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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20 無題
- 2014.12.18 그 해 가을 - 上
- 2014.11.10 매장昧葬의 후일담後日談
- 2014.10.25 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2 1
- 2014.10.21 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1 1
- 2014.10.21 切段
- 2014.10.21 雪遠 - 3
- 2014.10.21 雪遠 - 2
- 2014.10.21 雪遠 - 1
글
여느 4월 때와 같은 날씨였다
여느 4월 때와 같은 날씨였다. 봄이면서도 여름이었다. 두 계절 사이에 걸터 앉아 갈까 말까 망설이며 마침내 결심하여 일어나려다 담배 한 대 피고 일어나야지 하고 다시 앉으며 불을 붙인 것만 같은 날씨였다. 긴 소매 옷을 입고 나서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다지 덥진 않구나 하고 빠르게 걷다 스며오는 땀에 소매를 걷어 붙이는 날씨였다. 나뭇가지들만 고요히 쉬고 싶음에도 바람 불어와 손 흔들게 됨에 부산스러울 뿐이었다. 머그잔에 타놓은 커피는 오질나게 달았다. 커피 생각이 나 퇴사 선물로 받아놓은 포트에 물을 받아 끓여 믹스를 세 개 넣고 저었던 것이다. 커피를 한창 마실 때 쓰던 컵이 어디론가 사라져 다른 컵에 양을 대충 넣어 저었던 것이었기에 그 단맛의 진함은 내 불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려 해도 오질나게 달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임에도 여름처럼 내리쬐는 햇빛이 너무나 선명하여 마치 꿈결같이 느껴지듯 단맛도 그러했다.
오랜만에 글이 쓰고 싶어져 서재를 뒤져 CD를 찾아내 이리저리 파일을 찾았다. 제프 백. 스콜피온즈. 사이먼 앤 가펑클. 에릭 클랩튼. 산지 얼마 안되었을 때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것들인데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한 구석에 처박아놓고 듣지 않게 되었던 것들이었다. 현실과 유흥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져 애매모호해졌을 때는 듣는 귀조차 달라지는 모양이다. 봄날에 듣는 옛 노래는 가을에 듣는 것과는 사뭇 맛이 다름에 또 담배에 불을 지폈다. 이 갑에 든 것을 다 피우고 나면 더 이상 남아있는 연초가 없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정해진 그 데드라인이 참 좋았다. 담배가 남아있을 때 최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항상 안일한 자세로 일관하며 오늘이라는 단어는 잊고 내일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던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다. 편집장도 그걸 잘 알고 있었는지 내게 들어오던 담뱃값을 몇 주 전에 끊었던 것일테다. 자의로는 절대 쓰지 못하는 나를 위해 타의로라도 작문을 강제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원고를 받아들고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여느 때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또 이렇게 중얼대리라. 소설을 쓰라고 했지 또 수필을 끄적여놨네. 라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편집을 하고 다듬고 내게 연락을 하며 담뱃값을 보내리라. 그 담뱃값이 끊길 때서야 비로소 난 또 소설이라는 탈을 쓴 수필을 적어 보내리라. 다음 담뱃값이 떨어질 때는 계절이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 알 수 없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려고 담배갑을 열어 제낀 순간 몇 개피 남아있지 않은 담배를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창밖을 내다볼 것이다. 다섯 개피 남았다. 창 밖으로는 여전히 불어오는 바람에 그만 쉬고 싶다고 손사래를 치는 것인지 아니면 바람을 타며 비로소 움직이게 되었음에 기뻐하는 것인지 모를 나뭇가지가 일렁이고 있었다.
소재가 필요했다. 소재는 많았다. 내가 다만 정 붙이지 못할 따름이었다. 여자를 등장시키지 않으면 정을 붙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여자를 등장시킴에 있어 그 여자에게 집착하지 않고 어느 정도 떨어져 거리를 두고 바라봄에 나와 독자의 시선을 똑같은 거리로 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여자의 바로 뒤 또는 옆. 혹은 코 앞에서 바라보며 그 여자를 일일이 뜯어보고 그 여자의 기분이 되어보고 그 여자를 가지고 싶다는 일념 하나 만을 쓰고 있는 어찌 보면 안 될 글쟁이임에도 내 글은 어느정도 팔려 나갔다. 인세는 목공 딱풀로 돌아와 내 입에 칠을 해주었다. 그 끈적끈적함이 나는 좋았다. 몇 번 입술을 붙였다 떼면 사라지는 끈적함의 정도가 나는 좋았다. 항상 끈적끈적하면 신경쓰일 것이었다. 벽에 기대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손 끝에 만져지는 튀어나온 나사못을 이리저리 손으로 굴려보는 그런 잠깐의 어린 장난처럼 한 순간이 좋았다. 그 한 순간에 머물러 있고 영속을 추구하지 못하기에 내 글 또한 그 단발성을 따랐다. 그럼에도 사 읽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이런 글이 뭐가 좋다고 사읽는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담배가 끊어지는 순간 이 몹쓸 몸은 손을 떨 것이고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원고를 써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담뱃진에 쩐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바뀌며 고동치고 있음에도 나 자신은 정지한 채 그저 들어오는 담배 연기에만 움찔대며 천천히 맥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글을 팔아먹을 수 있을까. 담배를 물었다. 세 개피 남았다. 서점에서 책을 집고선 카운터로 다가가 얹은 다음 열 지갑의 대상은 언제라도 나 말고 다른 누군가로 변할 수 있었다. 그 초조함이 좋았다. 타의로부터 발한 그 죄여옴의 느낌이 좋았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CD는 반대로 돌기 시작했다. 제시 쿡의 플라멩코 기타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지 않으며 바람에 춤추는 나뭇가지의 움직임 모양새를 보는 것은 항상 기묘한 느낌을 들게 한다. 나뭇가지를 움직이는 것이 바람이 아니라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이라는 착각은 내가 앉아 있는 세상을 꿈결처럼 느끼게 했다. 항상 약에 취해 사는 것처럼 나를 몽롱하게 만들었고 그 몽롱함의 비영속성에 나는 또 전율하며 웃었다. 하루살이의 세상에 예술과 담배가 있다면 그들도 이렇게 살 것인가 하는 상상을 했다.
담뱃재가 트렁크 팬티 위로 떨어졌다. 입에 문 채 두들기다보면 코로 역류해오는 연기가 좋았다. 이따금 세게 기침을 했다. 그 기침이 좋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어두컴컴하지는 않지만 밝지도 않은 방 안이 좋았다.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가 매번 불규칙하게 어디론가 향하다 이내 눈으로 볼 수 없는 정도로 흩어져 퍼지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제시 쿡이 좋았다. 제프 백이 좋았다. 개리 무어가 좋았다. 다방에 앉아 몇 갑이고 담배를 피울 수 있었고 이따금 돈 없는 음악가가 커피 값 대신 통기타를 두들기던 때가 좋았다. 테이블 위에는 꽁초가 솔방울처럼 꽂힌 재떨이가 있었고 글씨가 뭉게질 때마다 연필을 깎은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담배를 문 채 소파에서 허리를 굽혀 원고지 위에 아무렇게나 글을 쓰고 있으면 옆에 다가와 앉아 관심 어린 눈빛으로 나와 원고지를 번갈아 바라보던 다방 아가씨의 그 표정이 좋았다. 사장은 벚꽃 구경을 하러 가 어수룩한 손짓으로 레코드를 갈아 끼우며 다방 안에 흐르는 고요를 길게 끌어주는 사장 아들의 난감한 표정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어쩌다 비지스를 틀어줄 때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그에게 엄지를 들어 보여줄 때의 그 보람에 찬 듯 웃는 표정도 좋았다. 재떨이에 꽂힌 꽁초는 모두 필터가 자근자근 씹혀 거의 뭉게져 있었다. 나와 같이 필터를 씹으며 담배를 태우길 좋아하던 미스 최가 좋았다. 하룻밤 같이 보내고서 다방에서 매일 같이 앉아 날아드는 날벌레에도 웃으며 즐기던 미스 최는 한 달이 지난 후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 사장 아들은 쌍화탕을 내올 때 꼬깃꼬깃 구겨진 쪽지 하나를 내게 건네주며 계란을 깨트려 타주었다. 쪽지 안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 쪽지를 받고 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도 연락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녀도 연락을 바라고 쪽지를 남긴 것은 아니리라. 나를 너무도 잘 알던 여자였다. 나를 잘 아는 여자는 나와의 이별에도 대부분 묵묵히 그저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달라는 식으로 연락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미스 최, 미스 박, 그리고 어느 불문과 여대생까지 세 명의 여자를 그 다방에서 만났고 이별했다. 만남과 이별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여전히 묵묵히 다방에 가 삼 번 자리에 앉아 원고지를 만지며 연필을 깎고 커피를 마셨다. 그런 날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방에 가던 날에 나는 원고지를 챙기지 않고 그저 소파에 허리를 묻은 채 커피를 마시며 앨런 파슨스의 올드 앤 와이즈를 들었다. 소파에 그렇게 푹 기대어 커피를 마신 것은 거의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기억한다. 사장 아들은 그 새 노련한 다방 주인이 다 되어 있었다. 단골 하나가 이제부터 오지 않으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내 옆에 조금 멀찍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년간 마주치며 말 없이도 대강 서로를 알았던 사장은 병원에 누워있다고 했다. 나는 지갑을 열고 바로 옆 꽃집에서 비싼 꽃은 살 수 없지만 그래도 화분은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사장 아들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사양하지 않고 그 돈을 받았다. 그러고나서 듣고 싶은 음악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딱히 마땅한 음악이 생각나지 않아 잠시 머뭇거리다 딱 한 번만 올드 앤 와이즈를 반복해줄 수 없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레코드 플레이어 앞으로 갔다. 그렇게 올드 앤 와이즈가 다시 흘러나왔다. 항상 꽁초가 수북히 쌓여 처량해보였던 양철 재떨이도 이별했지만서도 그들이 앉던 자리는 항상 비워두었던 미스 최와 미스 박 그리고 그 여대생과의 기억도 이별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받침대에 잔을 내려놓은 다음, 올드 앤 와이즈를 끝까지 듣고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 아들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잠시 쳐다보는 것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할까 했으나 그냥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갔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어느 음악 소리가 내 안을 티스푼을 넣어 커피를 휘저을 때의 맴도는 것처럼 휘돌았다. 올라갈 때마다 그 소리는 선명해졌고, 거의 다 올라가 햇빛이 보일 즈음에야 그 노래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앞 맞은 편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존 레넌의 러브였다. 나는 잠시 다방 밖에 걸터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곤 그저 멀찍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등 뒤에서부터 내리쬐고 있는 태양이 움직이며 내 시야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담배를 태웠다. 음악은 진작에 바뀌었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존 레넌의 러브를 듣고 있었다.
반 갑쯤 들어 있던 담배를 다 태웠을 때, 적어도 미스 최한테는 연락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 존 레넌을 좋아했었던 것이 비로소 생각났다.
2015 05 04 17 24
생각 나면 더 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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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題
도어락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밤 늦은 찬 바람이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것을 느낀 듯, 집 안의 인기척이 부스럭댔다. 그녀였다. 메리야스와 반바지 차림을 하곤 오늘도 묶은 머리를 한 채 아직 구두를 벗고 있던 내 앞으로 다가와 웃었다. 어서 와 라는 그 말에 나는 웃으며 구두를 다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서류 가방을 내려 놓고 끌러 아직 남아있는 잔업을 꺼내 들곤 외투를 벗어 행거에 걸었다. 그리곤 방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컴퓨터 옆 침대 위에 앉아 벽에 기댄 채 들고 왔던 두터운 종이 뭉치를 읽기 시작했다.
안 씻어? 그녀는 커피를 가져와 침대 옆 콘솔에 올려두곤 컴퓨터 앞에 앉아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씻을 시간도 없다는 뜻을 담은 그 말에 그녀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포토샵의 남은 작업을 계속했다. 스웨덴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헝가리라는 단어의 어감이 좋았다. 아주 아름답고 수려한 여자의 이름이 헝가리라면 그녀를 부를 때마다 입 안에 맴도는 헝가리라는 단어의 어감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이 세상 바깥의 느낌을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헝가리어는 알지 못했다. 헝가리어는 내일 다시 가져가 대사관 쪽 지인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다. 번역 일에서 정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향하는 구조 무전이다. 식구가 세 명 뿐인 번역 사무실의 사람들이 모든 언어를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왼손으론 턱을 괸 채 모니터와 눈 싸움을 하는 마냥 뚫어져라 쳐다보며 오른손으로는 타블렛 펜을 잡고 끄적이고 있었다. 그녀가 작곡한 앨범의 커버를 만드는 중이었다. Metro line and Blue Velvet on the Ground. 앨범 이름이 너무 긴 거 아니냐고 이름 지어줬던 내게 물어왔던 그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었다. 아무리 길고 아무리 불편해도 들을 사람은 다 들어. 그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알았다고 말하곤 커버를 만들어줄 사람을 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뭐든지 비싸지기 마련이었고, 그녀는 그 돈이 너무 아깝다고 말하며 자기 스스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돈이야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녀 자신의 작품이기에 그녀가 만드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종지부라 생각하여 그만 두었다.
그렇게 같은 포트에서 끓인 커피를 같은 공간에서 마시며 서로의 일을 하고 있었다. 둥글게 말린 형광등은 천장을 그리고 방 안을 새하얗게 칠하려는 듯 밝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 빛에 물든 천장의 벽지 무늬에 시선을 뺏긴 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듯 잠시 펜을 놓고 의자를 돌려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 위에 얼굴을 파묻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알지 못하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녀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아채곤 웃으며 마주 보았다.
커피 더 가져다줄까?
괜찮아. 더 마시면 못 잘 것 같아.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모자란 미소를 짓고는 의자를 돌려 다시 펜을 잡았다. 타블렛 위로 펜 끝을 두들기는 소리가 살짝씩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잠시 어디론가 잠겨 있던 내 의식을 박자에 맞춰 끌어 올리려는 듯 선명했다. 톡. 톡. 톡. 불어 한 페이지와 독일어 세 페이지, 그리고 영어 열다섯 페이지를 번역한 후 랩탑을 꺼내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녀의 키보드 소리와 내 키보드 소리가 맞물려 방 안은 마치 점심시간이 지난 후의 회사 사무실을 연상케 했다. 조수도 집 안에선 저렇게 허물없는 모습으로, 배가 드러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채 키보드를 두들기며 컴퓨터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회사에서처럼 조신한 모습으로 조용히 앉아 바른 자세로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마우스 휠을 굴리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앞선 생각이 다시 내 의식을 따라와 넌지시 만져왔다. 메리야스가 작은 모양인지 그녀의 허리께 살이 드러나보였다. 그저 '순수하게' 섹시해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려 놓고선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았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생각나는 앨범커버 작업본이 보였다.
수정한 거야? 그녀는 내가 인기척을 내지 않았던 듯 깜짝 놀라며 펜을 멈추고 돌아봤다.
놀랬잖아. 소리도 없이. …응. 조금 고쳐봤어. 너무 어두운 것 같아서 톤을 조금 높였어.
노을이 적막하게 내리쬐는 주홍빛 오후의 하늘과 어딘가로 뻗어있는 기차 레일. 시작은 누구나 같은 곳에서이지만 향하는 곳은 제각각 다를지도 모르는 무지향성을 느끼게 하는 앨범 커버였다.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쓸쓸함에 그녀를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오늘 조금 쌀쌀맞은 것 같아.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내가 그랬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곧 고쳤다. 그녀가 그렇다고 한다면 내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것이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어디서 쌀쌀했던 걸까. 그 포인트를 빨리 짚어내고자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어김없이 늦을 것이다.
모르는구나. 역시나 늦었다. 그녀는 뒤로 쓸어 넘긴 채 묶어 드러난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 하는 것 같았다. 눈치채지 못한 내 자신을 그제서야 다그쳤다. 전에도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그녀가 아무리 내게 그렇게 말하더라도 그녀가 말하기 전에 눈치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에 함께 지내는 것이니까. 그녀도 그렇게까지 화 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빨리 씻고 와서 스킨십을 하던, 피곤해 보인다고 말을 건네며 오늘은 이만 자자고 말해주던 해줘. 나 잘 알잖아. 먼저 뭐 하자고 말하기에는 네가 너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같아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서 싫어.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저 묵묵히 일어서 그녀의 뒤로 가 어깨를 감싸곤 그대로 목 부근을 안았다. 그녀는 아직 토라진 듯 그저 가만히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슬며시 손을 올렸다. 가녀린 손끝이 내 팔에 닿았다. 그녀는 마치 내 팔에 난 털이 처음 알게 된 것이라도 되는 듯 살며시 쓰다듬더니 그대로 몸을 푹 기대어 내 뺨에 뺨을 맞대었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원한다던가 하는 타이밍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 커피 몇 잔, 담배 몇 개피보다 더 위안이 되고 푸근한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니터는 계속해서 '어디론가' 뻗어있는 기차 레일 그리고 마치 누군가를 떠나 보낸 날의 노을처럼 적막하고 정확하게 마음 속을 스며 찌르는 은은한 파스텔 톤의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앨범 커버. 불어. 독일어. 헝가리. ……헝가리어. 형광등. 천장. 메리야스. 만지면 부수어질 것만 같은 그녀의 어깨. 쇄골. 나의 두터운 팔뚝. 머리를 묶어 올려 살며시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 그녀의 어깨에 스치는 와이셔츠 옷자락의 촉감. 늦은 밤이었다.
헝가리. 무심결에 그 단어를 읊조렸다. 그녀는 살짝 흠칫하다가 의자를 돌려 나를 꼭 안았다. 날갯죽지에 그녀의 길고 가녀린 손가락들이 감싸왔다. 그녀는 잠시 내 어깨 위에 턱을 올려놓곤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응. 왜?
END
2015 02 20
2004 Copyright [N]
Keyword : 니트
Music : Casker - 후유
https://www.youtube.com/watch?v=hIvpijob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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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 - 上
잠에서 깼다. 잠으로부터 억지로 끌어내진 것이 아닌 아침에 일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 일어남에 나는 한 동안 우두커니 앉아 눈을 끔뻑이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나를 잠에서 깨운 건지 내 기상에 마침맞게 소리가 나는 건지는 몰랐다. 아직 방 안은 어두컴컴했고 나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그 어둠에 지금이 새벽임을 알았다. 그제서야 그 소리가 휴대전화에서 나는 것임을 알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 시간 사이에서도 계속해서 그 벨은 끊이지 않고 마치 내 방에서 원래 나는 소리처럼 자연스럽게 계속되며 스스로의 중요성을 알렸다. 나는 느리게 전화로 손을 가져가 폴더를 열어 귀에 가져다 댔다. 수화기 너머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 그리 하라고 말한 것처럼 나 또한 아무 말 없이 전화를 귀에 댄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를 받고 있음에도 전화에는 의식이 가지 않았다. 문득 나 자신이 나무늘보가 된 것 같았다.
창문 너머로 자동차 전조등이 두 번, 오토바이 마후라 소리가 한 번 지나갔다. 침묵은 계속되었지만 그 침묵에 위화감은 없었다. 자연스러운 기상이었고 자연스러운 침묵이었다. 저 멀리 어딘가의 기지국으로 향하였다 다시 돌아온 수신 대기음이 돌아올 때까지 나는 그렇게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나는 폴더를 닫고 휴대전화를 옆에 내려놓은 다음 잠시 불려나온 잠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문은 열렸고 다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문 너머로 키 작은 누군가 내게 옆구리에 끼고 있는 숙제를 내밀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스쳤고, 나는 그저 아무런 치우침 없이 중얼거리며 잠으로 돌아갔다. 누구였을까.
칫솔질을 하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팬을 달구기 위해 가스를 당겼다. 틱틱거리는 점화음의 한 음절마다 덜 깬 잠으로부터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불이 온전히 붙었음에도 얼마간 그렇게 당기고 있었고,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고 온전해졌다. 세면대에 양칫물을 뱉고 입 안을 헹구었다. 세면대에 손을 짚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무의미와 유의미 사이의 틈바구니에 끼인 습관이었다. 딱히 의미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행동이었다. 하지만 여태 그 것으로부터 의미를 찾을 순 없었다. 그저 거울 너머로 전날 오버한 주량이 얼굴을 할퀴고 간 생채기만이 보였을 뿐이다. 계란을 깨 프라이팬에 넣었다. 흰자와 노른자의 경계는 또렷했다. 감싸고 있는 껍데기가 사라짐에도 그 경계의 신뢰는 변함 없음이 항상 신기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다시금 그가 내 어깨를 건드리며 숙제를 내밀었다. 누구였을까. 하지만 나는 아무런 고의성도 없이 그 숙제를 마치 명 받은 것처럼 신경쓰지 않으며 프라이팬을 공중에서 한 번 뒤집었다. 노른자가 깨지지 않고 온전히 뒤집혔고, 나는 만족했다. 나에게 그 무언의 전화를 할 친구도 딱히 없으며 최근에 있었던 일도 별로 없었다. 그저 아침을 먹으며 든 생각은 어제의 전화보단 계란에 소금을 덜 넣었다는 생각 뿐이었다.
출근길 버스에 탔다. 운 좋게 옆자리까지 빈 창가 쪽 자리가 있었기에 냉큼 가 앉았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손에 괴고선 바깥을 바라보았다. 가로수. 쌓인 눈. 빙판길. 한 아가씨가 입고 있는 더플 코트의 마음에 드는 디자인. 쇼윈도에 놓여 있는 앵클 부츠와 옥스퍼드 구두.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 지팡이를 짚으며 미끄러질까 천천히 얼어붙은 인도 위를 걷는 노인. 책가방을 맨 체 하품을 하곤 눈치를 보며 피시방으로 들어가는 학생. 문득 버스 유리창은 바깥이 내다보이는 게 아니라 언젠가 있었던 동시간대의 길거리를 녹화한 영상을 틀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게 지나갔다.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했다. 동료는 역시나 외근 아닌 외근을 나가 있었고, 나는 돈을 받지 않고 아니라 주는 입장이었기에 동료의 외근을 이용해 설렁설렁 일했다. 여직원이 내게 그리스어를 가져다 주었고, 나는 책상 한 구석에 그것을 아무렇게나 치워둔 후 여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문득 그리스를 생각하니 요거트가 먹고 싶어져 여직원에게 같이 가 먹자고 했고, 언제나 그런 쪽으로는 공범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나는 사무실 문을 잠시 잠그고 바로 앞 카페로 가 요거트 빙수를 먹었다. 혀에 닿는 요거트의 새콤씁쓸함과 얼음의 차가움이 극단적이어서 좋았다. 그녀는 엊그제 다이어트를 포기한 탓인지 식욕에 불이 당겨져 있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다이어트 하기에는 몸매가 너무 좋은 것 아니냐는 말에 사장님은 여자를 몰라요 라는 소리까지 들었었지. 그녀는 기어코 초코 파르페까지 시켰고, 그렇게 배탈이 났다. 그녀는 화장실을 들락날락한 끝에 탈진 직전의 몰골을 한 채 책상 위에 쓰러져 잠들었고 나는 그녀의 외투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외투가 어디서 본 것 같아 찬찬히 살펴보니 아침에 봤던 그 더플 코트였다. 보랏빛. 벨벳인지 부직포인지 모를 투박하면서도 포근한 감촉이었다. 문득 바비 빈턴의 블루 벨벳 가사가 생각났다. 나는 조용히 흥얼거리며 열쇠를 그녀 앞에 놓아두고 퇴근해도 좋다는 쪽지를 남긴 채 사무실을 나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을 무렵의 귀가는 언제나 여러 생각이 들게 했다.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집에 막 돌아왔을 때 감도는 공기는 언제나 익숙하지 않았다. 불을 켜고 찌개에 불을 올렸다. 그제서야 사람 사는 느낌이 났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와 냉장고를 열어 찬거리를 봤다. 맨 밑의 야채 칸을 열자 대파가 보였다. 나는 아주 잠시 그 대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장 본 기억이 없는 대파였다. 전기 생각이 나 일단 대파를 꺼내고 냉장고를 닫았다. 대파는 검은 비닐봉투에 밑단이 담긴 채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작은 봉투로도 충분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투 생각을 하자 문득 생각 외의 방향에서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그 기억은 마치 누가 일부러 지워놓은 듯 희미하여 바로 읽지는 못하였다. 왠지 모르게 내 스스로가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떠오른 생각은 항상 그렇듯 무신경으로 향하려 할 수록 반대로 더 거세게 달려갔고, 이윽고 온전히 드러났다.
한 달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집에 찾아왔던 날의 대파였다.
대파를 만져봤다. 그저 냉장고에 넣어져 있었기에 차가울 뿐인데 그 차가움은 다른 차가움과는 언뜻 다른 것이었다. 고개를 내민 빙산은 서서히 밑에 달려 있는 더 거대한 것들을 끌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 생각이었다. 약간 어눌한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었다. 뭔가를 말하려 할 때마다 그보다 더 수 많은, 그리고 그 말과는 관계 없는 것까지도 곰곰히 생각했었기에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계속 입을 오물거리는 토끼 같았다. 이따금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바라보며 걷다가 걸음이 느려져 잠시 후 후닥닥 달려와 당황하며 내 옷자락을 잡았었다. 단 둘이 있었을 때는 전자레인지에서 덥혀온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즐겨 봤었고, 토론할 때 만큼은 연인이라기보단 사이가 안 좋은 동호회 사람과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일본 영화를 되게 좋아했다. 라쇼몽과 죠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정말 좋아했다. 나 또한 영화를 계속해서 다시 보는 것을 좋아했기에, 일 년 반 동안 두 영화만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다. 나는 잠시 그렇게 대파가 그녀인 것처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고, 찌개가 끓어 뚜껑을 치고 올라오는 증기 소리에 문득 돌아와 황급히 가스 불을 껐다.
그깟 대파가 뭔지. 나는 애써 짧은 실소를 흘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잠시 멍하니 찌개가 담긴 그릇을 바라보다가 냉장고로 가 칭다오 한 캔을 꺼내왔다. 뚜껑을 따자 소리가 났다. 왠지 모르게 갇혀 있느라 답답했다는 말이 들리는 듯 했다. 맥주는 마치 기관지로 넘어가는 듯 얼얼한 냉기로 폐부를 적셨다. 식탁 위에는 여전히 검은 비닐봉다리에 담긴 대파가 가로로 놓여 있었다. 그 대파의 존재가 마치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것과 같이 느껴져 나는 그 생각의 어이없음에 실소했다.
한 캔을 더 까곤 바닥에 앉아 소파에 엉거주춤 기댔다. 팔을 편하게 걸치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영화 상실의 시대가 나오고 있었다. 원작을 끔찍이 아끼기에 영화화 됬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보고 싶지 않았다. 흥미 또한 동하지 않았다. 옛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영화의 제목은 내 머리를 강제로 젖혀보곤 어디선가 실 한 올을 가져다가 연결하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영화화 된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설레어 있었지만 나는 당시에 감독이 내게 무슨 해꼬지를 한 것 마냥 영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퉜다. 다퉜다기보단 내가 그녀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묵살했다. 그녀는 그렇게 혼자 보게 될거라면 보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녀가 그 영화를 봤는지 어쨌는지는 알지 못했다. 기억 너머로 그 때는 몰랐었던 그녀의 표정이 다른 것에 비해 너무나도 또렷히 보였다. 표정이 점점 가까이 보일 즈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렸다.
그 영화 지금은 봤을까.
그 때 그 전화, 그녀였나.
담배가 어느 정도 타들어갔을 즈음의 생각이었다.
End
20141218 0248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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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1
산맥은 그 둘레를 끊임없이 굽이치고 바람은 언제나처럼 동쪽에서 산맥이 열려 있는 서쪽으로 짙게 불며 흘러가기에 살고 있는 모든 나무와 풀들이 서쪽으로 휘어 곡야曲野라고 이름 지어진 곳이 있었다. 이따금씩 땅 밑에서 전갈이며 곤충들이 올라와 풀을 뜯어 보지만, 이 곡야에서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뭔가를 먹어보려고 하는 생물은 어릴대로 어린 녀석들인 것이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들이키게 되면 어떻지는 뻔하지 않은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대다수의 동물이 살아남지 못하는 곳임에도 식물들만은 잘만 버텨내고 있었다. 개체수의 증가도, 감소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이 옛날과 현재가 같아 기묘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 연유를 마치 커다랗고 날카로운 석회암 덩어리가 줄이어 서있는 듯, 보는 각도에 따라 하얗기도, 거뭇거뭇하기도, 회색빛이 돌기도 하는 저 산맥을 들어 얘기하곤 했다. 너무나도 드높아서, 구름 조차도 가운데의 몸뚱아리까지만을 삼키고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산맥에서 불어오는 거칠고 낮게 깔리는 바람을. 하지만 거기서 바람이 왜요? 라고 물어보아도, 곡야에 사는 모든 어린이들은 그들의 부모에게서 답을 듣지 못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꺼리는 것처럼 고개를 젓거나, 눈을 감는 부모의 모습을 봤다. 그리고, 그들이 자라나서 그들의 아이들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음을 들어도, 그들 또한 그렇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곡야는 그런 곳이다.
"네? 제 이름이 왜요?" 그는 아주 의아한 건지, 알면서도 숨기는 건지 모르는 듯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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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날처럼, 그저 반복되는 무직으로서의 무전취식의 일상의 한복판에서 깨달았다. 얼마 전 그저 문득, 단 하나의 메세지조차 오지 않는 카카오톡 친구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녀의 프로필을 눌러보았다. 오랜만에 바뀐 프로필 사진은 그녀가 그녀의 애인과 화목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녀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충만했는데, 이제는 반 반으로 나뉘어 느껴졌다. 그녀가 행복해보이니 잘된 거야. 라고 위안하는 절반과, 왜 아직도 헤어지지 않은거지. 하는 절반이었다. 나는 후자의 나 자신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라 그 생각을 접으려고 했다. 접으려고 할 수록 그 동안 억눌러 두었던 그림자 진 마음은 솟아오를 뿐이었고,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고 돌 수록 점점 더 비참해져만 갔다. 이런 내가, 거의 폐인에 가까운 내가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다 해도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녀가 머무를까. 그렇게 점점, 그녀를 생각하던 내 마음은 몇 년에 걸쳐 부수어지고 조각이 나뉘어가며 내 마음을 난자해왔고, 문득 이제 곧 조각조차 남지 않아 가루로서 빻아져 내 마음 안에 그대로 묻어서 알게 모르게 스며가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의 조각조차도 남지 않게 된 내 마음은 도대체 이제 무엇을 부수며 나아갈까. 상실해버린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하며, 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부수어가며 그나마 근근히 앞으로 나아가던 내 고장난 마음은 이제는 나 자신을 부숴가야만 그것을 연료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울고 싶었다. 아니, 마음은 울었다. 눈물샘은 말라 비틀어져 이제 모든 것에 대해 무덤덤하게 대응할 뿐이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알았다. 동시에 우습다는 것도.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워가면서도 글은 진전이 없었고, 잃어버린 음악들과 예술들의 방대한 바구니의 틈바구니에서 그 것들을 다시 그러모으려던 시도는 번번히 중단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내 잃어버린 소중한 방 하나를 되찾았다. Moby의 음악이었다. 떨어진 담배를 사러 가기 위해, 담뱃재와 밤샘으로 인해 약해진 몸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온갖 두려움을 헤치고 새벽의 편의점을 갔다 왔다. 그 왕래의 순간에조차 나는 끝까지 이어폰을 빼먹지 않았다. 학창 시절, 열정과 의지로 꿋꿋히 글을 써가던 나 자신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항상 미니스톱이 박힌 비닐 봉투를 든 채 집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렇게, 이 의자에 앉았다.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불을 붙이고, 잃어버렸던, 유실流失되었던 내 마음의 조각들 중 하나를 꺼내어 먼지를 털고 오랜만이야. 라고 속삭인 다음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 음악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만났던 때의 그 폐부에 차갑게 스며들면서도 깔끔하게 내쉬어지는 얕고도 무거운 공기. 갈대는 마치 훨훨 부는 바람에 머리를 말리듯 이리 저리 너울대었고, 나는 그 갈대숲을 사이에 두고 천변을 걸으며 찬란하게 별이 빛나던 밤 하늘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었다. 지금은 별조차도 내 눈에 띄지 않는다. 작은 알갱이 하나 하나가 크게 이루어진 청사진이며 온갖 문양들을 이루던 그 밤하늘조차 그저 새카맣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각 조각을 이어 붙여보니 어느새 그 때의 나 자신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왜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까. 왜 애써 보지 않으려 했었을까. 나 자신은 항상 산산히 부숴져 흩어지지만 그 모든 나 자신들을 모아줄 구심점이 하나씩은 있었는데, 왜 그것들을 돌아보지 않고 애써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항상 이렇게 깨닫지만서도, 벌써 나이는 첫 번째 파산波散 이후 두 해가 지나 스물 하나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룬 건 아무것도 없고,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저 한 여자만을 생각하다 아무 일도 못하게 된 병신으로밖에 쓸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은 내 스스로 걷어차 부수어트렸고, 신뢰하던 사람들은 항상 내가 그들을 저버렸으며, 나 자신마저도 항상 극한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건,
뭘 해도 나는 이렇게 살 놈이였어. 라는 쓰디 쓰면서도 나 자신에게 왠지 모르게 냉소를 짓게 만드는 도돌이표였다.
이 곡을 들으면서 나는 한 남자에게 저버려진 어떤 여자의 사막에서의 방황과 눈물로 점철된 만족스러운 점멸漸滅을 썼고, 이 곡을 들으면서는 어떤 그림을 그리는 여자의 깔끔하면서도 한 남자에게는 그녀를 찾아 나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도록 만들 만큼 지저분하게 추억을 점철한 실종을 썼고, 이 곡을 들으면서는…….
나는 잠시 음악을 멈추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웅크려 울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썼던 모든 글들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모두, 타의에 의해 실종된…….
그녀에 대한 생각을 했다. 하지 않으려 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면 할 수록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어쩌랴. 하게 되는 것을. 그녀의 가녀리면서도 확실한 손놀림으로 인해 완성되어가는 캔버스가 보였다. 그녀의 아름답고도 수려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녀의 둥글둥글하면서도 나름 매서운 곳이 있는, 그로 인해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해선 똑부러지는 성격이 보였다. 그녀의……그녀의……그녀의……그녀의…….
그녀가 나를 보며 왜 이러고 있어? 일어나. 예전처럼 나하고 같이 놀자. 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나를 보며 왜 이러고 있어? 예전의 네가 아니야.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리고 그저 유실자 n번째로 남으려는거야? 실망이야. 라며 나를 등지고 돌아서서 저 멀리로 걸어가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돌고 돈다.
이 세상에 내 존재를 그녀에게 알리기 위해 글을 쓰자고 하던 학창 시절의 내가 보였다.
이 세상에 내 존재를 그녀에게 글로나마 알리기 위해 글을 쓰던 스무 살의 내가 보였다.
이 세상에 보잘 것 없는 내 존재를 그녀에게 단 한 조각이나마 알리기 위해 글을 쓰던 내가 보였다.
그렇게, ( )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nd.
Novelistar / [N]
이제는 네 이름을 쓰기조차 미안해져, E.
20140827
0412
[N]
title P.S : 切斷의 오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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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遠 - 3
'내 어린 시절은 참으로,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랬었지.'
영상 퍼가기도 안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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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遠 - 2
벽난로에서 타들어가는 장작 덕분에 집안에 조금씩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내가 앉아 있는 긴 쇼파 오른쪽의 페어인 작은 쇼파에 앉아 무릎담요를 덮은 채 몸을 앞으로 구부려 양손으로 찻잔을 잡고 멍하니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맞은 편 텔레비전 위에 걸려 있는, 선생이 직접 친 사군자와 서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感監無疎識. 선생님은 참 한자를 특이하게 쓰셨다. 그녀는 아직도 찻잔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김의 질감과 흐트러짐을 보고 있는 듯 조용했다. 내가 글을 쓰다 문득 천장을 향해 피어오르는 연기의 물줄기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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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遠 - 1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