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4월 때와 같은 날씨였다

작품/짧은 글 2015. 5. 4. 17:26

여느 4월 때와 같은 날씨였다. 봄이면서도 여름이었다. 두 계절 사이에 걸터 앉아 갈까 말까 망설이며 마침내 결심하여 일어나려다 담배 한 대 피고 일어나야지 하고 다시 앉으며 불을 붙인 것만 같은 날씨였다. 긴 소매 옷을 입고 나서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다지 덥진 않구나 하고 빠르게 걷다 스며오는 땀에 소매를 걷어 붙이는 날씨였다. 나뭇가지들만 고요히 쉬고 싶음에도 바람 불어와 손 흔들게 됨에 부산스러울 뿐이었다. 머그잔에 타놓은 커피는 오질나게 달았다. 커피 생각이 나 퇴사 선물로 받아놓은 포트에 물을 받아 끓여 믹스를 세 개 넣고 저었던 것이다. 커피를 한창 마실 때 쓰던 컵이 어디론가 사라져 다른 컵에 양을 대충 넣어 저었던 것이었기에 그 단맛의 진함은 내 불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려 해도 오질나게 달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임에도 여름처럼 내리쬐는 햇빛이 너무나 선명하여 마치 꿈결같이 느껴지듯 단맛도 그러했다.

 

오랜만에 글이 쓰고 싶어져 서재를 뒤져 CD를 찾아내 이리저리 파일을 찾았다. 제프 백. 스콜피온즈. 사이먼 앤 가펑클. 에릭 클랩튼. 산지 얼마 안되었을 때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것들인데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한 구석에 처박아놓고 듣지 않게 되었던 것들이었다. 현실과 유흥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져 애매모호해졌을 때는 듣는 귀조차 달라지는 모양이다. 봄날에 듣는 옛 노래는 가을에 듣는 것과는 사뭇 맛이 다름에 또 담배에 불을 지폈다. 이 갑에 든 것을 다 피우고 나면 더 이상 남아있는 연초가 없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정해진 그 데드라인이 참 좋았다. 담배가 남아있을 때 최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항상 안일한 자세로 일관하며 오늘이라는 단어는 잊고 내일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던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다. 편집장도 그걸 잘 알고 있었는지 내게 들어오던 담뱃값을 몇 주 전에 끊었던 것일테다. 자의로는 절대 쓰지 못하는 나를 위해 타의로라도 작문을 강제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원고를 받아들고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여느 때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또 이렇게 중얼대리라. 소설을 쓰라고 했지 또 수필을 끄적여놨네. 라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편집을 하고 다듬고 내게 연락을 하며 담뱃값을 보내리라. 그 담뱃값이 끊길 때서야 비로소 난 또 소설이라는 탈을 쓴 수필을 적어 보내리라. 다음 담뱃값이 떨어질 때는 계절이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 알 수 없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려고 담배갑을 열어 제낀 순간 몇 개피 남아있지 않은 담배를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창밖을 내다볼 것이다. 다섯 개피 남았다. 창 밖으로는 여전히 불어오는 바람에 그만 쉬고 싶다고 손사래를 치는 것인지 아니면 바람을 타며 비로소 움직이게 되었음에 기뻐하는 것인지 모를 나뭇가지가 일렁이고 있었다.

 

소재가 필요했다. 소재는 많았다. 내가 다만 정 붙이지 못할 따름이었다. 여자를 등장시키지 않으면 정을 붙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여자를 등장시킴에 있어 그 여자에게 집착하지 않고 어느 정도 떨어져 거리를 두고 바라봄에 나와 독자의 시선을 똑같은 거리로 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여자의 바로 뒤 또는 옆. 혹은 코 앞에서 바라보며 그 여자를 일일이 뜯어보고 그 여자의 기분이 되어보고 그 여자를 가지고 싶다는 일념 하나 만을 쓰고 있는 어찌 보면 안 될 글쟁이임에도 내 글은 어느정도 팔려 나갔다. 인세는 목공 딱풀로 돌아와 내 입에 칠을 해주었다. 그 끈적끈적함이 나는 좋았다. 몇 번 입술을 붙였다 떼면 사라지는 끈적함의 정도가 나는 좋았다. 항상 끈적끈적하면 신경쓰일 것이었다. 벽에 기대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손 끝에 만져지는 튀어나온 나사못을 이리저리 손으로 굴려보는 그런 잠깐의 어린 장난처럼 한 순간이 좋았다. 그 한 순간에 머물러 있고 영속을 추구하지 못하기에 내 글 또한 그 단발성을 따랐다. 그럼에도 사 읽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이런 글이 뭐가 좋다고 사읽는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담배가 끊어지는 순간 이 몹쓸 몸은 손을 떨 것이고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원고를 써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담뱃진에 쩐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바뀌며 고동치고 있음에도 나 자신은 정지한 채 그저 들어오는 담배 연기에만 움찔대며 천천히 맥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글을 팔아먹을 수 있을까. 담배를 물었다. 세 개피 남았다. 서점에서 책을 집고선 카운터로 다가가 얹은 다음 열 지갑의 대상은 언제라도 나 말고 다른 누군가로 변할 수 있었다. 그 초조함이 좋았다. 타의로부터 발한 그 죄여옴의 느낌이 좋았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CD는 반대로 돌기 시작했다. 제시 쿡의 플라멩코 기타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지 않으며 바람에 춤추는 나뭇가지의 움직임 모양새를 보는 것은 항상 기묘한 느낌을 들게 한다. 나뭇가지를 움직이는 것이 바람이 아니라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이라는 착각은 내가 앉아 있는 세상을 꿈결처럼 느끼게 했다. 항상 약에 취해 사는 것처럼 나를 몽롱하게 만들었고 그 몽롱함의 비영속성에 나는 또 전율하며 웃었다. 하루살이의 세상에 예술과 담배가 있다면 그들도 이렇게 살 것인가 하는 상상을 했다.

 

담뱃재가 트렁크 팬티 위로 떨어졌다. 입에 문 채 두들기다보면 코로 역류해오는 연기가 좋았다. 이따금 세게 기침을 했다. 그 기침이 좋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어두컴컴하지는 않지만 밝지도 않은 방 안이 좋았다.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가 매번 불규칙하게 어디론가 향하다 이내 눈으로 볼 수 없는 정도로 흩어져 퍼지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제시 쿡이 좋았다. 제프 백이 좋았다. 개리 무어가 좋았다. 다방에 앉아 몇 갑이고 담배를 피울 수 있었고 이따금 돈 없는 음악가가 커피 값 대신 통기타를 두들기던 때가 좋았다. 테이블 위에는 꽁초가 솔방울처럼 꽂힌 재떨이가 있었고 글씨가 뭉게질 때마다 연필을 깎은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담배를 문 채 소파에서 허리를 굽혀 원고지 위에 아무렇게나 글을 쓰고 있으면 옆에 다가와 앉아 관심 어린 눈빛으로 나와 원고지를 번갈아 바라보던 다방 아가씨의 그 표정이 좋았다. 사장은 벚꽃 구경을 하러 가 어수룩한 손짓으로 레코드를 갈아 끼우며 다방 안에 흐르는 고요를 길게 끌어주는 사장 아들의 난감한 표정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어쩌다 비지스를 틀어줄 때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그에게 엄지를 들어 보여줄 때의 그 보람에 찬 듯 웃는 표정도 좋았다. 재떨이에 꽂힌 꽁초는 모두 필터가 자근자근 씹혀 거의 뭉게져 있었다. 나와 같이 필터를 씹으며 담배를 태우길 좋아하던 미스 최가 좋았다. 하룻밤 같이 보내고서 다방에서 매일 같이 앉아 날아드는 날벌레에도 웃으며 즐기던 미스 최는 한 달이 지난 후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 사장 아들은 쌍화탕을 내올 때 꼬깃꼬깃 구겨진 쪽지 하나를 내게 건네주며 계란을 깨트려 타주었다. 쪽지 안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 쪽지를 받고 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도 연락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녀도 연락을 바라고 쪽지를 남긴 것은 아니리라. 나를 너무도 잘 알던 여자였다. 나를 잘 아는 여자는 나와의 이별에도 대부분 묵묵히 그저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달라는 식으로 연락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미스 최, 미스 박, 그리고 어느 불문과 여대생까지 세 명의 여자를 그 다방에서 만났고 이별했다. 만남과 이별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여전히 묵묵히 다방에 가 삼 번 자리에 앉아 원고지를 만지며 연필을 깎고 커피를 마셨다. 그런 날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방에 가던 날에 나는 원고지를 챙기지 않고 그저 소파에 허리를 묻은 채 커피를 마시며 앨런 파슨스의 올드 앤 와이즈를 들었다. 소파에 그렇게 푹 기대어 커피를 마신 것은 거의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기억한다. 사장 아들은 그 새 노련한 다방 주인이 다 되어 있었다. 단골 하나가 이제부터 오지 않으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내 옆에 조금 멀찍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년간 마주치며 말 없이도 대강 서로를 알았던 사장은 병원에 누워있다고 했다. 나는 지갑을 열고 바로 옆 꽃집에서 비싼 꽃은 살 수 없지만 그래도 화분은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사장 아들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사양하지 않고 그 돈을 받았다. 그러고나서 듣고 싶은 음악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딱히 마땅한 음악이 생각나지 않아 잠시 머뭇거리다 딱 한 번만 올드 앤 와이즈를 반복해줄 수 없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레코드 플레이어 앞으로 갔다. 그렇게 올드 앤 와이즈가 다시 흘러나왔다. 항상 꽁초가 수북히 쌓여 처량해보였던 양철 재떨이도 이별했지만서도 그들이 앉던 자리는 항상 비워두었던 미스 최와 미스 박 그리고 그 여대생과의 기억도 이별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받침대에 잔을 내려놓은 다음, 올드 앤 와이즈를 끝까지 듣고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 아들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잠시 쳐다보는 것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할까 했으나 그냥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갔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어느 음악 소리가 내 안을 티스푼을 넣어 커피를 휘저을 때의 맴도는 것처럼 휘돌았다. 올라갈 때마다 그 소리는 선명해졌고, 거의 다 올라가 햇빛이 보일 즈음에야 그 노래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앞 맞은 편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존 레넌의 러브였다. 나는 잠시 다방 밖에 걸터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곤 그저 멀찍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등 뒤에서부터 내리쬐고 있는 태양이 움직이며 내 시야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담배를 태웠다. 음악은 진작에 바뀌었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존 레넌의 러브를 듣고 있었다.

 

반 갑쯤 들어 있던 담배를 다 태웠을 때, 적어도 미스 최한테는 연락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 존 레넌을 좋아했었던 것이 비로소 생각났다.

 


2015 05 04 17 24

생각 나면 더 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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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題

작품/짧은 글 2015. 2. 20. 20:05

도어락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밤 늦은 찬 바람이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것을 느낀 듯, 집 안의 인기척이 부스럭댔다. 그녀였다. 메리야스와 반바지 차림을 하곤 오늘도 묶은 머리를 한 채 아직 구두를 벗고 있던 내 앞으로 다가와 웃었다. 어서 와 라는 그 말에 나는 웃으며 구두를 다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서류 가방을 내려 놓고 끌러 아직 남아있는 잔업을 꺼내 들곤 외투를 벗어 행거에 걸었다. 그리곤 방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컴퓨터 옆 침대 위에 앉아 벽에 기댄 채 들고 왔던 두터운 종이 뭉치를 읽기 시작했다.


안 씻어? 그녀는 커피를 가져와 침대 옆 콘솔에 올려두곤 컴퓨터 앞에 앉아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씻을 시간도 없다는 뜻을 담은 그 말에 그녀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포토샵의 남은 작업을 계속했다. 스웨덴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헝가리라는 단어의 어감이 좋았다. 아주 아름답고 수려한 여자의 이름이 헝가리라면 그녀를 부를 때마다 입 안에 맴도는 헝가리라는 단어의 어감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이 세상 바깥의 느낌을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헝가리어는 알지 못했다. 헝가리어는 내일 다시 가져가 대사관 쪽 지인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다. 번역 일에서 정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향하는 구조 무전이다. 식구가 세 명 뿐인 번역 사무실의 사람들이 모든 언어를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왼손으론 턱을 괸 채 모니터와 눈 싸움을 하는 마냥 뚫어져라 쳐다보며 오른손으로는 타블렛 펜을 잡고 끄적이고 있었다. 그녀가 작곡한 앨범의 커버를 만드는 중이었다. Metro line and Blue Velvet on the Ground. 앨범 이름이 너무 긴 거 아니냐고 이름 지어줬던 내게 물어왔던 그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었다. 아무리 길고 아무리 불편해도 들을 사람은 다 들어. 그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알았다고 말하곤 커버를 만들어줄 사람을 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뭐든지 비싸지기 마련이었고, 그녀는 그 돈이 너무 아깝다고 말하며 자기 스스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돈이야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녀 자신의 작품이기에 그녀가 만드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종지부라 생각하여 그만 두었다.


그렇게 같은 포트에서 끓인 커피를 같은 공간에서 마시며 서로의 일을 하고 있었다. 둥글게 말린 형광등은 천장을 그리고 방 안을 새하얗게 칠하려는 듯 밝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 빛에 물든 천장의 벽지 무늬에 시선을 뺏긴 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듯 잠시 펜을 놓고 의자를 돌려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 위에 얼굴을 파묻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알지 못하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녀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아채곤 웃으며 마주 보았다.


커피 더 가져다줄까?

괜찮아. 더 마시면 못 잘 것 같아.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모자란 미소를 짓고는 의자를 돌려 다시 펜을 잡았다. 타블렛 위로 펜 끝을 두들기는 소리가 살짝씩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잠시 어디론가 잠겨 있던 내 의식을 박자에 맞춰 끌어 올리려는 듯 선명했다. 톡. 톡. 톡. 불어 한 페이지와 독일어 세 페이지, 그리고 영어 열다섯 페이지를 번역한 후 랩탑을 꺼내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녀의 키보드 소리와 내 키보드 소리가 맞물려 방 안은 마치 점심시간이 지난 후의 회사 사무실을 연상케 했다. 조수도 집 안에선 저렇게 허물없는 모습으로, 배가 드러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채 키보드를 두들기며 컴퓨터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회사에서처럼 조신한 모습으로 조용히 앉아 바른 자세로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마우스 휠을 굴리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앞선 생각이 다시 내 의식을 따라와 넌지시 만져왔다. 메리야스가 작은 모양인지 그녀의 허리께 살이 드러나보였다. 그저 '순수하게' 섹시해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려 놓고선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았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생각나는 앨범커버 작업본이 보였다.


수정한 거야? 그녀는 내가 인기척을 내지 않았던 듯 깜짝 놀라며 펜을 멈추고 돌아봤다.

놀랬잖아. 소리도 없이. …응. 조금 고쳐봤어. 너무 어두운 것 같아서 톤을 조금 높였어.

노을이 적막하게 내리쬐는 주홍빛 오후의 하늘과 어딘가로 뻗어있는 기차 레일. 시작은 누구나 같은 곳에서이지만 향하는 곳은 제각각 다를지도 모르는 무지향성을 느끼게 하는 앨범 커버였다.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쓸쓸함에 그녀를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오늘 조금 쌀쌀맞은 것 같아.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내가 그랬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곧 고쳤다. 그녀가 그렇다고 한다면 내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것이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어디서 쌀쌀했던 걸까. 그 포인트를 빨리 짚어내고자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어김없이 늦을 것이다.


모르는구나. 역시나 늦었다. 그녀는 뒤로 쓸어 넘긴 채 묶어 드러난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 하는 것 같았다. 눈치채지 못한 내 자신을 그제서야 다그쳤다. 전에도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그녀가 아무리 내게 그렇게 말하더라도 그녀가 말하기 전에 눈치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에 함께 지내는 것이니까. 그녀도 그렇게까지 화 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빨리 씻고 와서 스킨십을 하던, 피곤해 보인다고 말을 건네며 오늘은 이만 자자고 말해주던 해줘. 나 잘 알잖아. 먼저 뭐 하자고 말하기에는 네가 너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같아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서 싫어.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저 묵묵히 일어서 그녀의 뒤로 가 어깨를 감싸곤 그대로 목 부근을 안았다. 그녀는 아직 토라진 듯 그저 가만히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슬며시 손을 올렸다. 가녀린 손끝이 내 팔에 닿았다. 그녀는 마치 내 팔에 난 털이 처음 알게 된 것이라도 되는 듯 살며시 쓰다듬더니 그대로 몸을 푹 기대어 내 뺨에 뺨을 맞대었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원한다던가 하는 타이밍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 커피 몇 잔, 담배 몇 개피보다 더 위안이 되고 푸근한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니터는 계속해서 '어디론가' 뻗어있는 기차 레일 그리고 마치 누군가를 떠나 보낸 날의 노을처럼 적막하고 정확하게 마음 속을 스며 찌르는 은은한 파스텔 톤의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앨범 커버. 불어. 독일어. 헝가리. …헝가리어. 형광등. 천장. 메리야스. 만지면 부수어질 것만 같은 그녀의 어깨. 쇄골. 나의 두터운 팔뚝. 머리를 묶어 올려 살며시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 그녀의 어깨에 스치는 와이셔츠 옷자락의 촉감. 늦은 밤이었다.


헝가리. 무심결에 그 단어를 읊조렸다. 그녀는 살짝 흠칫하다가 의자를 돌려 나를 꼭 안았다. 날갯죽지에 그녀의 길고 가녀린 손가락들이 감싸왔다. 그녀는 잠시 내 어깨 위에 턱을 올려놓곤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응. 왜?




END

2015 02 20

2004 Copyright [N]


Keyword : 니트

Music : Casker - 후유

https://www.youtube.com/watch?v=hIvpijob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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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 - 上

작품/소설 2014. 12. 18. 02:49

잠에서 깼다. 잠으로부터 억지로 끌어내진 것이 아닌 아침에 일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 일어남에 나는 한 동안 우두커니 앉아 눈을 끔뻑이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나를 잠에서 깨운 건지 내 기상에 마침맞게 소리가 나는 건지는 몰랐다. 아직 방 안은 어두컴컴했고 나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그 어둠에 지금이 새벽임을 알았다. 그제서야 그 소리가 휴대전화에서 나는 것임을 알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 시간 사이에서도 계속해서 그 벨은 끊이지 않고 마치 내 방에서 원래 나는 소리처럼 자연스럽게 계속되며 스스로의 중요성을 알렸다. 나는 느리게 전화로 손을 가져가 폴더를 열어 귀에 가져다 댔다. 수화기 너머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 그리 하라고 말한 것처럼 나 또한 아무 말 없이 전화를 귀에 댄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를 받고 있음에도 전화에는 의식이 가지 않았다. 문득 나 자신이 나무늘보가 된 것 같았다.


창문 너머로 자동차 전조등이 두 번, 오토바이 마후라 소리가 한 번 지나갔다. 침묵은 계속되었지만 그 침묵에 위화감은 없었다. 자연스러운 기상이었고 자연스러운 침묵이었다. 저 멀리 어딘가의 기지국으로 향하였다 다시 돌아온 수신 대기음이 돌아올 때까지 나는 그렇게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나는 폴더를 닫고 휴대전화를 옆에 내려놓은 다음 잠시 불려나온 잠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문은 열렸고 다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문 너머로 키 작은 누군가 내게 옆구리에 끼고 있는 숙제를 내밀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스쳤고, 나는 그저 아무런 치우침 없이 중얼거리며 잠으로 돌아갔다. 누구였을까.



칫솔질을 하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팬을 달구기 위해 가스를 당겼다. 틱틱거리는 점화음의 한 음절마다 덜 깬 잠으로부터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불이 온전히 붙었음에도 얼마간 그렇게 당기고 있었고,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고 온전해졌다. 세면대에 양칫물을 뱉고 입 안을 헹구었다. 세면대에 손을 짚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무의미와 유의미 사이의 틈바구니에 끼인 습관이었다. 딱히 의미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행동이었다. 하지만 여태 그 것으로부터 의미를 찾을 순 없었다. 그저 거울 너머로 전날 오버한 주량이 얼굴을 할퀴고 간 생채기만이 보였을 뿐이다. 계란을 깨 프라이팬에 넣었다. 흰자와 노른자의 경계는 또렷했다. 감싸고 있는 껍데기가 사라짐에도 그 경계의 신뢰는 변함 없음이 항상 신기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다시금 그가 내 어깨를 건드리며 숙제를 내밀었다. 누구였을까. 하지만 나는 아무런 고의성도 없이 그 숙제를 마치 명 받은 것처럼 신경쓰지 않으며 프라이팬을 공중에서 한 번 뒤집었다. 노른자가 깨지지 않고 온전히 뒤집혔고, 나는 만족했다. 나에게 그 무언의 전화를 할 친구도 딱히 없으며 최근에 있었던 일도 별로 없었다. 그저 아침을 먹으며 든 생각은 어제의 전화보단 계란에 소금을 덜 넣었다는 생각 뿐이었다.


출근길 버스에 탔다. 운 좋게 옆자리까지 빈 창가 쪽 자리가 있었기에 냉큼 가 앉았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손에 괴고선 바깥을 바라보았다. 가로수. 쌓인 눈. 빙판길. 한 아가씨가 입고 있는 더플 코트의 마음에 드는 디자인. 쇼윈도에 놓여 있는 앵클 부츠와 옥스퍼드 구두.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 지팡이를 짚으며 미끄러질까 천천히 얼어붙은 인도 위를 걷는 노인. 책가방을 맨 체 하품을 하곤 눈치를 보며 피시방으로 들어가는 학생. 문득 버스 유리창은 바깥이 내다보이는 게 아니라 언젠가 있었던 동시간대의 길거리를 녹화한 영상을 틀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게 지나갔다.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했다. 동료는 역시나 외근 아닌 외근을 나가 있었고, 나는 돈을 받지 않고 아니라 주는 입장이었기에 동료의 외근을 이용해 설렁설렁 일했다. 여직원이 내게 그리스어를 가져다 주었고, 나는 책상 한 구석에 그것을 아무렇게나 치워둔 후 여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문득 그리스를 생각하니 요거트가 먹고 싶어져 여직원에게 같이 가 먹자고 했고, 언제나 그런 쪽으로는 공범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나는 사무실 문을 잠시 잠그고 바로 앞 카페로 가 요거트 빙수를 먹었다. 혀에 닿는 요거트의 새콤씁쓸함과 얼음의 차가움이 극단적이어서 좋았다. 그녀는 엊그제 다이어트를 포기한 탓인지 식욕에 불이 당겨져 있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다이어트 하기에는 몸매가 너무 좋은 것 아니냐는 말에 사장님은 여자를 몰라요 라는 소리까지 들었었지. 그녀는 기어코 초코 파르페까지 시켰고, 그렇게 배탈이 났다. 그녀는 화장실을 들락날락한 끝에 탈진 직전의 몰골을 한 채 책상 위에 쓰러져 잠들었고 나는 그녀의 외투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외투가 어디서 본 것 같아 찬찬히 살펴보니 아침에 봤던 그 더플 코트였다. 보랏빛. 벨벳인지 부직포인지 모를 투박하면서도 포근한 감촉이었다. 문득 바비 빈턴의 블루 벨벳 가사가 생각났다. 나는 조용히 흥얼거리며 열쇠를 그녀 앞에 놓아두고 퇴근해도 좋다는 쪽지를 남긴 채 사무실을 나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을 무렵의 귀가는 언제나 여러 생각이 들게 했다.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집에 막 돌아왔을 때 감도는 공기는 언제나 익숙하지 않았다. 불을 켜고 찌개에 불을 올렸다. 그제서야 사람 사는 느낌이 났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와 냉장고를 열어 찬거리를 봤다. 맨 밑의 야채 칸을 열자 대파가 보였다. 나는 아주 잠시 그 대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장 본 기억이 없는 대파였다. 전기 생각이 나 일단 대파를 꺼내고 냉장고를 닫았다. 대파는 검은 비닐봉투에 밑단이 담긴 채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작은 봉투로도 충분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투 생각을 하자 문득 생각 외의 방향에서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그 기억은 마치 누가 일부러 지워놓은 듯 희미하여 바로 읽지는 못하였다. 왠지 모르게 내 스스로가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떠오른 생각은 항상 그렇듯 무신경으로 향하려 할 수록 반대로 더 거세게 달려갔고, 이윽고 온전히 드러났다.


한 달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집에 찾아왔던 날의 대파였다.


대파를 만져봤다. 그저 냉장고에 넣어져 있었기에 차가울 뿐인데 그 차가움은 다른 차가움과는 언뜻 다른 것이었다. 고개를 내민 빙산은 서서히 밑에 달려 있는 더 거대한 것들을 끌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 생각이었다. 약간 어눌한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었다. 뭔가를 말하려 할 때마다 그보다 더 수 많은, 그리고 그 말과는 관계 없는 것까지도 곰곰히 생각했었기에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계속 입을 오물거리는 토끼 같았다. 이따금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바라보며 걷다가 걸음이 느려져 잠시 후 후닥닥 달려와 당황하며 내 옷자락을 잡았었다. 단 둘이 있었을 때는 전자레인지에서 덥혀온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즐겨 봤었고, 토론할 때 만큼은 연인이라기보단 사이가 안 좋은 동호회 사람과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일본 영화를 되게 좋아했다. 라쇼몽과 죠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정말 좋아했다. 나 또한 영화를 계속해서 다시 보는 것을 좋아했기에, 일 년 반 동안 두 영화만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다. 나는 잠시 그렇게 대파가 그녀인 것처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고, 찌개가 끓어 뚜껑을 치고 올라오는 증기 소리에 문득 돌아와 황급히 가스 불을 껐다.


그깟 대파가 뭔지. 나는 애써 짧은 실소를 흘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잠시 멍하니 찌개가 담긴 그릇을 바라보다가 냉장고로 가 칭다오 한 캔을 꺼내왔다. 뚜껑을 따자 소리가 났다. 왠지 모르게 갇혀 있느라 답답했다는 말이 들리는 듯 했다. 맥주는 마치 기관지로 넘어가는 듯 얼얼한 냉기로 폐부를 적셨다. 식탁 위에는 여전히 검은 비닐봉다리에 담긴 대파가 가로로 놓여 있었다. 그 대파의 존재가 마치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것과 같이 느껴져 나는 그 생각의 어이없음에 실소했다.



한 캔을 더 까곤 바닥에 앉아 소파에 엉거주춤 기댔다. 팔을 편하게 걸치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영화 상실의 시대가 나오고 있었다. 원작을 끔찍이 아끼기에 영화화 됬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보고 싶지 않았다. 흥미 또한 동하지 않았다. 옛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영화의 제목은 내 머리를 강제로 젖혀보곤 어디선가 실 한 올을 가져다가 연결하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영화화 된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설레어 있었지만 나는 당시에 감독이 내게 무슨 해꼬지를 한 것 마냥 영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퉜다. 다퉜다기보단 내가 그녀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묵살했다. 그녀는 그렇게 혼자 보게 될거라면 보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녀가 그 영화를 봤는지 어쨌는지는 알지 못했다. 기억 너머로 그 때는 몰랐었던 그녀의 표정이 다른 것에 비해 너무나도 또렷히 보였다. 표정이 점점 가까이 보일 즈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렸다.


그 영화 지금은 봤을까.

그 때 그 전화, 그녀였나.

담배가 어느 정도 타들어갔을 즈음의 생각이었다.




End

20141218 0248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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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昧葬의 후일담後日談

작품/소설 2014. 11. 10. 02:54
흙이 덕지덕지 묻어 굳은 채로 떨어지지 않는 삽날을 발 끝으로 긁어내다 포기하고, 옆으로 던졌다. 쓰러지듯 주저 앉아, 주린 목을 적셔줄 웅덩이라도 있는 마냥 절실함을 담아 세 발짝 쯤 되는 거리를 기어가, 아직 옷도 입히지 못한 봉분을 최대한 팔을 벌려 안았다. 으레 이 다음은 모두들 울지 못해 죽은 귀신처럼 울더만, 어째 나는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최대한 울지 않고 그녀를 떠나 보내는 것이 그녀가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될 수 있는대로 어딘가를 깨물었다. 입술이 찢어지고 이빨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내 것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멀게 들렸다. 어디선가 황조롱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귀뚜라미 소리와 비슷한 그 소리. 여름이 생각났다. 그녀와 함께 걷고팠던 그 여름날의 갈대밭. 함께 바닷가에 차를 몰고 가선 밀려오는 파도에 실린 바닷바람의 짠 내를 맡고 싶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소금기가 아름답게 꽃송이처럼 맺혀 있었으리라. 그녀를 잠시 쓰다듬곤, 미안하다고 말하고 봉분을 등에 베고 누웠다. 야속하게도 하늘은 구름 한 점 끼어있지 않았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누옇도록 짙어 금방이라도 소맷자락에 이슬 맺힐 것 같았다. 차갛게. 차갛게라는 단어를 하나 지어냈다. 차갑고 하얗게. 차갑고 누옇게. 차갑고……. 뒤엎어진 흙이 아직 추위에 굳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단어를 뱉어내고 있는가. 실소가 흘러 나왔다. 실소는 곧 울음으로 번졌다. 참기로 했는데, 참아지지가 않았다. 물러터진 입술의 상처 사이로 흘러 들어가 욱신거렸다. 그 욱신거림의 고동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느껴져, 내 자신이 살아있음에 그리고 그녀는 누워있음에 더더욱 울었다. 의문이었다. 나는 계속 살아 숨쉬며 박동하고 있는데 그녀는 어찌하여 차디 찬 곳에 누워 있는가. 하다못해 그 여름, 바닷바람으로부터 맺힌 소금기가 가시기 전에. 아직 흙이 따뜻할 적에 묻어주고 싶었다. 야속하게도 옅은 안개마저 어디선가 흘러 들어와 그녀를 적셨다.

태양이 거세게 내리쬐는 사막, 가녀린 맨발로 눈부시게 아름답고 고운 모래밭 위를 걷는 그녀가 보였다. 하이얀 원피스를 입고선 멋드러지게, 가느라면서도 균형있게 살집이 잡힌 다리를 내비치며 머리에 쓴 챙 모자를 바로 잡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하며, 태양을 등지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태양더러 돌아서라 말했다. 태양은 돌아섰고, 마침내 그녀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걷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한낱 꿈을 꾼 걸까, 나는. 그녀는 꿈 속에서 나와 시간을 보냈고, 실제로는 같이 자리하지도 않았던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아, 그녀는 진짜구나. 진짜 내 옆에 있었어.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아보려면 볼을 꼬집는다고들 하지 않는가…. 나는 그 물음으로 내 볼을 힘차게 꼬집었고, 정말로 아팠다. 아프다 못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황조롱이는 또 한 번 날아가며 울었고, 날갯짓으로 바닷바람을 실어왔다. 새벽의 선명하고 짙은 공기에서, 나는 울었다.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짚고는 일어섰다. 어딘가 아픈 곳도 없고 지치지도 않았을진데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났다. 그녀의 마지막을 나와 함께 한, 널브러져 있는 삽을 주워 발 끝으로 날을 털었다. 흙은 안개를 머금어 금방 떨어졌다. 힘 없이 삽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가면 그녀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치며 '사내 녀석이 기 펴고 다녀야지?' 라고 할까봐, 없는 힘을 쥐어 짜서 삽을 어깨에 메고 걸어 갔다. 그녀의 아리따운 머리 위로 갓 심어놓은 풀들이 다 자라 그녀의 자랑이었던 기다란 머리카락 마냥 늘어질 때에 다시 올 것이다.



그렇게 멀어졌다. 그녀의 봉분이 등 뒤로 보였다. 닿지 않아도 보였다. 알 수 있었다. 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내 어깨 위로는 아직 그녀의 무게가 실려있다. 그녀의 무게. 그녀는 아직 내 위로 살아 숨쉬고 있다. 그녀의 생존에 대한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는. 그녀…는.

열한 번째의 봉분을 만들면서, 나는 드디어 지쳤다. 추억과 망각 사이에 끼어 치던 발버둥. 종각에 다다른 것일까. 다시는 그녀를 묻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다 묻었기에. 묻어버렸기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는 너를 묻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녀는 내게─



END
2014 11 10 02 52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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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2

작품/소설 2014. 10. 25. 03:59
"오빠."
현관 계단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 햐르타는 무척이나 가냘팠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부모로부터 나온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나와는 너무도 다른 여동생이다. 조그만 몸에 가냘픈 팔다리, 그리고 정반대의 성격. 햐르타를 보고 있자면 할아배가 말해줬던 유리라는 것이 생각난다. 바깥에서 반대편 바깥이 내다보이는, 투명하고 맑은 물건. 안드라 아저씨는 햐르타를 보고 유리 인형이라고 했다. 본 적은 없지만, 왠지 어울리는 말이었다. 햐르타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앞뒤로 몸을 흔들거리며 물었다. 나는 방금 잡아온 커다란 놈을 손질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별이라는 거 있잖아. 아저씨가 빌려준 책에서 읽었단 말야. 저어기 위에 반짝거리면서 빛나는 자그만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더라."
"응."
"근데 여기서는 왜 별이 안 보여? 책에서는 어디에 가도 밤이 되면 보인다고 했는데……."
나도 본 적 없단다. 인석아. 내게 물어 뭣하니.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글쎄. 구름님이, 읏차. 계셔서 그런거 아닐까?"
아가미 부분에서 칼이 걸려 애를 먹었다. 비늘이 잘 벗겨지지가 않았다. 햐르타는 생선을 손질하며 말한 것에 성의가 없다고 생각한건지, 그 내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단에 굴러다니던 자갈 하나를 집어 저 멀리 던졌다.
"구름님은 말야.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잠시 날아가셨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했단 말야."
"오빠는 잘 모르겠다야."
"구름님이 궁금하니?"

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디선가 우연히 듣고 있었던지, 아니면 엿듣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안드라 아저씨가 옆구리에 붓과 종이를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햐르타는 안드라 아저씨를 보자마자 잽싸게 튀어나갔다. 왠지는 몰라도 여동생은 아저씨를 잘 따른다. 나는 그와 반대로 내심 못마땅해 했는데, 그게 그냥 여동생과 친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보였는지는 몰라도, 그랬다.
"아저씨~" "읏차, 욘석."
아저씨는 햐르타를 안아 올리더니, 어깨 위로 무동을 태우곤 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 비늘이 어떻게 되먹었길래 이렇게 단단한거여.
"아저씨, 아저씨. 알려주세요. 왜 저 구름님들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거에요?"
햐르타는 호기심 충만한 눈빛으로 아저씨가 가리킨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물었다. 점심도 굶어놓고 꽤나 명랑한 목소리였다. 아저씨는 어깨 위에 올라탄 햐르타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날뛰어서 그런지 조금 버거워하며 자세를 다시 잡고는 말했다.
"욘석아, 나도 듣고 있어서 아니까 그렇게 재촉하지 마려무나."
"알려주세요~알려주세요~"
아저씨는 잠시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골랐다. 햐르타에게 옛날 이야기라던가 책을 읽어줄 때면 저렇게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나는 드디어 생선의 아가미를 잘라내고서야, 잠시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칼을 내려 놓았다. 햐르타는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아저씨의 가슴팍을 살짝씩 때리고 있었다.

"그건 말이다…"





"일어났어?"

햐르타의 목소리가 들려서 잠에 깬건지, 잠에 깼는데 햐르타의 목소리가 들린건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뒤척이려던 찰나 몸이 쑤셨다. 바람이 거세게 불려는 참인가보다. 그와 동시에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시야가 흐릿했다. 창가에 햐르타가 흔들의자 위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며 바람을 쐬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거죽으로 싸인 커다란 책이 놓여 있었다. 무겁지도 않나. 햐르타는 가냘픈 소녀에서 가냘픈 아가씨로 자라났다. 유리는 차갑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그와 동시에 햐르타는 내게 점점 차가워졌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그 차가움이 안에 남아 느껴졌다. 싸늘한 냉대가 아닌, 이야기를 한 이후,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딘가 한 구석에 남는 그런 서느럼이었다. 내가 미안할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지만, 미안했다.

"창문 좀 닫아줄래?"
햐르타는 나와는 정반대로 바람을 좋아했다. 나는 그 바람에서, 한 방울의 피로 알게 된 그 냄새의 종잡을 수 없는 거대한 의미가 싫었다. 열 아홉에 성인식을 하고 나서도 햐르타는 여전히 바람 쐬기를 좋아했다. 바람을 쐬는 것을 원래부터 좋아 했지만, 피 냄새를 알게 된 후에도 좋아하는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모른다. 뒤의 경우는 왠지 생각하기 싫었다. 단 하나 바뀐게 있다면, 예전의 그 초롱초롱하던, 바람님이라고 부르며 창가에 앉아 입을 벌리던 그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인형처럼 앉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책을 읽고, 바람에 쪽수가 넘어가도 그저 묵묵히 다시 되넘겨 책을 읽을 뿐이었다. 창문을 닫아달라는 나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햐르타는 가는 양 팔을 벌려 여닫이 창을 하나씩 힘겹게 닫았다. 그리고는 무릎 위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오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아저씨한테 들었어. 산으로 간다면서."
갑자기 사레가 들려 기침이 났다. 햐르타가 책을 덮고 내 옆, 침대 위에 걸터 앉아 등을 두들겨 줬다. 죄 짓는 것도 아닌데 왜 기침이 나는지 원. 등을 두들겨주며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왠지 더더욱 그런 느낌을 들게 했다. 기침이 멈췄는데도 계속 심술궂게 등을 두들기자 몸을 일으켜 햐르타를 바라봤다.
"너도 알잖아. 가야 한다는 거."
내 말에 햐르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빠도 알잖아. 되게 위험하다는 거."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햐르타는 살짝 웃으며, 다시 의자로 돌아가 몸을 푹 안긴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할아배가 햐르타더러 읽는 이라고 써놓은 그 쪽지를 아저씨가 보여줬을런지가 궁금하다. 읽는 자이기에 책을 저렇게 좋아하는걸까, 책을 원래부터 좋아하는데 읽는 자인걸까? 어렸을 때부터 봐왔으니 아마 후자겠지. 할아배는 햐르타를 본 적도 없고. 양 손을 머리에 베고 다시 누웠다. 햐르타는 계속 묵묵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난 아직 반 까막눈이라서 저렇게까지 빨리 읽진 못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여동생이 벌써 성인식을 치뤘다는 게 참 오묘할 따름이었다. 근데 왜 여자애들은 열 다섯에 성인식을 하는 걸까. 아저씨를 만나면 묻고 싶었다.

"괜찮아, 인마. 내가 뭐 그렇게까지 운이 없는 놈도 아니잖아. 잘 될거니까 괜찮아."
왠진 모르지만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건넸다.
"괜찮지 않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잖아.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고 하는게 좋다고 봐, 오빠."
얘 또 이런다. 구석에 또다시 싸늘함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그와 동시에 살짝 머쓱해졌다.
"뭐, 그, 그럴지도 모르지만 진짜로 괜찮어."

여동생의 옆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내 여동생 치고는 너무도 예쁜 얼굴이다.





벌어지리라. 어느샌가 모르게 일어나 점점 커져 마침내 대두 되었을 때는 그 누구도 겉잡을 수 없게 된 일이. 섬뜩하고 참혹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거의 모든 걸 집어 삼킨 그것의 위용은 마치 파도와 같을 것이다. 절벽을 향해, 굳건한 절벽을 향해 잡아먹을 듯 달려와 부딪고, 자신의 몸집의 두 배 가량 치솟아오르는 파도. 파도와 같으리라. 땅 위에 서있는 모든 것들을 바다로 밀어내어, 그 것들이 익사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서서히 가라앉고, 마침내 바닥에 다다를 즈음 육탈하여 덜그럭거릴 때, 땅 위는 온전히 그 것의 것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으레 음모라는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음모를 믿고, 그 일에 대비하며 살아오던 이들 또한. 그 일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 그 일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안아 추위를 버티며, 이 세상에 그들밖에 갖고 있지 않은 온기를 나누리라. 그렇게 살아가리라. 어느샌가 모르게, 언젠가는 그들이 실패하여 땅에서 몰아내어져 바다로 떨어지며 그들의 먼 조상을 만날지라도, 그들은 마지막까지 온기를 가진 이들로서 칭송받으리라.

저 멀리,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별들로부터.

작자 미상, 종말록終末錄 , 7장 116쪽.



「」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를 담은 말이 목구멍을 타고 입술이 채 열리기도 전에 「」의 이야기를 담은 이들의 목을 잘라 버린다. 어떤 것인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손에 쥐어보지도, 냄새를 맡고 들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단 하나는 장담할 수 있는데, 「」가 이 세상을 삼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의 행동의 의의를 그 누가 알랴. 하지만, 오래 전부터 전승해오는 말들에 의하면, 그저 싫어서라고 한다. 웃기지 않은가? 얼마나 거대한지도, 강력한지도 모르는 존재가 우리를 마치 우리가 개미 보듯 하는 심정으로, 그저 손에 쥐고 톡 터트려 죽이려고 한다.

「」의 손가락 안에는 작은 점만이 보일 뿐이겠지만, 그 안에는 필연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온기와 가정, 그리고 희망과 구원이 있으리라.
얼마나 우습고도, 무서운 일이랴.

히옌 카이그, 「」, 머릿글







진행을 좀 하려고 했으나 종말록까지 쓰고 날려 먹어서(...)
더 이상 생각이 뻗어나가질 않아 여기서 마칩니다.
하아...백스페이스에 지우기와 뒤로 가기 두 기능을 동시에 넣었을 디자이너, 누구냐 도대체!!

그럼 여기서 이만.


2014 10 25
0354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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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1

작품/소설 2014. 10. 21. 03:05

산맥은 그 둘레를 끊임없이 굽이치고 바람은 언제나처럼 동쪽에서 산맥이 열려 있는 서쪽으로 짙게 불며 흘러가기에 살고 있는 모든 나무와 풀들이 서쪽으로 휘어 곡야曲野라고 이름 지어진 곳이 있었다. 이따금씩 땅 밑에서 전갈이며 곤충들이 올라와 풀을 뜯어 보지만, 이 곡야에서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뭔가를 먹어보려고 하는 생물은 어릴대로 어린 녀석들인 것이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들이키게 되면 어떻지는 뻔하지 않은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대다수의 동물이 살아남지 못하는 곳임에도 식물들만은 잘만 버텨내고 있었다. 개체수의 증가도, 감소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이 옛날과 현재가 같아 기묘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 연유를 마치 커다랗고 날카로운 석회암 덩어리가 줄이어 서있는 듯, 보는 각도에 따라 하얗기도, 거뭇거뭇하기도, 회색빛이 돌기도 하는 저 산맥을 들어 얘기하곤 했다. 너무나도 드높아서, 구름 조차도 가운데의 몸뚱아리까지만을 삼키고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산맥에서 불어오는 거칠고 낮게 깔리는 바람을. 하지만 거기서 바람이 왜요? 라고 물어보아도, 곡야에 사는 모든 어린이들은 그들의 부모에게서 답을 듣지 못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꺼리는 것처럼 고개를 젓거나, 눈을 감는 부모의 모습을 봤다. 그리고, 그들이 자라나서 그들의 아이들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음을 들어도, 그들 또한 그렇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곡야는 그런 곳이다.


곡야는 마치 곶처럼 대륙의 동쪽 끝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 곡야의 서쪽으로 쭉 가다 보면, 까마득한 발치 저 밑으로 자줏빛이 도는 파도가 휘몰아치며 드높은 절벽을 깎아 내렸다. 곡야의 산맥을 그 누구도 넘어본 적이 없다고들 어른들은 말했다. 산맥은 한 치의 틈도 없이 곡야를 둘러 싸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곡야의 존재를 알리가 없었고, 우리도 반대로 그러했다. 그렇기에 얼마 안되는 곡야의 주민들은 소일거리 수준의 낚시와, 절벽에 거의 붙다시피 한 밭에서 일구는 채소들로 삶을 이어 나갔다. 이따금 산맥에서 불어와 바다로 나가려는 바람의 욕구가 거셀 즈음엔 벼랑 언저리에서 일을 하다 그 바람에 휩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한 가장의 이야기가 들리곤 했다. 슬픈 동네다. 너무나도 슬퍼 곡야에는 밤조차 오지 않는다. 밤이라는 개념이 없다. 마을에서 제일 똑똑한 할아버지의 말로는 구름이 너무나도 두꺼워 낮이 내려오는 동안에 구름 위로는 밤이 오고, 밤이 내려오려는 동안에 다시 낮이 된다고 하셨다. 하루에 딱 삼십 분, 잠깐 어두워졌다가, 잠깐 밝아질 뿐이었다. 그 잠깐 어두워지는 시간에 안드라 아저씨는 짧은 밤을 만끽하며 괭이를 잠시 내려놓고 그림을 그렸고, 그 잠깐 밝아지는 시간에 뒤엣뜨 아줌마는 치매가 있는 노모의 욕창에 햇볕을 쬐였다.

할아버지는 산맥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이 불 때마다 지팡이를 짚고 바깥으로 나와 바람을 쑀다. 약간 쇳맛이 나면서도 코나 목구멍에는 걸리는게 없는 그런 바람 맛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 쇳냄새가 바로 피 냄새라고 하셨다. 나는 피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기에 몰랐고, 실감도 나지 않는다. 그렇게 어르신은 바람을 쬐면서, 오늘 하루도 바람이 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산맥 너머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다. 어르신은 이렇게 말하셨다.

바람마저 불지 않으면 우리 또한 이 땅처럼 어제와 내일을 모르게 된다네.

어린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어린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해보고 싶어져서, 해야만 될 것 같아서 산맥 쪽으로 고개를 숙였었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할아버지는 그렇게 산맥처럼 가만히 굳은 채 어느 쪽에서는 거무죽죽하고 어느 쪽에서는 새하얀, 산이 되어버리셨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안드라 아저씨가 창밖을 내다보다 뭔가 이상해서 뛰쳐 나오셨을 때도 가만히 있었다. 스쟐 형과 글리덴 누나가 나와서 울먹이며 연신 할아배 할아배라고 말할 때조차 나는 그저 형을 올려다 보기만 했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돌이라고 부르기에는 맞지 않을, 어떤 존재로 굳어버리신 할아버지를 바라 보면서, 그저 할아버지께서 짚고 계신 지팡이를 살며시 손가락으로 콕, 짚었다.

할아배는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듯 싶더니, 바람에 가벼이 실려 드넓은 서쪽 바다로 날아 가셨다.
나는 그제서야 울기 시작했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사라졌을 때, 나는 다섯 살이었다. 그렇게 이십 년이 흘렀고, 나는 스물이 넘어 어른이 되었다. 스무살이 되던 날 안드라 아저씨는 마을 사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 앞에 서서 자신의 팔을 헝겊으로 꽁꽁 싸매시더니, 자신이 그림을 그리던 붓을 반으로 쪼개 그 날카로운 단면으로 솟아나온 핏줄을 살짝 찔렀다. 그리고 거기서 솟아나오는 핏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어 내 아랫입술에 바르시곤, 핥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피의 맛을 처음 봤고, 그때부터 나는 저 위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처럼 입을 가리기 시작했다.

스쟐 형과 글리덴 누나는 이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둔 부부가 되었고, 뒤엣뜨 아주머니는 노모를 떠나 보내시고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연신 뭔가를 바느질 하시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내 동생 햐르타는 이제 열 아홉이 되었고, 아버지는 넉 달 전에 돌아가셨다. 잠깐의 밤 동안 추억에 가득 잠긴 눈으로 산맥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시던 안드라 아저씨는 햐르타의 대부代父가 되어 햐르타를 가르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돌아가신 할아배를 대하는 마냥 안드라 아저씨를 할아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러했다. 할아배라고 불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안드라 아저씨의 머리카락은 모두 다 하얗게 샜다. 나는 그것에 대해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끝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세상이라는 곳은 이 곡야가 전부인지도 모른다. 산맥 뒤로는 그저 무無만이 있으며, 우리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갑자기 저 산맥의 존재가 매우 갑갑하고 답답하게 여겨졌다. 가슴 속에 무언가 푹 박힌 듯, 막혀 왔다. 그렇게 산맥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괭이를 손에서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마시다 바람이 그치면 낚싯대를 끌어 올려보고, 아무 것도 없으면 땅바닥의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 차고, 뭔가 낚여 올라오면 옆집사는 여자애 루타에게 가져가던 날이 계속 되었다. 산맥을 넘고 싶었다.

어느날 나는 뭔가에 씌였는지, 낚여 올라온 팔뚝만한 물고기를 꼬챙이에 꿰갖고는 안드라 아저씨네 집에 들렀다.
안드라 아저씨는 여전히 집 안에서 뭔가를 그리고 계셨다. 먹물을 붓에 머금게 하곤 손으로 살짝 짜내어, 뭔가 알 수 없는 글자를 휘갈기고 계셨다. 나는 꼬챙이에 꿰어 온 물고기를 주방으로 가져가 구석에 세운 후, 마루로 와 안드라 아저씨가 앉아 있는 마룻바닥 뒷편에 앉았다.

"아저씨."
"왜?" 안드라 아저씨는 눈 앞의 종이만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산을 넘고 싶어요."
종이 위로 붓이 미끄러져 뽀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아저씨는 잠시 굳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붓은 머금었던 먹물을 종이에 아낌 없이 뱉어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아저씨가 할아배 마냥 죽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아저씨는 붓을 옆에 내려 놓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셨다. 나는 갑자기 앉은 자리가 불편해 다리를 잠깐 고쳐 앉았다.

"이유가 뭐냐?"
"바람이 궁금해서요."
"바람이 궁금해?" 아저씨는 잠시 콧잔등에 길게 자란 수염을 꼬시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어째서 저 높은 산의 등짝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피비린내를 안아 오는건지가 궁금해요."
아저씨는 잠시 내 눈동자 너머를 들여다보셨다. 빤히. 나는 잠시 머쓱해져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아저씨를 봤지만, 그 때마다 아저씨는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나를 보고 계셨었다. 그렇게 두어 번 했을까, 아저씨가 갑자기 일어서서 문을 걸어 잠그곤 창문에 발을 내리셨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내 앞에 털썩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시곤, 한숨을 한 번 푹 쉬셨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바라보셨다.

"궁금하냐? 난 여태까지 네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줄로만 알았다만."
"어, 음, 그렇긴 한데, 할아배가 했던 말이 점점 진짜로 다가와서요."
"피맛을 본 이후부터냐?" 나는 다가오는 그 말의 빛깔에 흠칫 놀라 대답했다.
"네……."
내 대답에 아저씨는 다시 다리를 고쳐 앉으시고, 양 손으로 무릎을 굳게 쥐셨다. 나는 마치 꾸짖음을 당하는 어린아이 마냥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생선을 향해 어디선가 꼬여든 파리가 날아가는 낼갯소리가 들렸다.

"햐르타보다 아직 너는 모르는게 많다."
동생 이야기가 나왔기에 나는 살짝 긴장했다. 그 여리고 순박하며 생선이면 사족을 못 쓰는 가시내가 뭘 안다는 말일까?
"내가 너희 아버지를, 아, 너희 아버지 험담을 하려는 건 아니야. 긴장 풀어라. 너희 아버지 대신해서 햐르타를 거둔지가 어언 삼 년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햐르타를 내 집 대신 이 할아배가 살던 집에서 길러냈지. 왠지는 모른다. 그냥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랬다. 저만치 멀리 있는 내 집은 스쟐과 글리덴에게 넘겨주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 늦은 밤 애 울음소리는 서로에게 인상만 찌뿌릴 뿐이니까."
정좌를 하고 있었기에 다리가 살짝 저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저씨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그 동안 그 누구도 할아배의 집 문턱을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 나조차도 생선을 들고 찾아 뵈었으니까. 그 전에 할아배는 바람을 맞기 며칠 전에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내가 하늘을 날게 될 날이 있을거다. 그 날 이후로 네가 첫 번째로 보는 이 마을의 여자 아이에게 내 집에서 내 책들을 읽게 해라. 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을에 여자 아이가 햐르타 뿐이었나?

"그렇게 나는 할아배의 집에서 햐르타를 길러 냈지. 그건 너도 알거다. 할아배의 집에는 그 아무런 책도 없었어. 책이라는 것도 나는 말로만 들어서 뭔지도 몰랐다. 어느 날,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 무심코 창문을 열고 있었지. 바람이 집 안으로 불어 들어오더구나. 그 바람에 그 때 아마 다섯 살이었나, 햐르타가 재채기를 했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었지. 나는 어딘가 바람에 삭아서 망가졌나 해서 안뜰로 나와 집을 한번 찬찬히 둘러 봤었다. 아무 곳도 무너진 곳이 없어서 집 안으로 다시 들어왔는데 햐르타가 없더구나. 마루에 깔려 있던 융단이 살짝 걷어져 있고, 그 안으로 구멍이 있었지. 나는 그 안으로 햐르타를 불러 보다가, 계단이 보여 걸어 내려갔네."
누군지는 몰라도 침이 목젖을 살짝 들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나인 것 같다. 아저씨는 가래가 끓었는지 잠시 기침을 세게 하더니 말을 이으셨다.

"책이라는게 있더구나. 수북히. 책상이 하나 보였고, 호롱불이 켜져 있었단다. 아무래도 햐르타가 킨 것 같지는 않았어. 할아배가 날아가고서도 그 오랜 시간을 계속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 같다. 뭘 태워서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햐르타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수북한 책더미 사이에서 종이 조각 하나를 꺼내 들곤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종이 조각을 펼쳤고, 안에 글씨가 있었지. 쪽지더구나. 그 쪽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단다."

讀者인 자네가 이 쪽지를 맨 처음 봤을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다네.
記者인 햐르타에게 글씨를 읽는 법을 알려주게나. 그러면 햐르타가 알아서 깨우치고 익힐 것이라네.
때가 되어 햐르타가 자라고 吼者인 오라비가 피비린내를 알게 될 때, 산맥을 넘게 하게.
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에 그 둘이 닿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짜 숨을 쉴 수 있네.



"…무슨 뜻이에요?"
"너는 아직도 네 이름이 왜 마을 사람들과 다른 어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나 보구나."
"네? 제 이름이 왜요?" 그는 아주 의아한 건지, 알면서도 숨기는 건지 모르는 듯 반응을 보였다.
"이 곡야는 말 그대로 세상의 끝이란다. 세상의 끝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백 번의 바람이 불 때마다 한 사람이 실려가고 한 사람이 불어온단다. 천 번의 바람이 불어오고 그 후로 백팔 번의 바람이 불어올 때 진실은 불어오고 다시 날아가며, 백육십이만 번의 바람이 불어올 때, 이 곡야는 점점 떠밀려오는 산맥에 짓눌려 비로소 하나의 산맥이 커다란 의意를 이루게 된단다."
정말로 모르는 모양인지, 그는 머리를 긁으며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무슨 뜻일까, 무슨 말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누리야. 왜 우리들, 마을 사람들은 항상 열두 명인건지 생각은 해 보았느냐? 어째서 마을 사람들이 나를 갑자기 할아배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 어째서 스쟐과 글리덴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하나씩 두고 있을까? 어째서, 저 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피비린내가 날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누리는 吼者, 우는 자로써 깨어났다.
세상은 이미 끝나 있었다. 어떠한 것이 어떠한 뜻으로 그러는지는 모른다. 얼마나 넓은 혹은 상상보다 작은, 산맥 너머의 땅들이 피비린내에 절어 있고, 얼마나 의미 없을 혹은 의미 있을 것들이 낮과 밤을 거두는 구름 너머로 자리 해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누리는 정말로 산맥을 넘고 싶었고, 그렇게 넘기로 결심했다. 드넓은 서쪽 바다로 떨어져 물고기 밥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보다, 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그 곳으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혈육인 햐르타를 데려 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이전까지의 누리와는 아무런 연관성이나 관련도 없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저 산을 넘어서면 드넓은 땅, 대륙大陸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그 대륙은 글자 그대로 대륙大戮인지라 그 옛날 저 산 너머 드넓은 곳이 다 사람 살만한 곳이었고, 산맥이 자그마한 봉우리였을 때조차 몰아내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곡야의 열 둘로는 역부족이리라. 먼 발치에서 피비린내를 맡으며 수많은 굴레 전의 혈욕을 충족시킬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굴레를 넘어 수많은 글자와 마음과 얼굴로 이 곡야에 다다랐다가 스쳐 지나갈 때, 그 무엇도 굴레를 기억할 수 없고 굴레를 돌이킬 수도 없다.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이리라. 웃음이 절로 나온다.

다만 손끝에 스치는 유일한 희망으로는 이 지팡이 하나와, 어디선가 불어 올 그 다섯 이者일 것이다.
언젠가는 이 굴레를 끝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때는 저주했던 이 무한의 굴레를.



몇 년만에 써보는 판타지인지 모르겠네요.
묘사가 감성적으로 젖어 있은지가 오래 되어 골자가 그 묘사에 흐려지는 것이 걱정입니다.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런지도 의문이네요. 워낙 갑자기 생각해낸 것들이라서요.
그럼 이만.

20141021
0302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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切段

작품/소설 2014. 10. 21. 01:06

그렇게 해서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날처럼, 그저 반복되는 무직으로서의 무전취식의 일상의 한복판에서 깨달았다. 얼마 전 그저 문득, 단 하나의 메세지조차 오지 않는 카카오톡 친구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녀의 프로필을 눌러보았다. 오랜만에 바뀐 프로필 사진은 그녀가 그녀의 애인과 화목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녀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충만했는데, 이제는 반 반으로 나뉘어 느껴졌다. 그녀가 행복해보이니 잘된 거야. 라고 위안하는 절반과, 왜 아직도 헤어지지 않은거지. 하는 절반이었다. 나는 후자의 나 자신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라 그 생각을 접으려고 했다. 접으려고 할 수록 그 동안 억눌러 두었던 그림자 진 마음은 솟아오를 뿐이었고,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고 돌 수록 점점 더 비참해져만 갔다. 이런 내가, 거의 폐인에 가까운 내가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다 해도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녀가 머무를까. 그렇게 점점, 그녀를 생각하던 내 마음은 몇 년에 걸쳐 부수어지고 조각이 나뉘어가며 내 마음을 난자해왔고, 문득 이제 곧 조각조차 남지 않아 가루로서 빻아져 내 마음 안에 그대로 묻어서 알게 모르게 스며가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의 조각조차도 남지 않게 된 내 마음은 도대체 이제 무엇을 부수며 나아갈까. 상실해버린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하며, 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부수어가며 그나마 근근히 앞으로 나아가던 내 고장난 마음은 이제는 나 자신을 부숴가야만 그것을 연료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울고 싶었다. 아니, 마음은 울었다. 눈물샘은 말라 비틀어져 이제 모든 것에 대해 무덤덤하게 대응할 뿐이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알았다. 동시에 우습다는 것도.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워가면서도 글은 진전이 없었고, 잃어버린 음악들과 예술들의 방대한 바구니의 틈바구니에서 그 것들을 다시 그러모으려던 시도는 번번히 중단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내 잃어버린 소중한 방 하나를 되찾았다. Moby의 음악이었다. 떨어진 담배를 사러 가기 위해, 담뱃재와 밤샘으로 인해 약해진 몸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온갖 두려움을 헤치고 새벽의 편의점을 갔다 왔다. 그 왕래의 순간에조차 나는 끝까지 이어폰을 빼먹지 않았다. 학창 시절, 열정과 의지로 꿋꿋히 글을 써가던 나 자신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항상 미니스톱이 박힌 비닐 봉투를 든 채 집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렇게, 이 의자에 앉았다.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불을 붙이고, 잃어버렸던, 유실流失되었던 내 마음의 조각들 중 하나를 꺼내어 먼지를 털고 오랜만이야. 라고 속삭인 다음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 음악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만났던 때의 그 폐부에 차갑게 스며들면서도 깔끔하게 내쉬어지는 얕고도 무거운 공기. 갈대는 마치 훨훨 부는 바람에 머리를 말리듯 이리 저리 너울대었고, 나는 그 갈대숲을 사이에 두고 천변을 걸으며 찬란하게 별이 빛나던 밤 하늘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었다. 지금은 별조차도 내 눈에 띄지 않는다. 작은 알갱이 하나 하나가 크게 이루어진 청사진이며 온갖 문양들을 이루던 그 밤하늘조차 그저 새카맣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각 조각을 이어 붙여보니 어느새 그 때의 나 자신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왜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까. 왜 애써 보지 않으려 했었을까. 나 자신은 항상 산산히 부숴져 흩어지지만 그 모든 나 자신들을 모아줄 구심점이 하나씩은 있었는데, 왜 그것들을 돌아보지 않고 애써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항상 이렇게 깨닫지만서도, 벌써 나이는 첫 번째 파산波散 이후 두 해가 지나 스물 하나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룬 건 아무것도 없고,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저 한 여자만을 생각하다 아무 일도 못하게 된 병신으로밖에 쓸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은 내 스스로 걷어차 부수어트렸고, 신뢰하던 사람들은 항상 내가 그들을 저버렸으며, 나 자신마저도 항상 극한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건,


뭘 해도 나는 이렇게 살 놈이였어. 라는 쓰디 쓰면서도 나 자신에게 왠지 모르게 냉소를 짓게 만드는 도돌이표였다.




이 곡을 들으면서 나는 한 남자에게 저버려진 어떤 여자의 사막에서의 방황과 눈물로 점철된 만족스러운 점멸漸滅을 썼고, 이 곡을 들으면서는 어떤 그림을 그리는 여자의 깔끔하면서도 한 남자에게는 그녀를 찾아 나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도록 만들 만큼 지저분하게 추억을 점철한 실종을 썼고, 이 곡을 들으면서는…….


나는 잠시 음악을 멈추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웅크려 울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썼던 모든 글들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모두, 타의에 의해 실종된…….


그녀에 대한 생각을 했다. 하지 않으려 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면 할 수록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어쩌랴. 하게 되는 것을. 그녀의 가녀리면서도 확실한 손놀림으로 인해 완성되어가는 캔버스가 보였다. 그녀의 아름답고도 수려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녀의 둥글둥글하면서도 나름 매서운 곳이 있는, 그로 인해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해선 똑부러지는 성격이 보였다. 그녀의……그녀의……그녀의……그녀의…….




그녀가 나를 보며 왜 이러고 있어? 일어나. 예전처럼 나하고 같이 놀자. 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나를 보며 왜 이러고 있어? 예전의 네가 아니야.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리고 그저 유실자 n번째로 남으려는거야? 실망이야. 라며 나를 등지고 돌아서서 저 멀리로 걸어가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돌고 돈다.

이 세상에 내 존재를 그녀에게 알리기 위해 글을 쓰자고 하던 학창 시절의 내가 보였다.

이 세상에 내 존재를 그녀에게 글로나마 알리기 위해 글을 쓰던 스무 살의 내가 보였다.

이 세상에 보잘 것 없는 내 존재를 그녀에게 단 한 조각이나마 알리기 위해 글을 쓰던 내가 보였다.



그렇게, (        )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Moby - The Dogs





End.


Novelistar / [N]

이제는 네 이름을 쓰기조차 미안해져, E.


20140827

0412

[N]



title P.S : 切斷의 오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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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遠 - 3

작품/소설 2014. 10. 21. 01:06

'내 어린 시절은 참으로,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랬었지.'

선생님은 조용히 머그잔을 두 손으로 그러잡고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었다. 뭔가 어디론가 멀리 나가 있어 닿지 못하고 그릴 수 밖에 없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초점은 저 멀리를 향해 있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손에 쥐고 있던, 선생님이 내게 주셨던 검은 자줏빛의 표지를 하고 있는 책을 펼쳐 보았다. 한 쌍의 노트였다. 선생님은 그 책과 짝을 이루는, 연한 베이지 색의 책을 일기장으로 쓰셨다. 나는 받은 책으로 글을 썼었다. 밤의 들판. 어딘가, 머나 멀면서도 손에 잡힐 듯한 그 이름이 좋았다. 선생님의 그 표정이 생각났고, 어딘가 닮아 있는 그와 나의 공통점이 어렴풋이 느껴져서 좋았다.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모든 것들…, 그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나 자신. 그렇게 자라왔어.'
평소에, 자신의 옛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안 하시던 분이었다. 마치 생판 다른 사람의 일생을 묘사하듯, 선생은 그렇게 흔들의자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읊조렸었다. 그리고, 집 안에는 언제부턴가 내가 볼 때마다 항상 굳게 닫혀 있었던 문 하나가 있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푸른 책만을 손에 안고서, 눈 내리던 들판을 지나 세상으로 나갔었다.

그 눈 내리던 날, 떠나는 자와 남은 자 모두의 고독이 청량한 추위로 뼈까지 스며오던 날이 몇 년 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어,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생각 속에 젖어있던 의식을 일으켰다. 나를 뜻하는 눈치였다.
"시헌始獻. 비로소 시에 바칠 헌. 씨는 붙여도 되고 안 붙여도 되. 편한 대로 불러."
어느샌가 그녀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 신경 쓰였다.
"선생님이 시헌씨에게 남겨 놓은 쪽지가 있어요."
나는 그저 천천히 찻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카우치에서 일어나 선생님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선생님의 일기장을 꺼냈다. 변한 건 하나 없는데도 어딘가 낡아 있는, 오래된 물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담배를 태우고 싶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일기장의 페이지 정 가운데를 헤쳐 열어, 뒤로 조금 넘겼다. 선생님의 고요하면서도 천천히 흐르는 손글씨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출 무렵, 그녀는 페이지 사이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일기장을 천천히 닫고 조용히, 소중한 듯 원래 있던 그대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려 하는 듯 놓고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내게로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내 것만 있는 건 아니지? 너는?"
그녀는 내 옆에 앉기가 조금 어색한 듯 앉고 나서 손으로 몸을 끌어 거리를 조금 벌리는 중이었고, 그래선지 내가 말을 걸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제게 쓰실 내용도 거기에 쓰셨다고 들었어요."
"누구한테?" 나는 호기심에 그녀에게 되물었다.
"선생님 친구 분이자 변호사요."

나는 대답을 듣고 수긍한 다음, 그녀에게서 조용히, 양피지와 비슷한 투박한 재질의 손바닥 만한 크기로 접혀 있는 쪽지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것이 마치 화산 폭발 이후 발굴된 유물이라도 되는 듯 행여 바스러질까 걱정하며 펼치기 시작했다. A4 크기로 두 장이 펼쳐졌고, 선생님의 손글씨가 보였다.

나일세.
이 글을 읽고 있을 때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는 진부한 문장은 쓰지 않겠네.
이미 써버렸구먼. 지울 수도 없고 이거 원. 여하튼, 미안하네. 자네는 자네 나름 잘 헤쳐 나가겠지만
혜인이를 남기고 가는게 마음에 걸리는구만. 궁금한게 많을테지. 오랜만의 만남이 이런 식이라서 또 미안하네.
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가고 싶었을 뿐이라고 답하는게 평소의 나다운 대답이겠지.
누군가 날 불렀네. 어디선가 머나 먼, 시간이 지나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도 안되며 서로가 서로를
만나보았자 서로가 서로의 과거의 모습만을 간직하는 게 서로를 더 위한 것이 되버린 그런 사람이.
날 불렀어. 어떻게, 어디선가 불렀는지는 나도 모르네. 자네도 알잖나.
그저, 하늘에서 하나 둘 내려오는 눈송이가 그 사람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한 자음 한 모음이었고,
나는 항상 흔들의자 위에서 그 눈에 담긴 말들을 눈으로 그러 모으고 있었네. 그리움이라는 단어의 낭만적인 표현이 되겠군 이건.
혜인이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을테지. 그저, 운명으로 이끌린 한 여자아이라네. 내 딸처럼 키워냈고.
자네와는 다른 느낌으로 '키우고' 싶었다네. 그렇기에 자네가 왔을 때 혜인이로 하여금 자네를 만나지 않게끔 한거고.
늙은이가 교편을 잡고 남의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맘에 안 들었을 혜인이에게 미안하구먼.

혜인이 울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곁눈으로도 보였다. 글을 읽는 속도가 나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나는 계속 쪽지를 읽을지, 그녀를 감싸 안고 다독일지 망설이다가 쪽지를 계속 읽어 내려가기로 했다.

이 집은 자네 좋을대로, 혜인이 좋을대로 지내도 되네. 그러라고 지었던 집이니까. 몇십 년 전에 말야.
자네를 이렇게나마 보게 되어서 정말 좋구먼. 가기 전에 보았었으면 더더욱 좋았을 것을.
그래도, 조금 잔인한 표현이지만 이것도 나름 낭만이 있구먼. 내가 남긴 말을 누군가 읽었는지의 여부를 절대로 확인할 수 없는 글이라….
미안하네. 말이 조금 샜구먼.

종이의 용량이 거기서 끝나 나는 잠시 혜인을 위해 기다렸다가, 뒤로 넘겨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항상 내 호號를 잊지 말게. 침심. 알지? 마음에 잠기게 항상. 해답은 마음 속에 있어.
그렇기에 내가 부름에 답해 따라 나가기로 결정 했던 것이고 말야. 주변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을 좇아
이기적으로 행동하는게 나 아니었는가. 하하. 이기적인 최후라 미안허이.
하지만 말야, 내 나름으로는 이게 최선이었다네.

가까워 질 수 없으면서도 보고 싶은 사람. 아침에 일어나 차를 끓이고 수저를 들 때면 옆에 있는 혜인이가 그 사람으로 보였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볼 때면 문득 팔을 옆으로 뉘여 그 사람이 베고 잘 수 있도록 하고 있었네. 그러다보니, 점점 초췌해져 갔어. 마음이 말야.
황새냉이라고 알지? 내가 자주 차를 끓였던 그 풀 말일세. 그 풀의 흙내 나면서도 텁텁하고, 여운이 남는 맛. 그러면서도 깊게 쓴…그 맛 말일세.
그 맛이 너무도 나랑 닮아 있더군. 꽃말조차도. 그럴 수 밖에 없었네.
그 사람과의 생각. 그 사람과 함께 있다는 생각을 접어 둔지가 벌써 몇십 년 전인데도 이렇게 다시금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건 두 가지 의미라고 생각했네.
죽을 때가 됬거나, 내가 회춘했거나 말일세. 하하. 농담이야 농담. 너무나도 선명하여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내 마음인지 그리움인지 집착인지
그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딱 정점에, 나는 그렇게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네. 닿지도 않을 이상향理想鄕을 향하여.
머나 먼 때에,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가 원망할 수 밖에 없던, 가족이었던 동시에 한 고아의 어머니였던 한 사람과,
그보다는 조금 더 뒤의 시간에,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다가 시간의 순리대로 흘러가 어딘가 항구에 닻을 내린 한 여자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그 닻을 잘라버리고 내가 키를 잡고 싶었던 그런 집착과, 조금 뒤의 포기와 절망을 내게 안겨줬던, 하지만 아직 유일하게 사랑하는 한 여자.
눈은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날씨야. 눈이 따뜻한 날씨에 내린다면 눈은 과연 슬픈 날씨였을까, 시헌이?
다시 말하지만, 거 참. 나는 이렇게 미련이 많은데도 떠나다니, 정말 멍청하고 우둔한 놈이 아닐 수 없네.
자네에게 미안하네. 오랜만의 해후가 이런 식이라니 자네에겐 정말로 미안해. 남겨질 혜인이를 잘 부탁하네.
주변이 아무리 황량하여도 싹을 틔우면 그게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 주변에 꽃이 싱그럽게 할 그런 아이라네.
삶의 시간이 맞물리지 못하여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고 가지 못하는 것이 내 유일한 응어리일세.

황새냉이 차, 맛은 어떤가? 괜찮은가? 내 장담하지. 혜인이가 나보다는 차를 더 잘 끓인다네.
그 아이 곁에서 항상 그 차를 마셔주길 바라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일세.
말이 길었구먼. 못난 스승 만나 맘고생 하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서로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던, 그런 못난 날 따라줘서 정말 고맙네.
세상에서 제일 남사스럽고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말이지만 이건 글이니 내 그 옛부터 내려온 금언禁言을 깨고 한 글귀 쓰지.

띄엄띄엄 벌어진 때와 장소의 편린이나마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고, 사랑하네.


마지막 문장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잉크가 번져 있었다. 나는 그저, 마음이 텅 비어버린 사람처럼, 쪽지를 털썩 무릎 위에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어디선가, 멀리서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혜인이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쪽지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려 끌어당긴 후, 그녀를 안았다. 어깨를 안은 팔로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다가, 눈물이 고였는지, 코를 훌쩍이며 그저 계속 흘러나올 뿐인 눈물을 손으로 닦고 또 닦고, 이따금씩 입고 있는 옷자락에 그 눈물을 닦았다.

나는 여전히 천장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천장의 마감재로 쓰인 통나무 한 기둥 한 기둥의 옹이의 문양을 세어나갔다. 뺨자락에 차가운 뭔가가 하나 굴러가며 스쳤다.








나는 그녀가 추위에 덜덜 떨고 있기라도 한 마냥 혜인의 어깨를 끌어 안고 집을 나서 문을 잠갔다. 펼친 손바닥 위에는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열쇠와, 혜인을 한 차례 번갈아 보았고, 혜인은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미소 지으며, 내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깊게 쌓인 눈밭을 헤치며 이따금씩 비틀거리며,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창 밖으로는 아직 눈이 내리고, 흔들의자는 누군가 아직 앉아 있는 듯 계속 흔들리며, 찻주전자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거실 책상 위에는 살짝 구겨진 종이 두 장이 펼쳐진 채 살짝 하늘거리는 선생의 집을 잠시 뒤로 한 채.

뒤돌아서 바라본 집 주변으로 노을이 서서히 지평선으로 스며 들며 들판을 밤으로 물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의 들판夜이었고, 기억 속에서부터 항해해온,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머나먼 눈밭이었다.


2014 10 15
0449 [N]



영상 퍼가기도 안 되다니.

Christopher Norman - Volat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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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遠 - 2

작품/소설 2014. 10. 21. 01:04

벽난로에서 타들어가는 장작 덕분에 집안에 조금씩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내가 앉아 있는 긴 쇼파 오른쪽의 페어인 작은 쇼파에 앉아 무릎담요를 덮은 채 몸을 앞으로 구부려 양손으로 찻잔을 잡고 멍하니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맞은 편 텔레비전 위에 걸려 있는, 선생이 직접 친 사군자와 서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感監無疎識. 선생님은 참 한자를 특이하게 쓰셨다. 그녀는 아직도 찻잔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김의 질감과 흐트러짐을 보고 있는 듯 조용했다. 내가 글을 쓰다 문득 천장을 향해 피어오르는 연기의 물줄기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그녀는 어느샌가 찻잔을 비우고 다음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황새냉이였다. 차에서 흙냄새가 나면서도 살짝 산뜻하고 그와 동시에 침착하고 가라앉는 듯한 향이 났다. 그녀는 그렇게 눈을 감고 차를 음미하다가, 내가 찻잔을 다 비우고 내려놓을 즈음 자신도 그렇게 했다.
"선생님한테 말씀은 들었어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그저 당연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곤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발은 유순해졌지만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혜인暳璘이에요. 별 반짝일 혜, 옥빛 린. 처음 절 보셨을 때 선생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선생님이 지어주셨다면……."
"네, 맞아요. 지금 열 아홉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퍽 맘에 드는지, 아니면 선생 생각이 났는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몇 시간만에 그녀의 얼굴에 어린 첫 미소였다. 그녀는 잠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창밖을 내다보며, 무릎담요의 폭을 살짝 여미곤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 절 길러주셨죠. 제 생부는 선생님의 교수 시절 제자셨다나봐요. 선생님을 따라 글을 쓰셨고, 그러다가 결혼을 하셨지만 글로만은 생계가 힘드셨는지 어떤 일을 손 대셨다가 저를 못 키울 형편에 놓이셨고, 절 선생님께 맡기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린 나이임에도 아무런 원망이나 증오 섞인 표정 없이 담담히 말해내는 모습에 나는 그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선생님이 몇 년 전에 알려주셨겠지.
"그렇게 여기서 자라왔죠. 선생님이 먹을 간 벼루에서 손가락으로 먹을 찍어내 장난을 치다보니 붓을 잡고 있었고, 선생님이 서재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띄운 미소가 신기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이 듣던 음악은 바깥에 내리는 눈. 휘몰아치는 바람에 하나되어 춤추는 풀밭. 이따금 불어와 창문에 달라 붙는 낙엽들. 너무도 선명하게 어울려서 그렇게 음악을 듣기 시작했죠." 그녀는 마치 젊은 미망인이 검은 옷을 입은 채 지난 삶을 읊조리는 마냥 무덤덤하면서도 선명한 기억과 전달력으로 말했다. 나는 문득 손이 허전해 찻잔을 다시 잡고 싶어졌다.
"선생님이 어째서 이렇게 거친 날씨에 바깥을 걷고 계셨는지가 궁금하실거에요. 그걸 듣기 위해서 오신 거이기도 할테고요."
말하지 않아도 그것 뿐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라는 말이 전해져 왔다. 또 다른 서남 선생님이 앞에 앉아 있는 것 마냥, 나는 그저 조용히 혜인의 말을 들었다.

"서재로 자리를 옮길까요?"
"응?"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니, 물음이 갑작스럽다기보다는 갑작스럽게 말투에서 감정이 느껴져 당황스래 되물었다. 상냥함이었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던 참이었으니까. 무서움? 무서움이라기보다는 너무도 익숙함에 그저 약간의 기묘함을 느낄 뿐이었다. 선생님이 계신 것 같은 그런 기분. 자리에서 일어나, 텔레비전의 오른편으로 돌아 문이 나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녀는 잠시, 다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겨 찻주전자에 물을 다시 받아 끓이며, 주방의 곁방으로 갔다. 무언가 뒤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서재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문을 마주보는 선생님의 책상과 그 뒤의 창문. 그리고 그 주변 벽의 꽉 들어찬 책장과, 지나다닐 수 있는 공간을 띄어놓고 놓여 있는 카우치. 그리고 작은 흔들의자. 책장 안에 꽂혀 있는 책장은 선생님답게, 전부 많은 횟수를 거듭하여 읽고 또 읽었기에 거의 다 헤져 있었다. 딱 한 권만이 멀쩡한 걸로 기억한다. 내가 아끼고 아끼던 노르웨이의 숲 한정판. 선생은 책은 책답게 읽어서 헤지는 것을 영광으로 안다고, 읽음으로서 책을 헤지게 하는 것은 책에 대한 죄악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너무도 아꼈던 탓에 선생님에게 화를 냈던 기억이 있다.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옆에, 움베르토 에코의 컬렉션이 늘어서 있었다. 계속 훑어보던 중, 왠지 모르게 책등이 빛이 바래지 않은 책 한 권이 더 보였다. 양을 쫓는 모험이었다.

"기다리셨죠."
그녀가 쟁반에 황새냉이 차와 귤을 내왔다. 귤...선생님의 소일거리 중 하나는 고구마를 굽고, 푸대기에서 차가운 귤을 한 바가지 꺼내와 책을 읽으며 보는 것이었다. 그녀도 선생이 앉은 흔들의자 옆 카우치에서 웅크린 채 귤을 까먹으며 군고구마 껍질을 까고 있었겠지. 그리고 다 먹고 나면 귤 껍질을 한데 모아 말려 차를 끓였겠지. 나는 조용히 그녀가 내온 귤을 마치 생채기 내면 안되는 소중한 것처럼 천천히 껍질을 까, 반절 나눠 그녀에게 건내고 나머지는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녀는 조용히 한 알 한 알 떼어 먹었다.

"양을 쫓는 모험 말야." 양을 쫓는 모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녀가 마치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꽤나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말야."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내 말을 이었다.
"네. 아끼는 책이라서 선생님에게조차 선생님 스타일대로 못 읽도록 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웃음을 터트리곤 노르웨이의 숲이 꽂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그러면 노르웨이의 숲도 못 읽었겠네?"
"네. 다른 출판본은 읽었는데 한정판은 아직…."
"읽어도 좋아.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에 내가 전세낸 건 아니니까."
그녀는 같은 내용이지만 조금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고, 문장의 좁음과 글씨의 크기와 한 페이지에 있는 문장의 흐름과 페이지로 인한 짤림을 볼 생각에 설레하는 눈빛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느냐 하면, 내가 그랬으니까. 그녀도, 선생님의 제자이므로.
"아, 죄송해요. 어, 하려던 말로 돌아갈게요."
그녀는 갑자기 손사래를 치며 내게 사과를 했다. 역시,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소녀는 소녀인 것 같다. 그깟 책 하나에 신나하고 있었나보다.

…그깟이라고 하기에는 나도 저랬었으니까 할 말은 없다.

"아침이었어요. 저는 방에서 일어나 눈을 부비며 선생님이 어디 계신지 둘러보았죠. 선생님은 흔들의자에 앉아 커다란 화첩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시면서 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깬 걸 보시곤 잠시 책을 덮고, 같이 아침을 먹었죠. 제가 설거지를 할 동안 선생님은 다시 서재로 가셔선 한참동안이나 같은 장章을 보고 계셨어요. 그러더니 옷을 두껍게 차려 입으시며 제게도 잠시 밖으로 나가자고 하셨죠. 그렇게 저희는 현관으로 나가, 선생님은 서서 담배를 피시고, 저는 계단에 앉아 있었어요. 담배를 피우시는 걸 아마 며칠만에 본 것 같아요."
담배를 피우시며 감정에 젖어 계셨을 선생님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살짝 미간을 찌뿌린 채, 모든 감각. 불어오는 바람, 시야에 보이는 것들, 바람 소리, 차가움. 담배를 피우실 때에는 모든 걸 한 번에 느끼시려고 하셨다. 나도 어쩌면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더니 제게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기다려라. 황새냉이 차를 우려 놓고. 라고 하시며, 담배를 끄시고, 눈밭을 향해 걸어 나가셨죠. 저는 선생님을 말리고 싶었지만, 뭔가, 뭔가…." 그렇게 그녀는 말 중간에 울먹이다가, 기어코 울음을 참지 못해 끅끅거리며 울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울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창 밖을 내다보며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담배 생각이 났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차가 식을 때까지 울었다. 우습게도, 관운장의 고사古事가 생각났다. 차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 붙이기에 진부한 문장이지만, 슬프게도 선생님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황새냉이의 꽃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무치는 그리움, 그대에게 바친다.
황새냉이의 꽃말이었다.                                                                                            


2



                           20141006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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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遠 - 1

작품/소설 2014. 10. 21. 01:03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슈?"

"예?"
옆 자리에 앉아있던 문화부 박윤수 기자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그저 당황 그 이상의 것이 얹어진 마냥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오늘 뭔가 발표하실게 있다던 갑자기 서남書襤 박사님이 잠적하셨잖우. 이유가 뭔 것 같은지……."
"정말입니까? 최근 연락해본지는 좀 되었습니다. 게다가 서남 선생님 계시는 인제에 눈이 많이 오고 있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지금 저-어기 떠들고 계시는 학회장님이 빨리 입 닫기만을 바라고 있겠구먼."
그가 아무 것도 비춰지지 않고 있는 프로젝터 스크린 앞에 서서 마무리 멘트를 하고 있는 침심沈心 문학연구회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그 앞에 두 줄로 늘어서 있는 책상 그 맨 끝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계속 그의 입술과, 등 뒤에 있는 출구를 번갈아 의식하며 초침의 움직임 한 번 한 번을 신경쓰고 있었다. 목이 말라왔다.

"……그러면 이제, 서남 선생님이 불참하신지 두 시간이 지났으므로 일단 여기서 마칩니다."
협회장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나는 자리를 박차고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계단을 두 계단 세 계단 씩 성큼성큼 뛰어 내려가다시피 하며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가 자가용의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인제군에 다다르기도 전에, 눈송이는 저번에 서남 선생님을 찾아 뵈었을 때보다 더 굵고 빼곡하게 하늘을 메우며 지상으로 강하降下하고 있었다. 초조하게 핸들을 잡은 손의 손가락을 툭 툭 굴리며 신호를 기다리던 즈음, 휴대전화가 울렸다. 운전 중이라는 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몇 일간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사람이 물을 본 듯 날렵하고 간곡하게 전화를 조수석 시트 위에서 낚아채 받았다. 인제 백병원이라는 다섯 글자가 귀에 스쳐 지나갔고, 나는 빨간불과 눈이 쌓인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핸들을 직각으로 틀었다.

"지하 1층으로 가시면 되요."
간호사의 말을 듣자 마자 곧장 안내데스크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21F. 간호사에게 선생님의 성함을 말하자마자 나온 번호. 방금 전에 실려오신 모양인지 간호사가 곧장 알려주었고, 나는 그 번호의 병상을 찾아 응급실 내부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21A……E……F.

F에 시선이 멈춘 순간, 어디선가 멀고도 가까운, 누군가가 떠나는 걸 남겨진 이들이 모두 슬퍼하는 울음 소리가 들렸고, 시선을 침상 번호에서 서서히 침상쪽으로 내리자, 익숙하지만 아주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한 노인과 그의 오른쪽에 그의 손을 붙잡고 애써 소리 죽여 울다 끝내 터져나오는 울음에 몸을 맡긴 한 아가씨가 보였다. 沈心. 마음에 잠겨라. 네가 느끼는 모든 것들에 잠겨 들어가라. 그것이 곧 너이고 그것이 곧 네 글이다.

내게 그렇게 가르치셨던, 글밖에 모르던 어떤 위대한 청년 소설가는 늙은 얼굴로 병상에 누워 심박 측정기의 이묘異妙한 곡소리와 함께 세상을 떠나셨다. 의사 말로는 심각한 동상과 저체온증이란다. 나는 텔레비전이나 소설에서 어째서 살리지 못했느냐고 의사의 멱살을 잡는 유가족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지인 분들의 의견에 따라, 자식이 없는 선생님의 장례식의 상주가 되어 삼 일간 식을 치르고, 육신에 얽매이지 않고 죽고 나면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 궁금하다. 라고 하신 말씀처럼 굴레를 벗겨드리고 나서 마지막까지 선생님 곁에 있던 아가씨와 단 둘이서 선생님이 평소 좋아 하셨던, 탁 트인 전경이 내다 보이는 전망 좋은 산등성이의 절벽 부근에 선생님의 유골을 묻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있었다. 내가 눈이 쌓여 곧 얼어붙을 땅을 삽으로 파려 할 때, 그녀는 아주 조용하고 나지막한 움직임으로 눈밭 위에 꿇어 앉고는 잠시 나를 올려다 보더니 세수를 할 때처럼 두 손을 정성스레 모아 눈을 뜨고, 옆에 붓고. 뜨고, 붓고를 반복했다. 나는 잠깐 입을 열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눈을 퍼낸 손이 창백해졌을 뿐, 떨지도 않고 삼십 분 동안 눈과 땅을 파내어 선생님을 묻었다. 그리고 걸어 내려왔다. 나는 왠지 '일을 마친 일꾼처럼' 삽을 들거나 메고 내려가는 것이 탐탁치 않아서 그냥 어디 한 구석에 버리고, 먼저 내려가기 시작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내 차의 조수석에 오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이 묻힌 곳을 의식하면서 운전을 하다가, 어느새 멀어져 갈 즈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서남 선생님과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될까요."
그녀는 조용히 손을 살며시 깍지 낀 채 배 위에 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몇 분간 말이 없었다. 조용했다. 가을에 이미 모든 곡식을 수확한 논에 수북이 쌓인 눈. 광활한 들판과 눈을 덮어 쓴 눈꽃가지들과 나무들. 선생님의 죽음. 몇십 년은 어긋나있는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 이질감 속에서, 황량한 감정과 텅 비어 있는 눈의 사막을 보며 달리며 나 자신의 존재감마저 내 머릿 속에서 잊혀갈 즈음, 그녀가 나지막히, 소리가 발發하고 나서 얼마 후 알아들을 수 있을 그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자…에요."


1


나는 왠지 모르게 그녀가 그러고 싶어하는 것 같아 선생이 살던 산 속의 집으로 차를 돌렸다. 산 깊숙한 곳으로 차를 끌고 올라가면 울타리도 없고 근처에 아무런 나무도 없는, 마치 산 정상과 같이 느껴지는. 산이라기보다는 오름의 꼭대기에 집을 지은 듯한 곳으로. 나는 멀찍히 차를 대놓고 시동을 끈 다음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선생의 집 주변의 눈밭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저 곳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선생님이 그 폭설 속에서 깊은 발걸음으로 헤쳐나가다 쓰러진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는 출발했을 때와 같은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오르락 내리락하는 작은 가슴팍만이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안전벨트를 풀고, 조용히, 나비와 같이 신중하다기보단 조용한 움직임으로 차 문을 열고 눈을 밟았다. 뽀드득하며 그녀의 신발 밑창 아래에서 눈송이들이 우그러들다가 부수어졌다. 나도 그녀를 따라 차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잠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저만치에 있는 선생님의 통나무집을 내다 보았다. 꽤나 멋지게 지어진 집이었다. 눈이 수북히 쌓인 지붕이 보였다. 그녀는 걸음을 옮겼고, 나는 잠깐 뛰어나가 그녀의 앞에서 그녀가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발자국을 남기며 눈을 헤쳐나갔다. 그녀는 아무도 없다는 듯, 내 뒤를 따르기보다는 그저 그녀의 페이스대로 집으로 걸어갔다.

서남 선생님은 절대로 집 문을 잠그지 않았었다. 잠금장치를 안에서 열고, 밖에서 열쇠를 잠그고.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생략될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를 느끼고 싶으셨던 분이었다. 내게 글을 가르치고, 지금의 내가 있게 해준 분. 그런 분의 제자. 나는 문 앞에 서서 그녀가 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간 비어 있던 탓인지 집 안은 바깥과 다름없이 쌀쌀했다. 나는 평소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나있는 거실의 커다란 창문 옆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따라 들어와 현관문 바로 옆의 벽난로에 파이어스타터로 불을 지피고 구석에 쌓여 있던 통나무 두 조각을 가져와 불을 먹인 다음 세 조각을 더 넣었다. 그리고나서 벽난로가 있는 벽을 따라 걸어가다 오른쪽의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끓였다.

선생이 마시던 둥굴레차는 뒷맛이 달달하지가 않아서 좋았다.                                                                                                20141003 0245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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