 손끝에 스치는 유일한 희망으로는 이 지팡이 하나와, 어디선가 불어 올 그 다섯 이者일 것이다.
언젠가는 이 굴레를 끝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때는 저주했던 이 무한의 굴레를.



몇 년만에 써보는 판타지인지 모르겠네요.
묘사가 감성적으로 젖어 있은지가 오래 되어 골자가 그 묘사에 흐려지는 것이 걱정입니다.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런지도 의문이네요. 워낙 갑자기 생각해낸 것들이라서요.
그럼 이만.

20141021
0302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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切段

작품/소설 2014. 10. 21. 01:06

그렇게 해서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날처럼, 그저 반복되는 무직으로서의 무전취식의 일상의 한복판에서 깨달았다. 얼마 전 그저 문득, 단 하나의 메세지조차 오지 않는 카카오톡 친구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녀의 프로필을 눌러보았다. 오랜만에 바뀐 프로필 사진은 그녀가 그녀의 애인과 화목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녀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충만했는데, 이제는 반 반으로 나뉘어 느껴졌다. 그녀가 행복해보이니 잘된 거야. 라고 위안하는 절반과, 왜 아직도 헤어지지 않은거지. 하는 절반이었다. 나는 후자의 나 자신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라 그 생각을 접으려고 했다. 접으려고 할 수록 그 동안 억눌러 두었던 그림자 진 마음은 솟아오를 뿐이었고,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고 돌 수록 점점 더 비참해져만 갔다. 이런 내가, 거의 폐인에 가까운 내가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다 해도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녀가 머무를까. 그렇게 점점, 그녀를 생각하던 내 마음은 몇 년에 걸쳐 부수어지고 조각이 나뉘어가며 내 마음을 난자해왔고, 문득 이제 곧 조각조차 남지 않아 가루로서 빻아져 내 마음 안에 그대로 묻어서 알게 모르게 스며가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의 조각조차도 남지 않게 된 내 마음은 도대체 이제 무엇을 부수며 나아갈까. 상실해버린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하며, 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부수어가며 그나마 근근히 앞으로 나아가던 내 고장난 마음은 이제는 나 자신을 부숴가야만 그것을 연료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울고 싶었다. 아니, 마음은 울었다. 눈물샘은 말라 비틀어져 이제 모든 것에 대해 무덤덤하게 대응할 뿐이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알았다. 동시에 우습다는 것도.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워가면서도 글은 진전이 없었고, 잃어버린 음악들과 예술들의 방대한 바구니의 틈바구니에서 그 것들을 다시 그러모으려던 시도는 번번히 중단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내 잃어버린 소중한 방 하나를 되찾았다. Moby의 음악이었다. 떨어진 담배를 사러 가기 위해, 담뱃재와 밤샘으로 인해 약해진 몸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온갖 두려움을 헤치고 새벽의 편의점을 갔다 왔다. 그 왕래의 순간에조차 나는 끝까지 이어폰을 빼먹지 않았다. 학창 시절, 열정과 의지로 꿋꿋히 글을 써가던 나 자신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항상 미니스톱이 박힌 비닐 봉투를 든 채 집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렇게, 이 의자에 앉았다.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불을 붙이고, 잃어버렸던, 유실流失되었던 내 마음의 조각들 중 하나를 꺼내어 먼지를 털고 오랜만이야. 라고 속삭인 다음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 음악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만났던 때의 그 폐부에 차갑게 스며들면서도 깔끔하게 내쉬어지는 얕고도 무거운 공기. 갈대는 마치 훨훨 부는 바람에 머리를 말리듯 이리 저리 너울대었고, 나는 그 갈대숲을 사이에 두고 천변을 걸으며 찬란하게 별이 빛나던 밤 하늘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었다. 지금은 별조차도 내 눈에 띄지 않는다. 작은 알갱이 하나 하나가 크게 이루어진 청사진이며 온갖 문양들을 이루던 그 밤하늘조차 그저 새카맣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각 조각을 이어 붙여보니 어느새 그 때의 나 자신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왜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까. 왜 애써 보지 않으려 했었을까. 나 자신은 항상 산산히 부숴져 흩어지지만 그 모든 나 자신들을 모아줄 구심점이 하나씩은 있었는데, 왜 그것들을 돌아보지 않고 애써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항상 이렇게 깨닫지만서도, 벌써 나이는 첫 번째 파산波散 이후 두 해가 지나 스물 하나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룬 건 아무것도 없고,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저 한 여자만을 생각하다 아무 일도 못하게 된 병신으로밖에 쓸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은 내 스스로 걷어차 부수어트렸고, 신뢰하던 사람들은 항상 내가 그들을 저버렸으며, 나 자신마저도 항상 극한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건,


뭘 해도 나는 이렇게 살 놈이였어. 라는 쓰디 쓰면서도 나 자신에게 왠지 모르게 냉소를 짓게 만드는 도돌이표였다.




이 곡을 들으면서 나는 한 남자에게 저버려진 어떤 여자의 사막에서의 방황과 눈물로 점철된 만족스러운 점멸漸滅을 썼고, 이 곡을 들으면서는 어떤 그림을 그리는 여자의 깔끔하면서도 한 남자에게는 그녀를 찾아 나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도록 만들 만큼 지저분하게 추억을 점철한 실종을 썼고, 이 곡을 들으면서는…….


나는 잠시 음악을 멈추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웅크려 울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썼던 모든 글들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모두, 타의에 의해 실종된…….


그녀에 대한 생각을 했다. 하지 않으려 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면 할 수록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어쩌랴. 하게 되는 것을. 그녀의 가녀리면서도 확실한 손놀림으로 인해 완성되어가는 캔버스가 보였다. 그녀의 아름답고도 수려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녀의 둥글둥글하면서도 나름 매서운 곳이 있는, 그로 인해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해선 똑부러지는 성격이 보였다. 그녀의……그녀의……그녀의……그녀의…….




그녀가 나를 보며 왜 이러고 있어? 일어나. 예전처럼 나하고 같이 놀자. 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나를 보며 왜 이러고 있어? 예전의 네가 아니야.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리고 그저 유실자 n번째로 남으려는거야? 실망이야. 라며 나를 등지고 돌아서서 저 멀리로 걸어가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돌고 돈다.

이 세상에 내 존재를 그녀에게 알리기 위해 글을 쓰자고 하던 학창 시절의 내가 보였다.

이 세상에 내 존재를 그녀에게 글로나마 알리기 위해 글을 쓰던 스무 살의 내가 보였다.

이 세상에 보잘 것 없는 내 존재를 그녀에게 단 한 조각이나마 알리기 위해 글을 쓰던 내가 보였다.



그렇게, (        )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Moby - The Dogs





End.


Novelistar / [N]

이제는 네 이름을 쓰기조차 미안해져, E.


20140827

0412

[N]



title P.S : 切斷의 오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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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遠 - 3

작품/소설 2014. 10. 21. 01:06

'내 어린 시절은 참으로,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랬었지.'

선생님은 조용히 머그잔을 두 손으로 그러잡고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었다. 뭔가 어디론가 멀리 나가 있어 닿지 못하고 그릴 수 밖에 없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초점은 저 멀리를 향해 있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손에 쥐고 있던, 선생님이 내게 주셨던 검은 자줏빛의 표지를 하고 있는 책을 펼쳐 보았다. 한 쌍의 노트였다. 선생님은 그 책과 짝을 이루는, 연한 베이지 색의 책을 일기장으로 쓰셨다. 나는 받은 책으로 글을 썼었다. 밤의 들판. 어딘가, 머나 멀면서도 손에 잡힐 듯한 그 이름이 좋았다. 선생님의 그 표정이 생각났고, 어딘가 닮아 있는 그와 나의 공통점이 어렴풋이 느껴져서 좋았다.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모든 것들…, 그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나 자신. 그렇게 자라왔어.'
평소에, 자신의 옛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안 하시던 분이었다. 마치 생판 다른 사람의 일생을 묘사하듯, 선생은 그렇게 흔들의자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읊조렸었다. 그리고, 집 안에는 언제부턴가 내가 볼 때마다 항상 굳게 닫혀 있었던 문 하나가 있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푸른 책만을 손에 안고서, 눈 내리던 들판을 지나 세상으로 나갔었다.

그 눈 내리던 날, 떠나는 자와 남은 자 모두의 고독이 청량한 추위로 뼈까지 스며오던 날이 몇 년 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어,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생각 속에 젖어있던 의식을 일으켰다. 나를 뜻하는 눈치였다.
"시헌始獻. 비로소 시에 바칠 헌. 씨는 붙여도 되고 안 붙여도 되. 편한 대로 불러."
어느샌가 그녀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 신경 쓰였다.
"선생님이 시헌씨에게 남겨 놓은 쪽지가 있어요."
나는 그저 천천히 찻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카우치에서 일어나 선생님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선생님의 일기장을 꺼냈다. 변한 건 하나 없는데도 어딘가 낡아 있는, 오래된 물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담배를 태우고 싶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일기장의 페이지 정 가운데를 헤쳐 열어, 뒤로 조금 넘겼다. 선생님의 고요하면서도 천천히 흐르는 손글씨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출 무렵, 그녀는 페이지 사이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일기장을 천천히 닫고 조용히, 소중한 듯 원래 있던 그대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려 하는 듯 놓고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내게로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내 것만 있는 건 아니지? 너는?"
그녀는 내 옆에 앉기가 조금 어색한 듯 앉고 나서 손으로 몸을 끌어 거리를 조금 벌리는 중이었고, 그래선지 내가 말을 걸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제게 쓰실 내용도 거기에 쓰셨다고 들었어요."
"누구한테?" 나는 호기심에 그녀에게 되물었다.
"선생님 친구 분이자 변호사요."

나는 대답을 듣고 수긍한 다음, 그녀에게서 조용히, 양피지와 비슷한 투박한 재질의 손바닥 만한 크기로 접혀 있는 쪽지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것이 마치 화산 폭발 이후 발굴된 유물이라도 되는 듯 행여 바스러질까 걱정하며 펼치기 시작했다. A4 크기로 두 장이 펼쳐졌고, 선생님의 손글씨가 보였다.

나일세.
이 글을 읽고 있을 때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는 진부한 문장은 쓰지 않겠네.
이미 써버렸구먼. 지울 수도 없고 이거 원. 여하튼, 미안하네. 자네는 자네 나름 잘 헤쳐 나가겠지만
혜인이를 남기고 가는게 마음에 걸리는구만. 궁금한게 많을테지. 오랜만의 만남이 이런 식이라서 또 미안하네.
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가고 싶었을 뿐이라고 답하는게 평소의 나다운 대답이겠지.
누군가 날 불렀네. 어디선가 머나 먼, 시간이 지나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도 안되며 서로가 서로를
만나보았자 서로가 서로의 과거의 모습만을 간직하는 게 서로를 더 위한 것이 되버린 그런 사람이.
날 불렀어. 어떻게, 어디선가 불렀는지는 나도 모르네. 자네도 알잖나.
그저, 하늘에서 하나 둘 내려오는 눈송이가 그 사람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한 자음 한 모음이었고,
나는 항상 흔들의자 위에서 그 눈에 담긴 말들을 눈으로 그러 모으고 있었네. 그리움이라는 단어의 낭만적인 표현이 되겠군 이건.
혜인이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을테지. 그저, 운명으로 이끌린 한 여자아이라네. 내 딸처럼 키워냈고.
자네와는 다른 느낌으로 '키우고' 싶었다네. 그렇기에 자네가 왔을 때 혜인이로 하여금 자네를 만나지 않게끔 한거고.
늙은이가 교편을 잡고 남의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맘에 안 들었을 혜인이에게 미안하구먼.

혜인이 울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곁눈으로도 보였다. 글을 읽는 속도가 나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나는 계속 쪽지를 읽을지, 그녀를 감싸 안고 다독일지 망설이다가 쪽지를 계속 읽어 내려가기로 했다.

이 집은 자네 좋을대로, 혜인이 좋을대로 지내도 되네. 그러라고 지었던 집이니까. 몇십 년 전에 말야.
자네를 이렇게나마 보게 되어서 정말 좋구먼. 가기 전에 보았었으면 더더욱 좋았을 것을.
그래도, 조금 잔인한 표현이지만 이것도 나름 낭만이 있구먼. 내가 남긴 말을 누군가 읽었는지의 여부를 절대로 확인할 수 없는 글이라….
미안하네. 말이 조금 샜구먼.

종이의 용량이 거기서 끝나 나는 잠시 혜인을 위해 기다렸다가, 뒤로 넘겨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항상 내 호號를 잊지 말게. 침심. 알지? 마음에 잠기게 항상. 해답은 마음 속에 있어.
그렇기에 내가 부름에 답해 따라 나가기로 결정 했던 것이고 말야. 주변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을 좇아
이기적으로 행동하는게 나 아니었는가. 하하. 이기적인 최후라 미안허이.
하지만 말야, 내 나름으로는 이게 최선이었다네.

가까워 질 수 없으면서도 보고 싶은 사람. 아침에 일어나 차를 끓이고 수저를 들 때면 옆에 있는 혜인이가 그 사람으로 보였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볼 때면 문득 팔을 옆으로 뉘여 그 사람이 베고 잘 수 있도록 하고 있었네. 그러다보니, 점점 초췌해져 갔어. 마음이 말야.
황새냉이라고 알지? 내가 자주 차를 끓였던 그 풀 말일세. 그 풀의 흙내 나면서도 텁텁하고, 여운이 남는 맛. 그러면서도 깊게 쓴…그 맛 말일세.
그 맛이 너무도 나랑 닮아 있더군. 꽃말조차도. 그럴 수 밖에 없었네.
그 사람과의 생각. 그 사람과 함께 있다는 생각을 접어 둔지가 벌써 몇십 년 전인데도 이렇게 다시금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건 두 가지 의미라고 생각했네.
죽을 때가 됬거나, 내가 회춘했거나 말일세. 하하. 농담이야 농담. 너무나도 선명하여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내 마음인지 그리움인지 집착인지
그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딱 정점에, 나는 그렇게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네. 닿지도 않을 이상향理想鄕을 향하여.
머나 먼 때에,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가 원망할 수 밖에 없던, 가족이었던 동시에 한 고아의 어머니였던 한 사람과,
그보다는 조금 더 뒤의 시간에,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다가 시간의 순리대로 흘러가 어딘가 항구에 닻을 내린 한 여자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그 닻을 잘라버리고 내가 키를 잡고 싶었던 그런 집착과, 조금 뒤의 포기와 절망을 내게 안겨줬던, 하지만 아직 유일하게 사랑하는 한 여자.
눈은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날씨야. 눈이 따뜻한 날씨에 내린다면 눈은 과연 슬픈 날씨였을까, 시헌이?
다시 말하지만, 거 참. 나는 이렇게 미련이 많은데도 떠나다니, 정말 멍청하고 우둔한 놈이 아닐 수 없네.
자네에게 미안하네. 오랜만의 해후가 이런 식이라니 자네에겐 정말로 미안해. 남겨질 혜인이를 잘 부탁하네.
주변이 아무리 황량하여도 싹을 틔우면 그게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 주변에 꽃이 싱그럽게 할 그런 아이라네.
삶의 시간이 맞물리지 못하여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고 가지 못하는 것이 내 유일한 응어리일세.

황새냉이 차, 맛은 어떤가? 괜찮은가? 내 장담하지. 혜인이가 나보다는 차를 더 잘 끓인다네.
그 아이 곁에서 항상 그 차를 마셔주길 바라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일세.
말이 길었구먼. 못난 스승 만나 맘고생 하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서로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던, 그런 못난 날 따라줘서 정말 고맙네.
세상에서 제일 남사스럽고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말이지만 이건 글이니 내 그 옛부터 내려온 금언禁言을 깨고 한 글귀 쓰지.

띄엄띄엄 벌어진 때와 장소의 편린이나마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고, 사랑하네.


마지막 문장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잉크가 번져 있었다. 나는 그저, 마음이 텅 비어버린 사람처럼, 쪽지를 털썩 무릎 위에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어디선가, 멀리서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혜인이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쪽지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려 끌어당긴 후, 그녀를 안았다. 어깨를 안은 팔로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다가, 눈물이 고였는지, 코를 훌쩍이며 그저 계속 흘러나올 뿐인 눈물을 손으로 닦고 또 닦고, 이따금씩 입고 있는 옷자락에 그 눈물을 닦았다.

나는 여전히 천장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천장의 마감재로 쓰인 통나무 한 기둥 한 기둥의 옹이의 문양을 세어나갔다. 뺨자락에 차가운 뭔가가 하나 굴러가며 스쳤다.








나는 그녀가 추위에 덜덜 떨고 있기라도 한 마냥 혜인의 어깨를 끌어 안고 집을 나서 문을 잠갔다. 펼친 손바닥 위에는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열쇠와, 혜인을 한 차례 번갈아 보았고, 혜인은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미소 지으며, 내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깊게 쌓인 눈밭을 헤치며 이따금씩 비틀거리며,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창 밖으로는 아직 눈이 내리고, 흔들의자는 누군가 아직 앉아 있는 듯 계속 흔들리며, 찻주전자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거실 책상 위에는 살짝 구겨진 종이 두 장이 펼쳐진 채 살짝 하늘거리는 선생의 집을 잠시 뒤로 한 채.

뒤돌아서 바라본 집 주변으로 노을이 서서히 지평선으로 스며 들며 들판을 밤으로 물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의 들판夜이었고, 기억 속에서부터 항해해온,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머나먼 눈밭이었다.


2014 10 15
0449 [N]



영상 퍼가기도 안 되다니.

Christopher Norman - Volat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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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遠 - 2

작품/소설 2014. 10. 21. 01:04

벽난로에서 타들어가는 장작 덕분에 집안에 조금씩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내가 앉아 있는 긴 쇼파 오른쪽의 페어인 작은 쇼파에 앉아 무릎담요를 덮은 채 몸을 앞으로 구부려 양손으로 찻잔을 잡고 멍하니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맞은 편 텔레비전 위에 걸려 있는, 선생이 직접 친 사군자와 서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感監無疎識. 선생님은 참 한자를 특이하게 쓰셨다. 그녀는 아직도 찻잔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김의 질감과 흐트러짐을 보고 있는 듯 조용했다. 내가 글을 쓰다 문득 천장을 향해 피어오르는 연기의 물줄기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그녀는 어느샌가 찻잔을 비우고 다음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황새냉이였다. 차에서 흙냄새가 나면서도 살짝 산뜻하고 그와 동시에 침착하고 가라앉는 듯한 향이 났다. 그녀는 그렇게 눈을 감고 차를 음미하다가, 내가 찻잔을 다 비우고 내려놓을 즈음 자신도 그렇게 했다.
"선생님한테 말씀은 들었어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그저 당연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곤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발은 유순해졌지만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혜인暳璘이에요. 별 반짝일 혜, 옥빛 린. 처음 절 보셨을 때 선생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선생님이 지어주셨다면……."
"네, 맞아요. 지금 열 아홉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퍽 맘에 드는지, 아니면 선생 생각이 났는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몇 시간만에 그녀의 얼굴에 어린 첫 미소였다. 그녀는 잠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창밖을 내다보며, 무릎담요의 폭을 살짝 여미곤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 절 길러주셨죠. 제 생부는 선생님의 교수 시절 제자셨다나봐요. 선생님을 따라 글을 쓰셨고, 그러다가 결혼을 하셨지만 글로만은 생계가 힘드셨는지 어떤 일을 손 대셨다가 저를 못 키울 형편에 놓이셨고, 절 선생님께 맡기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린 나이임에도 아무런 원망이나 증오 섞인 표정 없이 담담히 말해내는 모습에 나는 그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선생님이 몇 년 전에 알려주셨겠지.
"그렇게 여기서 자라왔죠. 선생님이 먹을 간 벼루에서 손가락으로 먹을 찍어내 장난을 치다보니 붓을 잡고 있었고, 선생님이 서재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띄운 미소가 신기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이 듣던 음악은 바깥에 내리는 눈. 휘몰아치는 바람에 하나되어 춤추는 풀밭. 이따금 불어와 창문에 달라 붙는 낙엽들. 너무도 선명하게 어울려서 그렇게 음악을 듣기 시작했죠." 그녀는 마치 젊은 미망인이 검은 옷을 입은 채 지난 삶을 읊조리는 마냥 무덤덤하면서도 선명한 기억과 전달력으로 말했다. 나는 문득 손이 허전해 찻잔을 다시 잡고 싶어졌다.
"선생님이 어째서 이렇게 거친 날씨에 바깥을 걷고 계셨는지가 궁금하실거에요. 그걸 듣기 위해서 오신 거이기도 할테고요."
말하지 않아도 그것 뿐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라는 말이 전해져 왔다. 또 다른 서남 선생님이 앞에 앉아 있는 것 마냥, 나는 그저 조용히 혜인의 말을 들었다.

"서재로 자리를 옮길까요?"
"응?"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니, 물음이 갑작스럽다기보다는 갑작스럽게 말투에서 감정이 느껴져 당황스래 되물었다. 상냥함이었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던 참이었으니까. 무서움? 무서움이라기보다는 너무도 익숙함에 그저 약간의 기묘함을 느낄 뿐이었다. 선생님이 계신 것 같은 그런 기분. 자리에서 일어나, 텔레비전의 오른편으로 돌아 문이 나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녀는 잠시, 다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겨 찻주전자에 물을 다시 받아 끓이며, 주방의 곁방으로 갔다. 무언가 뒤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서재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문을 마주보는 선생님의 책상과 그 뒤의 창문. 그리고 그 주변 벽의 꽉 들어찬 책장과, 지나다닐 수 있는 공간을 띄어놓고 놓여 있는 카우치. 그리고 작은 흔들의자. 책장 안에 꽂혀 있는 책장은 선생님답게, 전부 많은 횟수를 거듭하여 읽고 또 읽었기에 거의 다 헤져 있었다. 딱 한 권만이 멀쩡한 걸로 기억한다. 내가 아끼고 아끼던 노르웨이의 숲 한정판. 선생은 책은 책답게 읽어서 헤지는 것을 영광으로 안다고, 읽음으로서 책을 헤지게 하는 것은 책에 대한 죄악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너무도 아꼈던 탓에 선생님에게 화를 냈던 기억이 있다.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옆에, 움베르토 에코의 컬렉션이 늘어서 있었다. 계속 훑어보던 중, 왠지 모르게 책등이 빛이 바래지 않은 책 한 권이 더 보였다. 양을 쫓는 모험이었다.

"기다리셨죠."
그녀가 쟁반에 황새냉이 차와 귤을 내왔다. 귤...선생님의 소일거리 중 하나는 고구마를 굽고, 푸대기에서 차가운 귤을 한 바가지 꺼내와 책을 읽으며 보는 것이었다. 그녀도 선생이 앉은 흔들의자 옆 카우치에서 웅크린 채 귤을 까먹으며 군고구마 껍질을 까고 있었겠지. 그리고 다 먹고 나면 귤 껍질을 한데 모아 말려 차를 끓였겠지. 나는 조용히 그녀가 내온 귤을 마치 생채기 내면 안되는 소중한 것처럼 천천히 껍질을 까, 반절 나눠 그녀에게 건내고 나머지는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녀는 조용히 한 알 한 알 떼어 먹었다.

"양을 쫓는 모험 말야." 양을 쫓는 모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녀가 마치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꽤나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말야."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내 말을 이었다.
"네. 아끼는 책이라서 선생님에게조차 선생님 스타일대로 못 읽도록 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웃음을 터트리곤 노르웨이의 숲이 꽂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그러면 노르웨이의 숲도 못 읽었겠네?"
"네. 다른 출판본은 읽었는데 한정판은 아직…."
"읽어도 좋아.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에 내가 전세낸 건 아니니까."
그녀는 같은 내용이지만 조금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고, 문장의 좁음과 글씨의 크기와 한 페이지에 있는 문장의 흐름과 페이지로 인한 짤림을 볼 생각에 설레하는 눈빛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느냐 하면, 내가 그랬으니까. 그녀도, 선생님의 제자이므로.
"아, 죄송해요. 어, 하려던 말로 돌아갈게요."
그녀는 갑자기 손사래를 치며 내게 사과를 했다. 역시,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소녀는 소녀인 것 같다. 그깟 책 하나에 신나하고 있었나보다.

…그깟이라고 하기에는 나도 저랬었으니까 할 말은 없다.

"아침이었어요. 저는 방에서 일어나 눈을 부비며 선생님이 어디 계신지 둘러보았죠. 선생님은 흔들의자에 앉아 커다란 화첩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시면서 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깬 걸 보시곤 잠시 책을 덮고, 같이 아침을 먹었죠. 제가 설거지를 할 동안 선생님은 다시 서재로 가셔선 한참동안이나 같은 장章을 보고 계셨어요. 그러더니 옷을 두껍게 차려 입으시며 제게도 잠시 밖으로 나가자고 하셨죠. 그렇게 저희는 현관으로 나가, 선생님은 서서 담배를 피시고, 저는 계단에 앉아 있었어요. 담배를 피우시는 걸 아마 며칠만에 본 것 같아요."
담배를 피우시며 감정에 젖어 계셨을 선생님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살짝 미간을 찌뿌린 채, 모든 감각. 불어오는 바람, 시야에 보이는 것들, 바람 소리, 차가움. 담배를 피우실 때에는 모든 걸 한 번에 느끼시려고 하셨다. 나도 어쩌면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더니 제게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기다려라. 황새냉이 차를 우려 놓고. 라고 하시며, 담배를 끄시고, 눈밭을 향해 걸어 나가셨죠. 저는 선생님을 말리고 싶었지만, 뭔가, 뭔가…." 그렇게 그녀는 말 중간에 울먹이다가, 기어코 울음을 참지 못해 끅끅거리며 울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울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창 밖을 내다보며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담배 생각이 났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차가 식을 때까지 울었다. 우습게도, 관운장의 고사古事가 생각났다. 차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 붙이기에 진부한 문장이지만, 슬프게도 선생님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황새냉이의 꽃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무치는 그리움, 그대에게 바친다.
황새냉이의 꽃말이었다.                                                                                            


2



                           20141006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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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遠 - 1

작품/소설 2014. 10. 21. 01:03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슈?"

"예?"
옆 자리에 앉아있던 문화부 박윤수 기자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그저 당황 그 이상의 것이 얹어진 마냥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오늘 뭔가 발표하실게 있다던 갑자기 서남書襤 박사님이 잠적하셨잖우. 이유가 뭔 것 같은지……."
"정말입니까? 최근 연락해본지는 좀 되었습니다. 게다가 서남 선생님 계시는 인제에 눈이 많이 오고 있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지금 저-어기 떠들고 계시는 학회장님이 빨리 입 닫기만을 바라고 있겠구먼."
그가 아무 것도 비춰지지 않고 있는 프로젝터 스크린 앞에 서서 마무리 멘트를 하고 있는 침심沈心 문학연구회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그 앞에 두 줄로 늘어서 있는 책상 그 맨 끝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계속 그의 입술과, 등 뒤에 있는 출구를 번갈아 의식하며 초침의 움직임 한 번 한 번을 신경쓰고 있었다. 목이 말라왔다.

"……그러면 이제, 서남 선생님이 불참하신지 두 시간이 지났으므로 일단 여기서 마칩니다."
협회장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나는 자리를 박차고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계단을 두 계단 세 계단 씩 성큼성큼 뛰어 내려가다시피 하며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가 자가용의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인제군에 다다르기도 전에, 눈송이는 저번에 서남 선생님을 찾아 뵈었을 때보다 더 굵고 빼곡하게 하늘을 메우며 지상으로 강하降下하고 있었다. 초조하게 핸들을 잡은 손의 손가락을 툭 툭 굴리며 신호를 기다리던 즈음, 휴대전화가 울렸다. 운전 중이라는 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몇 일간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사람이 물을 본 듯 날렵하고 간곡하게 전화를 조수석 시트 위에서 낚아채 받았다. 인제 백병원이라는 다섯 글자가 귀에 스쳐 지나갔고, 나는 빨간불과 눈이 쌓인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핸들을 직각으로 틀었다.

"지하 1층으로 가시면 되요."
간호사의 말을 듣자 마자 곧장 안내데스크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21F. 간호사에게 선생님의 성함을 말하자마자 나온 번호. 방금 전에 실려오신 모양인지 간호사가 곧장 알려주었고, 나는 그 번호의 병상을 찾아 응급실 내부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21A……E……F.

F에 시선이 멈춘 순간, 어디선가 멀고도 가까운, 누군가가 떠나는 걸 남겨진 이들이 모두 슬퍼하는 울음 소리가 들렸고, 시선을 침상 번호에서 서서히 침상쪽으로 내리자, 익숙하지만 아주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한 노인과 그의 오른쪽에 그의 손을 붙잡고 애써 소리 죽여 울다 끝내 터져나오는 울음에 몸을 맡긴 한 아가씨가 보였다. 沈心. 마음에 잠겨라. 네가 느끼는 모든 것들에 잠겨 들어가라. 그것이 곧 너이고 그것이 곧 네 글이다.

내게 그렇게 가르치셨던, 글밖에 모르던 어떤 위대한 청년 소설가는 늙은 얼굴로 병상에 누워 심박 측정기의 이묘異妙한 곡소리와 함께 세상을 떠나셨다. 의사 말로는 심각한 동상과 저체온증이란다. 나는 텔레비전이나 소설에서 어째서 살리지 못했느냐고 의사의 멱살을 잡는 유가족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지인 분들의 의견에 따라, 자식이 없는 선생님의 장례식의 상주가 되어 삼 일간 식을 치르고, 육신에 얽매이지 않고 죽고 나면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 궁금하다. 라고 하신 말씀처럼 굴레를 벗겨드리고 나서 마지막까지 선생님 곁에 있던 아가씨와 단 둘이서 선생님이 평소 좋아 하셨던, 탁 트인 전경이 내다 보이는 전망 좋은 산등성이의 절벽 부근에 선생님의 유골을 묻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있었다. 내가 눈이 쌓여 곧 얼어붙을 땅을 삽으로 파려 할 때, 그녀는 아주 조용하고 나지막한 움직임으로 눈밭 위에 꿇어 앉고는 잠시 나를 올려다 보더니 세수를 할 때처럼 두 손을 정성스레 모아 눈을 뜨고, 옆에 붓고. 뜨고, 붓고를 반복했다. 나는 잠깐 입을 열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눈을 퍼낸 손이 창백해졌을 뿐, 떨지도 않고 삼십 분 동안 눈과 땅을 파내어 선생님을 묻었다. 그리고 걸어 내려왔다. 나는 왠지 '일을 마친 일꾼처럼' 삽을 들거나 메고 내려가는 것이 탐탁치 않아서 그냥 어디 한 구석에 버리고, 먼저 내려가기 시작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내 차의 조수석에 오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이 묻힌 곳을 의식하면서 운전을 하다가, 어느새 멀어져 갈 즈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서남 선생님과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될까요."
그녀는 조용히 손을 살며시 깍지 낀 채 배 위에 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몇 분간 말이 없었다. 조용했다. 가을에 이미 모든 곡식을 수확한 논에 수북이 쌓인 눈. 광활한 들판과 눈을 덮어 쓴 눈꽃가지들과 나무들. 선생님의 죽음. 몇십 년은 어긋나있는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 이질감 속에서, 황량한 감정과 텅 비어 있는 눈의 사막을 보며 달리며 나 자신의 존재감마저 내 머릿 속에서 잊혀갈 즈음, 그녀가 나지막히, 소리가 발發하고 나서 얼마 후 알아들을 수 있을 그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자…에요."


1


나는 왠지 모르게 그녀가 그러고 싶어하는 것 같아 선생이 살던 산 속의 집으로 차를 돌렸다. 산 깊숙한 곳으로 차를 끌고 올라가면 울타리도 없고 근처에 아무런 나무도 없는, 마치 산 정상과 같이 느껴지는. 산이라기보다는 오름의 꼭대기에 집을 지은 듯한 곳으로. 나는 멀찍히 차를 대놓고 시동을 끈 다음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선생의 집 주변의 눈밭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저 곳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선생님이 그 폭설 속에서 깊은 발걸음으로 헤쳐나가다 쓰러진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는 출발했을 때와 같은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오르락 내리락하는 작은 가슴팍만이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안전벨트를 풀고, 조용히, 나비와 같이 신중하다기보단 조용한 움직임으로 차 문을 열고 눈을 밟았다. 뽀드득하며 그녀의 신발 밑창 아래에서 눈송이들이 우그러들다가 부수어졌다. 나도 그녀를 따라 차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잠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저만치에 있는 선생님의 통나무집을 내다 보았다. 꽤나 멋지게 지어진 집이었다. 눈이 수북히 쌓인 지붕이 보였다. 그녀는 걸음을 옮겼고, 나는 잠깐 뛰어나가 그녀의 앞에서 그녀가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발자국을 남기며 눈을 헤쳐나갔다. 그녀는 아무도 없다는 듯, 내 뒤를 따르기보다는 그저 그녀의 페이스대로 집으로 걸어갔다.

서남 선생님은 절대로 집 문을 잠그지 않았었다. 잠금장치를 안에서 열고, 밖에서 열쇠를 잠그고.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생략될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를 느끼고 싶으셨던 분이었다. 내게 글을 가르치고, 지금의 내가 있게 해준 분. 그런 분의 제자. 나는 문 앞에 서서 그녀가 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간 비어 있던 탓인지 집 안은 바깥과 다름없이 쌀쌀했다. 나는 평소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나있는 거실의 커다란 창문 옆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따라 들어와 현관문 바로 옆의 벽난로에 파이어스타터로 불을 지피고 구석에 쌓여 있던 통나무 두 조각을 가져와 불을 먹인 다음 세 조각을 더 넣었다. 그리고나서 벽난로가 있는 벽을 따라 걸어가다 오른쪽의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끓였다.

선생이 마시던 둥굴레차는 뒷맛이 달달하지가 않아서 좋았다.                                                                                                20141003 0245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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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한 방울의 눈물이 되던 날

작품/소설 2014. 1. 1. 05:34

언젠가 세상에 이런 말이 던져진 적이 있다. 아주 먼, 머나먼 미래지만, 태양계의 주축이자 수많은 생명을 지구에 잉태시킨 태양이 활동을 멈춘다고. 하지만 너무나도 먼,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의 거리 너머에 놓인 미래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역사적인 날. 태양이 서서히 쪼그라들다 한 방울의 눈물로서 화하는 어찌 표현 해야할지 모를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이 날 이 풍경을 바라볼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태양은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다. 여태까지 늙어왔듯이 일정한 속도로,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죽어가고 있었다. 마치 경험 많은 마라토너처럼 꾸준하게, 천천히 페이스를 유지하며 그 순간, 그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지구 위에는 그 전에 있었던 문명들의 잿더미가 아직까지도 마저 다 깎여나가지 않아 수북이 쌓여 있다. 산과 들과 바다의 굴곡을 이루며 잠시나마 온전한 대자연 그 자체로 보일 정도로 너무나도 오랫동안 녹아들어 자연스러웠다.

 

햇빛은 해가 뜨건 지건 항상 노을빛이었고, 주홍빛으로 물든 산의 능선과, 저 너머 지평선에는 그렇게까지 찬란하게 빛나지 못하는 태양의 빛을 부드럽게 흩뿌려주는 여러 금속들이 쌓여 우그러들고 있다. 서서히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크기가 예전만치 못한 그 작은 태양은 마치 가을 날씨 마냥의 온도를 지구에 흩뿌리고 있었다. 나무들은 이미 몇몇 고목을 제하곤 절멸했고, 그 때문에 몇몇 텅 빈 황야와 사막에 덩그러니 서있는, 외로운 모냥으로 뻗어나가고 우그러든 고목들의 위로 그 오렌지 비취빛 노을이 비칠 때.

 

셀 수 없는 떠오름과 짐이 반복되었고, 서서히 그 약속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일부, 감성이 풍부하였던 이들의 준비물. 단 한번의 리허설도 있을 수 없는, 여타 피날레와는 달리 아주 방대하고 손아귀로 움켜쥘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사건. 어머니를 위한 피날레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양은 서서히 희옇게 변해갔다. 부플어오르는 정도는 서서히 커져갔고 시간도 빨리 흘러갔다. 호스티스 병상에 누워 창가의 햇빛을 바라보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말기 환자처럼.

 

 

하염없이 스쳐 지나가는 광경이 생경하여 다시금 알아차리고 난 뒤에 생각해보았다. 그 순간은 바로 내일로 다가와있었다. 수많은 카세트 테이프가 기관총의 총알처럼 끼워진 채 늘어져 있는 구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무사히 그 높은 쓰레기의 산에서 넘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쓰레기가 우그러들며 무너지며 감춰져 있던 몇몇이 드러났고, 애초부터 정상에 서서 태양을 바라보고 있던 고참들은 말 없이 신참들을 환영하며 그 날의 다가옴을 알렸다. 수많은 명화들과, 쓰리디 입체 이미지 상영기와, 수많은 책들의 산도 드러났다.

 

어찌보면,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어머니 태양의 임종을 잊어버리진 않았나보다.

 

 

 

문득, 너무나도 슬픈 햇빛이 살며시 일어나기에 바라보았다.

빛은 엄청나게 진한 오후의 것과 다름 없었고, 태양은 서서히, 마지막 등산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태양은 너무나도 거대하였지만 빛은 그렇지 아니했고, 그렇기에 마치 지구에 마지막 포옹을 하려는 것처럼 태양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듯 보였다. 빛이 서서히 지평선으로부터 올라왔고, 그 순간, 모든 라디오가. 덕지덕지 먼지가 쌓여있는 책들과 명화들과 상영기의 산 위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범위 안에서, 마지막 어머니의 일주를 응원하고 있다.

 

임종 직전 녹음하여 중간중간 거센 기침이 콜록이는 배철수의 DJ 멘트와 그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하는 롤링 스톤스의 Satisfaction이 살며시 지지직거리며 나오고 있었고, 수많은 상처입고 찌그러지고 군데군데 낡은 옛 백색 가로등들이 점멸하여 책들과 명화들을 비춰주고 있었다. 영사기에서는 인류가 이룩한 모든 영상매체들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나올 즈음에는 태양이 정오까지의 등정을 절반쯤 마친 상태였다.

 

수많은 에술인들의 한마디씩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태양의 임종 날짜를 알지 못해 준비하지 못한 이들도 문명의 도움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과 스케치는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며 밑자락을 찰랑였고, 베토벤과 모짜르트 등의 교향곡은 위에만 먼지가 쌓인 레코드 플레이어로 전 지구에서 동시에 웅장하고 아름답게 울려나오고 있다. 어머니에게 들릴까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언제나 그랬듯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으며, 헤밍웨이와 도데와 포와 그 외 수많은 책 속의 작가들은 그들의 책 페이지로나마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봄에 감사하듯 미풍에 천천히 펄럭이며 한 장 한 장 넘어가고 있다. 희미하게 설국이라 보이는 책의 주변엔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마치 눈보라처럼 책을 에두르고 있었고, 오웰은 왠지 모르게 슬퍼하는 듯 이따금 페이지를 멈춘다. 수많은 춤과 희극과 오페라들이 영사기를 통해 지나갔다. 피에타는 지는 태양을 향해 세워져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햇빛을 받는 예수의 얼굴에는 그늘이 지지 않았다. 피에타에만은 가로등이 켜있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런 예수를, 혹은 태양을 안고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머릿자락만이 지평선 너머로 보일 때. 마침맞게 지구와 머나먼 태양의 크기가 겹쳐졌고, 그렇게 모든 라디오가 서서히 지지직거리며 멈추었다. 어머니는, 기침을 한 번 크게 하시더니 적막함 속에 크게 팽창했다 그 반동으로 한없이 우그러드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 방울의 눈물이 되셨고, 칠흑같은 암흑 사이로 달과 별의 빛이 비치는 라디오에서는 그저 주인 모를 안녕 인사만이 나오고 있었다.

 

산 그 자체이거나 위에 놓여있던 인간의, 지구의 모든 것들은 거의 영원에 가까웠던 기다림을 끝내고 피날레에 만족한 듯 서서히 무너졌다. 비록 그 누구도 기억하거나 보지 못했을지라도.

 

 

 

 

Fin

 

 

 

 

 

 

 

 

The Day Sun becomes like a single drop of tear

 

2014 01 01

05 33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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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冬寒

작품/소설 2013. 12. 4. 04:34

찬 바람이 분다. 어느새 허여렇게 폐부에 스민 찬 바람은 어느 덧 젖어들어 따스한 몸을 부르르 떤다. 한사코 말려도 갈 것이고 오라고 재촉하여도 오지 않을 그런 것. 계절이 바뀌었다. 어느새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바깥바람은 쌀쌀하기 그지 없었다. 창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가 이불을 덮어 쓰며 리모컨을 이리저리 꾹꾹 눌러대며 채널을 돌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뉴스는 난장판이었고, 사놓은 귤은 거의 다 먹어서 심심할 때 요깃거리도 없었다. 계속 리모컨을 꾹꾹대다가 그만두고, 베란다로 나갔다.

 

바깥은 그저 새하얀 커버를 둘러쓴 듯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고 아무 것도 비쳐오지 않았다. 그저 하이얀 싸늘함 그대로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지구본이 놓인 책상 앞에 앉아 계속 그것을 돌리고 있는 마냥, 바깥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려는지 바람은 아무런 찰기 없이 싸늘했고, 오지 않으려는지 햇빛은 쨍쨍했다. 눈이 녹는지 그대로 굳어있을른지 알지 못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이얗게 새어나가는 입김의 살결을 헤아려보려는 듯 시선은 멀었고, 마음은 그저 비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나도 몰랐다. 그저 저기 어딘가에, 헤아림의 바깥, 어딘가에 두고 온 것만 같은 머나먼 것이 생각났고, 기억났고, 그리워졌다. 아무런 연고가 닿지 않을지라도 왠지 모르게 그러했다.

 

문명 사회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립된 무인도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나먼 것에 있는 것에 손을 뻗을진데 나는 그에 발끝만치도 닿지 못했다. 멀었다. 허공으로 사라져가는 내 숨결의 살결을 좇으려는 것 만큼이나 멀었고, 가느다랗고, 희였다. 지구본을 한없이 돌리다보면 멈춘 그 지점, 대서양이든 태평양이든 그 한 가운데에 마치 뭔가 지표라도 솟아나올 것처럼 그렇게 계속 이어나갔다. 돌리고 또 돌렸다. 돌리는 손짓과 돌아가는 그 지구본이 따로가 아닌 하나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해서 돌렸다. 스쳐가는 선과 점과 대륙이 검은 곡선과 색깔들로 보일 때까지.

 

멀다. 너무나도 멀다. 어딘가로 가야만 어디로든지 가까워질 것이 분명한데, 그렇지조차 않다. 나는 여기에 있고, 그건 저 곳에 있다. 서로 멈춰선 채 마치 팽팽한 전화선이 연결된 양끝자락처럼 미동조차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가선 안된다고 말하는 듯 하다. 양립한다. 가야한다는 마음과, 왠지 모를 주저와 불안과 안주와 체념이. 어쩌면 서로의 거리는 거기까지가 최근인지도 모른다…….

 

어디까지일까. 언제까지일까. 내 손등으로부터 팔, 팔꿈치를 지나 어깨, 목을 타고 올라가 머리. 거기까지의 살결을 헤아려본다. 무궁하고 무진하다. 그것들을 모두 하나하나 핀셋으로 집어 헤아려놓고 자, 여기 있습니다. 할 때까지일까? 별들이 다 떨어져 땅에 박히고 그 별들의 조각 하나씩을 모아 목걸이를 만들어 저 높은 달에 내걸어놓고 깊은 잠에 빠져들 때까지일까? 영원히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를 헤엄치다 지쳐 빠져 죽기 직전에 저 멀리 하느다랗게 보이는 육지의 끝자락을 눈물지으며 닿고자 할 때까지일까?

 

언제까지고 어디까지고 항상 해온 말이지만, 마치 겨울에 눈이 내리듯. 가을에 마치 살갗에 닿는 바람이 아닌 내 마음에 부는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봄에 항상 꽃들이 살갑게 피워오르듯. 그렇게, 언제까지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일까.

 

족쇄채워진 겨울맡의 지나온 발자국을 뒤돌아본다. 항상 그렇게, 눈은 언제고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지워 흐릿하게 했고, 나는 항상 내가 제자리임을 느끼고 뼈저리게 울었다. 겨울눈이 내리고, 봄눈이 녹을 때까지.

끌어안을 것도 없이 나 스스로의 양어깨를 끌어안고 움츠러든 채 등줄기에 내리는 싸락눈을 쉴 새 없이 맞는 것은 크나큰 고역이었다.

 

 

 

2013 12 04

04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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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葬

작품/소설 2013. 11. 23. 04:03

어느 날이었다. 펜을 받치는 오른 손 중지 언저리에 물집이 잡혀 펜을 잡을 때마다 찌릿거려 거슬리던 터였다. 항상 내게는 그랬듯, 사소한데서부터 평상시 밀려있던 안좋은 일들이 몰려오려는 듯 싶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펜을 멈추고 손을 내밀어 수화기를 들었다. 혹시나였고, 역시나였다. 닿지도 않았는데도 중지 아래 물집이 짓눌린 듯 아렸다.

 

오랜만에 본 녀석은 옛날과 변한 게 없었다. 이상했다. 응당 변했어야 마땅할 시간을 사이에 두고 만난 것일 진데 그렇지가 않았다. 문득 콧구멍으로 냄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육개장의 고춧기름 냄새. 온갖 떡의 고물이 너풀거리는 마냥 살며시 흩어져 섞인, 편육의 기름내와 새우젓의 비릿한 냄새.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신발을 벗은 내 두 발이 딛고 서있는 자리를 내려다봤다. 공산품이었지만, 지푸라기로 엮인 자리였다. 마지막으로, 저 멀리 처져 숨을 헐떡이는 후발주자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향내가 목마른 칼칼함을 치겨들고 콧속부터 내게 스미어왔다.

 

이미 염을 했었다고 한다. 나는 문득 그렇지 않음을 알지만, 경황이 없어 인편이 늦었음을 알지만 내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 너는 이 녀석이 염되고 나서 불릴 정도로 먼 사람이었는가?

 

이상하게도, 딱 떨어지는 부정이 뒤이어지진 않았다.

 

자리에 앉아 잠시 단을 바라봤다. 식장에 와서 몇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녀석에게 향을 지피지 않았다. 그저 서 있다가, 부조금을 넣은 봉투를 건네고, 짧은 말로 이름과 연락처를 말하고, 그제서야 아무 자리에나 앉아 옆에 있는 주방 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다들 바쁜 모양이지만, 기분 묘하게도 그 누구도, 어떤 아줌마도 내 앞에 편육 한 접시 놓고 가질 않았다.

 

문상객이 그리 많진 않았다. 반의반쯤 차있었다. 오후 여섯시 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드러내어 슬퍼하는 사람도 없는, 중간경계의 시간이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미소 지었다. 어째서인지 무르팍을 움켜잡은 손을 힘주었는지 모른다. 그제서야 한 상 차려져 왔고, 나는 묵묵히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접시의 랩을 뜯고 소주를 까 잔에 따랐다. 그리곤 마음속으로 말했다. 잔을 치켜들고서, 그 녀석을 향하고는.

 

건배. 네 안타까운 죽음에. 네가 뺏어간 그녀의 숨결에 애도의. 지금에 와서야 아무런 감정으로도 정리되지 않은 너의 면상을 목도하게 된 가련한 나에게. 그리고, 내가 네게 주먹을 휘둘러도 닿을 수 없음에 너의 행운에. 건배.

 

으레 그렇듯 피부 바깥이 쓸수록 넘어가는 술은 달았다. 미쳐버릴 것 같이 달았다.

 

탁.
편육 위에 새우젓과 김치 쪼가리를 올려 집으려던 찰나, 내 앞에 소줏잔이 상에 부딪는 소리가 났다. 검게 물들이인, 소매가 넓은 상복을 입은 한 여자였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목소리는 깊은 목마름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잘 여며졌던 듯, 살짝 느슨해진 매듭이 눈길을 끌었다. 거칠은, 옛것의 상복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핀을 꽂아 드러난 왼쪽 귀맡을 대충 쓸어 넘기곤 오른손에 잡고 있던 잔을 내밀었다. 나는 대충 두 손으로 따랐고, 그녀는 잔이 반 쯤 차오를 때까지 어디론가 보내놓은 넋을 부르지 않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넋이 돌아온 듯 상 아래에 내렸던 팔을 들어 두 손으로 받고는 내 눈치를 살짝 보았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줌마를 불러 육개장과 밥을 달라 했다. 그녀는, 괜찮다는 것인지 자기가 움직이겠다는 것인지 모를 손사래를 치다 단념했다. 김이 피어오르는 국물이 놓였고, 그녀는 잠시 속으로 숨을 삼킨 듯 멈칫하곤 잔을 들어 내게 살짝 내밀더니 그대로 들이키곤 국그릇을 들어 마셨다. 나는 재빨리 잔을 들어 맞배하곤 그녀를 바라보며 잔을 비웠다. 목구멍에 국물 넘어가는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 듯 했다.

 

쓰네요. 다른 의미라곤 없는, 적확한 말이었다. 그녀는 내 있지도 않은 시선이라곤 개의치 않고 밥을 퍼 국에 말곤 먹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자작하다가, 그녀 앞의 김치 그릇에 기름이 적은 수육 한 조각을 집어놓았다. 그녀는 숟가락에 밥을 뜬 채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놓곤 잔을 내밀었다. 나는 밑바닥까지 따라 간신히 찰랑였고, 그녀는 그 수육으로 그 잔을 비웠다.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한산했다.

 

친구인가요?
네. 그쪽은, 들었던 적이 있는데. 여동생 분이신지.
그녀는 귀맡을 쓸어 넘기곤 잠시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옆으로 쓸었다. 꽤나 예쁜 이마를 갖고 있었다.
네. 뭐, 오빠가 제 얘기를 다 하다니 뜻밖인걸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상 배다른 여동생이나 다름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나도 그 녀석이 왜 그랬는지는 이해가 가질 않아서였다. 자기가 받은 핏줄인 아버지조차 얘기를 꺼리는 놈이었으니.

 

여튼,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시잖아요? 저희 오빠란 사람은 뭐든지. 적지도 많지도 않은걸.
문상객조차도요. 라고 덧붙이진 않았다. 뭐,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가족인 여동생의 입에서, 그것도 상중에 나올 정도로 딱히 켕기는 점 없이 완벽하게도. 나는 그저 소주를 한 병 더 비틀어 열었다. 넌지시 눈빛으로 물어봤고,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손을 어깨 맡으로 올려 엄지로 등 뒤의 단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작했다.

 

아, 그리고 내일부턴 낮춰서 줘요. 두 손으로 받는 게 귀찮기도 하고.
내일? 나는 씹고 있던 인절미를 마저 씹어 삼키곤 물었다.
내일도 굳이 와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싫음 말고요. 오지 않을 이유도 있진 않잖아요?
잠시 머릿속으로 스케쥴을 떠올렸다. 그녀 말 대로였다. 하지만, 오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영정 사진을 볼 때마다, 그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어른거렸다. 둘이서 카메라에 꽤나 가깝게 찍힌 스티커 사진. 아무런 감흥 없이, 오랫동안 메말라 사이사이에 나락을 품은 듯 갈라진 논밭을 보는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슬픔도, 분노도, 허망함도 아니었다. 구역질이 났다. 밖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역겨워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숨이 붙어있을 때에 절대 보지도 만나지도 않겠다는 그 씹어뱉었던 다짐을 기한연장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잠시 나와 내 시선의 끝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팔을 올려 턱을 괴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라도 우광쾅 내려줬으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속을 폭풍우가 몰아치며 온갖 것을 휘젓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해당될지 몰랐다. 비록 그다지 슬프지 않은 혈육의 죽음일 것 같지만.

 

담배좀 피고 오겠다 하곤 구두를 신었다. 한쪽만 열린 창가엔 물에 꽁초가 담긴 종이컵이 놓여있었다. 그 앞에 서서 우중충하게 물들어 곧 뉘울, 햇빛인지 달빛인지 모를 빛을 받으며 불을 붙였다. 스몄다. 비웠다. 채웠다.

 

털었다…….

 

한 번, 깊게 타들었다. 그녀는 그 녀석과 삼 년을 사귀었다. 그녀는 스물넷이었고, 그는 다섯이었다. 한 살 차이는 곧 동갑이었다. 사귀기 한 달 전, 그녀가 갓 입학했을 때, 나와 그녀를 아는 사람은 우리가 진작부터 사귀는 줄 알았었고, 나는 그 추측을 진짜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정이 있어 가지 못한 MT 첫날, 밤 열두시에 걸려온 전화에서 그녀의 술 취한 목소리와 마지막, 그 녀석의 걱정마라는 말을 듣고 전화기를 벽에 던지지도 않고, 그저 무릎이 으스러지라고 꽉 쥐었을 뿐임에 화가 났다. 아마도, 아니, 확실히. 그녀의 처녀막은 그 새끼에게 찢겼다. 그리고서부터 나는 그 녀석을 멀리했다. 단 두 가지 생각에서부터였다. 반절이 탔다. 컵에 버리곤 하나 꺼냈다. 그 녀석의 면상을 보고 있자면 그 날, 취해있었을 그녀의 이빨 사이로 수작을 부렸을 그 새끼의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 그녀는 그 새끼와 사귀게 된 건지, 어떻게 그 자식을 좋아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머리가 아팠다. 내가 그를 멀리하려했음에도 그는 내가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여서인지 자꾸만 가까워지려 했다. 깊게 한 숨 빨았다. 찬 것 같지도 않았다. 밤은 점점 선명해져가 파고들었다.

 

……이윽고 나는 바깥에서마냥 불을 밟아 껐다. 보는 사람은 없었다. 대소에 관계없이, 무엇인가의 조재를 부수지 않고선 생각이 멈출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 존재는 참으로 소박하게도, 관짝 안에 누워있는, 배때지가 휑댕그레 비어있는 녀석의 골통이나 다른 것이 아닌. 피다 만 담배꽁초 하나였다…….

 

사실 그렇게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당연히 자기 것일 줄 알았던 것을 뺏긴 아이는 처음엔 울다가, 지쳐 잠들고, 이윽고 그 당연함이 새 주인에게 옮겨갔겠거니 하곤 수긍한다. 하려 한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수긍하게 된 자신을 보게 된다. 구두를 벗었다. 그녀는 안즉 앉아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그녀 앞에 가 앉았다. 그녀는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기분 좋게 알딸딸한 마냥 몸이 앞뒤로 일렁이고 있었다. 졸고 있는 성 싶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깨워 들어가 자게 할지, 아니면 깨지 않도록 일어나 내일 다시 올지를 고민했다. 잠시뿐이었고, 나는 그녀의 빈 잔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라낸 다음 일어났다. 신발장으로 가면서, 단을 힐끗 바라보았다. 영정 사진은 무덤덤했다. 나는 장례식의 최후의 최후까지 향을 올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 날 집에 가서 했던 일 중에 기억나는 것이라곤 반 쯤 마시다 변기에 부어버린 맥주와, 뉴스 기사의 토막난 부분부분과, 시리도록 멀리 느껴진 천장 뿐이었다.

 

 

 

다음 날, 느지막히 점심을 먹고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끌며 갔다. 끊임없이 되물었다. 왜 다시 가고 있는 거지? 어떤 이유에서?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내려오고 있는 그것을 기다릴 때, 이유를 찾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무 이유 없는 게 이유였다. 나는 씁쓸함을 다시며 3층을 눌렀다. 문이 닫혔다. 거울은 무한히 연속해있었다. 그 끝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이에도 무엇이 있을런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녀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상 앞에 앉아 작은 조각으로 잘리어 나온 오렌지를 한 손으로 집어 입에 넣으며 발라먹고 있었다. 단 왼쪽, 문이 열리며 약간 붕 뜬 머리를 한 그녀가 걸어 나왔다. 하품을 자그맣게 하더니, 버릇인 듯 귀맡을 쓸어넘기곤 아직 졸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내 쪽을 보고도 계속 시선을 돌리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혹은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궁금해졌던 찰나, 그녀가 내 앞에 천천히 다가와 앉았다. 잠시 멀뚱멀뚱 내 뒤 어딘가를 바라보다, 두 번째 하품을 하곤 말했다.

 

머리 많이 떴어요?
나는 잠시 대답들을 쏟아냈다.
상중인 여자는 항상 붕 뜬 머리를 하고 있어야 예의일 것 같은 정도로만.
뭐예요, 그게.
그녀는 피식 웃더니 묶지 않은 뒷머리를 양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리곤 잠시 나를 바라봤다.
몇 살이게요.
글쎄. 술 마신 다음날 늦게 일어나 세수를 했을 때 그렇게 물어보긴 했어. 스스로한테.

한두 살은 더 먹어 보이는데요, 어제보다.
떡국 곱하기 이는 소주 한 병. Q.E.D. 고마워, 조수.
뭘요, 박사님.
내가 농담하는 내색조차 않자 그녀는 오히려 자그맣지만 깊게 웃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턱을 괴곤 내게 되물었다.

 

정말로 몇 살이게요?
어찌 대답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는 척 했다가 대답했다.
스물 하나. 일부러 틀려보았다.
영계 좋아하시는구나?
이번엔 정말로 난감해져 내 표정이 어떤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잠시 웃더니 말했다.

아무 이유도 없는데 왔으니 수고비를 드릴게요.
무슨 이유에서?
그녀는 맨손으로 인절미 하나를 집어먹곤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무 이유 없어요.
노란 떡고물이 입술 근처에서 반들거렸다.

 

흐름은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부자연스러움과 당연함 사이에 연관성을 찾기란 힘들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당연함은 확고히 다가오려 했다. 당면한 당연함의 무게에 섬짓 발뺌할 새도 없이, 아니, 오히려 내가 당연함을 밀치며 벗기고 만지고 주물렀다. 그러면서 그가 죽은 이틀 후 그의 여동생을 안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답은 없었다. 서로 왠지 몰랐다. 만난 지 하루만에, 무슨 당위성이 내포되어 있어 몸을 섞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만큼이나 새하얘서 아무 것도 건져 올릴 것이 없었다. 그 무가치함을 우리는 서로의 몸에서 찾으려는 듯, 혹은 보상받으려는 듯 서로를 가졌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반반이 되었다. 누런 시트 위로 땀방울이 굴렀다. 만난 지 하루만에, 나는 녀석의 여동생의 처녀막을 찢었다.

 

모르겠다. 그녀를 안고 있는 지금 마음은 오히려 차분히 지금과 먼 어떠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느낄 수 있었다. 몸과는. 열기와는 거리가 먼 것을 몸으로 읽어낸다는 게 퍽 우스워 웃었다. 그녀가 움찔해왔다.

 

그녀를 안으며. 그녀가 타고 있었던 에스엠 파이브가 생각났다. 반파되어 있었다. 휀다부터 뒷좌석 도어까지. 프레임이 으스러져 있었다. 다이아몬드 크러쉬였다.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그녀의 죽음과 그의 생존의 흔적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속으로 내가 아는 식은 지식만을 되뇌일 뿐이었던 나 자신이 기억났다. 으스러진 뼈. 얼굴. 기름이 섞인 핏방울. 상처라도 없이 살아있었다면 차라리 신을 원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았다. 허벅지 아래로 아작난 그의 왼쪽 다리와 으깨진 왼손의 깁스를 뜯어 발겨버리고 싶은 마음을 씻어 흘리고 나는 병실을 나서 영안실로 갔다. 그는 나를 따라가지 그 곳에 가지 못하는 것에 슬퍼했다. 그리고나서 그 곳에서 그를 본 게 전부다. 숨이 차올랐다.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내 몸이 보기엔 이게 내 머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 같았고 내 머리가 보기엔 내 몸이 그러했다. 그녀가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알듯이 나 또한 그랬다.

 

그녀의 뒷태가 보였다. 앞으로 머리칼이 넘겨져, 가녀린, 쥐기만 해도 부수어질 마냥 얇고 고고한 목 뒷부분이 보였다. 나는 문득 살의를 느꼈다. 그녀에 대한 살의가 아니었다. 그녀의 고고함에 대한 살의였다. 부딪히고 끼어 으스러진 그녀의 상실에 대한 살의였다. 짓부숴버리고 싶어졌다. 그녀와 그녀의 고고함이 비슷하게 닿아옴에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짓눌린 몸 또한 비슷해야 하리라. 나는 그 논리에서 하등 오류를 찾을 수 없었다. 조심스레 감싸쥐었다. 두 손에 뒤에서 앞까지 닿아 닫혔다. 그녀는 잠시 느려졌을 뿐 계속이었다.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작은 가마와 풍성한 머리카락이 보였고, 귀맡의 살짝 튼 피부가 보였다. 매일같이 쓸어 넘기다보니 텄나 싶었다. 아름답게 굽이진 어깨 아래로 어깨뼈와, 살짝 튀나온 등뼈와 허리뼈, 그리고 엉덩이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목은 여전히 그러쥐고 있었다. 그녀가 자세를 바꾸려 하는 게 느껴졌다. 기회는 지금 뿐이라고 그녀가 메아리 질렀다. 지금이 아니면. 그가 내게 찔러오던 날 밤, 접점인 이 시선. 이 자세. 이 구도가 아니면 넌 할 수 없어. 라고 그녀가 되뇌어왔다. 무얼? 내가 묻자, 그녀는 내 뒤에서 내 양팔 위에 팔을 겹치곤 살며시 밀었다. 등에 그녀의 가슴이 닿아왔다.

 

네가 그토록 원하는 것.
그녀는 잠시 쉬고는 내 손에 힘을 주려 했다. 그녀의 목울대가 닿았고, 그녀는 움찔하며 살짝 멈췄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듯 느껴졌다.

 

내 존재.
그리고 손은 내 손이 아니게 됐다.

 

 


담배 연기가 침대 바로 위 환풍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내가 물었다.
……눈이 오겠지?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는 손바닥을 펴 그녀의 어깨부터 등허리까지 살며시 쓸어내렸다. 부드럽고 온기가 있었다. 그녀와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잠시 담배 한 숨의 틈을 두고 다시 물었다.

 

눈이 올테야.

 

그녀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내게 몸을 돌려 밀착해왔다. 춥다는 듯이. 너무 춥다는 듯이 내게 붙어오더니 들릴까 말까 한 크기로 말했다.

 

응.

 

 

End.
13 06 27
00 18-21 [N]

고개를 돌려 곧 얼어붙을 물방울 하나가 굳는걸 보곤 그녀를 끌어안았다. 추웠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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